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의 일행들은 곧장 파미란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유리창 옆에 앉아 있는 주서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자세와 표정이 소준섭과 똑같았다. 이런 방식으로 속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방식으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자신이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소수빈은 죽은 주서희를 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희야, 모두 내 탓이야. 너한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네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오빠로서 널 지켜주지 못한 내 탓이야. 네가 이렇게 된 게 다 나 때문인 것 같구나. 널 방패막이로 만든 내 잘못이다. 죄책감이 몰려온 소수빈은 손을 뻗어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 이때, 옆에 서 있던 허윤서가 그 모습을 보고는 이내 그를 막고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의 팔을 껴안고는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 한편, 서유가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이승하의 손을 떼고 주서희의 앞으로 다가가 한참 동안 피가 마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연이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해맑게 웃던 사람이었는데...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치마,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이리 머릿속에 생생한데 어떻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가 있는 건지...서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숨이 멎은 지가 오래되어서 더 이상 체온은 없는 것 같았다.여기로 오는 길에 하도 많이 울어서 눈물이 마른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니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꽉 막고 있어 숨 쉴 수조차 없었다. 옆에 있던 정가혜는 주서희의 손을 잡고 악착같이 비벼댔다. 자신의 체온으로 이 뻣뻣한 몸을 다시 따뜻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아무리 비벼도 소용이 없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영혼이 떠났고 남은 것은 단지 차가운 이 몸뚱이뿐이었다. “연이랑 약속했잖아요. 곁에서 연이가 커가는
서유은 주서희가 남긴 유서를 품에 안고 흐느끼며 울었다. 그토록 괴로우면서도 구구절절 친구들을 걱정하는 주서희의 마음에 그녀는 억장이 무너졌다. 주서희에게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영원히 함께하면서 가족처럼 지내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들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주서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기억 속에 주서희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부때부터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녀의 병을 치료해 주었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늘 앞장서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 착한 사람이 왜 이리 허망하게 떠난 것인지...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주서희의 앞으로 다가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주서희를 품에 꼭 안았다. 이렇게 꼭 안으며 주서희가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주서희를 꼭 껴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차가운 주서희의 몸에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주서희는 이미 죽었고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서유가 이러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해 끝까지 그녀를 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정가혜 역시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두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면서 예전에 주서희에게 돈을 돌려주겠다고 은행 카드를 들고 주서희의 뒤를 쫓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 당시 주서희는 정가혜에게 많은 돈을 남겨주겠다고 서유와 약속했었다. 근데 정말로 자신의 모든 걸 남겨줄 줄은 몰랐다. 정말 바보같이 착한 사람이다. 이리 착한 사람이 이렇게 생을 마감할 줄은 몰랐다. 이제 고작 서른밖에 안 된 나이에 한창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미련 없이 떠날 줄은 몰랐다.정가혜는 이런 상황을 두 번째로 겪고 있다. 첫 번째는 서유였고 두 번째가 주서희일 줄은 몰랐다.친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또다시 겪게 하다니. 하느님도 참 무심하시지...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은 결코 서유보다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정가혜는 그저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들을 제외하고 소수
가냘프고 허약한 몸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떨림을 그치지 못했고 고통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 나와 몸 구석구석이 지끈지끈 쑤시는 듯 아팠다. 힘이 빠진 그는 전혀 걸을 수 없었고 손바닥을 땅에 대고는 그녀를 향해 기어갔다.그녀를 만질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차가운 촉감이 순식간에 전해졌고 의사인 윤주원은 금방 깨달았다. 주서희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가 이젠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는 것을. 안색이 조금씩 창백해지고 눈물이 빗방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자신의 낭패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숙인 채 서유에게 주서희를 건네받아 품에 안았다. 손을 뻗어 보물을 끌어안듯 온 힘을 다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생기가 없는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대고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뗐다. 눈을 내리깔자 눈물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고 수정같이 맑은 눈물방울이 그렇게 그 위에서 굳어져 버려 그녀의 피부와 하나가 되었다.더 이상 울지 말라고 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눈물샘은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주서희의 변호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바로 윤주원임을 확인한 뒤 그에게 다가가 손으로 쓴 유서를 건네주었다.“이건 주서희 씨가 직접 쓴 겁니다. 꼭 윤주원 씨한테 전해달라고 당부했어요.”그가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봉투를 쳐다보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유서가 적힌 종잇장에 손이 닿자 숨이 막혔다. 그는 편지를 바로 열지 않고 그녀와 편지를 품에 꼭 껴안았다. 마지막인 것인 것처럼 손을 쉽게 놓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아쉬워도 시신을 옮겨야 했다. 현지 경찰은 이승하의 체면을 생각해 함부로 시신을 옮기지 않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윤주원은 의사니까 냉정할 줄 알았다. 근데 서유와 정가혜보다 더 미친 듯이 주서희를 안고 한사
주서희가 소각장으로 들어갈 때, 서유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승하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마치 실이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다.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좋은 사람이었던 주서희는 결국 한 줌의 재가 되어 작은 상자에 담겨졌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다시 자유를 얻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주서희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다른 세상으로 그녀만의 행복을 찾아 나섰다. 사실 이것은 단지 사람들의 아름다운 환상일 뿐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건 사람들의 기대일 뿐이다.소준섭은 죽을 때까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몰랐고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이 그를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쉬울까? 당연히 아쉽겠지. 하지만 이게 끝이었다. 화장을 마친 후, 윤주원은 그녀의 유골을 바다에 직접 뿌렸다. 소준섭의 유골이 뿌려진 바로 그곳이었다. 두 사람의 유골이 바람에 실려 바다로 흘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윤주원은 두 사람을 위해 무덤을 세웠다. 묘비에는 부부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두 사람의 영혼이 만난다면 이곳이 그들의 안식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도 살면서 환상과 기대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지...그들은 밤새도록 묘비 앞에 서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광풍이 불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주서희가 친구들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그들을 쫓아내기라도 하듯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섬을 떠났고 윤주원만 우산을 쓴 채로 묘비 앞에 서 있었다. 빗물이 옷을 다 적셔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하면 마음의 아픔이 조금은 덜한 것 같았다. 결국 몸에 무리가 온 그는 묘비 앞에서 쓰러졌고 이승하가 사람을 보내 그를 다시 배에 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이미 귀국행 전용기 안에 있었다. 그는 무사히 귀국했고 주서희는 영원히 그 나라 그 섬에 남아 있
방금 서재에서 나온 소찬우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어두워졌다.소준섭을 해결하고 나니 소수빈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왜 그의 인생은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을 걸까?소찬우는 차가운 시선으로 소수빈을 쳐다보았다.“네가 서희한테 소준섭의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고 한 거야?”별다른 표정이 없이 소찬우가 입을 열었다.“형, 누나한테 그걸 알려준 건 별다른 뜻 없었어요. 큰형이 있는 곳을 제대로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것도 잘못이에요?”소수빈은 소파에 꽂힌 칼을 뽑아 들고는 칼날을 만졌다.“잘못이 없다? 네가 서희한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서희는 죽지 않았을 거야.”그 말에 소찬우는 눈치껏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더니 천진난만한 얼굴로 소정의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둘째 형이 돌아와서 후계자가 되면 전 이제부터 후계자 수업 안 받아도 되는 거죠?”급한 마음에 소정의는 소찬우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을 불러 7살짜리 소찬우에게 경엉 수업을 하게 하였다.“저놈이 오고 싶다고 올 수 있을 것 같아?”한마디 내뱉던 소정의가 빚 독촉을 하러 온 소수빈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그 당시 내가 직접 널 데리러 갔을 때도 넌 돌아올 생각이 없었어. 다시는 이 소씨 가문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지.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더니 왜 지금은 돌아오겠다고 하는 거야?”소수빈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소씨 가문으로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후계자 자리만 갖고 싶을 뿐입니다.”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소씨 가문의 주식을 모두 팔아서 사회에 기부할 생각이다. 송문아는 자신의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기를 원하였고 감옥에서 나온 뒤 잘 먹고 잘살 속셈이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감옥에서 나오면 집도 없게 만들어버릴 작정이다. 소정의가 만약 여자에 미치지 않았다면 송문아한테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한 일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통보를 마친 뒤, 소수빈은 사람들을 데리고 소씨 가문의 주식들을 끌어모았다. 어차피 소씨
소수빈이 미친 듯이 복수하는 가운데 서유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 한 달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깊은 밤이면 주서희의 환한 얼굴, 엄숙한 얼굴, 웃는 얼굴, 우는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라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히 새겨질 것 같았다. 사람이 죽어서 그 사람의 흔적과 머릿속에 있는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고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면 잊혀지는 순간이라고 했는데...서유는 주서희를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주서희의 사진을 보며 꿈속에서 그녀를 떠올렸다. 결국은 우울함 때문에 서유는 침대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이승하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곁을 지키며 그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당신 몸이 망가지면 난 어떡하라고?”얼마 후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우러 루드웰로 떠나야 했다. 근데 서유가 이러니 어찌 마음이 놓이겠는가?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말아요.”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어루만졌다.“당신이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서유는 갑자기 주서희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만약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녀도 그를 따라갈 것이다. 죽을 만큼 이 사람을 사랑하니까.그녀는 손을 뻗어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미안해요. 당신 걱정하게 만들어서.”이승하는 고개를 젓고는 죽 그릇을 가져왔다.“주 집사님한테 부탁한 거야. 좀 먹어.”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한입 받아먹었다.“하 박사님이 링거 놔주신다고 했는데. 오후에 잠깐 오시라고 해요.”마침내 그녀가 기운을 차리는 모습을 보고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당신은 푹 쉬어. 이런 일은 나한테 맡기고.”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주서희의 죽음에서 벗어나야만 이승하도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주서희의 죽음은 그들에게 곁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쳐준 것이었다. 슬픔에 빠져 허망하게 살아가라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턱을 살짝 쳐들고 가까이 다가갔다.“어떻게요?”그녀의 몸에서 나는 상쾌하고 편안한 바디 향과 은은한 술 냄새가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원래는 꿍꿍이가 있었는데 그녀가 정말 가까이 다가오자 놀라서 약간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얼굴을 피했다. 그의 품에 안긴 정가혜는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왔고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아 그의 팔을 잡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그녀가 가까이 오자 그는 피하지 않고 뻣뻣한 등을 곧게 펴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가슴에 닿자 심장이 철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그의 하얀 셔츠를 잡고 살짝 힘을 주어 눈앞의 사람을 가까이 끌어당겼다.“어떻게요? 뭘 원하는 거예요?”그녀의 붉은 입술은 그의 얇은 입술에 거의 다 닿았고 조금만 더 가까우면 입술이 부딪혔을 것이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빨간 입술을 쳐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말하면 그대로 해줄 거예요?”웬일인지 그녀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술에 취했을 뿐이고 전혀 경계심이 없이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었다. 반쯤 취한 그녀를 쳐다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담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뽀뽀해 줘요.”가까이 다가온 그의 하얀 얼굴을 보고 그녀는 셔츠를 잡았던 손을 떼고는 그의 얼굴을 움켜쥐고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그의 심장에 각인되었고 찌릿찌릿한 느낌이 갑자기 온몸을 엄습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그녀의 허리춤에 감쌌다. 살짝 힘을 주니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겼다. 자세가 불편했는지 그녀는 발버둥을 쳤고 그런 그녀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그가 갑자기 그녀를 덥석 안아 올렸다. 술을 많이 마신 그녀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빙빙 돌았다. 괴로워 죽을 것만 같아서 그의 목에 걸쳤던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잡고
그녀는 얌전해졌지만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손은 끝내 놓지 않았다. 마치 이것이 변태 놈을 방비하는 비밀 무기인 것처럼 말이다.손은 경계하고 있지만 마음은 왠지 모르고 안심이 되었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라도 한 듯 그녀는 순순히 손을 떼고 그의 목을 감싼 채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덩치가 큰 이연석의 품에 안겨 있으니 왜소한 편인 그녀는 마치 매달려 있는 인형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그녀를 조수석에 태운 뒤 안전벨트를 매주었다.운전하면서 가끔 그녀를 쳐다보았고 헝클어진 머리가 얼굴을 덮은 줄도 모르고 달콤하게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그녀 얼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얼굴을 어루만졌다. 가볍게 어루만진 것뿐인데 그녀가 손을 뻗어 마치 쿠션을 잡듯 그의 손을 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닿자 그는 무의식중에 손을 움츠렸다. 간신히 다 잡은 마음이 또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신호등과 그녀를 번갈아 보면서 차라리 그녀가 깨어나서 머리카락이라도 뽑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한 손으로 차를 몰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손을 빼려고 하는데 곤히 잠든 여자는 한사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이거 놔요. 안 놓으면 나 무슨 짓 할지 몰라요.”그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그녀는 힘을 뺐다. 그 틈을 타 손을 뺀 그가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차에서 내린 그가 조수석으로 가서 다시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았다.그녀를 안고 별장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노현정과 마주쳤다.지난 한 달 동안 그는 매일과 같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매번 노현정에게 그녀를 맡기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오늘 밤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럴 줄 알았다. 황급히 앞으로 다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