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소지섭과 소수빈의 얼굴에 남아 있는 멍 자국을 보았다. “두 사람도 걱정 많이 했지? 미안해.” “우리야 괜찮아요. 집사님께서 속을 많이 쓰셔서 주름이 더 늘었어요.” 소지섭은 서유를 위로하려는 말이었는데, 소수빈이 그걸 듣고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원래도 많았어.” 소수빈은 일부러 소지섭의 말을 끊어놓고, 소지섭은 그 말에 분노가 치밀어 주먹을 꽉 쥔 채로 소수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서유 앞에서 두 사람이 싸울 수는 없었기에 서로 고개만 돌리고 상대방을 보지 않으려 했다. 서유는 두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몰랐지만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저으며 서유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했다. 서로 간단한 안부를 나눈 뒤 이연석이 본격적으로 물었다. “형수님, 우리 형 지금 어떻게 됐어요? 다치진 않았죠?” 이연석은 이전에 육성재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연석은 그에게 몇 번이나 화가 나서 때리고 싶었지만 서유와 함께 형을 찾으러 갔던 것을 생각하며 억지로 참았다. 서유는 모두가 이승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아까 정가혜 앞에서 슬픔을 내비치는 것과 달리 이연석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다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루드웰에서 상위급이 되었더라고요.”그 말을 듣자 긴장했던 모두의 얼굴에 안도감이 흘렀다. “우리 형 참 대단하네.” 이연석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승하의 성공이 그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서유도 그 사실을 인정했지만 아무런 감정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소수빈은 그런 서유의 모습에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모님, 저희에게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 서유는 순간적으로 실망에서 벗어나 대답했다.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뭐 있겠어. 승하 씨는 정말로 괜찮아.” 그는 다치지 않았고 온몸이 멀쩡해 보였다. 아주 건강하게. “육성재 씨가 그러는데,
상연훈이 나타나자 서유는 잠시 멍해졌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알게 됐는지, 또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아했다. 혹시 예전에 김초희로 가장해 그들의 집에 프로젝트를 논의하러 갔던 것을 상연훈이 눈치챈 것일까?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요. 서유 씨는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프로젝트를 맡을 여력이 없다고. 상연훈 씨, 대체 왜 또 온 겁니까?” 육성재는 상연훈의 등장에 불만스러운 듯, 그의 잘생긴 외모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연훈은 육성재의 거만함을 신경 쓰지 않고 서유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서유 씨, 시간 됩니까?” 서유는 생각을 정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연훈의 시선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 “서유 씨와 단둘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육성재가 뭐라 반발하려는 찰나 서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련님, 가혜를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좀 쉬게 해줘요.” 이연석은 상연훈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전에 상연훈과 서유가 마주한 적도 없는데 상연훈이 왜 서유를 찾아왔을까? 그러나 의문은 남았어도 그는 얌전히 정가혜를 일으켜,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이연석은 돌아서기 전에 육성재를 힐끔 쳐다보았다. “너는 안 가?” 이 녀석도 좀 이상했다. 전에 서유가 의식을 잃고 있을 때 그는 병상 곁을 지키며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가 서유의 남편인 줄 알겠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연석은 도둑을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육성재를 흘겨보며 불쾌함을 드러냈고, 육성재는 그 시선을 불편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떠난 뒤, 상연훈은 우아하게 걸음을 옮겨 서유 앞에 앉았다. 방금 전 정가혜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서유 씨, 몸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미안합니다.” 상연훈은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잘생긴 얼굴에는 늘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어, 사람들은 그를 교양 있는 가문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상연훈이 자리를 뜬 후, 육성재와 이연석은 다시 돌아와 서유에게 그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유전자 검사하러 왔어요.”그 말이 나오자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상영훈이 어찌 서유를 찾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반면 정가혜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와 서유의 손을 잡았다. “너무 잘됐다. 너희 가족들이 드디어 널 찾았네.”고아인 그들에게 가족을 찾는 것만큼 감격스러운 일은 없다. 정가혜는 자신이 가족을 찾은 듯처럼 기쁜 마음에 눈물까지 흘렸다. “아직 정확히 결과 나온 거 아니야. 그러니까 흥분하지 마.”이 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많고도 많고 모두가 혈연관계일 수는 없다. “알았어. 결과 나오면 그때 기뻐할게.”임신한 정가혜는 살이 좀 오른 건지 얼굴이 통통해져 말할 때 약간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서유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볼살을 꼬집었다.“도련님이 잘 챙겨줬나 보네. 살이 오르니까 보기 좋다.”그녀의 칭찬에 이연석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올렸다.“남편으로서 임신한 와이프 챙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옆에 있던 정가혜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한껏 야윈 서유의 모습을 보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급히 한마디 보탰다.“형수님, 이제부터 가혜 씨를 챙겨주듯 제가 형수님도 잘 돌봐줄게요.”임신한 후부터 지금까지 남편 없이 혼자 였던 서유는 얼굴도 몸도 많이 마른 상태였고 종잇장처럼 가벼워 보이는 것이 바람이 불면 흩어질 것만 같았다. 옆에서 보고 있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둘째 형은 언제 돌아올 건지...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옆에서 서유를 지켜주지 못한 마음에 많이 아쉬울 텐데 말이다.한편, 서유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니에요. 가혜만 잘 돌봐주면 돼요. 난 혼자도 문제없어요.”혼자 할 수 있다는 건 이젠 익숙해졌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말에 정가혜는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
한편, 상철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보고서를 집어 상연훈에게 건네주었다.“이거 서유한테 보여주고 가서 집으로 데려오너라.”“돌아오면 서유의 성을 상씨로 바꿀 것이다.”“그리고 내 딸 김영주의 유골함도 김씨 가문에서 가져와야 해.”상철수가 계속해서 상연훈에게 당부했다.“초희 그 아이는 심씨 가문에 묻혔다고 하더라. 그 아이의 유골함도 가져오고 이름도 바꾸거라.”상씨 가문의 자식이니 마땅히 상씨 성을 가져야 하고 가문으로 돌아와 이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 검사 결과서를 받아쥔 상연훈은 보고서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상철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 저희가 이승하한테 한 일을 알게 되면 서유는 돌아오려 하지 않을 겁니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던 상철수가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Ace의 일은 서유에게 알리지 말거라.”서유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그들이 이승하의 머리를 찢었다는 걸 서유가 알면 어찌 이 가문으로 돌아오려고 하겠는가?이제 막 잃어버린 핏줄을 되찾은 상철수로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어 상연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승하는요?”이승하는 서유의 남편이기도 하고 S 조직의 리더이기도 하다. 가족이자 원수 사이인 그를 건드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 건지?잠깐 망설이던 상철수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서유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승하한테 알리지 말거라. 김종수 쪽에도 사람을 보내 지켜보고. 김종수가 화학 구역으로 가는 권한을 얻게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야.”그 말에 상연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승하한테 알려주지 않겠다는 건 그를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인 건가?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철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사한테 이승하를 치료하라고 해. 그러나 절대 이승하가 화학 구역을 나서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서유의 남편이긴 하지만 S 조직의 리더이기도 하다.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건 오롯이
한편, 연중서와 연지유 두 사람을 잡아 온 김종수는 서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을 이승하에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화학 구역으로 가는 권한이 없었다. 화학 구역은 그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고 그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곳이 아니라 미리 사람을 안배한 적도 없어서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을 통해 김종수도 이승하가 S 조직의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현재, Ace의 다른 배후자들은 상철수가 이승하를 죽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상철수는 이승하를 죽이지 않고 화학 구역에 가두어둘 뿐만 아니라 의사를 보내 이승하를 치료하게 하였다. 이승하의 목숨을 살려두고 그의 입에서 S 조직의 창시자를 알아내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 이유를 다른 배후자들은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이승하의 입에서 그걸 알아내려면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게 가장 옳은 방법이 아닐까? 뭐 하러 굳이 그를 치료하는 것인지? 이건 상철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S 조직의 멤버를 잡으면 직접 벌까지 주던 사람이 S 조직의 리더한테 이러는 것이 말이 되는가?이승하를 남겨둔 게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상연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상철수를 만나러 오라는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비밀스러운 조직이라 평소에는 사적으로 왕래한 적이 없었고 루드웰에서도 일만 처리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이지? 서울에서 보자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하던 일을 제쳐두고 서울로 갔다. 그는 상연훈이 말한 방법에 따라 은밀히 상씨 가문의 뒷마당을 지나쳐 상철수의 서재로 들어갔다.한편, 상철수는 한창 커피를 끓이고 있었고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한 뒤 커피 한잔을 따라주었다.“물어볼 것이 있어서 이리로 불렀다.”소파에 앉은 뒤 상철수가 건네주는 커피를 건네받았다.“형님, 궁금한 게 무엇
상철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명을 내렸으니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저 그대로만 하면 된다는 눈빛이었다. 그와 실랑이를 벌이기 싫었던 김종수는 핸드폰을 꺼내 그 앞에서 바로 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집사의 목소리가 아닌 그 손자의 목소리였다. 집사에게 김영주에 대해 물으니 쓸데없는 말들만 늘어놓는 탓에 상철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상철수가 또 화를 낼까 봐 두려웠던 김종수는 언성을 높였다.“오 집사님... 내 말 들려요? 할아버지께서 왜 영주 누나를 입양한 겁니까?”오태식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어갔다.“뭐라고? 안 들려...”김종수는 고개를 들어 상철수를 쳐다보았다.“안 될 것 같습니다.”이내 상철수가 핸드폰을 낚아채 차갑게 입을 열었다.“계속 말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네 식구들 다 죽여버릴 거야.”전화기 맞은편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누구입니까?”“김영주의 친부.”“당신이군요. 어르신께서 당신이 찾아오면 사실대로 알려주라고 하셨습니다.”...뭐야? 아까는 일부러 치매인 척한 거야?상철수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말해.”오태식도 부탁을 받은 것이었다. 김종수의 할아버지는 그한테 김영주의 친아버지를 제외하고 그 누가 찾아와도 절대 김영주의 출생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김종수와 김씨 가문의 후손들이 자꾸만 찾아와서 물어보는 탓에 그는 일부러 치매인 척한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 김영주의 친아버지가 찾아왔으니 그는 어르신의 당부대로 모든 사실을 상철수에게 털어놓았다.김종수의 할아버지는 정여희의 친한 친구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 당시 정여희는 그 친구에게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했었다.그런데 얼마 안 되어 그 친구가 병에 걸렸고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어서 김종수의 할아버지한테 그 아이를 맡기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정여희가 남긴 재산도 모두 함께 건네줬다. 정여희의 친구는 상철수를
그 이유가 뭔지 김종수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담담하게 이성적으로 상철수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승하가 맡고 있는 지금의 S 조직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거나 사적인 원한으로 복수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비즈니스 업계에서 해가 되는 사람들을 처리했을 뿐이죠. 저희도 그런 놈들에게 초대장을 보내 혼내주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일은 그냥 덮고 가는 게 어떠할까요?”“절대 그럴 수는 없네.”상철수는 S 조직에 대한 원한이 김종수보다 훨씬 컸다. 직접 두 눈으로 지켜봤는데 어떻게 이리 쉽게 묻어둘 수가 있겠는가?“어르신...”“더 이상 날 설득하지 말게나. 아니면 자네한테도 화가 미칠 수 있어.”김종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루드웰의 룰에 따르면 루드웰에 합류한 사람들은 S 조직의 멤버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화학 구역으로 가게 된다. “알겠습니다. 더는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다만...”상철수의 싸늘한 눈빛에 김종수는 말끝을 흐렸다. 서유가 살아 있다는 걸 이승하에게는 알려주자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다. 살기가 가득한 그 눈을 보며 김종수는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혼자 이곳에 온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오랜 시간 상철수를 따르면서 그한테는 상철수가 큰 형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이승하 때문에 그와 충돌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자리를 뜨려는 순간 상철수가 그를 불렀다. “서유를 상씨 가문으로 데려올 생각이야. Ace에 관한 일과 우리가 이승하의 머리를 찢었었다는 일은 서유한테 알리지 마.”김종수는 그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상철수가 루드웰의 창시자이고 이승하에게 한 짓을 서유가 알게 된다면 아마 많이 원망할 것이다. 김종수도 서유에게 계속해서 외삼촌이고 싶었기 때문에 상철수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알겠습니다. 전 모른 척할 테니까 어르신 뜻대로 하십시오.”말을 마치고 서재를 나서는데 상철수가 그의 뒷모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상연훈은 서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할머니께서 어떤 생각이셨는지는 잘 모르겠어. 자세한 이유를 알고 싶다면 나랑 같이 집으로 가서 할아버지께 여쭤봐.”서유는 검사 보고서를 그에게 다시 건네줬다.“고마워요. 덕분에 엄마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이젠 엄마의 묘에 진짜 이름을 쓸 수가 있겠네요.”그는 안색이 굳어졌다. “내가 이리 널 찾아온 건 단순히 너의 어머니의 출생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서가 아니야. 우리 상씨 가문으로 널 데려가 네 자리를 찾아주고 싶어서 그래.”서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하지만 나한테는 이미 가족이 있어요.”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가 그녀의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결혼을 했어도 상씨 가문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나는 건 문제 없잖아.”“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면 됐어요. 굳이 만날 필요 없을 것 같아요.”엄마가 살아있었다면 가족들을 만나러 가야겠지만 외손녀가 굳이 만나러 갈 필요가 있을까? 각자 잘 살고 있으니 서로 방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라는 걸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없는 나이니까. 그가 설득하려고 하자 서유는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결과 나오면 내 결정에 맡기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 결정은 상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네가 돌아오길 바라고 계셔. 정말 다시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거야?”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할아버지께서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에 대해 야박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거절하는 거야?”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두 분 사이에 있었던 일은 난 잘 몰라요. 뭐라고 할 입장도 아니고요. 다만 할아버지께서 잘못하신 건 맞아요.”“인정해. 나도 그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만약 나였다면 목숨까지 내걸고 밀어붙였을 거야. 가족들이 날 죽이기야 하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