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던 강하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정주현 씨, 그날 밤 구승훈 씨는 내가 어떤 약을 먹었는지 알아요?”정주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속으로는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사실대로 실토했다.“알아요, 하지만 기회를 틈타 몹쓸 짓을 한 건 사실이잖아요 하리 씨.”강하리는 순간 침묵했고 정주현이 뭐라고 말을 덧붙였지만 들리지 않았다.정주현이 다시 그녀를 불러서야 문득 정신을 차렸다.“하리 씨, 내 말 듣고 있어요?”“네?”정주현은 혀를 찼다.“우리 영감탱이가 하리 씨 몸 어떠냐고 물어요. 또 어디서 들었는지 하리 씨 어머님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 한번 뵈러 간대요.”강하리는 웃음을 터뜨렸다.“정 회장님께 전 괜찮으니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엄마는 굳이 보러 오실 필요 없어요.”정주현이 다시 혀를 찼다.“알아서 하라고 해요. 이런 식으로 직원들 챙겨준다고 생각하나 보죠, 내버려둬요.”강하리는 짧게 대답을 한 뒤 전화를 끊었고 이윽고 손연지가 다가와 물었다.“구승훈이 안대?”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손연지는 강하리의 눈치를 살폈다.“그럼 우리가 괜한 사람 탓한 거야?”강하리는 한참을 제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벨이 몇 번 울리더니 구승훈이 전화를 받았다.“하리야.”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고 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구승훈 씨, 그 약 해독제가 없는 거 알고 있었죠?”구승훈 쪽에서 갑자기 조용해지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답했다.“그래, 알아.”이미 알고 있었지만 구승훈 본인이 인정하는 말을 들으니 강하리는 가슴이 저릿했다.“그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구승훈이 웃었다.“하리야, 솔직하게 말해도 네가 믿었겠어?”강하리는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만약 구승훈이 그 자리에서 바로 말했다면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이 개 같은 남자가 선을 넘은 게 이번만이 아니었고 그는
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쥐었고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렸다.“우리 형 상처가 심각해요. 안현우 때문에 며칠째 할아버지와 맞서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가볍게 때리는 것도 아니고, 예전 상처가 낫지도 않는데 새 상처가 생기니까 어젯밤부터 열도 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본인은 괜찮다고 우기면서 약도 안 먹고 그냥 이렇게 버티고 있어요.”그 말에 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구승훈의 동정심 유발 작전은 아닌지 의심했다.하지만 그녀를 돕느라 다친 건 사실이었기에 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물었다.“그 사람 아파트에 있어요?”“네, 아파트에 있어요. 며칠 전 할아버지 집에 갇혀 있다가 어제 막 나왔어요.”강하리가 답했다.“제가 이따가 갈게요.”“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겨 곧장 아파트로 갔다.아파트 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먼저 문을 두드렸지만 문을 열어줄 사람은커녕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결국 그녀는 지문을 이용해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현관 신발장 위에는 지난번에 신었던 새 슬리퍼가 놓여 있었고 강하리는 안을 흘끗 들여다보고는 슬리퍼를 신었다.집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불렀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그녀는 닫혀 있는 침실 문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문에 짓눌렸다.곧바로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구승훈은 그녀를 품에 안고 고개를 숙여 쳐다보고 있었는데 짙은 눈동자에 온통 그녀의 모습뿐이었다.당황한 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려다가 문득 그의 얼굴이 너무 창백하고 이마가 거즈로 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순간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더니 한참 후에야 물었다.“할아버지가 때렸어요?”라고 물었다.구승훈이 짧게 대답하자 강하리는 마음속으로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이런 일에 엮이게 해서 미안해요.”구승훈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다.“엮인
구승훈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옆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강하리가 급히 전화기를 낚아챘다.“무슨 일이야?”손연지의 목소리엔 온통 초조함뿐이었다.“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간병인 말로는 아주머니를 재활실에 모시고 가서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다른 사람들 다 나와도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에 들어가 살펴봤더니 재활실 어디에도 아주머니는 없었대. 의사 선생님들한테도 다 물어봤는데 다들 보지 못했대.”강하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전화를 끊고 곧장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구승훈은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었고 그도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그녀를 쫓아 나갔다.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강하리는 이미 차에 타고 있었고 구승훈은 달려가서 그녀를 끌어내렸다.하얗게 질린 강하리의 얼굴을 보고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자신의 차에 태운 뒤 조심스럽게 안전벨트까지 매주었다.“지금 상태로 운전하면 위험해. 내가 데려다줄게.”강하리는 이미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구승훈의 차는 빠르게 달려갔고 가는 길에 노민준에게도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는 가슴 아픈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는 새하얀 얼굴로 좌석에 기대어 유난히 초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이미 사람 보내 알아보고 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지금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구승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순간 지난번에 그녀 혼자 정서원의 생사를 마주하게 했던 기억이 떠올라 죄책감이 밀려왔다.“미안해, 하리야.”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손연지는 막 차를 주차한 상태였다.세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고 병동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정양철도 그곳에 있었다.강하리는 순간 당황했다.“정 회장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
강하리가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내자 구승훈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독였다.“이미 사람 보내서 그 재활사 찾고 있어.”강하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의사한테 가 봐요, 난 괜찮으니까.”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아까의 당황한 기색은 사라진 듯했다.대체 이 여자는 언제부터 그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버티는 게 습관이 된 걸까, 이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다 자기 때문인 것 같아 구승훈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난 괜찮아. 아주머니 일은 내 쪽에서 알아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철저하게 알아보면서 재활사뿐만 아니라 병원 내 청소부들까지 모조리 훑었다.심지어 사람을 보내 지역 전체의 카메라를 돌려보도록 했다.“돌아갈 거야,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 거야?”강하리는 여기서 기다리려다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돌아가서 기다려요.”결국 구승훈은 강하리를 데리고 다시 아파트로 돌아갔다.손연지는 강하리와 함께 돌아가려고 했지만 강하리의 안색을 보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자신과 돌아가면 그저 불안하게 기다리겠지만, 구승훈과 함께 있으면 좀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어느새 달려온 노민우는 함께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 씨는 대체 누구에게 밉보여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야.”이틀 전 안현우의 일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젠 어머니에게도 사고가 생겼다.손연지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알겠어요, 우리 하리가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싫은 사람이겠죠.”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역겨운 표정을 지었고 노민우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쪽은 왜 그렇게 나한테 불만이 많아요?”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당신이 아니라 비열한 사람들한테는 다 그래요.”노민우는 순간 욱해서 맞받아쳤다.“내가 왜 비열하죠? 말 가려서 해요. 내가
“네 조상님이다 이 자식아!”말을 마친 손연지는 옆에서 호신용 스프레이를 집어 들어 노민우에게 뿌렸다.그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던 노민우는 스프레이를 정면으로 맞자 눈이 너무 매워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이윽고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반신에 무언가 닿았다.“꺼져! 안 그러면 당장 여기서 꿰매줄 테니까!”노민우가 힘겹게 눈을 뜨자 번뜩이는 날카로운 메스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그는 손연지를 노려보았다.“당신 의사야?”손연지는 웃었다.“당연하지, 그것도 정관 수술 전문으로 하는 남성 전문의야.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 바꾸지 말고 바로 이 조상님께 와 알았지?”그렇게 말한 뒤 손연지는 곧바로 차 문을 열고 노민우를 밀쳤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기가 막혀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천하의 노민우가 생애 처음 여자에게 호신용 스프레이를 맞고 아랫도리가 메스로 위협을 당했다!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결국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운전을 하던 구승훈은 휴대폰을 힐끗 보고 스피커로 돌렸다.“무슨 일이야?”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훈아, 그 여자 변태 이름이 뭐야?” 구승훈은 순간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강하리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은 노민우가 손연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목을 가다듬었다.“어느 여자 변태를 얘기하는 거야?”“강하리 씨 친구 있잖아.”강하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노민우 씨? 손연지 말하는 거예요?”노민우는 강하리의 목소리에 순간 당황했다.“이름이 손연지예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강하리 씨.”노민우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강하리가 다급하게 불렀다.“노민우 씨, 연지는 왜요? 연지 괴롭히지 마세요!”“괴롭히는 게 아니라 우리 병원에 스카우트하려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었고 강하리가 다소 걱정스러운
강하리는 즉시 그를 밀어냈다.“나가요!”하지만 구승훈은 다시 그녀를 껴안았다.“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남자는 그녀의 귀에 속삭이고는 그냥 돌아섰다.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닫힌 욕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일부러 놀리는 건가.문득 강하리는 마음이 시큰해지더니 한참 후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그래, 괜찮을 거야. 엄마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믿어야지.’샤워를 하고 나오니 구승훈은 옆에서 낮은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고,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본 그가 황급히 둘러대며 전화를 끊었다.“왜 젖은 머리로 나왔어?”말을 마친 그가 침실로 들어가 드라이기를 꺼내더니 소파에 앉았다.“이리 와.”그의 옆으로 다가간 강하리가 소파에 앉으려는데 구승훈이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강하리 몸이 순간 경직되자 구승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 아무것도 안 해. 아주머니도 계시잖아.”강하리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저쪽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고 있던 아주머니는 그 말에 몰래 웃으며 뒤돌아 부엌으로 들어갔고 강하리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드라이기를 집어 들었다. “내가 직접 할게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도 더 강요하지 않았다.휴대폰이 계속 울리자 강하리를 보낸 뒤 결국 집어 들었고 발신자를 확인한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무슨 일이세요?”저쪽에서 들려오는 구동근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너, 오늘 내가 주선한 맞선 자리 왜 안 갔어! 이놈이 점점 기어오르려고!”구승훈은 강하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갑게 웃었다.“날 위한 맞선 자리에요 아님 할아버지가 원하는 여자예요? 마음에 드시면 본인이 결혼하시지 왜 저한테 강요하세요.”“개자식, 무슨 헛소리야! 또 그 망할 것이랑 같이 있는 게지! 구승훈, 내가 직접 그 물건 처리하게 하지 말아.”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잘생긴 눈가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다.“그 여자
강하리가 다시 깨어났을 땐 병원이었고 깨어난 그녀를 본 손연지는 황급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의사 선생님이 가벼운 뇌진탕이래, 어지럽고 메스껍지 않아?”강하리는 살짝 멈칫하다 말했다.“아니, 난 괜찮아. 구승훈은 어딨어?”손연지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야 말을 꺼냈다.“아주머니는 중환자실에 입원하셨고 구승훈도 다쳤어. 출혈이 심해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강하리의 심장이 철렁했다.“어디 다쳤는데? 지금 어디 있어?”다그쳐 묻던 그녀가 이불을 뒤척이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손연지가 서둘러 말렸다.“아직 움직이지 마, 아직 안 깨어났어. 네가 가도 소용없어, 일단 의사 선생님 먼저 부를게.”손연지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의사가 간단한 검사를 통해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손연지는 그녀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했다.“구승훈 씨한테 먼저 가 봐. 아주머니 쪽은 아직 면회 시간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도 교대 중이라 당직 선생님 오면 가서 상황 물어보면 되잖아.”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의사 선생님이 엄마에 대해선 말씀하신 거 없어?”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난 가족이 아니라 당장은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만 했고 자세한 건 네가 깨어나면 설명해 줄 거래.”강하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일단 구승훈 씨부터 보러 가야겠어.”구승훈의 병실은 건물 가장 안쪽 끝에 있었다.강하리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자 가슴이 먹먹해지며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조여졌다.구승재는 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일어났다.“강하리 씨, 괜찮아요?”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쪽 형 상태는 어때요?”“비장이 파열돼서 피를 좀 많이 흘렸는데 큰 문제는 없고 아직 안 깨어났을 뿐이니 걱정하지 마요. 가서 말동무나 좀 해줘요. 난 나가서 통화 좀 하고 올게요.”구승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고 강하리는 침대 가장자리
강하리는 심장이 철렁해서 서둘러 다가왔다.“왜 그래요, 상처가 아파요?”하지만 구승훈은 갑자기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하리야,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내 상처 건드릴 수 있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강하리의 몸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구승훈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고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일렁거렸다.그의 의도를 감지한 강하리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구승훈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녀의 뒤통수를 꽉 잡았다.“하리야.”남자는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무 데도 가지 말고 잠시만 이렇게 나와 함께 있어 줘.”두 눈이 마주치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튕기는 듯했다.메말라가는 주변 공기에 강하리는 당황한 기색으로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이윽고 구승훈은 그녀를 꽉 붙들고 바로 입을 맞추었다.두 입술이 맞닿자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갈증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괴롭게 했다.구승훈의 다른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붙들어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혀가 잇새를 가르며 들어오자 방안에는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그러다가 불순한 그의 손이 그녀의 옷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고 강하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화를 냈다.“구승훈 씨, 여긴 병실이에요.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곳이라고요.”“그럼 나중에는 돼?”강하리가 곧바로 그의 손을 쳐내자 구승훈이 웃음을 터뜨렸다.“하리야, 너한테 빚진 목숨 오늘로 갚았는데,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강하리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그동안 줄곧 갈피를 잡지 못하고 구승훈에게 흔들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웠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구승훈 씨, 그동안 당신이 해준 것들은 정말 감동이지만... 또다시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당신 곁에 있을 수는 없어요.”구승훈이 멈칫했다.“누가 그래, 명분이 없다고?”그의 말을 들은 강하리는 덜컥 심장이 뛰며 입술을 다물고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은 손가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