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옆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강하리가 급히 전화기를 낚아챘다.“무슨 일이야?”손연지의 목소리엔 온통 초조함뿐이었다.“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간병인 말로는 아주머니를 재활실에 모시고 가서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다른 사람들 다 나와도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에 들어가 살펴봤더니 재활실 어디에도 아주머니는 없었대. 의사 선생님들한테도 다 물어봤는데 다들 보지 못했대.”강하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전화를 끊고 곧장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구승훈은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었고 그도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그녀를 쫓아 나갔다.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강하리는 이미 차에 타고 있었고 구승훈은 달려가서 그녀를 끌어내렸다.하얗게 질린 강하리의 얼굴을 보고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자신의 차에 태운 뒤 조심스럽게 안전벨트까지 매주었다.“지금 상태로 운전하면 위험해. 내가 데려다줄게.”강하리는 이미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구승훈의 차는 빠르게 달려갔고 가는 길에 노민준에게도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는 가슴 아픈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는 새하얀 얼굴로 좌석에 기대어 유난히 초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이미 사람 보내 알아보고 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지금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구승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순간 지난번에 그녀 혼자 정서원의 생사를 마주하게 했던 기억이 떠올라 죄책감이 밀려왔다.“미안해, 하리야.”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손연지는 막 차를 주차한 상태였다.세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고 병동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정양철도 그곳에 있었다.강하리는 순간 당황했다.“정 회장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
강하리가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내자 구승훈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독였다.“이미 사람 보내서 그 재활사 찾고 있어.”강하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의사한테 가 봐요, 난 괜찮으니까.”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아까의 당황한 기색은 사라진 듯했다.대체 이 여자는 언제부터 그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버티는 게 습관이 된 걸까, 이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다 자기 때문인 것 같아 구승훈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난 괜찮아. 아주머니 일은 내 쪽에서 알아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철저하게 알아보면서 재활사뿐만 아니라 병원 내 청소부들까지 모조리 훑었다.심지어 사람을 보내 지역 전체의 카메라를 돌려보도록 했다.“돌아갈 거야,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 거야?”강하리는 여기서 기다리려다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돌아가서 기다려요.”결국 구승훈은 강하리를 데리고 다시 아파트로 돌아갔다.손연지는 강하리와 함께 돌아가려고 했지만 강하리의 안색을 보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자신과 돌아가면 그저 불안하게 기다리겠지만, 구승훈과 함께 있으면 좀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어느새 달려온 노민우는 함께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 씨는 대체 누구에게 밉보여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야.”이틀 전 안현우의 일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젠 어머니에게도 사고가 생겼다.손연지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알겠어요, 우리 하리가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싫은 사람이겠죠.”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역겨운 표정을 지었고 노민우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쪽은 왜 그렇게 나한테 불만이 많아요?”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당신이 아니라 비열한 사람들한테는 다 그래요.”노민우는 순간 욱해서 맞받아쳤다.“내가 왜 비열하죠? 말 가려서 해요. 내가
“네 조상님이다 이 자식아!”말을 마친 손연지는 옆에서 호신용 스프레이를 집어 들어 노민우에게 뿌렸다.그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던 노민우는 스프레이를 정면으로 맞자 눈이 너무 매워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이윽고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반신에 무언가 닿았다.“꺼져! 안 그러면 당장 여기서 꿰매줄 테니까!”노민우가 힘겹게 눈을 뜨자 번뜩이는 날카로운 메스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그는 손연지를 노려보았다.“당신 의사야?”손연지는 웃었다.“당연하지, 그것도 정관 수술 전문으로 하는 남성 전문의야.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 바꾸지 말고 바로 이 조상님께 와 알았지?”그렇게 말한 뒤 손연지는 곧바로 차 문을 열고 노민우를 밀쳤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기가 막혀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천하의 노민우가 생애 처음 여자에게 호신용 스프레이를 맞고 아랫도리가 메스로 위협을 당했다!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결국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운전을 하던 구승훈은 휴대폰을 힐끗 보고 스피커로 돌렸다.“무슨 일이야?”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훈아, 그 여자 변태 이름이 뭐야?” 구승훈은 순간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강하리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은 노민우가 손연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목을 가다듬었다.“어느 여자 변태를 얘기하는 거야?”“강하리 씨 친구 있잖아.”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노민우 씨? 손연지 말하는 거예요?”노민우는 강하리의 목소리에 순간 당황했다.“이름이 손연지예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강하리 씨.”노민우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강하리가 다급하게 불렀다.“노민우 씨, 연지는 왜요? 연지 괴롭히지 마세요!”“괴롭히는 게 아니라 우리 병원에 스카우트하려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었고 강하리가 다소 걱정스러운
강하리는 즉시 그를 밀어냈다.“나가요!”하지만 구승훈은 다시 그녀를 껴안았다.“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남자는 그녀의 귀에 속삭이고는 그냥 돌아섰다.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닫힌 욕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일부러 놀리는 건가.문득 강하리는 마음이 시큰해지더니 한참 후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그래, 괜찮을 거야. 엄마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믿어야지.’샤워를 하고 나오니 구승훈은 옆에서 낮은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고,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본 그가 황급히 둘러대며 전화를 끊었다.“왜 젖은 머리로 나왔어?”말을 마친 그가 침실로 들어가 드라이기를 꺼내더니 소파에 앉았다.“이리 와.”그의 옆으로 다가간 강하리가 소파에 앉으려는데 구승훈이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강하리 몸이 순간 경직되자 구승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 아무것도 안 해. 아주머니도 계시잖아.”강하리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저쪽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고 있던 아주머니는 그 말에 몰래 웃으며 뒤돌아 부엌으로 들어갔고 강하리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드라이기를 집어 들었다. “내가 직접 할게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도 더 강요하지 않았다.휴대폰이 계속 울리자 강하리를 보낸 뒤 결국 집어 들었고 발신자를 확인한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무슨 일이세요?”저쪽에서 들려오는 구동근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너, 오늘 내가 주선한 맞선 자리 왜 안 갔어! 이놈이 점점 기어오르려고!”구승훈은 강하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갑게 웃었다.“날 위한 맞선 자리에요 아님 할아버지가 원하는 여자예요? 마음에 드시면 본인이 결혼하시지 왜 저한테 강요하세요.”“개자식, 무슨 헛소리야! 또 그 망할 것이랑 같이 있는 게지! 구승훈, 내가 직접 그 물건 처리하게 하지 말아.”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잘생긴 눈가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다.“그 여자
강하리가 다시 깨어났을 땐 병원이었고 깨어난 그녀를 본 손연지는 황급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의사 선생님이 가벼운 뇌진탕이래, 어지럽고 메스껍지 않아?”강하리는 살짝 멈칫하다 말했다.“아니, 난 괜찮아. 구승훈은 어딨어?”손연지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야 말을 꺼냈다.“아주머니는 중환자실에 입원하셨고 구승훈도 다쳤어. 출혈이 심해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강하리의 심장이 철렁했다.“어디 다쳤는데? 지금 어디 있어?”다그쳐 묻던 그녀가 이불을 뒤척이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손연지가 서둘러 말렸다.“아직 움직이지 마, 아직 안 깨어났어. 네가 가도 소용없어, 일단 의사 선생님 먼저 부를게.”손연지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의사가 간단한 검사를 통해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손연지는 그녀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했다.“구승훈 씨한테 먼저 가 봐. 아주머니 쪽은 아직 면회 시간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교대 중이라 당직 선생님 오면 가서 상황 물어보면 되잖아.”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의사 선생님이 엄마에 대해선 말씀하신 거 없어?”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난 가족이 아니라 당장은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만 했고 자세한 건 네가 깨어나면 설명해 줄 거래.”강하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일단 구승훈 씨부터 보러 가야겠어.”구승훈의 병실은 건물 가장 안쪽 끝에 있었다.강하리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자 가슴이 먹먹해지며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조여졌다.구승재는 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일어났다.“강하리 씨, 괜찮아요?”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쪽 형 상태는 어때요?”“비장이 파열돼서 피를 좀 많이 흘렸는데 큰 문제는 없고 아직 안 깨어났을 뿐이니 걱정하지 마요. 가서 말동무나 좀 해줘요. 난 나가서 통화 좀 하고 올게요.”구승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고 강하리는 침대 가장자리
강하리는 심장이 철렁해서 서둘러 다가왔다.“왜 그래요, 상처가 아파요?”하지만 구승훈은 갑자기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하리야,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내 상처 건드릴 수 있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강하리의 몸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구승훈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고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일렁거렸다.그의 의도를 감지한 강하리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구승훈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녀의 뒤통수를 꽉 잡았다.“하리야.”남자는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무 데도 가지 말고 잠시만 이렇게 나와 함께 있어 줘.”두 눈이 마주치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튕기는 듯했다.메말라가는 주변 공기에 강하리는 당황한 기색으로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이윽고 구승훈은 그녀를 꽉 붙들고 바로 입을 맞추었다.두 입술이 맞닿자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갈증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괴롭게 했다.구승훈의 다른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붙들어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혀가 잇새를 가르며 들어오자 방안에는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그러다가 불순한 그의 손이 그녀의 옷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고 강하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화를 냈다.“구승훈 씨, 여긴 병실이에요.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곳이라고요.”“그럼 나중에는 돼?”강하리가 곧바로 그의 손을 쳐내자 구승훈이 웃음을 터뜨렸다.“하리야, 너한테 빚진 목숨 오늘로 갚았는데,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강하리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그동안 줄곧 갈피를 잡지 못하고 구승훈에게 흔들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웠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구승훈 씨, 그동안 당신이 해준 것들은 정말 감동이지만... 또다시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당신 곁에 있을 수는 없어요.”구승훈이 멈칫했다.“누가 그래, 명분이 없다고?”그의 말을 들은 강하리는 덜컥 심장이 뛰며 입술을 다물고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일 있으면 연락해.”강하리는 대답을 하고 병동을 나섰다.그녀가 막 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안에서 가 나온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몇 명과 근엄한 노인이었다.생활한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바로 구씨 가문 어르신, 구동근이었다.그 옆에는 젊은 여자도 있었는데 스물다섯, 여섯 살로 보이는 그녀는 예쁜 외모에 우월한 분위기를 자랑했다.여인은 강하리를 살며시 훑어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 승훈 오빠가 저를 반기지 않으면 어떡해요?”구동근의 눈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러기만 해봐, 내가 그 자식 혼내야지!”여자의 입가에 번진 달콤한 미소가 유난히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안 돼요, 때리게 둘 수는 없죠.”강하리는 그 순간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아챘다. 구씨 가문에서 구승훈에게 찾아준 맞선 상대겠지.입술을 달싹이며 옆에 서 있던 그녀의 마음이 저릿했다.진작 생각했어야 하는데, 구씨 가문에서 구승훈의 결혼을 재촉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지난해 그의 생일부터 구동근은 한차례 주선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구승훈에 의해 무산되었다.이번에도 같은 수법인 것 같은데 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내색은 안 해도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구승훈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그들 사이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언제 귀국할지 모르는 송유라와 이젠 집안에서 주선한 맞선 상대에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구씨 가문 사람들까지.강하리는 가슴 속 답답함을 숨기며 한숨을 내쉬고 병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구동근의 매서운 눈빛이 문득 그녀의 뒷모습에 향했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는 혐오감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없었다.…손연지가 아침 식사 2인분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어때, 구승훈은 일어났어? 심각하게 다친 거야? 팥죽 주문했는데 네가 갖다줄래?”강하리는 음식을 건네받으며 애써 웃었다.“고마워.”그녀의 안색이 어두워 보이자 손연지가
이어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저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구승훈, 네가 재주 좀 부린다고 내가 널 못 건드릴 줄 알아?”바로 이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승훈 오빠도 말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오빠, 할아버지 화나게 하지 마요. 어제도 오빠 때문에 고혈압 오셨어요.”듣다 못 한 강하리는 문 앞 창턱에 죽을 놓고 곧장 뒤돌아 떠났다.병실로 돌아왔을 때는 의사 선생님도 교대를 마친 뒤였다.중환자실 밖에서 강하리는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내부에서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고 의사는 강하리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강하리 씨, 진료실 가서 얘기하시죠.”강하리의 심장이 철렁하며 양옆으로 드리운 손에 힘이 들어갔다.의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가자 상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어갔다.“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요.”강하리의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을 치는 것 같았다.“어떻게, 어떻게 안 좋으신데요?”의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막 깨어나셨을 때 이미 몸의 여러 장기가 각기 서로 다른 정도로 망가졌으니 평소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전에 재활 기계에서 넘어진 후에 대량의 안정제를 투여받았어요. 그 정도 양이면 어머니 같은 분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인도 견디지 못하죠. 이미 투석을 하고 있지만 장기부전이 계속 악화되고 있어요. 강하리 씨,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고 기적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멍하니 듣고 있던 강하리는 얼핏 보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엄청난 고통 뒤엔 무뎌지기 마련이다.이제 곧 밝은 나날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충분히 노력했는데 무심한 하늘은 그녀가 잘 살길 바라지 않는 듯싶다.그녀의 손에 모든 걸 다 쥐여주고서 또다시 잔인하고 매정하게 다시 빼앗아 간다.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진료실에서 나왔는지, 어떻
문을 잠그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 울려 퍼지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임명우를 바라보고는 잠겨진 문손잡이에 시선을 고정했다.“임 대표님, 무슨 뜻이세요?”임명우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오늘 회의 내용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요.”“그렇다고 문을 잠글 필요까지 있나요?”강하리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문을 잠그는 행동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그녀는 임명우와의 협력을 계속 거부해 왔는데 임명우의 의도적인 접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런 의도적인 접근은 마치 예전의 정양철처럼 대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임명우에게 항상 거부감을 느껴왔다.하지만 지금까지 임명우는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처럼 문을 잠근 것은 처음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임명우는 웃으며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나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임명우를 바라보았다.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임 대표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우리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그렇죠?”임명우는 또 한 번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강하리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을 보며 그는 어색한 미소를 거두었다.“제가 꼼수를 써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강 대표님, 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어요. 임 대표님, 본론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강하리는 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녀가 문에 도착하기 전에, 임명우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임명우 씨!”강하리는 임명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대체 무슨 짓이에요?”“강하리 씨, 저와 거래를 하죠. 강하리 씨가 저를 다정하게 대해주면 제가 그 심리 상담사를 구승훈 옆에서 떼어내
강하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노민우 씨는 해야 할 일 해요. 손연지와 얘기 좀 할게요.”노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연지를 돌아보았다.“어제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손연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내 몸에 있는 이 흔적들은 내가 스스로 만든 거야?”“그냥 키스만 했어.”“아까는 아무것도 안 했다더니, 이제는 키스만 했다고?”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강하리는 재빨리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병원 정원에서.강하리는 손연지의 화난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아직도 웃겨? 너 누구 편이야?”강하리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화내지 마. 노민우는 사실 괜찮은 사람이야.”손연지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말 좀 들어봐.”강하리는 어제 노민우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손연지에게 대략적으로 전했다.손연지는 강하리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강하리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번졌다.“미쳤는지는 그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미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지?”강하리는 손연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지만 노민우 씨가 여씨 가문과 완전히 관계를 끊기 전까지는 더 깊은 관계는 맺지 마.”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 그녀가 강하리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병원에 왔어? 혹시 아픈 거야?”“일이 좀 있어서.”손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은 정원에 앉아 있다가 각자의 일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하리는 약병을 약리 연구소에 가져다주고 인성 테크로 향했다.안예서는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강하리를 보자마자 달려왔다.“대표님, 방금 회의 일정이 추가되었어요. 오후에 출장을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강하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안예서를 돌아보았다.“언제 통보받았어?”“방금이요.”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안예서는 불안해졌다.안예서는 강하리가 원래 임명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이렇게 온 것도 계약 때
구승훈은 자연스럽게 강하리 앞으로 다가갔다.그녀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빼앗아 들고 우유 컵을 그녀에게 건넸다.“노민준이 준 약이야. 손 찔리겠다.”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구승훈의 얼굴에 고정한 채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이 너무 잘 감추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의 얼굴에서 어떠한 이상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괜찮다고 하지 않았어?”“응, 괜찮아.”구승훈은 대답하며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노민준이 신경 써서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고 했어. 걱정하지 마, 괜찮아. 나중에 연성시에 돌아가서 심리 치료도 함께 받으면 금방 나을 거야.”강하리는 구승훈이 다시 쓰레기통에 버린 앰플 병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같이 야근할까?”“괜찮아. 가서 쉬어.”그러고는 일어나서 프린터 옆에 있는 자료를 가져왔다.구승훈은 떠날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이메일을 확인했고 강하리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일을 계속했다.구승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임희주의 계획을 노민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서재의 고요함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고 강하리가 일을 계속하고 있자 구승훈은 그녀의 손에서 자료를 빼앗았다.“자.”그러고는 강제로 강하리를 끌어안고 침실로 향했다.두 사람은 밤새도록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앰플 병에 대한 일은 잊힌 듯했다.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바빴다.구승재는 미국에서 돌아왔고 구승훈은 오늘 회사에 가서 그를 만나야 했다.“회사에 데려다줄까?”구승훈은 강하리의 허리를 잡으며 물었고 강하리는 생각할 틈도 없이 거절했다.“직접 거래처에 갈 거야.”“그럼 내가 거래처까지 데려다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거절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집을 나섰다.강하리는 연정이와 조용히 아침 식사를 했다.연정이
강하리는 침실 문을 흘끗 보고는 구승훈을 무시했다.하지만 곧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강하리가 ‘꺼져!’라고 말하려던 순간,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술 드셨으니, 숙취 해소에 좋은 차를 끓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구승훈은 지금 옆에 있어요?”가정부는 옆에 서 있는 구승훈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아니요, 대표님은 방금 준봉 씨와 함께 서재로 가셨습니다.”가정부가 말을 마치자 강하리는 바로 문을 열었다.그러자 문 앞에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있는 구승훈과 그의 뒤에 서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정부가 있었다.“이제 가서 쉬세요.”구승훈은 가정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러고는 숙취 해소차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강하리가 말할 틈도 없이 그는 숙취 해소차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강하리에게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숙취 해소차를 넘겨받았지만 삼키기도 전에 구승훈은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가 숨이 가쁠 때까지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숙취 해소차는 누가 더 많이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맛있어?”구승훈은 강하리의 입술을 핥으며 아쉬운 듯 물었다.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며 침실 안쪽으로 걸어갔다.“나가서 자.”구승훈은 숙취 해소차를 옆에 내려놓고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직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임희주 씨 문제는 내가 잘 처리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무시하고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무릎에 앉히고 따뜻한 숨결을 그녀의 목덜미에 뿌리며 부드럽게 입술을 핥았다.“그럼 내가 잘못을 만회할게.”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오늘 밤, 강 대표님을 편안하게 모실게. 어때?”강하리는 임희주의 끈질긴 집착 때문에 짜증이 났을 뿐이지 진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남자의 뻔뻔한 모습을 보니 화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좀 염치가 있어야지.”“염치가 중요한 게 아니야.”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강하리의 잠옷
구승훈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준봉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재로 와.”준봉은 곧 자료를 들고 서재로 왔다.“말해 봐.”준봉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보고했다.“임희주 씨의 과거는 조작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조사했던 정보에 따르면 임희주 씨는 남쪽 작은 도시의 보육원 출신이고 여 사모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로 보입니다. 며칠 전에 대표님께서 여 사모님 쪽을 조사해 보라고 하셔서 관련된 사람들을 추적해 봤는데 여씨 가문의 오래된 집사가 몇 년 동안 연성시 외곽의 보육원을 후원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보육원을 조사해 보니 실제로 임희주 씨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었는데 입양한 사람이 그 집사의 고향 친구였답니다.”준봉은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표정을 살폈다.임희주의 출신을 보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사람을 키워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준봉은 구승훈의 표정을 긴장하며 지켜보았지만 구승훈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다만, 그 깊고 짙은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준봉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사모님과 아가씨가 계시잖아요. 두 분 다 잘 지내고 계시니까요.”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 다시 물었다.“아내가 화난 데다가 꼬맹이까지 울려버렸어. 어떻게 달래야 할까?”“네?”준봉은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아직 솔로예요.”구승훈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나가 봐.”“그럼 임 선생은 어떻게 할까요?”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계속 감시해. 조만간 여씨 가문 사모님과 연락할 거야.”준봉은
노민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얼굴에 가득했던 득의만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강하리의 화난 모습을 보니 솔직히 겁이 났다.“저기, 승훈이랑 싸웠어요?”“민우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손연지는 어디 있어요?”“손연지는 호텔에 있어요.”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하리는 서두르지 않고 노민우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노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회사, 강하리 씨가 인수해 줬으면 좋겠어요.”강하리는 놀라서 노민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노씨 가문은 의학계의 명문가였고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이번 세대에는 병원을 노민준에게 물려주었지만 노민우 또한 의료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그는 명인병원 지분 외에도 의약품과 의료기기 사업을 하는 회사를 직접 설립했고 꾸준히 잘 운영해 왔다.그런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뭘까?“무슨 뜻이에요?”노민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전 어릴 때부터 엄마를 무서워했어요. 엄마는 항상 강압적이었고 제 결혼을 강요하면서 제가 거부하면 손연지에게 달려갈 거라고 협박했어요.”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말에 따라 결혼했는데도 엄마는 손연지를 찾아가는 바람에 손연지가 많이 억울하게 됐어요. 다 제가 잘못한 탓이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노민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손연지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노력해서 손연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사실 전 승훈이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연지에게 달려갈 수 없어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손연지에게 가면, 오히려 우리 둘 다 더 힘들어질 거예요. 그래서 우리 회사를 먼저 정리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이제야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하지만 굳이 저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요? 노민우 씨도 회사를 독립시킬 수 있잖아요. 아니면, 구승훈이 도와줄 수도 있고요.”노민우는 웃으며 말
강하리는 스스로 최근 구승훈에게 꽤 너그러웠다고 생각했다.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답답함이 끓어올랐다.강하리의 마음속에서 구승훈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구승훈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의 끊임없는 도발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구승훈의 입가가 씰룩였다. 아마도 오랜만에 강하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는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그는 강하리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내가 처리할게. 네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됐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닥쳐.”구승훈은 강하리를 달래려고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강하리의 냉정한 말에 곧 입꼬리가 떨어지며 입을 다물었다.차가 저택 앞에 멈출 때까지 강하리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차가 멈추자, 강하리는 화가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민우를 보았다.“담배 꺼요.”노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담배를 껐다.그는 일어서서 강하리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다가갔지만 강하리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노민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왜 이래?”구승훈은 노민우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너는 손연지랑 있지 않고 우리 집엔 왜 왔어?”노민우는 코를 긁적이며 답했다.“강하리 씨 만나러 왔어.”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누구 만나려고?”“노민우 씨, 들어오세요.”그때, 강하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오자 구승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들어갈게.”노민우는 웃음을 머금고 구승훈에게 손을 흔들었고 구승훈의 어이없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서재로 와요.”그는 강하리가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따라 올라갔다.구승훈은 한숨을 쉬며 가정부에게 연정이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다.“쉬세요.
방에서 나온 강하리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 그녀는 멀리서 구승훈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복도에 서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임희주라는 것은 분명했다.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때, 그녀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강 대표님, 안 가보세요?”강하리가 고개를 돌리자 미소 띤 얼굴의 임명우가 보였다.“임 대표와 무슨 상관이죠?”임명우는 손에 술잔을 든 채,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강 대표님은 눈에 든 모래 한 톨도 못 참는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그러운 것 같네요.”강하리는 비웃으며 말했다.“임 대표님, 협상하려면 협상만 하세요. 이러시면 제가 방법을 써서 계약을 강제로 해지하는 수가 있어요.”임명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너무 섣불렀네요. 하지만 강 대표님에게 남자를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었어요.”그러고는 잠시 멈추다가 말을 이어갔다.“아, 내일 사업 협상이 있는데, 제가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강 대표님, 내일 뵙겠습니다.”임명우는 그녀에게 술잔을 들어 보이며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임명우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상한 짜증이 솟아올랐다.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구승훈 쪽으로 걸어갔다.클럽은 그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지만 하이힐이 바닥을 찍는 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고 구승훈과 임희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를 보는 순간, 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임희주는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그녀는 구승훈 옆에 서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명에 비친 그녀의 눈은 유난히 빛났다.구승훈은 손을 들어 그녀를 끌어안으며
“좋아해, 됐지?”손연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곧 잠들 준비를 했다.노민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비록 손연지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말 한마디 속에 어쩌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그럼 소영준은 아직도 좋아해?”노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귀찮게 굴지 마.”손연지는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했고 노민우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물었다.“그럼 누가 제일 좋아?”“하리.”손연지는 눈을 흐리게 뜬 채로 답했다.더 물어보려 했지만 그 순간 노민우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여사님’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자 노민우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화면을 보기만 할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되자 노민우는 곧바로 노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엄마 좀 말려줘. 그리고 나 결혼 취소한 거, 형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너 확실한 거야?”노민준은 대답 대신 노민우의 마음을 물었다.노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기 전에 노민준이 덧붙였다.“결혼 취소한 건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있어. 할아버지께서도 여씨 가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를 꿋꿋이 이겨내고 손 선생이랑 잘 지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동생아, 이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결심이 확실하지 않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마. 너도 승훈이처럼 가족을 등 돌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겠어?”그럴 수 있다고 답하려던 찰나, 노민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노민준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삼촌 쪽은 내가 막아볼게.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정말 결혼을 취소할 거라면 여씨 가문에 직접 가서 이유를 설명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모든 일을 손 선생이 떠안게 될 거야. 알았지? 난 삼촌 보러 가야겠다.”전화를 끊은 후, 노민우는 한숨과 함께 손연지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