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막 내려온 구승훈은 건물 입구에 서 있는 노민우를 보았다.그의 이마에는 아직도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구승훈이 차 쪽으로 걸어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노민우가 얼굴을 찡그리며 다가왔다.“손연지가 강하리랑 같이 살아?”구승훈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여자랑 잤는데 얻어맞기까지 해?”노민우는 큼 헛기침을 했다.“실수로 침대에서 떨어진 거야. 손연지는 어때?”구승훈은 말하기 전에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몰라.”“너 방금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어?”구승훈이 그를 흘겨보았다.“난 강 대표님만 보여.”“... 그래.”노민우가 한숨을 내쉬며 옆에서 덩달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강하리가 위층에서 내려오자 두 남자가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구승훈이 그녀를 보고 이쪽으로 걸어왔지만 강하리는 그런 그를 그대로 지나쳐 노민우에게 다가갔다.“노민우 씨, 연지 괴롭히지 않겠다면서요?”노민우는 다소 침울한 기색이 역력했다.“강하리 씨, 그 여자가 먼저 들이댔다면 믿겠어요? 계속 날 안고 자겠다는데 어떤 정상적인 남자가 그런 상황에서 참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노민우를 바라봤다.“왜 못 참아요, 걔가 취했다고 그쪽도 취했어요? 결국 아랫도리 간수 못 한 거잖아요!”노민우는 그녀의 말에 괜히 찔렸다.당시 술을 많이 마셨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손연지를 보니 다소 견딜 수가 없었고 그녀가 입 맞췄을 때 온몸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그럼 내가 뭘 어떡해요, 저 여자랑 결혼이라도 해요? 한 번 잔 걸로 그러지는 말죠?”손연지도 노민우와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었기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단지 조금 화가 났을 뿐이었다.못 참았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설명이 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손연지는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계속 말했지만 누구도 이런 일을 쉽게 넘길 수는 없었다.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노민우를 바라보았다.“그쪽 몸에 무슨 병 같은 거 없죠?”노민우는 당황했다.“강하리 씨, 날 어떤 사람으로
“지금 자고 있으니까 네가 올라가도 소용없잖아. 나랑 같이 출근하러 갈래?”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뇨, 올라가서 자료 준비해야죠. 며칠 뒤면 B시에 가야 해요.”“또 가?”강하리는 피식 웃으며 다가가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얌전히 있어요, 내가 돈 벌어서 당신 먹여 살릴 테니까.”구승훈의 목울대가 움찔하더니 강하리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키스했다.“먹여 살릴 필요 없어. 그냥 나 만족만 시켜줘.”강하리는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남자를 밀어냈다.“얼른 가요, 난 연지 보러 올라가야 해요.”구승훈은 마지못해 그녀를 보내주었다.손연지는 하루 동안 집에서 자고 다음 날 바로 출근했다.강하리는 그녀와 다시 얘기하고 싶었지만 손연지가 노민우를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입가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강하리가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구승훈이 기다리고 있었다.거즈와 약을 손에 들고 있던 남자는 강하리가 내려오자 인츰 건네주었다.“강 대표님이 수고 좀 해줘.”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물건을 건네받고 감긴 거즈를 조심스럽게 풀었다.손에 난 흉측한 상처 때문에 그녀의 손도 흠칫 떨렸다.구승훈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그러쥐며 말했다.“오늘 밤에 올 거야? 네가 없으니까 씻는 게 너무 불편해. 어제 손에 물 닿았는데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어.”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나 오늘 밤 야근해야 할지도 몰라요.”구승훈이 바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야근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올게.”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에게 약을 발라준 뒤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구 대표.”구승훈이 돌아보니 밖에 서 있는 장진영이 보였고 순간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내가 했던 말은 깨끗이 잊어버렸네.”장진영은 얼굴에 멍까지 들어 있었다.“구 대표, 제발 우리 송씨 가문 좀 봐줘. 그 사람이 잠깐 어떻게 됐나 봐, 그 사람도 속은 거야!”구승훈
장진영은 밖에서 차창을 두드리며 여전히 울부짖었고 구승훈은 시동을 걸고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차 안에서 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하리야, 송유라는...”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설명 안 해도 돼요, 방금 들었으니까.”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자신의 다친 손을 그녀의 손에 밀어 넣었다.“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않게 잘 지켜보라고 했어.”강하리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손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대로 잡았다.가는 내내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오늘 밤에 데리러 올게.”차에서 내리기 전 구승훈은 그녀를 달래는 어투로 낮게 말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차에서 내렸다.강하리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송유라 쪽은 어떻게 됐어?”구승재는 한숨을 쉬었다.“여전히 똑같아. 하루 종일 울고, 다리 부상도 의사 말로는 수술하면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고의 전문가가 아니면 안 된대. 우리가 찾아줘?”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일단 며칠 누워있으라고 해.”구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는 게 낫지 않아? 이제 강하리랑 화해했는데 그 여자를 데리고 있는 건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언젠가 강하리가 송유라 때문에 또 형을 떠날지도 몰라.”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잘 지켜봐, 문제 일으키지 않게, 송동혁 일은 알리지 말고.”구승재는 대답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강하리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바삐 돌았다.북교 프로젝트가 요 며칠 공개될 예정이고 그녀는 정주현에게 업무를 넘기기 시작했다.정주현은 인수인계 과정에서 내내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일을 하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강하리를 보내는 건 아쉬웠다.“정말 가야 해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아니면요?”정주현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회사에 오래 있을 줄 알았는데 6개월 만에 떠날 줄은 몰랐네요.”
“괜한 생각이야. 나랑 그 댁 어르신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고 구 대표와는 부딪힐 일이 없는데 내가 왜 구 대표를 노리겠나?”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양철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외교부에 가고 싶나?”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양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좋아, 그 선택 존중하지.”강하리는 정양철의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정양철의 말한 것 중에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일까?’오후 내내 인수인계를 마치고 강하리가 회사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구승훈의 차가 갓길에 세워져 있었고 강하리가 그쪽으로 가려는데 안예서가 그녀를 불렀다.“부장님.”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췄고 저쪽에는 이미 구승훈이 차에서 내린 뒤였다.안예서도 깜짝 놀랐다. “구 대표님 또 오셨어요?”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이번에는 무슨 일로?”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여자 친구 데리러요.”안예서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하리의 팔을 꽉 잡았다.“부장님, 방금 들었어요? 구 대표님께서 여자 친구 데리러 왔다고 하셨어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응, 들었어.”안예서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부장님, 놀랍지도 않아요? 구 대표님께서 여자 친구가 있대요, 그것도 우리 회사에!”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가 놀라워, 구 대표님 나이도 있는데 연애할 때도 됐지.”안예서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구 대표님, 여자 친구가 누구예요?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았고 강하리의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예서야, 네 차 왔어.” 안예서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안예서의 차가 멀어지고 강하리가 뒤를 돌아보자 어두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구승훈을 발견했다.그가 다가와 강하리를 차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하리를 거칠게 품에 가두었다.“강 대표님께선
강하리는 그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깜짝 놀랐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를 밀어냈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거칠게 깊숙이 파고들었다.“하리야, 내 말 듣고 있어?”주해찬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구승훈은 전화기를 들고 곧바로 상대에게 쏘아붙였다.“주해찬 씨, 남 일 방해하지 마시죠?”말을 마친 그가 곧바로 전화를 끊었고 강하리가 서둘러 말했다.“구승훈 씨, 뭐 해요?”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꼬집으며 안아 들었다.“주해찬 멀리 해, 하리야.”강하리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업무적인 얘기 말고 연락 안 해요.”구승훈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다른 사람하고도 업무상 연락할 수 있는데 왜 매번 주해찬이 연락하는 거야? 외교부에 다른 사람은 없어?”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구승훈 씨, 업무적인 건 나도 그 사람도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일 말고 다른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할 테니까 그만 좀 해요, 네?”구승훈은 피식 웃기만 했다.“넌 아무 일 없을지 몰라도 그 자식은 모르지.”“그렇게 선 넘는 사람 아니에요.”“선 넘는지 아닌지는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잘 알지.”그녀가 뭐라 말하려는데 구승훈이 이미 그녀의 입술을 막고 있었다.강하리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구승훈은 어디선가 넥타이를 꺼내 그녀의 손목을 묶었다.“하리야, 지금은 딴생각하지 말고 나만 봐.”구승훈은 말하며 큰손으로 그녀의 치마 밑을 들추었다.그와 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녀도 화가 난 상황이라 하면서도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하고 나니 손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구승훈은 묶었던 넥타이를 풀고 뻔뻔하게 손목에 입을 맞췄다.“아파?”강하리가 그를 발로 찼다.“구승훈, 이 개자식!”구승훈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하리야, 전에 할 때 임정원 전화는 잘 받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신경 써?”강하리는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화를 냈다.“구승훈 씨, 주해찬 씨랑은 일 때문에 연락하는 거라고 여러 번 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이제부터 콘돔 끼면 안 돼요? 나 지금 되게 괴로워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흘러내려? 어디 봐.”그렇게 말하며 그가 강하리의 치마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강하리가 발로 세게 걷어찼다.“비켜요.”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내가 씻겨줄게.”“아뇨, 내가 알아서 할게요!”“얌전히 있어, 내가 씻겨 줄게.”...한편, 손연지가 병원에 막 도착해 차를 주차하고 있을 때 노민우가 옆에서 걸어왔다.그의 이마에는 여전히 멍이 들어 있었다.손연지는 그를 힐끗 보고는 차 문을 쾅 닫고 입원 병동으로 걸어갔다.그 눈빛에 담긴 경멸과 혐오가 너무 짙어서 노민우는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그는 다소 격앙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손연지, 이건 무슨 뜻이야?”손연지의 발걸음이 멈추며 그녀가 노민우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노민우 씨, 난 의사니까 내 앞에서 못 한다고 인정하는 게 부끄러운 일 아니야.”당황한 노민우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발끈했다.“손연지, 누가 못한다는 거야!”“여기 당신 말고 다른 사람 있어?”노민우는 순식간에 분노했다.“못 해? 밤새 좋다고 소리 지른 게 누군데? 그날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 자기가 술에 취해서 필름 끊겨놓고 나보고 못 한다고?”손연지는 비웃으며 돌아섰다.“노민우 씨, 헛소리하지 마. 내가 필름이 끊겨도 그런 일은 절대 안 잊어!”노민우는 너무 화가 나서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 “안 돼, 이 일 제대로 얘기해.”다른 건 몰라도 남자로서 자존심이 걸려 있었기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손연지가 피식 웃었다.“무슨 얘기를 해, 선배한테 증명해 달라고 할까?”노민우가 씩씩거렸다.“한 번 더 자, 너 정신 멀쩡할 때!”손연지는 발을 들어 그를 홱 걷어찼다.“꿈 깨, 너 때문에 첫 경험도 버렸는데 두 번째도 버리라고?”노민우는 이를 악물고 화를 꾹 참았다.“버리다니?”“당신이랑 하는 건 그냥 버리는
강하리는 그 후 이틀 동안 정주현에게 업무를 넘기면서 외교부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했다.그녀는 지금까지의 추측대로라면 정양철이 그렇게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인수인계 마지막 날까지 정양철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강하리는 자신이 정말 괜한 생각을 한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업무 인계가 끝났으니 구승훈에게 연락한 다음 퇴근하고 곧장 공항으로 가려고 했다.그런데 회사 아래층에 있던 한 남자가 그녀를 막았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앞에 서 있는 예쁘고 상냥한 여자를 바라보았다.“누구세요?”“저 승훈이 엄마예요.”강하리는 잠시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옆에 있는 카페로 가요.”여초연은 강하리를 본 순간부터 강하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강하리 씨 정말 예쁘네요. 이러니까 승훈이가 그렇게 좋아하죠.”강하리는 여초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칭찬 감사합니다.”여초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바라보았다.“걱정하지 마요, 긴장도 하지 말고. 귀찮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승훈이 떠나라는 말도 안 해요. 그냥 그 자식 정신 차리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요.”강하리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구승훈의 엄마도 그의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여초연은 커피를 강하리 쪽으로 밀었다.“승훈이 성격이 워낙 유별나서 평소에 힘든 부분이 많죠?”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래도 절 잘 챙겨줘요.”여초연은 커피를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하리 씨, 승훈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인 나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어요. 아마 하리 씨가 처음일 거예요. 그래서 부탁 좀 할게요. 인내심 갖고 지켜봐 줘요. 사랑을 몰라도 내가 보기엔 하리 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으니까.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영감탱이가 문씨 가문이랑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강하리도 알아들었다.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약속할게, 파티에서 문연진이랑 절대 가까이 있지 않을게, 알았지?”강하리는 왠지 씁쓸함이 밀려왔다.그에게 안 가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가까이하든 말든 구동근은 분명 문연진을 구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로 소개할 것이다.하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구승훈은 어쨌든 구씨 가문 사람인데 본인 할아버지 생신에 무슨 이유로 가지 말라고 하겠나.구승훈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나랑 같이 갈래?”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싫어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괜히 찾아가서 욕만 먹을 텐데요.”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강하리의 손을 붙잡고 낮게 속삭였다.“하리야, 조금만 더 시간을 줘.”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저녁 비행기로 B시에 가야 했고 구승훈은 공항에 그녀를 내려주면서도 보내주기 싫은 표정으로 껴안고 입 맞추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이틀 동안 겨우 즐겁게 지내나 싶었는데 다시 혼자 있으라고?”강하리가 웃었다.“나랑 같이 갈래요?”구승훈은 홧김에 그녀의 목을 힘껏 빨아당겼다.“못 간다는 거 잘 알잖아.”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흔적 남기지 마요, 일하다가 보이면 어쩌려고.”그 말에 구승훈은 그녀의 옷깃을 열고 가슴에 자국 몇 개를 남겼다.“거기 가면 주해찬이랑은 떨어져 있어, 알았지?”강하리가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알았어요.”구승훈은 이를 갈았다.“오면 나랑 밤새 같이 있어, 피곤하단 말 하지 마.”할 말을 잃은 강하리는 그를 밀어내고 곧장 차 밖으로 나갔다.강하리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초연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도 놀라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녁 언제 먹으러 올 거야? 네가 좋아하는 거 만
거칠게 원하던 구승훈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강하리는 비틀거렸고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품에 낚아챘다.“너무 좋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좋기는 개뿔!”구승훈은 웃으며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응, 나도 좋았어.”“...”개자식과 더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뻔뻔한 걸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씻겨주고 그녀를 안아 침대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손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어디 가?”“연지 보러 갈 거야. 오늘 밤엔 연지랑 잘 거야.”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 넌 내 아내야.”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구승훈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러면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갈래?”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며 문득 지난번에 구승훈이 혼인신고 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그러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심미현의 죽음과 오지 않는 구승훈이었다.강하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구승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지난번 같은 일은 없어.”강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구승훈의 짙고 검은 눈동자에 밝은 빛이 비쳤다.“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고자가 될 테지만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 내가 손으로도 잘 모실 수 있으니까.”“... 닥쳐!”말을 마친 그녀가 잠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두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또 콘돔 안 썼어?”강하리는 말하며 지난번에도 구승훈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구승훈, 미쳤어? 난 지금...”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걱정하지 마, 임신 안 해.”강하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손으로 강하리의 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나 묶었어.”
손연지는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그녀는 도저히 찾아갈 데가 없어 결국 강하리를 찾으러 B시까지 왔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몇 마디로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구승재도 별말 없이 바로 손연지에 대해 알아본 사실을 강하리에게 전했고 대충 손연지가 말한 내용과 거의 같았지만 몇 가지 세부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손연지가 병원에서 손가락질받고 있었다는 것, 노민우의 약혼녀라는 사람이 손연지를 머물 곳도 없게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 등등...손연지는 노민우를 그냥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노민우의 어머니가 노민우 몰래 손연지를 노씨 가문으로 데려와 심한 모욕을 준 것뿐이었다.그래도 손연지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니라 노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상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연지에게 수표를 던지며 연성을 떠나라고 했다.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고 노민우의 결혼을 파탄 낼 생각도 없었기에 처음엔 연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노민우의 어머니가 그녀의 부모님까지 찾아갔다.강하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손연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뒤에서 껴안았다.“나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어떻게 같아?”구승훈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뭐가 다른데?”강하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녀를 정말로 기쁘게 만드는 건 별로 없었다.어릴 적 강찬수의 가정 폭력부터 나중에 구승훈에게 받은 상처까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손연지가 곁에 있었고 그녀에게 손연지는 가족이었다.강하리는 대답이 없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아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하지만 조용한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고 구승훈이 귓불을 깨물며 그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금 긴장한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