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서유는 이승하가 그녀를 밀어내고 돌아서서 연지유를 품에 안는 장면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멍해진 그녀는 곧바로 달려갔지만 이승하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왜 너는 아직도 매달리는 거지?” 서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이승하를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정말 이혼했어요?” 이승하는 대답하지 않고 품속의 연지유를 더욱 꽉 껴안으며 다정하게 대했다. 서유는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그 순간 남자가 고개를 숙여 연지유와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서유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수천 개의 화살에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견디며 혼란스러운 정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흰색 천장을 보고서야 서유는 자신이 악몽을 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단지 꿈이었음을 안도하던 그녀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눈길을 옮기자 갑자기 한 장의 고독하고도 날카로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깨어났어요?” 상대방의 눈빛이 그녀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 반짝였다. 마치 별빛이 켜진 것처럼. 서유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다 한참 만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살며시 만졌다. 촉감은 진짜였다. 그는 살아 있었다. 서유의 맑은 눈동자에 얇은 물기가 서렸다. “육성재 씨,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육성재는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큰 고비를 넘겼으니 행운이 따라올 거예요. 안아줄까요?” 육성재를 바라보며, 서유는 문득 그가 자신 대신 총을 맞았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의 목숨을 건 헌신과 피로 얼룩진 모습은 그녀에게 깊은 감동과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 서유는 그를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말로
육성재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아버지에게 섬에서 기다리라고 한 건 나였어요.”그들은 섬에서 끌려갔고 게임이 끝난 후 다시 섬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육성재는 만약 서유가 살아남는다면 그녀 역시 그곳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인 육우성에게 섬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다행히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우성은 섬의 해변에서 서유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서유 씨를 발견했을 때 온몸이 젖어 있었다고 했어요. 아마도 바다에 빠졌던 것 같아요.” “누가 서유 씨를 바다에서 끌어올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이 서유 씨를 응급 처치해 줬다고 하더군요.”그래서 서유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지킬 수 있었다.이 말을 듣고 서유는 멍하니 있었다. 그때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었고, 그녀를 제때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연중서 뿐이었다. 혹시 그가 죄책감을 느끼고 돌아와 자신을 구한 것일까? 서유는 이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설사 그가 구했다 해도 서유의 마음속의 미움이 사라지진 않았다. 만약 연중서가 없었다면 그녀의 어머니와 두 자매는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연중서가 없었다면 그녀는 연지유에게 그렇게까지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서유는 연지유가 이승하에게 이혼을 강요하며 자신을 밀어내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의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고 그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이를 본 육성재는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너무 화내지 마요.” 서유는 천천히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금 차분하게 손을 옮겼다. 먼저 사랑한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행동에서도 상대방이 거부감을 느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육성재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하지만 그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침대 머리맡에 있는 물컵을 들어 물을 따랐다. 그리고 서유에게 건넸다.
창밖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있는 서유를 보며 육성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너무나 오랫동안 말이 없어서 서유는 그가 더는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실패가 무엇인지 따질 필요는 없어요.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고 생각도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서유는 그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눈은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 고요한 쓸쓸함이 육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서유가 이승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에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는 말은 그녀가 상처받은 후 한순간의 감정적인 표현일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육성재는 마음속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니 굳이 더 말하지 않고 그냥 그녀와 함께 조용히 앉아 있었다.잠시 후, 서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육성재를 돌아보았다. “그날 성재 씨가 입술 모양으로 나한테 무슨 말을 했었죠? 그때 피가 가려서 못 봤어요.” 서유는 손에 쥔 물컵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육성재를 바라보았다. “그때 뭐라고 했던 거예요?” 육성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서유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의 귀 끝이 서서히 붉어졌다. “별거 아니었어요.” 서유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어색해하는 육성재를 살펴보았다. “아, 그냥 말해줘요. 안 그러면 계속 생각나서 신경 쓰일 거 같아요.” 사실 이혼한 서유를 앞에 두고 육성재는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승하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아무리 다른 이가 노력하고 서유를 좋아해도, 그녀는 그와 함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생사를 함께하는 사랑 앞에서 육성재가 가진 작은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녀가 자신을 볼 때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그때 상금 꼭 집에 가져다 달라고 한 거였어요.” 서유는 그가 무슨 감동적인 말을 하려는 줄 알았지만 결국 상금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게 조금 어이가 없
육성재는 상연훈의 시선을 따라 병상에 누워 깊이 잠든 서유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일인데요?” 상연훈은 육성재의 경계하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길고 늘씬한 다리를 뻗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유 씨가 전에 우리 할아버지의 프로젝트를 맡았었는데, 보내온 설계도에 약간 문제가 있더군요. 그래서 다시 디자인을 부탁하려고 왔습니다.” 설명을 마친 상연훈은 맑고 신비로운 눈빛으로 육성재의 얼굴에서 서유를 향한 시선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방금 옆 병실에 친척을 보러 갔다가 여기에 서유 씨도 있는 걸 보고 잠시 들렀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누워 있습니까?” 서유가 건축 디자이너라는 것은 육성재도 알고 있었기에 상연훈의 말에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조심스러웠다. “임신 중이라 병원에 와서 태아를 보호하고 있는 중입니다.” 상연훈은 예상치 못한 소식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심코 링거를 한 병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렇군요.” 육성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격적으로 상연훈을 돌려보내려 했다. “지금 서유 씨는 프로젝트를 맡을 여력이 없으니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연훈은 서유를 지키면서 꼿꼿이 앉아 있는 육성재를 바라보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짧게 대답했다. “좋아요. 깨어나면 다시 찾아오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섰다. 마치 정말 우연히 지나가다 들른 것처럼 말이다.서유는 링거의 약물 덕분에 깊이 잠들어 있었고 방문객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악몽에 빠져 있었고 땀이 비 오듯 흘러 이마와 등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꿈속에서 이승하가 그녀를 여러 번 밀쳐내는 장면이 반복되었고,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수 없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려 할 때마다 연지유, 연중서, 그리고 이승하가 그녀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구조를 요청했지만 이승하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서유는 그가 멀어지
서유는 고열에 시달리며 땀을 흘렸고, 해조류처럼 검고 긴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완전히 축축해 보였다. 꼭 방금 바다에서 건져 올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 서유를 보며 정가혜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서유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치우고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서유는 단 한 장의 편지만 남기고 밤사이 사라져 버렸다. 약속했던 것조차 지키지 않은 서유에 대해 정가혜는 화가 나고 걱정스러웠다. 임신한 상태에서의 걱정과 불안은 그녀의 배를 아프게 했고 지난 두 달은 병상에서 보내거나 눈물 속에서 보낸 시간들이었다. 정가혜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각오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믿을 수 없었다. 한 번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서유가 그렇게 쉽게 또 불행을 겪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육성재가 돌아와 서유와 이승하가 아직 살아있으며, 다만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그제야 정가혜는 비로소 한숨 돌리며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육성재의 말에 약간의 의심이 섞여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서유의 생존을 간절히 바랐던 정가혜에게는 충분했다. 서유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정가혜는 아주 조심스럽게 서유의 이마, 얼굴, 목, 손을 반복해서 닦았다. 그러다가 뜨거운 열기가 조금씩 내려가자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서유는 여전히 악몽 속에 있었지만 이번에는 따스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서 바닷속에서 건져 올려 주었다. 그녀의 깊이 찡그려진 미간이 서서히 풀어졌고, 그 손길 아래서 조금 더 잠을 자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눈을 떴다.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육성재가 아닌, 아름다운 정가혜의 얼굴이었다. “서유야, 깨어났어?” 정가혜는 서유가 눈을 뜨자마자 수건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서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마른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가혜야, 미안해. 너를
서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가 루드웰에서 일어난 일을 정가혜에게 털어놓았다. 정가혜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가냘픈 서유의 얼굴을 애처롭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많이 힘들었구나.” 그녀는 그저 한마디만 했다. 서유를 달래지도 않았고 이승하를 변호하지도 않았지만, 그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서유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가혜의 따뜻한 위로에 그동안 마음속에 눌러 담았던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혜야.” “응, 나 여기 있어.” 서유는 얼굴에 얹어진 정가혜의 손을 꼭 잡아 자기 가슴에 안았다. “나 정말 많이 힘들었어.” 정가혜는 서유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지만 만나자마자 이혼을 통보받은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정가혜은 마음 아픈 서유를 위로하듯 그녀의 야윈 손등을 다른 손으로 덮으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해도 돼. 네 마음속에 담아둔 억울함을 다 털어놔.” 서유는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억울할 게 뭐 있어. 다 익숙해졌는걸.” 서유는 이승하의 차가운 무관심과 자신을 밀어내는 그의 태도에 이미 익숙해졌다고 했다. 그저 그 후에 찾아오는 슬픔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익숙하다’는 말이 서유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정가혜는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서유의 손등을 계속 두드리며 그 손길로 서유를 위로하고 있었다. 서유는 더 이상 정가혜까지 자신과 함께 아파하지 않도록 말하기를 멈추었다.“가혜야, 퇴원하면 더 이상 블루리도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때 연이를 내 별장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 서유는 이제 두 사람의 신혼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은 듯했다. 정가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그녀가 대답을 마치자 정가혜는 또 한 번 서유의 이름을 불렀다.
서유는 소지섭과 소수빈의 얼굴에 남아 있는 멍 자국을 보았다. “두 사람도 걱정 많이 했지? 미안해.” “우리야 괜찮아요. 집사님께서 속을 많이 쓰셔서 주름이 더 늘었어요.” 소지섭은 서유를 위로하려는 말이었는데, 소수빈이 그걸 듣고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원래도 많았어.” 소수빈은 일부러 소지섭의 말을 끊어놓고, 소지섭은 그 말에 분노가 치밀어 주먹을 꽉 쥔 채로 소수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서유 앞에서 두 사람이 싸울 수는 없었기에 서로 고개만 돌리고 상대방을 보지 않으려 했다. 서유는 두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몰랐지만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저으며 서유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했다. 서로 간단한 안부를 나눈 뒤 이연석이 본격적으로 물었다. “형수님, 우리 형 지금 어떻게 됐어요? 다치진 않았죠?” 이연석은 이전에 육성재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연석은 그에게 몇 번이나 화가 나서 때리고 싶었지만 서유와 함께 형을 찾으러 갔던 것을 생각하며 억지로 참았다. 서유는 모두가 이승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아까 정가혜 앞에서 슬픔을 내비치는 것과 달리 이연석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다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루드웰에서 상위급이 되었더라고요.”그 말을 듣자 긴장했던 모두의 얼굴에 안도감이 흘렀다. “우리 형 참 대단하네.” 이연석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승하의 성공이 그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서유도 그 사실을 인정했지만 아무런 감정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소수빈은 그런 서유의 모습에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모님, 저희에게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 서유는 순간적으로 실망에서 벗어나 대답했다.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뭐 있겠어. 승하 씨는 정말로 괜찮아.” 그는 다치지 않았고 온몸이 멀쩡해 보였다. 아주 건강하게. “육성재 씨가 그러는데,
상연훈이 나타나자 서유는 잠시 멍해졌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알게 됐는지, 또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아했다. 혹시 예전에 김초희로 가장해 그들의 집에 프로젝트를 논의하러 갔던 것을 상연훈이 눈치챈 것일까?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요. 서유 씨는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프로젝트를 맡을 여력이 없다고. 상연훈 씨, 대체 왜 또 온 겁니까?” 육성재는 상연훈의 등장에 불만스러운 듯, 그의 잘생긴 외모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연훈은 육성재의 거만함을 신경 쓰지 않고 서유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서유 씨, 시간 됩니까?” 서유는 생각을 정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연훈의 시선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 “서유 씨와 단둘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육성재가 뭐라 반발하려는 찰나 서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련님, 가혜를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좀 쉬게 해줘요.” 이연석은 상연훈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전에 상연훈과 서유가 마주한 적도 없는데 상연훈이 왜 서유를 찾아왔을까? 그러나 의문은 남았어도 그는 얌전히 정가혜를 일으켜,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이연석은 돌아서기 전에 육성재를 힐끔 쳐다보았다. “너는 안 가?” 이 녀석도 좀 이상했다. 전에 서유가 의식을 잃고 있을 때 그는 병상 곁을 지키며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가 서유의 남편인 줄 알겠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연석은 도둑을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육성재를 흘겨보며 불쾌함을 드러냈고, 육성재는 그 시선을 불편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떠난 뒤, 상연훈은 우아하게 걸음을 옮겨 서유 앞에 앉았다. 방금 전 정가혜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서유 씨, 몸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미안합니다.” 상연훈은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잘생긴 얼굴에는 늘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어, 사람들은 그를 교양 있는 가문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