상준석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정장 차림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상태준을 돌아보았다.“형, 들었어? 서유가 나 잘생겼다고 칭찬하는 거.”무뚝뚝한 사람인 건지 실실 웃는 상준석을 보고도 그는 담담하기만 했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용건부터 말해.”그를 힐끔 쳐다보던 상준석은 고개를 돌리고 서유를 쳐다보았다.“연훈이한테 들었어. 우리 집안으로 돌아오길 원치 않다고 하던데.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그녀는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며 대답했다.“이제는 아이도 생겼고 내 가정도 있어요. 상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내가 어느 집안의 자식인지 그것만 알면 됐어요.”상준석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쳐다보았다.“임신했구나. 축하해.”온순한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그는 아이에 관해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친해지려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그녀를 설득했다. “어찌 됐든 집으로 돌아와야지. 그래야 뱃속의 아이도 자신의 외가가 어디인지 알 거 아니야. 아이의 성장에 우리 상씨 가문의 뒷받침이 있다면 아이한테도 좋은 일이야. 자신감이 넘치고 용감한 아이로 자라게 될 테니까.”서유는 자라면서 자신감도 용감함도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결핍으로 인해 늘 사람들에게 끌려다니기 일쑤였다.그러나...그녀는 상준석과 아무 말이 없는 상태준을 쳐다보며 웃었다.“나도 이제는 아이한테 남부러운 것 없는 그런 좋은 환경을 줄 수 있어요. 그러니 상씨 가문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상태준은 모처럼 웃는 얼굴을 보이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그러나 오빠들은 네가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어.”간절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조금 난처해졌다.“난...”“어르신들 때문에 너와 네 어머니가 그 고생을 했고 이제야 널 찾게 되었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보상해 주고 싶어.”상준석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형 말이 맞아. 상씨 가문에서 지내지 않더라도 네 어머니
“그 영화 말이에요. 진짜예요?”상준석은 손을 들어 자신의 코를 만졌다.“맞춰봐요.”진짜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말에 상준석은 맞장구를 쳤다.“정확히 맞혔네요.”말을 마치고는 이연석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남편 되는 분이 딱 내 스타일인데.”이연석이 남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려는데 그가 그녀의 배를 힐끗 쳐다보고는 쿨하게 병실을 나섰다.상태준과 상연훈의 뒤를 쫓아가던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연석에게 윙크를 던졌다.“서유한테 내 연락처 있으니까 연락해요.”“미친 거 아니야?”그 말에 이연석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그러나 정가혜는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당신이 상준석 씨랑 만난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요.”이연석은 불같이 화를 냈다.“내가 저 인간이랑 만나느니 차라리 내시가 되고 말지.”뭔가 생각하던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내시가 되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은데...”얼굴이 새빨개진 그를 보며 정가혜는 그의 팔을 붙잡고 그를 달랬다.“농담이에요. 그러니까 화 풀어요.”그녀의 애교에 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이제부터 저런 징그러운 인간 쫓아다니지 말아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제야 도시락통을 들고 그녀와 함께 나란히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로 들어선 후, 정가혜는 흥분된 표정을 지으며 서유를 향해 걸어갔다.“방금 상준석 씨가 너한테 동생이라고 하던데. 두 사람 정말 사촌지간이야?”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사 결과를 정가혜한테 건네주었다.“검사 결과가 그렇다네.”보고서를 확인하던 정가혜는 미소를 지으며 서유의 손등을 토닥였다.“어쩐지 어렸을 때부터 예쁘더라니. 역시 유전자는 못 속여.”서유가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상준석 씨 보고 나니까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정가혜는 연신 손을 저었다.“아니. 난 항상 네가 예쁘다고 생각했었어. 상준석 씨보다 네가 훨
고개를 돌려 정가혜를 쳐다보는데 그녀의 눈에도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서유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 돌아오면 다시 얘기해요.”그 뜻을 알아차린 이연석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형수님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수프 좀 더 줄까요?”그가 수프를 그릇에 담아 서유의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바로 그때, 육성재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래에서 상씨 가문의 삼 형제를 만났어요. 유전자 검사 결과 나온 거예요?”고개를 끄덕이는 서유의 모습에 육성재는 결과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상씨 가문의 어르신은 애인과 당신이 닮았다는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서유는 정가혜가 건네준 숟가락을 받으며 대답했다.“전에 언니를 대신해 프로젝트를 맡다가 만나게 된 거예요. 그때 날 보더니 많이 닮았다고 하더라고요.”그녀는 육성재에게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그 집안에서 나에 대해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죠.”그러나 육성재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왜 자꾸 의심이 드는 걸까?상연훈의 말이 흠잡을 데 없이 너무 완벽해서 그런 걸까?“그럼 상씨 가문으로 돌아가기로 한 거예요?”대답을 하려는데 육성아가 밖에서 비틀거리며 뛰어 들어왔다.“서유 씨.”“깨어난 거예요?”육성아를 보고 육성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일부러 알리지 않았건만 어떻게 혼자 병원까지 쫓아온 건지?그동안 살이 많이 빠진 육성아는 전혀 임산부같이 보이지 않았고 얼굴도 창백한 상태였다. 집에서 편히 지내고 싶었지만 택이가 걱정되어 이리 달려온 것이다. 서유가 깨어났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찾아온 것이었다. 뜻밖에도 서유는 정신이 돌아왔고 침대에서 내려와 밥도 먹을 수 있을 만큼 호전되었다. “서유 씨가 깨어났는데 왜 다들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지?”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마치 버림받은 사람처럼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몸이 안 좋아서 알리지 않았던 거야.”육성재는 짧게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이때, 정가혜가 몸을 던져 서유를 덥석 감싸안았다. 이연석은 빠른 속도로 육성아의 손에 있던 죽을 낚아챘고 육성재는 육성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뭐 하는 짓이야.”육성재는 짙은 눈썹을 한껏 찌푸린 채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육성아를 노려보았다.“택이가 원해서 한 일이야. 이승하가 강요한 게 아니라고. 이건 택이의 선택이었어. 그리고 탓을 하려면 이승하를 탓해야지 왜 서유 씨한테 그래?”이성을 잃은 육성아는 육성재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미친 사람처럼 육성재를 밀어냈다. 총상을 입고 아직 채 회복되지 않은 육성재는 상처가 찢어진 고통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테이블을 짚고서야 겨우 몸을 가누었고 상처로 인한 통증 때문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어. 택이 씨가 저 여자 남편 때문에 죽었으니까 대가를 치러야지.”제정신이 아닌 육성아는 이미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였고 기를 쓰며 고집을 부렸다. “저 여자 남편 때문에 택이 씨가 죽은 거야.”그녀는 서유를 노려보며 눈물을 흘렸고 서유에게 손찌검을 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왜 그러는 건지 요즘은 자꾸만 화를 내고 사람을 때렸다.이 세상에서 그녀에게 빚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그녀의 이런 막무가내인 행동을 받아줄 필요가 없는 사람들한테 왜 이러는 건지.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이러고 있다. 택이는 죽었고 그녀는 병을 앓고 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육성아는 그 답을 알 수도 없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도 없어 테이블 위의 국그릇을 들어 서유를 향해 계속 뿌렸다. 다행히 옆에 있던 이연석이 빠르게 움직여 그녀의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그가 차가운 얼굴로 육성아를 제압한 뒤 고개를 돌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서유를 쳐다보았다.“가혜 씨, 얼른 의사 불러요.”정신이 번쩍 든 정가혜는 이내 침대 옆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한편, 이연석이 육성아를
육성아의 말은 참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안중에도 없었더라면 서유가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겠지...“성아 씨, 난 택이 씨를 가볍게 여긴 적 없어요. 승하 씨는 더더욱 아닐 거고요. 승하 씨한테 택이 씨는 남동생 같은 존재예요.”“남동생 같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요?”“승하 씨가 루드웰에 가면서 제일 먼저 속인 게 택이 씨였어요. 택이 씨한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일부러 택이 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요?”서유의 설명에도 육성아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또다시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입 다물어요. 당신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으니까. 다들 모두 한통속이잖아.”“성아 씨...”서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성아는 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이연석이 그녀를 제지하려는 순간, 육성재가 다가와 그를 막아섰고 이내 성숙한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남자는 빠르게 손을 뻗어 육성아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있는 힘껏 내려친 뺨에 육성아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아랫배에서 통증이 전해지고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도 없이 육우성을 쳐다보았다. 한편, 육우성은 그녀가 피를 흘리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택이라는 그놈하고 몰래 연애를 한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임신했어? 그랬으면 잠자코 있을 것이지 죽은 놈 때문에 지금 이 난리를 피워?”“그 사람 죽지 않았어요.”어디서 생긴 힘인지 그녀는 허리를 굽혀 자신을 부축해 주던 육성재를 밀어내고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육우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택이 씨는 죽지 않았다고요. 살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그동안 육성아의 병세는 끊임없이 재발했다. 육우성은 밤낮으로 그녀의 곁을 지키며 그녀를 돌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정말 구제 불능이구나.”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육우성은 손을 뻗어 육성아의 팔을 잡아당겼
육성재는 자신의 상처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허리를 숙여 육성아를 안아 올렸다. “얼른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가서 아이 지워.”육우성의 말은 그녀의 가슴을 후려쳤다. 자신에게 아이가 있어서 정략결혼을 못 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처음부터 부모님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육성재는 육우성을 무시한 채 그녀를 안고 재빨리 병실을 뛰쳐나갔다.잠시 후, 육우성은 고개를 돌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서유를 쳐다보았다. 육성재의 부탁으로 서유를 찾아간 이유는 그녀가 김영주의 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무인도에서 그녀를 찾았을 때, 그는 서유가 김영주인 줄 알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성적인 그는 그 당시 크게 감정 변화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김영주는 단지 젊은 시절 사랑했던 사람일 뿐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감정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또한 이미 지난 일이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서유에게서 눈을 떼고는 돌아서서 병실을 나갔다.그들이 떠난 후, 정가혜는 의사가 남긴 연고를 집어 들고 서유에게 약을 계속 발라 주었다.“성아 씨도 참. 왜 화풀이를 너한테 해?”육성아보다 서유를 생각하면 마음이 더 아팠다. “큰 충격을 받아서 그래. 시간이 지나 괜찮아지면 안 그럴 거야.”개의치 않아 하는 서유를 보고 정가혜는 한숨을 내쉴 뿐 더 이상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한편, 서유는 이연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도련님, 성아 씨한테 좀 가볼래요? 아이가 잘못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유산될 가능성이 커서 그녀는 걱정이 앞섰다.내키지 않았지만 이연석은 병실을 나섰다. 잠시 후, 육성재와 이연석은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얼굴에 온통 연고투성이인 서유를 보고 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때요? 아직도 아파요?”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육성아의 아이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유산됐어요.”서유와 정가혜는 멍해졌다. 순
서유는 결국 육성아를 보러 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머리를 기울인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날씨가 흐려 어두컴컴한 탓에 병실은 더 차갑게 느껴졌다. 서유는 병실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얘기 좀 할까요?”육성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거절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서유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허리를 묶고 있는 두 개의 벨트 위로 옮겨갔다.육성재의 말로는 이성을 잃은 육성아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간병인에게까지 손찌검을 했다고 한다. 병원 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진정제를 놓고 병상에 묶어두었다. 나중에 정신장애로 판정받으면 아마 육우성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이송될 수도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식을 잃고 자유까지 영원히 잃게 된다면 그녀에게 남은 길은 딱 하나였다. 주서희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는 걸 서유는 보고 싶지 않아 용기를 내 그녀를 만나러 왔다. 육성아의 손목에 있는 상처를 보니 아마도 아이를 잃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았다. 육성아의 비참한 삶을 생각하며 서유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차가운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졌다.그녀가 자신을 뿌리칠 줄 알고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손을 거두는데 그녀가 서유의 손을 덥석 잡았다.“아주 오랜 시간... 아무도 날 보러 오지 않았어요.”오빠인 육성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다들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남자 때문에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고 혀를 찼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보러 온 사람이 없었다.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서유는 그녀의손가락을 다시 꼭 잡았다. 예전에 광기 어른 그녀의 모습을 전혀 개의치 않아 했고 그녀가 갑자기 이성을 잃고 자신을 다치게 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서유의 눈에 그녀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여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공허한 눈을 천천히 들어 여전히
그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오히려 상대를 속박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나중에 육성아는 그녀만의 택이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한 사람을 죽도록 사랑하면 그 사람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시간이 지나 아이까지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린 그녀가 택이를 여전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을지? 서유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택이의 무덤 앞에서 육성아를 만나는 장면을 그려보았다.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검은색 베레모를 쓴 채, 꽃바구니를 들고 아이와 함께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무덤 앞에 있는 싱싱한 국화꽃을 보고 서유는 고개를 돌려 육성아의 모습을 찾아보았다.그녀의 모습은 급히 사라져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매년 기일, 서유가 택이의 무덤을 찾을 때면 무덤 앞에 항상 꽃다발이 놓여있었다.육성아가 한 번도 택이를 잊은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상들은 모두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의 육성아는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힘겹게 버티고 있다.다들 그녀가 미쳤다고 했다.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건 사실이지만 아이를 잃고 난 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그녀의 탓이었다. 몇번이나 출혈이 있었고 결국 아이는 영원히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녀는 서유를 껴안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했다.택이와 함께 있을 때, 늘 그한테 손찌검하고 싫은 소리 하고 다정하게 대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택이 앞에서 늘 공주처럼 그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그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던 걸 후회한다고 했다. 택이가 이 세상에 남긴 핏줄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 했다.이기적이고 나쁜 여자라 늘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다.그녀의 말을 들으며 서유도 밤새 따라 울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어떤 건지 서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한때는 이승하가 죽은 줄 알고 지금의 육성아보다 더 괴로워했으니까.그녀는 육성아를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