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말을 마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구승재가 달려와 구승훈을 부축하며 물었다. “형, 괜찮아?”구승훈은 웃기만 할 뿐 옆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기까지 했다. “괜찮아, 안 죽어.”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의사 선생님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려.”구승훈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래.”구승재는 강하리 쪽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편 이쪽 상황을 전해 들은 구승유는 서둘러 뒷마당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고 정원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인은 온화하면서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고, 단정한 치마저고리를 입으니 더욱 우아해 보였다. 구승유는 황급히 달려가 여자의 팔을 껴안았다. “큰엄마, 큰오빠가 할아버지한테 맞았어요.” 여초연은 멈칫하며 물었다.“걔는 어디 있어?”“거실에요, 셋째 오빠랑 같이 있어요.” 여초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가봐야겠다.”밖으로 나가면서 그녀는 다시 물었다.“또 그 여자 때문이야?”구승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오빠 이번엔 진심인 것 같아요.”여초연의 눈빛이 번뜩였다.“네 오빠 마음이 움직였다면 좋은 여자겠지.”곧 여초연이 거실에 도착하자 그녀를 본 구승훈의 시선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왜 왔어요?” 여초연은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다쳤다고 들었어.”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픔이 번쩍였다.“너도 참, 꼭 그렇게 반기를 들어야겠어?”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이렇게 되면 당신은 기쁘지 않나?” 여초연의 얼굴에 아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고 옆에서 보다 못한 구승유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오빠! 큰엄마는 오빠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 태도 좀 바르게 할 수 없어?”구승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넌 참견하지 마.”형이 큰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구승유는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그녀는 다가가 여초연을 부축했다.“큰엄마, 그냥 아파하라고 해요. 본인이 자초한 건데
영상에는 장면만 담겨있고 소리가 없었다. 10초 남짓한 짧은 영상이었지만 강하리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당시 그녀는 분명 발버둥 쳤지만 무력한 모습이 영상에서는 다르게 비쳤다. 얼굴의 홍조까지 더해져 더욱 야릇한 분위기로 보였다. 강하리는 영상을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영상 아래에 달린 댓글은 더 심각했다. [세상에, 저 여자 너무 예쁘다.][저 얼굴, 저 몸매, 너무 섹시하네.][이걸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데 아가씨 나랑 한번 잘래?][한 번만 자게 해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노골적으로 희롱하는 발언들이 마구 쏟아지고 곧바로 다른 누군가 나타나 몰아가기 시작했다.[얼마 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미녀 번역가 아닌가? 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아닌데.] [세상에, 저런 사람도 외교부에 들어가? 외교부 창피해서 어떡해.][외교부에도 같이 자는 남자가 있나 보지.][정말? 몸 대주고 승진한 거야?]댓글 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곧바로 누군가 그녀가 송유라와 구승훈의 관계를 망쳤다는 말을 꺼냈다. 마침 언니가 떠나서 하소연할 곳이 없었던 송유라의 팬들은 강하리를 미친 듯이 물어뜯고 있었다.손연지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휴대폰을 다시 빼앗았다. “하리야, 그만 봐.” 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더 이상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글에 마음이 괴로웠다.마음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오며 대체 누가 자신을 이토록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통화 좀 할게.” 그렇게 말한 후 그녀가 손연지의 휴대폰을 가져와 정주현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전화를 걸기도 전에 손연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화면에 뜨는 이름을 본 강하리는 손에 힘이 들어갔고 손연지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구승훈이야?”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받기 싫으면 내가 대신 받을게.” 강하리는 전화기를 움
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눈동자에 비친 복잡한 감정을 숨겼다.“아니요, 잔 적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전화기를 옆에 내려놓았다.옆에 있던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형, 강하리 씨 괜찮대?”구승훈은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구승재는 순간 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정주현 잘못은 아니야. 그때 노진우도 함께 살펴봤는데 안현우가 가지고 간 장난감에 카메라가 숨겨져 있었어. 두 사람은 물건들을 보지도 않고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고 카메라를 보니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치운 건 맞아. 영상 올린 사람도 그냥 우연히 주웠다고 했어.”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웃는 얼굴로 구승재를 바라봤지만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그런 걸 주울 사람이 있을까?”구승재는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그였다면 절대 주울 리 없는 물건이었다.쓰고 싶으면 새 걸 사서 쓰면 되지, 병이 있을지도 모르는 데 남이 쓰던 걸 왜 주워가겠나.구승훈의 눈빛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송씨, 안씨 가문 사이에 오간 게 없는지 확인해 봐, 특히 송씨 가문 쪽!”송유라와 안현우는 평소에도 사이가 좋았는데, 이번 일에 정말 송유라가 관여하지 않았을까?휴대전화를 움켜쥔 구승훈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고 빠르게 대답한 구승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형, 강하리 씨한테 왜 다치고 열 나는 건 얘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며칠 전부터 안씨 가문이 여러 가문과 손잡고 에비뉴를 공격한다는 얘기는 왜 또 안 했어?”구승훈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아직 그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가서 이 일부터 처리해.”강하리는 전화를 끊고 손연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손연지는 줄곧 웹사이트를 훑어보다가 잠시 후 소리를 질렀다.“하리야, 그 영상들 진짜 사라졌어. 얼른 봐, 호텔 측에서 너한테 사과하고 풀영상까지 전부 다 내보냈어. 네가 화장실에서 끌려 나와 엘리베이터에 탄 것부터 안현
강하리는 그 약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지 잘 몰랐다.다만 그날 밤 김주한이 준 약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약이라는 것만 알았다.김주한이 준 약은 최소한 정신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날 밤, 그녀는 정말 자신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혼란스러워하는 강하리의 표정을 보며 손연지는 갑자기 불안해졌다.“하리야, 이게 어떤 약인지 알아?”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뭐 이상한 것 있어?”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연지의 마음은 순간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그 약은 해독약이 없어.”손연지의 말이 끝나자 강하리가 당황했다.“해독약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약에 대해 설명하는 손연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대체 이런 약은 왜 개발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가 생각했을 때 의약품은 환자를 치료하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 고통을 덜어주는 데 사용되어야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약을 돈과 욕망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말을 이어갔다.“얼마 전 우리 병원에 막 열여섯 살이 된 여학생이 설날에 친구들을 따라 놀러 갔다가 누군가 이런 약을 탄 걸 먹게 됐어. 병원에 와서 여러 의사들을 불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가족은 죽어도 남자로 해결하지는 못하겠대. 결국 그 여학생은...”손연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여학생은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강하리의 심장이 철렁했다.“게다가 다시 깨어날 확률이 매우 낮고 신체의 여러 장기가 매우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어.”손연지는 말을 하며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어떻게 사람이 이런 약을 써?”멍하니 듣고 있던 강하리의 마음이 어느새 뒤죽박죽되었고 손연지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하리야, 구승훈이 이런 약이라는 걸 알았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손연지는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거면? 하리야, 우리가 괜한 사람 원망한 건 아닐까?”강하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던 강하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정주현 씨, 그날 밤 구승훈 씨는 내가 어떤 약을 먹었는지 알아요?”정주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속으로는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사실대로 실토했다.“알아요, 하지만 기회를 틈타 몹쓸 짓을 한 건 사실이잖아요 하리 씨.”강하리는 순간 침묵했고 정주현이 뭐라고 말을 덧붙였지만 들리지 않았다.정주현이 다시 그녀를 불러서야 문득 정신을 차렸다.“하리 씨, 내 말 듣고 있어요?”“네?”정주현은 혀를 찼다.“우리 영감탱이가 하리 씨 몸 어떠냐고 물어요. 또 어디서 들었는지 하리 씨 어머님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 한번 뵈러 간대요.”강하리는 웃음을 터뜨렸다.“정 회장님께 전 괜찮으니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엄마는 굳이 보러 오실 필요 없어요.”정주현이 다시 혀를 찼다.“알아서 하라고 해요. 이런 식으로 직원들 챙겨준다고 생각하나 보죠, 내버려둬요.”강하리는 짧게 대답을 한 뒤 전화를 끊었고 이윽고 손연지가 다가와 물었다.“구승훈이 안대?”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손연지는 강하리의 눈치를 살폈다.“그럼 우리가 괜한 사람 탓한 거야?”강하리는 한참을 제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벨이 몇 번 울리더니 구승훈이 전화를 받았다.“하리야.”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고 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구승훈 씨, 그 약 해독제가 없는 거 알고 있었죠?”구승훈 쪽에서 갑자기 조용해지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답했다.“그래, 알아.”이미 알고 있었지만 구승훈 본인이 인정하는 말을 들으니 강하리는 가슴이 저릿했다.“그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구승훈이 웃었다.“하리야, 솔직하게 말해도 네가 믿었겠어?”강하리는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만약 구승훈이 그 자리에서 바로 말했다면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이 개 같은 남자가 선을 넘은 게 이번만이 아니었고 그는
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쥐었고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렸다.“우리 형 상처가 심각해요. 안현우 때문에 며칠째 할아버지와 맞서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가볍게 때리는 것도 아니고, 예전 상처가 낫지도 않는데 새 상처가 생기니까 어젯밤부터 열도 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본인은 괜찮다고 우기면서 약도 안 먹고 그냥 이렇게 버티고 있어요.”그 말에 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구승훈의 동정심 유발 작전은 아닌지 의심했다.하지만 그녀를 돕느라 다친 건 사실이었기에 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물었다.“그 사람 아파트에 있어요?”“네, 아파트에 있어요. 며칠 전 할아버지 집에 갇혀 있다가 어제 막 나왔어요.”강하리가 답했다.“제가 이따가 갈게요.”“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겨 곧장 아파트로 갔다.아파트 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먼저 문을 두드렸지만 문을 열어줄 사람은커녕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결국 그녀는 지문을 이용해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현관 신발장 위에는 지난번에 신었던 새 슬리퍼가 놓여 있었고 강하리는 안을 흘끗 들여다보고는 슬리퍼를 신었다.집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불렀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그녀는 닫혀 있는 침실 문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문에 짓눌렸다.곧바로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구승훈은 그녀를 품에 안고 고개를 숙여 쳐다보고 있었는데 짙은 눈동자에 온통 그녀의 모습뿐이었다.당황한 강하리는 그를 밀어내려다가 문득 그의 얼굴이 너무 창백하고 이마가 거즈로 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순간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더니 한참 후에야 물었다.“할아버지가 때렸어요?”라고 물었다.구승훈이 짧게 대답하자 강하리는 마음속으로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이런 일에 엮이게 해서 미안해요.”구승훈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댔다.“엮인
구승훈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옆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강하리가 급히 전화기를 낚아챘다.“무슨 일이야?”손연지의 목소리엔 온통 초조함뿐이었다.“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간병인 말로는 아주머니를 재활실에 모시고 가서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다른 사람들 다 나와도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에 들어가 살펴봤더니 재활실 어디에도 아주머니는 없었대. 의사 선생님들한테도 다 물어봤는데 다들 보지 못했대.”강하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전화를 끊고 곧장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구승훈은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었고 그도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그녀를 쫓아 나갔다.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강하리는 이미 차에 타고 있었고 구승훈은 달려가서 그녀를 끌어내렸다.하얗게 질린 강하리의 얼굴을 보고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자신의 차에 태운 뒤 조심스럽게 안전벨트까지 매주었다.“지금 상태로 운전하면 위험해. 내가 데려다줄게.”강하리는 이미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구승훈의 차는 빠르게 달려갔고 가는 길에 노민준에게도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는 가슴 아픈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강하리는 새하얀 얼굴로 좌석에 기대어 유난히 초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이미 사람 보내 알아보고 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지금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구승훈은 잠시 멈칫하다가 순간 지난번에 그녀 혼자 정서원의 생사를 마주하게 했던 기억이 떠올라 죄책감이 밀려왔다.“미안해, 하리야.”강하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손연지는 막 차를 주차한 상태였다.세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고 병동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정양철도 그곳에 있었다.강하리는 순간 당황했다.“정 회장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
강하리가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내자 구승훈이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독였다.“이미 사람 보내서 그 재활사 찾고 있어.”강하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의사한테 가 봐요, 난 괜찮으니까.”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아까의 당황한 기색은 사라진 듯했다.대체 이 여자는 언제부터 그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버티는 게 습관이 된 걸까, 이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다 자기 때문인 것 같아 구승훈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난 괜찮아. 아주머니 일은 내 쪽에서 알아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철저하게 알아보면서 재활사뿐만 아니라 병원 내 청소부들까지 모조리 훑었다.심지어 사람을 보내 지역 전체의 카메라를 돌려보도록 했다.“돌아갈 거야,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 거야?”강하리는 여기서 기다리려다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돌아가서 기다려요.”결국 구승훈은 강하리를 데리고 다시 아파트로 돌아갔다.손연지는 강하리와 함께 돌아가려고 했지만 강하리의 안색을 보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자신과 돌아가면 그저 불안하게 기다리겠지만, 구승훈과 함께 있으면 좀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어느새 달려온 노민우는 함께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 씨는 대체 누구에게 밉보여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야.”이틀 전 안현우의 일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젠 어머니에게도 사고가 생겼다.손연지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알겠어요, 우리 하리가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싫은 사람이겠죠.”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역겨운 표정을 지었고 노민우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쪽은 왜 그렇게 나한테 불만이 많아요?”손연지는 콧방귀를 뀌었다.“당신이 아니라 비열한 사람들한테는 다 그래요.”노민우는 순간 욱해서 맞받아쳤다.“내가 왜 비열하죠? 말 가려서 해요. 내가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