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어.”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전화를 끊고 강하리에게 걸어갔다.“화 풀어, 알았지? 강찬수에 대해 계속 알아볼 테니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한편, 강하리 곁으로 가는 구승훈을 바라보던 송유라의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했다.그녀의 다리와 발에는 깨진 꽃병으로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는 듯했다.안현우는 덤덤하게 웃었다.“유라 씨, 이대로 떠나면 정말 가망이 없어.”노민우는 옆에서 인상을 찌푸렸다.“안현우, 그만해. 감정적인 일인데 억지 부린다고 돼?”안현우가 콧방귀를 뀌었다.“이게 뭐가 억지야? 유라 씨랑 승훈이는 원래 알아주는 한 쌍이었어, 몰라?”노민우는 다소 말문이 막혔다.“정말로 짝이 맞다면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겠지. 지금 승훈이 마음은 누가 봐도 강하리에게 있잖아.”그렇게 말한 후 그는 송유라를 바라보았다.“유라 씨, 몇 년 동안 요양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외국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날 지 누가 알아요.”송유라는 눈물을 훔쳤다.“내 남자는 아무도 못 뺏어가요.”노민우는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안현우는 옆에서 피식 웃었다.“노민우, 설마 강하리 그 여자한테 홀린 건 아니지?”노민우는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병동을 빠져나갔다.밖으로 나오는데 마침 누군가와 부딪혔다.사과하려던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던 손연지는 상대가 노민우인 데다가 송유라의 병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눈을 어떻게 뜨고 다니는 거예요?”노민우는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아니, 분명 그쪽이 와서 부딪힌 건데요?”손연지의 표정은 경멸로 가득했다.“부딪혀도 싸죠 뭐. 온몸에 비열한 냄새가 진동하네!”말을 마친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고 노민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봐요, 말 똑바로 안 해요?”“나쁜 놈 친구랑 할 말 없어요!”
강하리는 손연지가 자신을 부를 때까지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멍하니 뭐 해?”강하리는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흩어져 있던 생각을 정리하고 병동으로 걸어갔다.방금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두려움이 밀려왔다.찰나의 순간 그녀는 바로 송동혁에게 가서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이성이 그녀를 말렸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오가는 병원에서 다짜고짜 찾아가서 다그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들어갔다가 참지 못하고 소란이라도 피우면 송동혁의 친딸인지 아닌지 여부와 상관없이 정서원의 평판은 완전히 망가질 테니까.그녀는 이제 막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가 평온하게 살길 바랐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봤다.“연지야, 혹시 친자 확인할 수 있는 곳 알아?”손연지는 깜짝 멈칫했다.“친자 확인 검사? 누구를 하려고?”강하리는 잠든 정서원을 힐끗 쳐다보며 손연지에게 방금 들은 말을 속삭였다.손연지는 깜짝 놀라며 미처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가 송동혁의 딸이 아니라고?”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두 사람이 말한 잡것에 자신 말고 또 다른 누군가 있을 리가.“아니, 그럼 송동혁은 왜 그때 네 엄마한테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 거야? 미친 거야, 몇 년 동안 아내와 자식을 버렸다는 소리만 듣고 살았잖아.” 강하리의 눈동자에 냉기가 감돌았다.“만약 우리 엄마가 자신이 품고 있는 아이가 송동혁의 아이가 아닌 걸 알았어도 그 비싼 보석을 다 주었을까?”“젠장!”손연지는 이를 갈았다.“송동혁, 그 개자식!”이내 확 바뀐 어투로 말했다.“오히려 잘됐어. 그 사람들과 바로 선 그어버릴 수 있잖아. 넌 정말 좋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쓰레기 같은 아버지가 있을 수 있겠어!”강하리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났다.“그래, 이제 진짜 연을 끊어야지.”“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손연지가 묻자 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별생각 없어
강하리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누가 알겠어, 그런 게 또 좋은가 보지!”안예서의 눈이 깜빡였다.“부장님 데뷔하면 송유라는 아주 쉽게 짓밟을 수 있을 거예요!”강하리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농담하지 말고 빨리 가서 홍보팀과 마케팅팀에 개업식 순서와 초대 명단을 다시 확인해 봐.”안예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대답했다.그녀가 나간 후 강하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휴대폰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SNS에 들어갔다.SNS에는 이미 송유라가 건강 문제 때문에 해외로 가는 게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라와 있었다.사진을 보면 현장 분위기는 정말 뜨거웠다.송유라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제법 불쌍해 보였다.팬들의 얼굴도 눈물범벅이었다.[강 부장님, 송유라 갔어요.]구승재가 곧바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강하리는 한참 동안 휴대폰의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네.][형은 이틀 동안 출장 가요. 강 부장님, 형은 정말 부장님이랑 잘해보고 싶어 해요. 전에 잘못한 게 있지만 최대한 보상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무 모질게 굴지는 말아주세요. 강 부장님, 형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강하리는 메시지를 보며 손을 말아쥐면서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망설였다....대양그룹의 개업식은 4월 초로 예정되어 있었다.화창한 봄날, 강하리는 단숨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드레스를 입고 개업식에 등장했다.정양철은 그녀와 함께 대양그룹의 파트너들에게 한 명씩 인사를 건넸고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저마다 농담을 건넸다.“강 대표를 후계자로 키우는 겁니까, 며느리로 키우는 겁니까?”정양철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눈치껏 웃었다.혹시나 정말 며느리로 삼을 수도 있으니까.옆에서 강하리를 바라보는 정주현의 눈에는 애정이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아버지가 정말 강하리를 며느리로 키울 생각이라면 엎드려 절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개업식이 끝난 뒤엔 개업 파티가 열렸고 정양철은 5성급
남자는 심플한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 밑단은 넣지 않고 밖으로 드리워져 있었다.이런 곳에서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누구보다 이목을 끌었다.강하리의 시선이 잠깐 남자에게 머물다가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저쪽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이쪽을 바라봤다.강하리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남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그러고는 다소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강하리 옆에 있는 정주현에게 시선이 향했다.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조금 차갑게 식어 있었다.강하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그가 말했다.“축하해요, 강 대표님.”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강 대표님 방금 저 왜 피하셨어요?”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일 뿐 대답하지 않자 정주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못생겨서 그러지 뭘.”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보던 구승훈이 몸을 숙여 강하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강하리, 내가 북교에 있는 땅 손에 넣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라 충격에 가득 찬 얼굴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가 거절했는데?구승훈이 웃었다.“오늘 선물로 주고 싶었어.”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며 구승훈을 향해 웃었다.“그렇게 귀한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의 눈빛이 짙어졌다.“그럼 어느 땅을 원하세요? 대표님이 알아봤던 다른 땅도 제가 다 인수했는데 어떤 걸 원하시나요?”강하리는 흠칫 놀라며 정주현을 돌아봤고 정주현도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전부터 그가 알아보고 다녔던 땅이 왜 하루아침에 이 개자식에게 넘어간 걸까?“구승훈 씨, 정말입니까?”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정주현 씨는 내가 이런 일로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입니까?”정주현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전에 그 땅에 대해 알아봤을 때 다른 사람도 관심을 보인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구승훈일 줄이야.강하리에게 접근하려고 정말 갖은 수를
“정말 받을 거예요?”강하리는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받든 안 받든 제 일이에요.”정주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오프닝 음악이 울리고 구승훈이 이쪽으로 다가오는데 정주현이 강하리를 끌고 홀로 나서자 구승훈의 발걸음이 멈추며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구 대표님 라이벌이 많네요.”최하영이 불쑥 옆에서 말을 걸었다.“왜요, 선물 못 줬어요?”구승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피식 웃을 뿐 말없이 손에 든 와인 잔을 웨이터의 트레이에 올려놓더니 댄스 홀로 걸어갔다.강하리와 정주현은 오늘 밤 주인공으로서 오프닝을 장식하는 건 당연했다.게다가 두 사람 모두 미모가 뛰어나기 때문에 자연스레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보다 더 빛나는 남자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강하리가 빙글빙글 도는 사이 구승훈은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강하리는 눈 깜박하는 사이 상대가 정주현에서 구승훈으로 바뀌었다.그녀가 당황하고 있는데 구승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애송이랑 춤추는 게 뭐가 재밌어?”강하리는 힘껏 그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구승훈 씨, 이럴 땐 제발 좀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강하리에게 고정된 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하리야, 난 그저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야.”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꾸했다.“그럴 필요 없어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할 지는 내 마음이지.”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구승훈 씨,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대양그룹 일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구승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난 너한테 주는 거야. 누가 대양그룹에 준다고 했어?”멈칫한 강하리에게 구승훈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강하리,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대양그룹에 팔든 네가 가지든 너만 좋다면 난 상관없어.”남자의 입술이 귓가에 닿을락 말락 했고 은근한 우디향이 그녀의 입과 코로 스며들었다.강하리가
화장실에 도착한 강하리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예상치 못한 구승훈의 행동이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 땅은 이제 받아도 문제, 안 받아도 문제였다.개자식, 대체 도와주려는 건지, 난처하게 하려는 건지!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혼란스러운 생각을 억눌렀다.그녀는 와인 때문인지 얼굴이 온통 빨개진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거울로 바라보았다.몸에서도 열기가 치솟고 있었다.그녀는 얼굴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막 밖으로 나서기 바쁘게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고 강하리는 두어 번 심하게 몸부림치다가 의식을 잃었다.그녀가 기절하자 상대는 모자와 큰 치마를 그녀의 몸에 씌우더니 화장실 문을 열고 그녀를 부축하며 걸어 나왔다.“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이 모습을 본 웨이터가 달려와 도와주려고 했다.“위층에 쉴 수 있는 라운지가 있는데 안내해 드릴까요?”상대가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이미 방 준비했어요.”웨이터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위층으로 바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제가 눌러드릴게요.”웨이터가 모퉁이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눌러주자 상대는 강하리를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마침 이쪽으로 향하는 구승훈의 시선을 차단했다.“대표님?”넋이 나간 그의 모습에 옆에 있던 사람이 부르자 구승훈은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제가 좀 바빠서요, 다음에 얘기하시죠.”구승훈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정말 드물었고, 평소 말을 섞을 만큼 자신의 지위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꽤 아쉬워했다.하지만 구승훈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그럼 대표님 먼저 일 보세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화장실로 향했다.강하리가 들어간 지 이미 한참이 지났다.그는 옆에 있는 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가서 강 대표한테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봐줄 수 있어요?”웨이터는 서둘러 대답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건지, 약 효과 때문에 괴로운 건지 알 수 없었다.자꾸만 옆에 있는 사람의 몸에 밀착하고 싶었다.“더... 더워... 나 너무 힘들어요... 구승훈 씨...”구승훈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안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잠시 후 그가 코웃음을 쳤다.“강하리, 여기 구승훈 같은 건 없어. 난 현우 오빠지.”그렇게 말하며 그가 강하리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데 강하리가 갑자기 몸부림을 쳤다.약효가 지나갔는지 그녀가 힘겹게 눈을 뜨자 안현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강하리의 동공이 확 움츠러들었다.“안현우, 꺼져!”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고 안현우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꺼지라고? 내가 가면 누가 널 기분 좋게 해주겠어? 강하리, 얌전히 있어. 나 구승훈만큼 잘해!”안현우는 말을 마친 후 강하리를 껴안고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강하리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도망가려 했지만 다시 한번 발목이 잡혀 뒤로 끌어당겨졌다.이윽고 그가 벨트로 강하리의 몸을 내리쳤다.“망할 년이 아직도 도망가려고 하네!”강하리는 눈물을 흘렸다.“안현우, 구승훈이 알면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안현우는 웃었다.“안다고 해도 침대 위에서 네 방탕한 모습만 볼 텐데? 생각해 봐, 나랑 자고도 걔가 널 원할까?”안현우가 앞으로 다가가 침대에서 그녀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강하리, 보여? 저기에 네가 망가지는 모습이 다 담길 거야.”그가 옆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하자 강하리의 몸이 덜덜 떨렸다.“안현우, 원하는 게 뭐야? 뭐든 다 들어줄게, 제발 날 보내줘, 응?”안현우는 콧방귀를 뀌었다.“강하리, 내가 원하는 건 너야.”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강하리의 옷깃을 잡아 뜯었고 강하리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몸부림을 쳤다.그러다 안현우가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소품을 집어 안현우의 머리에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하지만 약에 취해 힘은 턱없이 약했고 안현우는 조금의 상처
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은 채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고 노진우가 바짝 뒤따랐다.“대표님, 안 대표는...”안현우는 구승훈의 발길질에 숨이 넘어갈 뻔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통을 꾹꾹 참으며 웃었다.“구승훈, 너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날 때렸어? 우리 두 가문이 어떤 사이인지 잊지 마!”구승훈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앞으로 나아가 안현우를 한 번 더 걷어차더니 발로 안현우의 목을 짓밟았다.“무슨 약을 먹인 거야?”안현우의 동공이 움츠러들며 구승훈이 전혀 장난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구승훈, 정말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구승훈이 힘껏 발로 밟자 안현우는 순식간에 숨 막히는 공포를 느꼈다.“무슨 약을 먹인 거야!” 구승훈은 굳은 얼굴로 다시 물었고 안현우는 얼굴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랐다.“약 이름은 A, 암시장에서 샀고 해독약이 없어. 이대로 있으면 저 여자는 바보가 되겠지.”구승훈의 눈동자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가며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여자를 바라보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러고는 분풀이하듯 다리를 뻗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안현우를 발로 찼다.“잘 지키고 있어.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까.”그렇게 말한 뒤 남자는 다시 충혈된 눈으로 정주현을 바라보았다.“정주현 씨, 방에 다른 카메라나 녹음기가 있는지 확인하세요. 안현우 평소에 더럽게 노는 놈인데 영상 유출되지 않게요.”정주현은 이를 악물고 구승훈 품에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구승훈, 그 여자 건드리지 마, 알았어?”걸음을 멈칫한 구승훈은 대꾸하지 않고 강하리를 안은 채 방을 나섰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그는 직접 전화를 걸었다.노민준, 노민우의 사촌 형이자 현재 명인병원의 원장으로서 약물에 대해선 천재인 사람이었다.“A라는 약이 있다는데 혹시 들어봤어?”노민준은 다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너 그 약 먹었어?”구승훈은 설명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해독할 수 있어?”“다른 건 시도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A는 답이 없어. A가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