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재는 마음속이 이미 복잡해져 여러 상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과연 서유에게 입맞출 수 있을까? 유부녀인 걸 떠나서 육성재는 게임을 빌려 좋아하는 여자를 가볍게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상호 자발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서유를 좋아한 순간부터, ‘상호’라는 단어는 그저 사치에 불과했고 이 생에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었다. 육성재는 가슴 속 깊이 묻어둔 감정을 억누르고 발을 들어 김선우를 힘껏 걷어찼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아무 여자나 키스할 것 같아?” 말을 마친 그는 빠르게 서유를 힐끗 쳐다본 후 감정을 겨우 진정시킨 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 했다. “결혼 축하 선물은 이미 보냈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김선우는 이승하를 제대로 골탕 먹이지 못해 아쉬웠지만 육성재가 무섭게 쏘아보는 눈빛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따라나섰다. “거기 서!” 등 뒤에서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선우는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설마... 이승하가 그를 그냥 보내주지 않을 생각인 걸까? “김 대표, 이리 와.” 김선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살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살벌한 눈빛을 본 김선우는 차마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이 대표님, 저...” “다시 한 판 더 하자. 승부 규칙은 끝나고 알려주지.” 김선우는 그가 당장 자신을 해치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승하가 다시 한 판 더 하자고 제안했다. 이승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김선우는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든 괴롭히려 한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육성재를 바라봤지만 육성재는 아예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배를 나가버렸다. 육성재가 나가고 이승하는 그를 붙잡지도 않았다. 이는 이승하가 겨냥한 사람이 김선우, 오직 그뿐임을 의미했다. 이제 끝났
옆에서 구경하던 이연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가 그쪽 형이에요? 함부로 부르지 마요!”‘진짜 형 맞는데.’ 서유는 속으로 살짝 웃으며 조용히 일어나 김선우 앞에 섰다. “김 대표님, 당신이 게임을 빌미로 이런 짓을 두 번이나 벌였어요. 나를 곤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매우 존중하지 않았어요. 앞으로 나를 누나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이는 남동생이 절대 누나에게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김선우는 전혀 ‘존중’과 ‘불경’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승하를 골탕 먹이려 했을 뿐 이게 서유를 난처하게 만들 줄은 몰랐고,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다만, 이제는 너무 늦은 셈이었다. “누나, 나도 누가 빅 조커와 작은 조커를 뽑을지 몰랐어요. 만약 제가 뽑았다면 저도 역시 이 대표한테 뽀뽀하라고 했을 거예요. 그저 이 대표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서유가 뽑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 순간 그는 게임에 너무 몰입해 지난번 진 내기를 떠올리며 너무 우쭐해졌던 것이다. 결국 그는 남녀 구별이나 결혼 관계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김선우는 약간 못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서유를 존중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 김선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때리세요, 때릴 만큼 때리시고 나면 저 좀 집에 보내줘요...” 이승하는 그의 부은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세게 뺨을 후려친 후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다음번에도 이러면 네 다리를 부러뜨릴 거다.” 김선우는 이미 철저하게 당하고 나서 이승하를 올려다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투가 육성재가 자신을 혼낼 때와 닮아 있었다. 게다가 이승하의 눈이 왠지 작은 고모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기억은 이미 흐릿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눈빛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김선우가 이승하를 유심히
며칠 뒤, 바다 위에서 열린 결혼식이 성황리에 끝났다. 정가혜는 어른들과 또래들을 정중하게 배웅하며 예의와 존경을 다했고 그 결과 이씨 가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했다. 몇몇 형수들이 정가혜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은 유나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배 아래에 서 있는 정가혜를 돌아보았다. 정가혜가 배에서 내리는 이씨 가문의 모든 사람에게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답례품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유나희는 미묘하게 입가를 당겼다. 어찌 된 일인지, 며칠 간의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꽤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을 배웅한 후 정가혜는 그제야 내내 곁에 있던 서유를 마주보았다. “답례품 외에도 하나 더 선물을 준비했어.” 서유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뭔데?” 정가혜는 답례품을 건네며 한 장의 사진을 손에 쥐어주었다. “한번 봐봐, 마음에 들어?” 서유는 사진을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그 사진에는 이씨 집안 형제자매들과 김씨 집안 형제자매들이 모두 옥외 선실에 모여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비록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를 잘 몰랐지만 이승하는 두 가문의 혈연을 연결하는 존재였다. 이 사진은 매우 절묘하게 찍혔다. 이승하가 중심에 앉아 있고, 왼쪽에는 김씨 집안 가족, 오른쪽에는 이씨 집안 가족이 자리했으며 두 가족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승하는 고개를 숙여 서유를 바라보고 있었고 서유 역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사진의 주변에는 깨끗하게 정돈된 소파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배경으로 담겨 있었다. 게다가 구석에 앉아 있는 송사월과 와인잔을 들고 이지민을 바라보는 단이수의 모습도 그날 밤의 장면처럼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서유는 그 사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제 이걸 찍었어?” 정가혜는 연이와 함께 뛰며 달려가는 심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 씨가 찍었어.” 그날 밤 그들이 카드놀이를 할 때, 연이는 심이준에게 이것저것 먹고 마시고 싶다고 졸
술자리가 끝나고 윤주원은 파미란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서유와 정가혜도 그와 동행했다. 윤주원은 주서희에게 자신이 의학상을 받았다고 말했고 정가혜는 이연석과 결혼했고 임신까지 했다고 알렸다. 그러나 서유는 주서희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없었다.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해 주서희의 바람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서희의 묘비를 손으로 쓰다듬고 나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석양의 붉은빛을 등지고 조용히 말했다. “서희 씨, 준섭 씨를 빨리 찾길 바랄게요.”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영원히 함께하길. 서유 자신도 주서희의 말을 듣고 아이를 빨리 갖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다시 주서희를 찾아와 알려줄 것이다.그룹의 주식 분배가 끝났고 이연석도 결혼하며 주서희를 만났다.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서유가 상씨 집안에 가는 것. 서유가 김초희를 대신해 맡은 프로젝트들은 밤낮없이 작업을 거쳐 모두 디자인을 완료했으며, 이제 상씨 집안 프로젝트만 남았다. 상씨 집안 프로젝트가 끝나면 서유는 김초희의 모든 유언을 완성하게 되고 그녀의 생전에는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다. 서유는 상씨 집안의 디자인을 끝낸 후, 김초희가 세상을 떠났음을 공식 발표하고 자신의 정체를 다시 밝힐 계획이었다. 이승하가 그룹의 이름으로 서유의 능력을 건축계에 알렸고 그 덕분에 서유의 이름은 건축계에서 인정받았다. 이승하가 그녀에게 마련해준 생존의 길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도 프로젝트를 받을 수 있었다.서유는 펜과 자, 기타 도구들을 상자에 넣고 나서 소파에 앉아 손톱을 다듬고 있는 심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이제 출발합시다.” 심이준은 손톱 끝을 확인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서유를 보며 말했다. “서유 씨도 손톱 좀 정리해요. 상철수는 결벽증이 있거든요.” 서유는 상자를 닫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분의 결벽증이 우리 남편을 능
지난번에 심이준이 상가의 현장을 조사하러 왔을 때도 상연훈이 그를 맞이했기에, 둘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심이준은 자연스럽게 상연훈과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상연훈 씨,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상연훈은 가볍게 대답한 뒤, 심이준 옆에 있는 서유를 바라보았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다우시네요.” 그의 눈에 잠깐 놀라움이 스쳤지만 금세 사라졌다. 서유도 상연훈과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고 처음으로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상연훈은 잘생긴 얼굴에 날렵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고, 하얀 피부가 더해져 마치 옥처럼 빛났다.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쳤다. 과연 좋은 가문에서 자란 인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연훈 씨 역시 TV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기품이 넘치시네요.” 서유의 칭찬에 상연훈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상연훈입니다.” 서유도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김초희입니다.” 상연훈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놓고, 심이준과 서유를 차로 안내했다. 북미의 대가문이라면 운전기사가 따로 있을 법도 했지만 상연훈은 직접 차를 몰며 전혀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릴 때부터 사치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고 엄하게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하도록 배웠습니다.” 상연훈은 운전하면서 설명을 덧붙인 후 서유에게 웃음을 지었다. “운전기사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이 설계비를 못 낼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가벼운 농담에 서유는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며 미소를 지었다. “연훈 씨, 농담이시군요. 상씨 집안의 재력과 지위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연훈은 차선을 바꾸며 서유를 다시 한번 흘깃 바라보았다. “초희 씨도 오기 전에 저희 집에 대해 이미 조사를 하셨겠죠. 그럼 굳이 제가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요.”
이 사실을 깨달은 후, 서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상연훈이 불쾌해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연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저도 어릴 때는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되었죠.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단지 상업적 결혼의 희생양이었을 뿐이에요.” 뒤에서 따라가던 서유는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들 같은 대가문도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의 자유를 희생해야만 한다니 놀랍네요.” 상연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죠.” 서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럼 지금 세대는 그런 걸 겪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상연훈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상씨 집안에 자신 한 명의 희생자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분의 자식들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죠.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요.” 상철수가 집권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이전 세대가 정해둔 낡은 규칙들을 바꾸는 것이었다. 덕분에 현재 상씨 집안은 매우 화목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연훈의 말을 들은 서유는 속으로 궁금증이 생겼다. 상씨 집안은 더 이상 상업적 결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 상연훈은 여전히 결혼 상대를 찾고 있는 것일까? 상연훈은 서유의 생각을 읽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희 씨는 결혼하셨어요?” 서유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저는 상씨 집안에 대해 알아보고 왔는데, 상연훈 씨는 저에 대해 알아보지 않으셨나요?” 김초희가 사망한 소식은 지현우의 손을 거쳤고, 서유가 김초희로 신분을 대신하는 일은 이승하와 지현우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두 자매의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김씨 집안과 육씨 집안의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육성재와 몇몇 동세대 사람들 외에는 김초희의 동생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또한 김영주가 김씨 집안의 혈연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가문
상연훈의 모습이 서재 속으로 사라지자 서유는 재빨리 목소리를 낮추어 심이준에게 말했다. “선생님, 상연훈 씨가 계속해서 우리를 떠보려고 해요. 조심하세요.” 손목을 주무르던 심이준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서유 씨가 더 신중하게 굴면 그들은 더 의심하죠. 좀 편하게 행동해요.” 프로젝트 조사차 많은 가문을 접했던 심이준은 서유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아왔기에 자연스럽게 더 여유로웠다. 서유도 그를 따라 긴장된 마음을 풀며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건물 자체는 간단하고 소박해 보였다. 북미 대기업의 막대한 재력을 보여주는 모습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부유한 가정처럼 보였다. 다만 눈길을 끄는 것은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들이었다. 그 사진들은 상당히 오래된 듯했고 모든 사진이 반쪽만 남아 있었다. 마치 예전에 그녀가 송사월을 오해하고 그의 사진에서 자신의 반을 가위로 잘라내고 오직 그녀와 정가혜의 모습만 남겼던 것처럼 말이다. 사진 속 남자는 상연훈과 약간 닮아 있었고 사진의 오래된 정도로 미루어 보아 그 남자는 상철수일 가능성이 컸다. 이 집의 주인이 상철수의 첫사랑이라면 사진을 자른 사람은 상연훈의 첫사랑일 터였다. 서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집에서 상철수의 사진만 남겨두고 자신은 잘라낸 것일까? 그녀가 의문에 찬 얼굴로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심이준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하나 더 알려줄게요. 상연훈이 아까 서유 씨한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에요.” 서유는 깜짝 놀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심이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할머니는 돌아가셨어요. 다만 상연훈이 말한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가 아니에요. 그 할머니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요.” 서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알려준 것도 아니잖아요.” 심이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
서유는 상연훈이 서재 문을 열어주자 그의 앞에 다가갔다. 상연훈은 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초희 씨, 들어오세요.” 서유는 한 발 내디뎌 방으로 들어섰다. 눈에 들어온 것은 깔끔하고 정돈된 서재였다. 나무 바닥과 가구들이 따뜻한 햇빛을 받아, 방 안은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흰색 정장을 입은 은발의 노인이 창가에 등을 돌린 채 서서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초희 씨가 왔습니다.” 상연훈은 서유를 방 안으로 들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상철수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고 강인한 눈빛이 세월의 무게와 지혜를 담고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서유 또한 상철수를 살폈다.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래층 사진 속처럼 당당하고 웅장한 체구에,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마치 중년의 남성처럼 성숙하고 우아하며 깊은 신뢰감을 주는 인상을 풍겼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서유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상철수는 시선을 상연훈에게 돌렸다. “연훈아, 너는 나가 있어라. 초희 씨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 상연훈은 잠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유를 한번 더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상철수는 다시 탐구하는 눈빛으로 서유를 응시했다. “초희 씨, 어떤 커피를 좋아하나?” 그는 잠시 그녀를 살핀 뒤 커피 머신으로 걸어가 옆에 있던 깨끗한 컵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서유는 그가 먼저 소파에 앉으라는 말을 할 줄 알았으나 예상과 달리 커피 종류부터 묻는 그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모카요.” 컵을 들던 상철수의 손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한동안 응시했다. 은발의 멋진 노인이 다시 한번 자신을 바라보자 서유는 순간 긴장했다.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과 달리 상철수의 굳어있던 표정과 강한 인상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