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구경하던 이연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가 그쪽 형이에요? 함부로 부르지 마요!”‘진짜 형 맞는데.’ 서유는 속으로 살짝 웃으며 조용히 일어나 김선우 앞에 섰다. “김 대표님, 당신이 게임을 빌미로 이런 짓을 두 번이나 벌였어요. 나를 곤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매우 존중하지 않았어요. 앞으로 나를 누나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이는 남동생이 절대 누나에게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김선우는 전혀 ‘존중’과 ‘불경’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승하를 골탕 먹이려 했을 뿐 이게 서유를 난처하게 만들 줄은 몰랐고,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다만, 이제는 너무 늦은 셈이었다. “누나, 나도 누가 빅 조커와 작은 조커를 뽑을지 몰랐어요. 만약 제가 뽑았다면 저도 역시 이 대표한테 뽀뽀하라고 했을 거예요. 그저 이 대표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서유가 뽑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 순간 그는 게임에 너무 몰입해 지난번 진 내기를 떠올리며 너무 우쭐해졌던 것이다. 결국 그는 남녀 구별이나 결혼 관계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김선우는 약간 못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서유를 존중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 김선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때리세요, 때릴 만큼 때리시고 나면 저 좀 집에 보내줘요...” 이승하는 그의 부은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세게 뺨을 후려친 후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다음번에도 이러면 네 다리를 부러뜨릴 거다.” 김선우는 이미 철저하게 당하고 나서 이승하를 올려다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투가 육성재가 자신을 혼낼 때와 닮아 있었다. 게다가 이승하의 눈이 왠지 작은 고모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기억은 이미 흐릿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눈빛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김선우가 이승하를 유심히
며칠 뒤, 바다 위에서 열린 결혼식이 성황리에 끝났다. 정가혜는 어른들과 또래들을 정중하게 배웅하며 예의와 존경을 다했고 그 결과 이씨 가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했다. 몇몇 형수들이 정가혜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은 유나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배 아래에 서 있는 정가혜를 돌아보았다. 정가혜가 배에서 내리는 이씨 가문의 모든 사람에게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답례품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유나희는 미묘하게 입가를 당겼다. 어찌 된 일인지, 며칠 간의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꽤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을 배웅한 후 정가혜는 그제야 내내 곁에 있던 서유를 마주보았다. “답례품 외에도 하나 더 선물을 준비했어.” 서유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뭔데?” 정가혜는 답례품을 건네며 한 장의 사진을 손에 쥐어주었다. “한번 봐봐, 마음에 들어?” 서유는 사진을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그 사진에는 이씨 집안 형제자매들과 김씨 집안 형제자매들이 모두 옥외 선실에 모여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비록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를 잘 몰랐지만 이승하는 두 가문의 혈연을 연결하는 존재였다. 이 사진은 매우 절묘하게 찍혔다. 이승하가 중심에 앉아 있고, 왼쪽에는 김씨 집안 가족, 오른쪽에는 이씨 집안 가족이 자리했으며 두 가족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승하는 고개를 숙여 서유를 바라보고 있었고 서유 역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사진의 주변에는 깨끗하게 정돈된 소파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배경으로 담겨 있었다. 게다가 구석에 앉아 있는 송사월과 와인잔을 들고 이지민을 바라보는 단이수의 모습도 그날 밤의 장면처럼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서유는 그 사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제 이걸 찍었어?” 정가혜는 연이와 함께 뛰며 달려가는 심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 씨가 찍었어.” 그날 밤 그들이 카드놀이를 할 때, 연이는 심이준에게 이것저것 먹고 마시고 싶다고 졸
술자리가 끝나고 윤주원은 파미란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서유와 정가혜도 그와 동행했다. 윤주원은 주서희에게 자신이 의학상을 받았다고 말했고 정가혜는 이연석과 결혼했고 임신까지 했다고 알렸다. 그러나 서유는 주서희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없었다.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해 주서희의 바람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서희의 묘비를 손으로 쓰다듬고 나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석양의 붉은빛을 등지고 조용히 말했다. “서희 씨, 준섭 씨를 빨리 찾길 바랄게요.”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영원히 함께하길. 서유 자신도 주서희의 말을 듣고 아이를 빨리 갖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다시 주서희를 찾아와 알려줄 것이다.그룹의 주식 분배가 끝났고 이연석도 결혼하며 주서희를 만났다.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서유가 상씨 집안에 가는 것. 서유가 김초희를 대신해 맡은 프로젝트들은 밤낮없이 작업을 거쳐 모두 디자인을 완료했으며, 이제 상씨 집안 프로젝트만 남았다. 상씨 집안 프로젝트가 끝나면 서유는 김초희의 모든 유언을 완성하게 되고 그녀의 생전에는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다. 서유는 상씨 집안의 디자인을 끝낸 후, 김초희가 세상을 떠났음을 공식 발표하고 자신의 정체를 다시 밝힐 계획이었다. 이승하가 그룹의 이름으로 서유의 능력을 건축계에 알렸고 그 덕분에 서유의 이름은 건축계에서 인정받았다. 이승하가 그녀에게 마련해준 생존의 길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도 프로젝트를 받을 수 있었다.서유는 펜과 자, 기타 도구들을 상자에 넣고 나서 소파에 앉아 손톱을 다듬고 있는 심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이제 출발합시다.” 심이준은 손톱 끝을 확인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서유를 보며 말했다. “서유 씨도 손톱 좀 정리해요. 상철수는 결벽증이 있거든요.” 서유는 상자를 닫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분의 결벽증이 우리 남편을 능
지난번에 심이준이 상가의 현장을 조사하러 왔을 때도 상연훈이 그를 맞이했기에, 둘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심이준은 자연스럽게 상연훈과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상연훈 씨,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상연훈은 가볍게 대답한 뒤, 심이준 옆에 있는 서유를 바라보았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다우시네요.” 그의 눈에 잠깐 놀라움이 스쳤지만 금세 사라졌다. 서유도 상연훈과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고 처음으로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상연훈은 잘생긴 얼굴에 날렵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고, 하얀 피부가 더해져 마치 옥처럼 빛났다.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쳤다. 과연 좋은 가문에서 자란 인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연훈 씨 역시 TV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기품이 넘치시네요.” 서유의 칭찬에 상연훈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상연훈입니다.” 서유도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김초희입니다.” 상연훈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놓고, 심이준과 서유를 차로 안내했다. 북미의 대가문이라면 운전기사가 따로 있을 법도 했지만 상연훈은 직접 차를 몰며 전혀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릴 때부터 사치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고 엄하게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하도록 배웠습니다.” 상연훈은 운전하면서 설명을 덧붙인 후 서유에게 웃음을 지었다. “운전기사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이 설계비를 못 낼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가벼운 농담에 서유는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며 미소를 지었다. “연훈 씨, 농담이시군요. 상씨 집안의 재력과 지위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연훈은 차선을 바꾸며 서유를 다시 한번 흘깃 바라보았다. “초희 씨도 오기 전에 저희 집에 대해 이미 조사를 하셨겠죠. 그럼 굳이 제가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요.”
이 사실을 깨달은 후, 서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상연훈이 불쾌해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연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저도 어릴 때는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되었죠.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단지 상업적 결혼의 희생양이었을 뿐이에요.” 뒤에서 따라가던 서유는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들 같은 대가문도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의 자유를 희생해야만 한다니 놀랍네요.” 상연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죠.” 서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럼 지금 세대는 그런 걸 겪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상연훈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상씨 집안에 자신 한 명의 희생자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분의 자식들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죠.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요.” 상철수가 집권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이전 세대가 정해둔 낡은 규칙들을 바꾸는 것이었다. 덕분에 현재 상씨 집안은 매우 화목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연훈의 말을 들은 서유는 속으로 궁금증이 생겼다. 상씨 집안은 더 이상 상업적 결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 상연훈은 여전히 결혼 상대를 찾고 있는 것일까? 상연훈은 서유의 생각을 읽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희 씨는 결혼하셨어요?” 서유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저는 상씨 집안에 대해 알아보고 왔는데, 상연훈 씨는 저에 대해 알아보지 않으셨나요?” 김초희가 사망한 소식은 지현우의 손을 거쳤고, 서유가 김초희로 신분을 대신하는 일은 이승하와 지현우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두 자매의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김씨 집안과 육씨 집안의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육성재와 몇몇 동세대 사람들 외에는 김초희의 동생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또한 김영주가 김씨 집안의 혈연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가문
상연훈의 모습이 서재 속으로 사라지자 서유는 재빨리 목소리를 낮추어 심이준에게 말했다. “선생님, 상연훈 씨가 계속해서 우리를 떠보려고 해요. 조심하세요.” 손목을 주무르던 심이준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서유 씨가 더 신중하게 굴면 그들은 더 의심하죠. 좀 편하게 행동해요.” 프로젝트 조사차 많은 가문을 접했던 심이준은 서유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아왔기에 자연스럽게 더 여유로웠다. 서유도 그를 따라 긴장된 마음을 풀며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건물 자체는 간단하고 소박해 보였다. 북미 대기업의 막대한 재력을 보여주는 모습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부유한 가정처럼 보였다. 다만 눈길을 끄는 것은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들이었다. 그 사진들은 상당히 오래된 듯했고 모든 사진이 반쪽만 남아 있었다. 마치 예전에 그녀가 송사월을 오해하고 그의 사진에서 자신의 반을 가위로 잘라내고 오직 그녀와 정가혜의 모습만 남겼던 것처럼 말이다. 사진 속 남자는 상연훈과 약간 닮아 있었고 사진의 오래된 정도로 미루어 보아 그 남자는 상철수일 가능성이 컸다. 이 집의 주인이 상철수의 첫사랑이라면 사진을 자른 사람은 상연훈의 첫사랑일 터였다. 서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집에서 상철수의 사진만 남겨두고 자신은 잘라낸 것일까? 그녀가 의문에 찬 얼굴로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심이준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하나 더 알려줄게요. 상연훈이 아까 서유 씨한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에요.” 서유는 깜짝 놀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심이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할머니는 돌아가셨어요. 다만 상연훈이 말한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가 아니에요. 그 할머니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요.” 서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알려준 것도 아니잖아요.” 심이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
서유는 상연훈이 서재 문을 열어주자 그의 앞에 다가갔다. 상연훈은 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초희 씨, 들어오세요.” 서유는 한 발 내디뎌 방으로 들어섰다. 눈에 들어온 것은 깔끔하고 정돈된 서재였다. 나무 바닥과 가구들이 따뜻한 햇빛을 받아, 방 안은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흰색 정장을 입은 은발의 노인이 창가에 등을 돌린 채 서서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초희 씨가 왔습니다.” 상연훈은 서유를 방 안으로 들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상철수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고 강인한 눈빛이 세월의 무게와 지혜를 담고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서유 또한 상철수를 살폈다.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래층 사진 속처럼 당당하고 웅장한 체구에,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마치 중년의 남성처럼 성숙하고 우아하며 깊은 신뢰감을 주는 인상을 풍겼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서유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상철수는 시선을 상연훈에게 돌렸다. “연훈아, 너는 나가 있어라. 초희 씨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 상연훈은 잠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유를 한번 더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상철수는 다시 탐구하는 눈빛으로 서유를 응시했다. “초희 씨, 어떤 커피를 좋아하나?” 그는 잠시 그녀를 살핀 뒤 커피 머신으로 걸어가 옆에 있던 깨끗한 컵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서유는 그가 먼저 소파에 앉으라는 말을 할 줄 알았으나 예상과 달리 커피 종류부터 묻는 그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모카요.” 컵을 들던 상철수의 손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한동안 응시했다. 은발의 멋진 노인이 다시 한번 자신을 바라보자 서유는 순간 긴장했다.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과 달리 상철수의 굳어있던 표정과 강한 인상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내 오
생각을 마친 서유는 그저 자기 신분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도 솔직히 얘기해 주었으니, 서유도 솔직해질 때였다.“제 어머니는 아이를 한 명 더 낳았었어요.”서유가 본인이 김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을 본 상철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디 있지?”“저도 몰라요. 어릴 때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찾지 못했거든요.”김초희와 그녀의 일은 지현우, 이승하 그리고 김 씨, 육 씨, 심씨 가문, 세 가문이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살아있고 누가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상철수도 그저 김영주가 김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김초희와 김초아를 낳았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상철수 눈앞에 있는 김초희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김영주와 많이 닮은 것도 아니었다.‘김초아라는 아이는 김영주를 닮았을까?’메이크업으로 본인을 감춘 서유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상철수를 훑어보다가 얘기했다.“왜 갑자기 제 동생의 일에 흥미를 갖는 건가요?”커피를 들고 있는 상철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얘기했다.“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이야.”서유는 조심스레 상철수를 보면서 되물었다.“저 아까 아래층에서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봤어요. 다 절반만 있던데, 혹시 누가 잘라버린 건가요?”상철수가 사적인 일을 물어보았으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서유도 사적인 일을 물어보아도 되지 않을까.상철수는 서유의 무례함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젊었을 때 사귀었던 사람이야. 나랑 싸운 후에 본인 사진을 다 도려내고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지.”서유는 약간 놀랐다. 상철수에게 옛 연인이 있었다는 것과, 그 연인과 아이까지 낳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그럼 후에 찾으러 가셨나요?”상철수는 동화책을 읽어주듯 담담하게 말했다.“찾으러 갔는데, 죽었더라고.”서유는 멍해서 바로 사과를 했다.“죄송해요, 몰랐어요...”상철수는 손을 저으면서 얘기했다.“이제는 옛날 일이야.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