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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7화

작가: 알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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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의 일행들은 곧장 파미란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유리창 옆에 앉아 있는 주서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자세와 표정이 소준섭과 똑같았다.

이런 방식으로 속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방식으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자신이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수빈은 죽은 주서희를 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희야, 모두 내 탓이야. 너한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네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오빠로서 널 지켜주지 못한 내 탓이야. 네가 이렇게 된 게 다 나 때문인 것 같구나. 널 방패막이로 만든 내 잘못이다.

죄책감이 몰려온 소수빈은 손을 뻗어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 이때, 옆에 서 있던 허윤서가 그 모습을 보고는 이내 그를 막고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의 팔을 껴안고는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

한편, 서유가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이승하의 손을 떼고 주서희의 앞으로 다가가 한참 동안 피가 마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연이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해맑게 웃던 사람이었는데...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치마,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이리 머릿속에 생생한데 어떻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가 있는 건지...

서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숨이 멎은 지가 오래되어서 더 이상 체온은 없는 것 같았다.

여기로 오는 길에 하도 많이 울어서 눈물이 마른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니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꽉 막고 있어 숨 쉴 수조차 없었다.

옆에 있던 정가혜는 주서희의 손을 잡고 악착같이 비벼댔다. 자신의 체온으로 이 뻣뻣한 몸을 다시 따뜻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아무리 비벼도 소용이 없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영혼이 떠났고 남은 것은 단지 차가운 이 몸뚱이뿐이었다.

“연이랑 약속했잖아요. 곁에서 연이가 커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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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은 주서희가 남긴 유서를 품에 안고 흐느끼며 울었다. 그토록 괴로우면서도 구구절절 친구들을 걱정하는 주서희의 마음에 그녀는 억장이 무너졌다. 주서희에게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영원히 함께하면서 가족처럼 지내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들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주서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기억 속에 주서희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부때부터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녀의 병을 치료해 주었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늘 앞장서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 착한 사람이 왜 이리 허망하게 떠난 것인지...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주서희의 앞으로 다가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주서희를 품에 꼭 안았다. 이렇게 꼭 안으며 주서희가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주서희를 꼭 껴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차가운 주서희의 몸에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주서희는 이미 죽었고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서유가 이러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해 끝까지 그녀를 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정가혜 역시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두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면서 예전에 주서희에게 돈을 돌려주겠다고 은행 카드를 들고 주서희의 뒤를 쫓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 당시 주서희는 정가혜에게 많은 돈을 남겨주겠다고 서유와 약속했었다. 근데 정말로 자신의 모든 걸 남겨줄 줄은 몰랐다. 정말 바보같이 착한 사람이다. 이리 착한 사람이 이렇게 생을 마감할 줄은 몰랐다. 이제 고작 서른밖에 안 된 나이에 한창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미련 없이 떠날 줄은 몰랐다.정가혜는 이런 상황을 두 번째로 겪고 있다. 첫 번째는 서유였고 두 번째가 주서희일 줄은 몰랐다.친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또다시 겪게 하다니. 하느님도 참 무심하시지...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은 결코 서유보다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정가혜는 그저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들을 제외하고 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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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169화

    가냘프고 허약한 몸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떨림을 그치지 못했고 고통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 나와 몸 구석구석이 지끈지끈 쑤시는 듯 아팠다. 힘이 빠진 그는 전혀 걸을 수 없었고 손바닥을 땅에 대고는 그녀를 향해 기어갔다.그녀를 만질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차가운 촉감이 순식간에 전해졌고 의사인 윤주원은 금방 깨달았다. 주서희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가 이젠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는 것을. 안색이 조금씩 창백해지고 눈물이 빗방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자신의 낭패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숙인 채 서유에게 주서희를 건네받아 품에 안았다. 손을 뻗어 보물을 끌어안듯 온 힘을 다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생기가 없는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대고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뗐다. 눈을 내리깔자 눈물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고 수정같이 맑은 눈물방울이 그렇게 그 위에서 굳어져 버려 그녀의 피부와 하나가 되었다.더 이상 울지 말라고 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눈물샘은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주서희의 변호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바로 윤주원임을 확인한 뒤 그에게 다가가 손으로 쓴 유서를 건네주었다.“이건 주서희 씨가 직접 쓴 겁니다. 꼭 윤주원 씨한테 전해달라고 당부했어요.”그가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봉투를 쳐다보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유서가 적힌 종잇장에 손이 닿자 숨이 막혔다. 그는 편지를 바로 열지 않고 그녀와 편지를 품에 꼭 껴안았다. 마지막인 것인 것처럼 손을 쉽게 놓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아쉬워도 시신을 옮겨야 했다. 현지 경찰은 이승하의 체면을 생각해 함부로 시신을 옮기지 않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윤주원은 의사니까 냉정할 줄 알았다. 근데 서유와 정가혜보다 더 미친 듯이 주서희를 안고 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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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170화

    주서희가 소각장으로 들어갈 때, 서유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승하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마치 실이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다.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좋은 사람이었던 주서희는 결국 한 줌의 재가 되어 작은 상자에 담겨졌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다시 자유를 얻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주서희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다른 세상으로 그녀만의 행복을 찾아 나섰다. 사실 이것은 단지 사람들의 아름다운 환상일 뿐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건 사람들의 기대일 뿐이다.소준섭은 죽을 때까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몰랐고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이 그를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쉬울까? 당연히 아쉽겠지. 하지만 이게 끝이었다. 화장을 마친 후, 윤주원은 그녀의 유골을 바다에 직접 뿌렸다. 소준섭의 유골이 뿌려진 바로 그곳이었다. 두 사람의 유골이 바람에 실려 바다로 흘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윤주원은 두 사람을 위해 무덤을 세웠다. 묘비에는 부부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두 사람의 영혼이 만난다면 이곳이 그들의 안식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도 살면서 환상과 기대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지...그들은 밤새도록 묘비 앞에 서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광풍이 불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주서희가 친구들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그들을 쫓아내기라도 하듯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섬을 떠났고 윤주원만 우산을 쓴 채로 묘비 앞에 서 있었다. 빗물이 옷을 다 적셔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하면 마음의 아픔이 조금은 덜한 것 같았다. 결국 몸에 무리가 온 그는 묘비 앞에서 쓰러졌고 이승하가 사람을 보내 그를 다시 배에 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이미 귀국행 전용기 안에 있었다. 그는 무사히 귀국했고 주서희는 영원히 그 나라 그 섬에 남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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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171화

    방금 서재에서 나온 소찬우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어두워졌다.소준섭을 해결하고 나니 소수빈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왜 그의 인생은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을 걸까?소찬우는 차가운 시선으로 소수빈을 쳐다보았다.“네가 서희한테 소준섭의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고 한 거야?”별다른 표정이 없이 소찬우가 입을 열었다.“형, 누나한테 그걸 알려준 건 별다른 뜻 없었어요. 큰형이 있는 곳을 제대로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것도 잘못이에요?”소수빈은 소파에 꽂힌 칼을 뽑아 들고는 칼날을 만졌다.“잘못이 없다? 네가 서희한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서희는 죽지 않았을 거야.”그 말에 소찬우는 눈치껏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더니 천진난만한 얼굴로 소정의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둘째 형이 돌아와서 후계자가 되면 전 이제부터 후계자 수업 안 받아도 되는 거죠?”급한 마음에 소정의는 소찬우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을 불러 7살짜리 소찬우에게 경엉 수업을 하게 하였다.“저놈이 오고 싶다고 올 수 있을 것 같아?”한마디 내뱉던 소정의가 빚 독촉을 하러 온 소수빈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그 당시 내가 직접 널 데리러 갔을 때도 넌 돌아올 생각이 없었어. 다시는 이 소씨 가문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지.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더니 왜 지금은 돌아오겠다고 하는 거야?”소수빈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소씨 가문으로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후계자 자리만 갖고 싶을 뿐입니다.”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소씨 가문의 주식을 모두 팔아서 사회에 기부할 생각이다. 송문아는 자신의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기를 원하였고 감옥에서 나온 뒤 잘 먹고 잘살 속셈이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감옥에서 나오면 집도 없게 만들어버릴 작정이다. 소정의가 만약 여자에 미치지 않았다면 송문아한테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한 일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통보를 마친 뒤, 소수빈은 사람들을 데리고 소씨 가문의 주식들을 끌어모았다. 어차피 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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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172화

    소수빈이 미친 듯이 복수하는 가운데 서유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 한 달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깊은 밤이면 주서희의 환한 얼굴, 엄숙한 얼굴, 웃는 얼굴, 우는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라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히 새겨질 것 같았다. 사람이 죽어서 그 사람의 흔적과 머릿속에 있는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고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면 잊혀지는 순간이라고 했는데...서유는 주서희를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주서희의 사진을 보며 꿈속에서 그녀를 떠올렸다. 결국은 우울함 때문에 서유는 침대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이승하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곁을 지키며 그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당신 몸이 망가지면 난 어떡하라고?”얼마 후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우러 루드웰로 떠나야 했다. 근데 서유가 이러니 어찌 마음이 놓이겠는가?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말아요.”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어루만졌다.“당신이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서유는 갑자기 주서희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만약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녀도 그를 따라갈 것이다. 죽을 만큼 이 사람을 사랑하니까.그녀는 손을 뻗어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미안해요. 당신 걱정하게 만들어서.”이승하는 고개를 젓고는 죽 그릇을 가져왔다.“주 집사님한테 부탁한 거야. 좀 먹어.”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한입 받아먹었다.“하 박사님이 링거 놔주신다고 했는데. 오후에 잠깐 오시라고 해요.”마침내 그녀가 기운을 차리는 모습을 보고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당신은 푹 쉬어. 이런 일은 나한테 맡기고.”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주서희의 죽음에서 벗어나야만 이승하도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주서희의 죽음은 그들에게 곁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쳐준 것이었다. 슬픔에 빠져 허망하게 살아가라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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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173화

    그녀는 턱을 살짝 쳐들고 가까이 다가갔다.“어떻게요?”그녀의 몸에서 나는 상쾌하고 편안한 바디 향과 은은한 술 냄새가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원래는 꿍꿍이가 있었는데 그녀가 정말 가까이 다가오자 놀라서 약간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얼굴을 피했다. 그의 품에 안긴 정가혜는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왔고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아 그의 팔을 잡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그녀가 가까이 오자 그는 피하지 않고 뻣뻣한 등을 곧게 펴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가슴에 닿자 심장이 철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그의 하얀 셔츠를 잡고 살짝 힘을 주어 눈앞의 사람을 가까이 끌어당겼다.“어떻게요? 뭘 원하는 거예요?”그녀의 붉은 입술은 그의 얇은 입술에 거의 다 닿았고 조금만 더 가까우면 입술이 부딪혔을 것이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빨간 입술을 쳐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말하면 그대로 해줄 거예요?”웬일인지 그녀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술에 취했을 뿐이고 전혀 경계심이 없이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었다. 반쯤 취한 그녀를 쳐다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담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뽀뽀해 줘요.”가까이 다가온 그의 하얀 얼굴을 보고 그녀는 셔츠를 잡았던 손을 떼고는 그의 얼굴을 움켜쥐고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그의 심장에 각인되었고 찌릿찌릿한 느낌이 갑자기 온몸을 엄습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그녀의 허리춤에 감쌌다. 살짝 힘을 주니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겼다. 자세가 불편했는지 그녀는 발버둥을 쳤고 그런 그녀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그가 갑자기 그녀를 덥석 안아 올렸다. 술을 많이 마신 그녀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빙빙 돌았다. 괴로워 죽을 것만 같아서 그의 목에 걸쳤던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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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워서 미친 듯이 토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이를 악물고 온몸의 토사물을 참으며 노현정을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만 나가 봐요.”노현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걱정이 되었지만 눈치껏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힌 후 이연석은 입고 있던 옷과 바지를 벗었다. 샤워를 하려는데 그녀의 머리가 쓰레기통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의 몸을 받쳐주었다.뜨거운 살결이 그녀의 옷에 닿았고 불편함을 느낀 그녀는 발버둥 치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그가 그녀를 덥석 안아 욕조에 넣었다. 따뜻한 물이 사방으로 퍼졌고 편안함을 느낀 그녀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그는 클렌징 용품들을 가져와 그녀의 입술과 얼굴을 깨끗이 씻어준 후, 샤워하러 갈 생각이었다. 근데 그녀가 갑자기 그의 허리를 껴안고는 그의 복근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허리를 반쯤 굽힌 남자는 젖어 있는 여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욕조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를 맡으며 그가 그녀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내가 누군지 알아요?”깨끗하게 토하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고는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희미한 시선 아래 기억 속에 새겨진 그 얼굴이 떠오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연석 씨...”당신이 왜 여기에 있냐고 묻고 싶은 찰나 남자가 그녀의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그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기억해요. 오늘 밤은 당신이 먼저 유혹했다는 걸.”뭐? 의문이 채 풀기도 전에 붉은 입술이 부딪혀왔고 그가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이 피부 위를 스쳐 지나갔고 얇은 옷감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뜨거운 손길이 느껴져 온몸이 활활 타올랐다. 눈앞의 잘생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그녀는 그를 밀쳐내지 않고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정신이 들어 그를 밀어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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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산에서 쓰러진 나무들은 이 세상과 저세상을 가로지른 썩은 나무와 같았다. 넘어가려고 하다가 발길을 멈추고 나무 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뒤따라오던 하준이는 이승하의 모습을 보고 우산을 쓰고 걸음을 옮겼다.우산의 가장자리로 내려앉은 흰 눈, 긴 속눈썹을 살짝 떨던 그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손을 내밀어 옆에 있는 나무를 툭툭 두드렸다.“앉거라.”하준이는 그가 눈 맞을까 봐 우산을 거두지 않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우산을 이승하의 옆으로 기울였다. 오늘의 아버지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검은 코트에 흰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그는 옷차림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지만 애써 가꾼 얼굴에는 어느덧 이별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 “아버지.” 하준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두 부자간에 할 말은 이미 다 한 것 같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얇은 정장 차림의 이하준을 쳐다보았다. 코트를 벗어 자연스럽게 아이의 몸을 감쌌다. 아이가 다시 코트를 벗어 다시 돌려주려 하자 그가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존재. 하준이는 지금의 마음을 무슨 말로 형용할지 몰랐다. 아버지의 여온이 깃든 옷을 꽉 쥔 채 아이처럼 그의 따뜻한 품을 말없이 느꼈다. 우산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얼마 후, 무거운 이하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아버지, 절 위해 할 수 있는 아직 많아요. 그러니까 절 믿으세요. 제가 반드시 그 칩을 꺼낼 겁니다.”검은 정장 차림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그가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는 우산을 따라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3년을 연구했으니... 네가 이 칩을 꺼낼 수 있을 거라고 난 믿는다.”하준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제가 의학 공부를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9화

    이하준의 성인식 당일, 눈이 펑펑 내렸다. 예전에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녀가 깨어나던 날처럼 눈이 펑펑 내렸었다.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깜빡하고 멍하니 창가에 서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룸에서 나온 이승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창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갔다. 뼛속 깊이 새겨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햇살 아래, 아름다운 그녀가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낙인처럼 그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이번 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잊을까 봐 두려운 것이 바로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의 인생은 고작 50년도 채 되지 않았고 하늘은 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자신에게 불공평하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서유를 떠나는 게 가슴이 찢어질 뿐이다. 이 몸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미련은 그가 떠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가 다시 힘겹게 몸을 이끌고 드레스룸으로 향하더니 퍼 코트를 챙겨와 서유의 몸을 감싸주었다. 자신을 감싸안은 손길에 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눈을 내리깔고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그 위에 덮었다. “손이 많이 차가워요.”“날씨가 추워지니까 그런 거야.”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동자 속에 여전히 잘생긴 그의 얼굴이 비춰지자 그녀는 순간 울컥했다.“당신한테 아직 하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늦게 떠나면 안 돼요?”그 말에 흠칫하던 그가 천천히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는 그녀의 콧등을 살짝 어루만졌다. “바보.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당신 옆에 꼭 붙어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의 손을 잡은 채 발끝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승하 씨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8화

    그가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연석도 알고 있었다. 그가 오기 전, 이연석은 로봇 앞에 서서 끊임없이 로봇 기능을 체크하고 있었다. 유리창 안, 이연석이 코드를 빠르게 두드리자 그 옆에 있던 로봇이 실제 사람처럼 말을 하였고 그 모습에 이승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연석아...”그의 목소리에 이연석은 행동을 멈추고 옆으로 몸을 돌려 둘째 형을 쳐다보았다.최근 몇 년 동안, 로봇을 개발하기 위해 이승하는 고통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바삐 돌아쳤다. 둘째 형이 안쓰러웠던 이연석은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 둘째 형보다 능력은 훨씬 떨어지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형, 언제쯤 형수한테 보여줄 거예요?”그가 자신을 부축하려는 이연석의 손을 밀치고는 허리를 곧게 펴고 로봇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손을 뻗어 머리 뒤의 스위치를 누르자 로봇이 그와 똑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고 그 모습에 그가 또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게 있으면 내가 떠난 후에도 서유가 외롭지는 않겠지...”이승하가 연구 개발한 칩은 미리 앞으로의 10년, 20년 동안의 말을 모두 녹음해 둔 칩이었다. 서유가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싶다면 계속 살아가야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 건 바보 같은 여자가 자신을 따라 죽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가 계속 살기를 바랐고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죽기 전에 로봇이 완벽하게 제작된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서유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는 안색이 점차 굳어졌다. “내가 떠나면 그때 이 로봇을 서유한테 보여줘. 그리고 하준이를 도와 회사를 꼭 지키거라.”둘째 형의 마지막 당부에 이연석은 눈시울이 붉어졌다.“형, 정말 방법이 없는 거예요?”그동안 유명한 의사를 수없이 많이 찾아다녔고 머리를 바꾸는 수술까지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7화

    어두컴컴한 방안, 이하준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어떻게 그 엄청난 고통을 무릅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지금껏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철이 없었던 그는 아빠를 무시한 적도 많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한 못된 짓을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던 소년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았고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온몸이 떨릴 정도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예전에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죽음이 닥쳐오니 자신이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밤새 의학 서적을 뒤적거리며 칩을 꺼내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그는 머리 수술에 관한 모든 서책을 다 뒤져보았다. 윤주원과 조지 그리고 알고 있는 유명한 의사들에게 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결론은 모두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칩을 꺼내는 동시에 그 안의 바이러스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에 이하준은 밤새 넋을 잃은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안, 앞길을 밝혀 주는 등불조차 없이 깜깜하기만 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이하준은 다음날 한결같이 다정한 부모님의 모습에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두 분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던 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건가요? 그래서 더 서로를 소중히 여긴 거 아닌가요?”서유도 이하준처럼 마음이 아팠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니 예전보다는 침착할 수 있었다.“시간이 많든 적든 부부는 서로를 아껴야 더 오래갈 수 있는 거야.”식탁에 앉은 이하준은 굳어진 입꼬리를 살짝 올릴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고개를 돌려 겉으로는 죽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맞은편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빠, 저 의학 공부하고 싶습니다.”의학을 배우고 싶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분명 칩을 꺼낼 때 필요한 강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6화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5화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4화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3화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 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   제1532화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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