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번쩍였다.강하리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온 순간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두 사람이 헤어진 후부터 지금까지 그가 따라다니며 잡지 않았다면 강하리는 아마 절대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강하리가 기꺼이 그의 접근을 받아주고 있긴 하지만 그게 자신이 따라다녀서 얻은 결과라는 걸 구승훈은 잘 알았다.그녀의 마음속에 아직 자신이 있는지 구승훈은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가 달려와 그의 앞을 가로막는 순간까지 말이다.구승훈은 정말 화가 나고 두려웠지만 그런 대답을 해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아무 말도 없었지만 백 마디 말보다 더 가슴에 와닿았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거즈로 감싼 그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부정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런 상황에서 단숨에 칼을 손으로 움켜쥐다니.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나서서 칼을 막아주려 한 건 그녀였지만 사실은 구승훈이 자신을 지켜주었다.시간이 흐른 뒤 강하리는 마침내 시선을 들어 남자의 뜨겁고 무거운 눈빛을 마주했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씨, 계속 확고하게 날 선택할 거예요? 송유라나 구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도요.”구승훈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어?”강하리는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구승훈 씨, 그 남자가 칼을 들고 당신에게 달려드는 걸 본 순간 정말 무서웠어요. 이대로 당신을 잃을까 봐, 아직 제대로 사랑도 해보지 못한 우리가 이렇게 영원히 헤어질까 봐.”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당신 앞에 다가가서 막았어요.”구승훈은 숨이 턱 막히며 그녀를 곧장 품으로 끌어당겼다.강하리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었다.코끝이 시큰 해났다.그녀의 마음에는 여전히 갈피를 잡
그 말에 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사라졌다.“그놈 구승현 오른팔이야. 우리 집 영감탱이가 지난번에 구승현을 이용해서 날 몰아붙이려고 할 때 그놈을 내보냈어.”강하리는 가슴이 철렁했다.“이번엔 구승현이 짓이에요? 난 송동혁인 줄 알았는데.”구승현의 눈가에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구승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아직 침대에 누워있고 그동안 계속 구승훈 측 사람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이번엔 누군가 구승현의 손을 빌린 걸 수도 있다.다만 상대가 감히 자신에게 덤벼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아직 확실하지 않아. 이미 경찰서로 보냈으니까 조사하면 나오겠지.”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다시 입을 맞췄다.얼마 후 불순한 그의 손이 마구 헤집기 시작했고 그의 의도를 감지한 강하리는 곧바로 그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여긴 병원이에요!”구승훈은 웃으며 따라나섰다.“그럼 오늘 밤 나랑 같이 집에 갈래?”“아니요.” 돌아간다면 또다시 힘든 밤이 될 게 분명했고 말 그대로 침대에서 힘들어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순간 불만이 차올랐다.“하리야, 이제 막 연애하기로 했는데 달콤한 것 좀 해봐야 하지 않아?”강하리가 답했다.“그래서요?”“난 아직 배고픈데?”강하리는 걸음을 멈추었다.“관계 정의하기 전에는 뭐 안 했어요?”구승훈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그럼 오늘 밤에 짐 싸서 내일 이사해, 응?”강하리가 그를 바라봤다. “구승훈 씨, 누가 보면 당신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는 줄 알겠어요!” 구승훈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지분거리며 말했다.“그러게 누가 날 이렇게 오랫동안 굶기게 놔두래?”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밖으로 나갔다. “공사장에서 다친 노동자 두 명도 이 병원에 있는데 가서 봐야겠어요.”구승훈은 굳어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같이 가.”강하리는 그에게 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가만히 쉬지도 않을
강하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구승재 씨한테 와서 당신 돌봐주라고 연락할게요.”구승훈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걔가 왜 날 돌봐?”강하리가 그를 흘겨보았다.“구승훈 씨, 내가 올라가면 나한테 손 안 대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구승훈이 그녀를 안았다.“약속할게.”강하리는 웃으며 그를 차 밖으로 밀어냈다.“당신 약속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어요!”그러고는 곧장 차를 몰고 떠났다.그녀도 며칠은 쉬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이 개자식 때문에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구승훈은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피식 올리다가 얼마 후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사실 강하리가 오지 않는 것도 다행이었다. 마침 오늘 밤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그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데리러 와.”구승재가 구승훈을 데리러 왔고 두 사람은 구씨 가문 저택으로 갔다.가는 동안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그 두 사람 추궁했더니 송동혁이 보냈다고 하더라. 송동혁 측에도 사람 보냈는데 송씨 가문에 갔을 때 마침 짐 싸서 도망갈 준비 하고 있었대. 그러면서 말로는 진용철이 거짓말을 했다고, 형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말을 꺼냈다.“송유라 쪽에는 송동혁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비밀로 해. 안 그러면 또 성가신 문제가 생겨.”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참고 이렇게 물었다.“정말 송동혁 짓이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송동혁이 미치지 않고서야 나한테 달려들지 않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송동혁이 아니라면 둘째 형이야?”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맞는지 아닌지 때려보면 알겠지.어쨌든 그들은 구승현의 측근들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구승현과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구씨 가문의 옛 저택에 도착한 구승훈은 곧장 구승현의 방으로 향했다.구승현은 흔들의자에 누워 예쁜 가정부가 먹여주는 포도를 입에 넣고 있었는데 누군가 방문을
손연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하체를 흘깃 쳐다보았다.“선배 말로는 당신이 정말 아무 반응도 없었다던데.”“내가 남자한테 반응하는 게 이상하지!”손연지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노민우 씨, 병이 있으면 치료하면 되죠. 필요하면 언제든 전문의 예약 잡아줄게요.”“난 아무 문제 없어!”“문제가 없으면 꺼져! 또 내 앞을 어슬렁거리면 문제가 없는데도 문제가 생기게 할 거야!”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이면서 걷다가 응급실 문을 나서는 순간 소영준을 만났다.두 사람을 본 소영준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노민우 씨, 또 무슨 일이죠?”노민우가 웃었다.“여기 병원 의사 선생님 좀 데려가려고요.”소영준은 손연지를 흘깃 쳐다보았다.“명인병원 산부인과에 의사가 부족한가요?”노민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죠. 거기로 가면 월급은 여기 세배로 드려요.”손연지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이는데 소영준은 큰 소리로 웃었다.“그렇다면 저도 산부인과로 옮기고 싶네요.” 노민우가 웃었다.“안타깝게도 일반 외과는 의사가 부족하지 않아요.”소영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노민우와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은 뒤 자리를 떠났다.소영준의 모습이 거의 사라질 때까지 손연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노민우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한심하긴!”손연지가 그를 무시하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노민우가 서둘러 따라와 물었다.“소영준 씨랑 약속 잡아줄까?”손연지가 걸음을 멈추며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노민우, 정확히 원하는 게 뭐야?”노민우가 웃으며 말했다.“없어, 아무것도.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여기 돌아다니는 건데.”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할 일 찾아줄까?”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다시 한번 메스를 꺼냈다.노민우는 서둘러 자기 하반신을 가렸다.“손연지, 좀 여자답게 행동할 수는 없어?”“당신처럼?”노민우의 입꼬리가 일그러지며 그녀를 끌어당겼다.“어떻게 해야 나한테 살갑
강하리가 다소 어색하게 옷을 정리했고 손연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둘이...”강하리는 목을 가다듬었다.“만나보기로 했어. 어떻게 되든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손연지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정말 결심했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연지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강하리에게 다가와 안아주었다.“하리야, 행복해야 해.”강하리는 웃으며 손연지를 껴안았다.“응.”그녀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것이다.손연지는 집에서 나와 노민우가 알려준 장소로 곧장 향했지만 룸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룸에는 소영준 말고도 정신병자 노민우도 있었다!노민우는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거렸다.그는 손연지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어때, 내가 진짜로 불렀어.’손연지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소영준도 손연지를 보고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손 선생님도 오셨어요?”손연지는 다시 노민우를 노려보았다.이게 불러낸 거야?그녀는 당황한 듯 소영준을 향해 웃었다.“소 교수님...”“제가 불렀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민우가 옆에서 대답했다.“두 사람 같이 식사하자고요.”노민우가 웃자 손연지는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노민우 저 미친놈이 약속을 잡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테이블 아래에서 노민우의 다리를 세게 발로 찼고 노민우는 그녀의 발길질에 얼굴이 굳어지며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소영준이 그를 돌아보았다.“왜요, 어디 불편하세요?”노민우는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아니요, 아주 편합니다!”그의 말이 끝나자 손연지가 다시 발로 찼다.“편하면 실컷 당해봐 어디.”노민우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너무 화가 나서 손연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손연지, 때리지 말고 말로 해!”손연지는 차갑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바로 깨물었다.노민우는 고통에 이가 갈렸고 손연지가 손을 놓자 손등에는 선명한 이빨 자국 두 줄이 남아있었다.
술에 많이 취해서 그런지 노민우는 이 미친 여자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노민우는 정신없이 일어나 손연지를 힘겹게 일으켜 세우고 어디 사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가 갑자기 구토를 했다.노민우의 관자놀이가 불끈거리며 화를 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결국 그는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았고 손연지를 침대에 눕힌 후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샤워가 반쯤 끝났을 때 욕실 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렸다.원피스를 입고 있던 손연지는 불편해서인지 벗어버린 상태였고 몸에는 간단히 속옷만 걸친 채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노민우 앞에서 옷을 벗었다.노민우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손연지는 옷을 다 벗고 샤워기 아래로 곧장 걸어 들어와 씻기 시작했다.노민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옆으로 나가려는데 손연지의 발이 미끄러지자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손이 닿는 순간 몸속의 취기가 순식간에 올라오며 노민우는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손연지의 몸매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손연지는 흐릿한 표정으로 노민우를 바라보았다.“오빠, 진짜 잘생겼다. 누나랑 잘 생각 없어?”노민우가 그녀를 끌어올렸다.“손연지,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손연지가 그의 얼굴을 만졌다.“미친 노민우랑 좀 닮긴 했는데 소 교수님만큼 잘생기진 않았지만 나쁘진 않네, 잘 거야?”노민우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손연지를 번쩍 들어 침대에 던져버렸다.“술에 취해서 나한테 달려들지 마. 그렇게 남자가 고파?”그러자 손연지는 그를 잡아당기며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소 교수님, 나 교수님 좋아해요.”노민우의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는데 손연지가 별안간 그의 목을 붙잡고 입 맞추기 시작했다.다음 날 이른 아침.손연지는 눈을 뜨기도 전에 끔찍한 두통을 느꼈다.무의식적으로 옆을 더듬어 휴대폰을 가져오려는데 손끝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깜짝 놀라 눈을 떴더니 옆에 노민우가 있었다.머릿속이 윙 울리던 그녀는 곧장 발을 들어 노민우를 침대에서 걷어찼다....하룻
구승훈은 적극적인 그녀의 행동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이내 그녀를 껴안고 반격에 나섰다.한바탕 키스가 끝나고 그는 곧바로 한 팔로 그녀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구승훈 씨! 나 오늘 출근해야 해요!”강하리가 발버둥 쳤지만 벗어나지 못했고 구승훈은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문에 밀착시켰다.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아래쪽으로 가져갔다.“강 대표님이 지른 불이니까 본인이 직접 끄셔야지.”강하리는 손을 빼고 그를 노려보았다.“곧 북교 프로젝트가 시작될 거고 업무 인수인계도 해야 하니까 그만둬요.”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고개를 숙여 귀 끝을 깨물었다.“빨리할게, 손연지 씨 집에 없지?”강하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잠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는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는 대신 문에 단단히 밀어붙였다.“강 대표님, 제 허리 잡으세요.”“침대로 가요.”“여기서 먼저 하고. 하리야, 나 꽉 잡아.”문에서 침대까지 이어진 정사가 끝나고 구승훈은 침대에 기대어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다시 돌아와, 응?”강하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어젯밤에 저택으로 갔어요?”구승훈의 행동이 잠깐 멈추고 2초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일이 좀 있어서.”“민연진이 또 왔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강 대표님 사람 보내서 날 감시하시나?”강하리는 그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구승훈은 그녀를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어젯밤에 민씨 가문 사람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만났어.”강하리는 대답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옆에서 그녀의 옷을 집어 들어 입는 걸 도와주었다.“강 대표님 걱정하지 마, 당신 남자 아직 깨끗하니까. 내가 방금 증명하지 않았어? 다른 여자들한테는 전혀 힘 안 쓰고 다 너를 위해 남겨둔다고.”그의 말에 강하리의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입 다물어요.”그렇게
그녀는 이 시간쯤이면 강하리가 출근했을 거라고 예상했다.심지어 밖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돌아오기까지 했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강하리도 손연지를 보고 살짝 놀랐다.“왜 이 시간에 돌아왔어? 몸이 안 좋아? 감기 걸렸어? 아까 목소리 들었는데...”강하리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멈칫했고 시선이 손연지의 목에 새겨진 키스 마크로 향한 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 이게 무슨 일이야? 손연지, 너...”손연지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강하리의 가슴이 철렁하며 서둘러 다가가 구승훈을 끌어당겼다.“당신은 일단 가요.”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그대로 쫓겨나게 되었다.닫힌 문을 바라보며 그의 관자놀이가 펄떡거렸다.‘이렇게 내쫓는다고?’강하리는 구승훈을 내보낸 뒤 손연지의 방으로 향했고 그녀가 들어갔을 때 손연지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였다.“무슨 일이야? 당직이라고 하지 않았어?” 강하리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고 손연지의 얼굴엔 어색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내 주량 알잖아, 와인 한 잔만 마셔도 의식을 잃을 지경인데.”“그리고?”“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그게 다야.”강하리는 그녀를 끌어당겨 몸을 확인했다. “소 교수님이야?”손연지는 그 말만 들어도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소 교수님 아니야, 소 교수님이었다면 꿈에서도 웃었겠지!”강하리는 몸을 움찔했다. “그럼 누구야?” 노민우의 이름이 입술에 맴돌았지만 손연지는 굳어버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저런 미친놈과 잤다는 게 그녀에겐 너무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할 거야!”강하리는 그녀의 표정을 빤히 보았다.“노민우는 아니지?”“...”“소 교수님이랑 밥 먹는데 굳이 끼어들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그, 그 자식이...”손연지는 처음으로 너무 화가 나서 할 말을 잃었다.강하리는 그녀를 욕실로 끌고 들어가 물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