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를 뿌리치고 빨리 화장실에 가서 찬물에 샤워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구승훈은 결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날 좀 놓으라고요, 승훈 씨. 제발 놓으란 말이에요!”지금 강하리는 꼭 강가에 떠밀려 나와 미친 듯이 수원을 찾아 퍼덕이는 물고기처럼, 참을 수 없는 갈증을 해소하지 못해 허덕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앞에 이 남자는 그녀가 본능적으로 다가가고 싶게 만들었지만, 의식적으로는 밀어내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가서 샤워할래요, 승훈 씨. 날 좀 놔줘요.”미간을 잔뜩 찌푸린 구승훈은 그제야 강하리의 이상한 점은 비단 얼굴에 난 손바닥 자국뿐만 아니라, 그녀의 체온과 상태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한 구승훈은 순간 얼굴이 차갑게 변하다 못해 서리라도 내린 것만 같았다.그는 갑자기 강하리의 손목을 거머잡고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가두었다.“강하리, 어디 갔었어? 대체 누구를 만나서 뭘 먹은 거야?” 강하리는 이미 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달았다. 그녀는 그저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이다.그녀는 이 남자를 원하고 원했지만, 무의식으로부터 그에게 구걸하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아랫입술을 꽉 깨문 강하리의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감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힘을 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강하리의 입술이 짓무른 것을 본 그는 그녀의 턱을 그러쥐고 그녀가 이를 풀도록 압박했다.남자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눈에서는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누구를 만나서 대체 뭘 먹은 거야? 빨리 대답해!”눈시울이 붉어진 강하리는 약물에 시달려 목소리마저 떨려왔다. 하지만 구승훈에게 잡힌 턱의 통증으로 인해 마침내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그녀는 남자의 셔츠를 어찌나 세게 움켜잡았는지 손톱이 하얗게 물들었다.“김주한이 집을 보겠다고 예약을 잡았어요.”구승훈의 눈
그제야 구승훈은 자신이 마음 아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 여자를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도 정말이지 우스웠다.그와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마음 아파할 줄 안다고?그는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됐다. 그러나 하필이면 어젯밤 강하리의 모습을 보며 분명히 느꼈다.강하리가 악을 쓰며 자기 입술을 물어뜯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었다.애초에 강하리가 떠나겠다고 했을 때도 구승훈은 순순히 놓아주었다. 어차피 그녀가 그의 곁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을 때는 조금만 손 쓰면 그만이니까.그리고 그런 수단과 방법을 강하리에게 쓸 때만 해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재미있게 즐기던 게임이 순식간에 무미건조해졌다. 더 이상 아무런 흥미도 없었고, 다시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손에 들려 있는 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는 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구승훈은 입속에 담배 연기를 후 뿜어내고는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때였다. 시큰거리고 뻐근한 허리를 힘겹게 지탱하며 일어난 그녀는 정리를 마치고 나서야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몇 통 걸려 온 것을 발견했다.눈살을 찌푸리고 전화를 들여다본 강하리는 부재중 전화 전부가 정서원의 주치의에게서 걸려 온 거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다시 전화를 걸었다.“선생님, 우리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그게 아니라요, 하리 씨. 구 대표님께서 하리씨 어머니의 약값을 계속 예전의 할인 혜택으로 해드리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걸 전해 드리려고 전화한 거예요.”뜻밖의 소식에 입이 턱 벌어진 강하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아,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잠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바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침 회의 중이던 구승훈은 휴대폰을 얼핏 보고
구승현은 애초부터 구승훈을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이 몇 년 동안 구승현은 구씨 가문에서 매우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씨 가문 어르신은 항상 구승훈만 중시했다. 구승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영감탱이는 구승훈에게 눈이 멀기라도 한 듯,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승현은 몇 번이고 구승훈을 도발했다. 구승훈은 전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번에는 갑자기 마음을 모질게 먹고 구승현의 사업을 전부 부숴버렸다.비서 실장은 강하리의 귀에 대고 속닥속닥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편 강하리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구승훈이 구승현에게 불같이 화를 낸 이유가 그녀 때문일 거라 착각하여 김칫국부터 마시는 터무니 없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이때 구승현이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최상층 전체에 울려 퍼졌다.“구승훈 이 개같은 자식아. 네가 한 짓이 나보다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다고, 정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언젠가는 네 놈을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빌게 할 거야. 두고 봐!”강하리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계약서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사납고 서늘한 눈길이 그녀의 몸에 끈적하게 와닿는 걸 느꼈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지만,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만 눈에 들어왔다.“제가 보기에 대표님은 정말 무정한 분이신 것 같아요. 자기 친형제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비서 실장은 보다 못해 강하리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하지만 강하리는 입술을 감쳐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때 사무실에서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강하리.”손에 들려 있던 계약서를 비서 실장에게 건넨 강하리는 구승훈의 사무실 문을 밀고 안으로 걸어갔다. 구승훈은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었다. 강하리가 들어 온 것을 본 구승훈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그녀에게 손짓했다.“이리 와 봐.”강하리가
구승훈이 말하는 동시에 셔츠 단추를 풀었다.그에 시선을 빼앗긴 강하리가 그제야 구승훈의 셔츠에 핏자국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당황한 강하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구승훈이 벗은 셔츠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바로 욕실에 들어가 버렸다.구승훈이 사라진 뒤에도 강하리의 시선은 여전히 쓰레기통 속의 셔츠에 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방 안에 피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구승훈이 모범 시민상은커녕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적당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가 하고 다니는 짓도 떳떳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볼 일은 없다 보니 매번 이렇게 당황했다.저번에 로열 클럽에서 본 꼬마까지 한다면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었는데 오늘은 이유를 몰랐다.구승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강하리가 식은 반찬들을 간단하게 데워 식탁에 놓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용무 없으시다면 먼저 가 볼게요.""같이 먹자."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잡아채자 강하리가 잠시 침묵했다."배 안 고파요."구승훈이 공기를 짓누르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살짝 숨을 내쉰 강하리가 맞은편에 앉았다.식사 도중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입맛 없던 강하리가 젓가락질 몇 번 하고는 식탁에 내려놓을 뿐이었다.반면, 구승훈은 꽤 입맛이 돌았는데 강하리가 한 밥이 오랜만이라 그런가 어쩐지 맛있다는 감상이 들 정도였다.식사를 끝내고 티테이블에 앉아 차를 우리고 나서야 물었다."생각은 끝냈어?"뭘 묻는 건지는 강하리도 잘 알고 있었다."대표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강하리의 몸이 살짝 굳은 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다시 들어와."구승훈은 고민 따위는 사치인 듯 말했다."됐어요."강하리가 창밖의 야경을 봤다.눈살을 살짝 찌푸린 구승훈은 더 이상 강하리를 궁지에 몰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지금처럼 밖에 두고 지켜보기만 할 생각도 없었다."하리야, 알아서 들어올래, 내가 들어오게 할까."강
강하리가 아파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눈이 가득 흩날리고 있었지만 강하리의 시야에는 아까 전 자신의 말에 어두워진 구승훈의 표정만이 있었다.그런 말을 하면 기분을 잡치게 할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만약 이게 언젠가 사라질 감정이라면 더 이상 추호의 기대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깊게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숨을 내쉬어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고는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를 보고 쓰게 웃으며 돌아갔다.그 시각, 구승훈은 아직 차가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구승훈의 머릿속에는 강하리의 말이 아직 맴돌고 있었다.자신과의 만남이 강하리에게는 그저 상사에게 맞춰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구승훈이 잡념을 쉬이 떨치지 못했다.‘계약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나 보지?’평소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강하리에게 감탄했을 텐데, 지금은 그 이성이 너무나도 성가셨다.꼭 구승훈과의 만남이 강하리가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구승훈이 강하리를 붙잡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강하리의 말대로 구승훈이 굳이 강하리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여자가 줄을 설 테니.강하리는 매번 자신이 정한 한계선을 비웃듯 넘었다.이 관계는 서로 원해서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강하리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매번 강요만 하게 됐다.피식 웃고 담배 한 대를 태운 구승훈은 지금 이런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고작 애인 때문에 이러는 것은 구승훈의 상식 한참 밖의 일이었다.결국 구승훈은 해탈의 경지에 올라 강하리가 다른 남자를 함부로 만나지 않고 본인 몸과 마음만 잘 챙긴다면 다른 건 딱히 상관없었다.담배를 다 피우고 옷을 갈아입은 구승훈도 아파트를 벗어났다....다음 날, 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기다린 듯한 모양새의 구승재를 마주쳤다.강하리를 본 구승재가 재빠르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어제 형이 김주한 씨 반 죽여놓은
강하리가 아파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눈이 가득 흩날리고 있었지만 강하리의 시야에는 아까 전 자신의 말에 어두워진 구승훈의 표정만이 있었다.그런 말을 하면 기분을 잡치게 할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만약 이게 언젠가 사라질 감정이라면 더 이상 기대는 추호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깊게 숨을 들이쉰 강하리가 숨을 내쉬어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고는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를 보고 쓰게 웃으며 돌아갔다.그 시각, 구승훈은 아직 차가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구승훈의 머릿속에는 강하리의 말이 아직 맴돌고 있었다.자신과의 만남이 강하리에게는 그저 상사에게 맞춰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구승훈이 잡념을 쉬이 떨치지 못했다.‘계약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나 보지?’평소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강하리에게 감탄했을 텐데, 지금은 그 이성이 너무나도 성가셨다.꼭 구승훈과의 만남이 강하리가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구승훈이 강하리를 붙잡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강하리의 말대로 구승훈이 굳이 강하리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여자가 줄을 설 테니.강하리는 매번 자신이 정한 한계선을 비웃듯 넘었다.이 관계는 서로 원해서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강하리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매번 강요만 하게 됐다.피식 웃고 담배 한 대를 태운 구승훈은 지금 이런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고작 애인 때문에 이러는 것은 구승훈의 상식 한참 밖의 일이었다.결국 구승훈은 해탈의 경지에 올라 강하리가 다른 남자를 함부로 만나지 않고 본인 몸과 마음만 잘 챙긴다면 다른 건 딱히 상관없었다.담배를 다 피우고 옷을 갈아입은 구승훈도 아파트를 벗어났다....다음 날, 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기다린 듯한 모양새의 구승재를 마주쳤다.강하리를 본 구승재가 재빠르게 달려왔다."강 부장님, 어제 형이 김주한 씨 반 죽여놓은
나가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보던 송유라가 표정을 굳혔고 그와 함께 안현우가 혀를 차자 구승재가 웃었다."왜요? 이번에는 또 강 부장님의 뭘 헐뜯으시려고요?"그에 안현우도 마주 웃었다."승재 씨, 대체 그 사람이 뭘 해 줬길래 이렇게 싸고돌아요?""뭘 해 준 건 아니고, 제 형수님이 되어야 할 사람이니까요."구승재의 말에 송유라의 표정이 한없이 구겨졌다."승재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신분으로 승재 씨 가문이라니요~""유라 씨, 형 결혼은 절대 남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왜, 저번에 약혼식도 바로 취소해 버린 거 기억 안 나세요?"저번 일을 떠올린 송유라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구승재는 멈추지 않았다."게다가 누구한테 분명 저희 형은 원하지 않으면 절대 선택을 번복할 사람이 아니라고 당부했는데도 떠났으면서 그 누구는 이제 와서 또 붙잡네요."송유라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송유라가 어디 가서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송유라가 구승재를 노려본 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샤워를 마친 강하리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유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밖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감기에 걸린 것일 것이다.유산한 뒤로부터 몸이 허약해진 게 느껴질 때마다 강하리는 그저 쓴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누우려던 참에 핸드폰이 울려 발신인을 확인한 강하리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받았다."대표님."가볍게 대답한 구승훈이 한참을 침묵하더니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강주시야?"창문을 가득 채운 시린 빗방울 너머 폭죽을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연지가 고른 장소예요.""올 때 전화해. 데리러 갈 테니까."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준 강하리가 김주한의 일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한 사이, 송유라의 소리가 들렸다."오빠, 저 사람들이 저 괴롭혀요..."그에 감사 인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시 들어갔다."
강하리가 놀라 굳은 몸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어떻게 여기에..."미간을 살짝 좁힌 구승훈이 강하리의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가늠했다."아직 열나네. 옷 갈아입어, 병원 가게."강하리의 가슴속에 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자 눈을 맞추지 못하고 살짝 웃어 보였다."약 몇 번만 더 먹으면 나을 거예요.""강하리, 말 좀 듣고 얼른 옷 갈아입어. 아니면 내가 갈아입혀 줘?"강하리의 손목을 낚아챈 채 말했다.그러자 강하리가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코끝이 찡한 느낌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승훈 씨, 여긴 왜 오셨어요?"강하리 본인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몰랐지만 아마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어서 서러운 듯했다. 구승훈을 보고 어쩐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니.하지만 더 의문인 건 며칠 전 그 일을 겪고도 한달음에 달려온 구승훈의 행동이었다.그 생각을 고스란히 얼굴에 띄운 강하리를 보던 구승훈이 웃었다."왜. 여긴 네 구역이니까 난 들어오면 안 되나? 그렇다고 여기서 죽게 둘 순 없잖아."강하리가 조금 젖은 눈을 살짝 문지르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진짜 괜찮아요."들은 체도 안 한 구승훈이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건넸다."빨리 입어. 병원 가는 게 무슨 대수라고."남은 손으로는 강하리의 붉어진 눈꼬리를 문지른 채였다."말 좀 들어."강하리가 깊게 심호흡하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제어하고 갈아입으러 자리를 피했다.택시를 잡아 병원에 도착한 뒤 진찰에 링거까지 맞으니 어느덧 점심이었다."아침에 밥은 먹었어?"강하리가 고개를 젓자 뒷목을 살짝 꼬집었다."나 안 왔으면 호텔에서 죽어 갈 생각이었지, 아주."찍소리 못하는 강하리에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뭐 먹을래."강하리가 눈을 내리깔았다."팥죽이요."잠시 멈칫한 구승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팥죽을 사 와서는 오른손에 링거를 꽂은 강하리를 대신해 숟가락을 들고 죽을 먹여 줬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가 별말 없이 죽을 받아먹었다."강 부장, 이래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
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가늘어졌다.바의 어둡고 밝은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깊게 가라앉았다.“최하영 씨에게 전화해서, 연성시에 있는 형수님을 잘 돌봐주라고 해. 필요하면 안현우에게 직접 손을 써도 돼.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구승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임희주 씨는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은 비웃음을 띠며 눈을 내리깔았다.“임희주는 아직 시험하고 있어. 하지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여초연이 임희주에게 그렇게 긴 시간을 주진 않을 거니까.”구승재는 잠시 형을 바라보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왜?”구승훈이 시선을 돌렸다.구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방금 형수님이 이혼 서류를 서산 퍼스트 빌리지로 보냈어.”구승훈은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가에는 쓴웃음이 맴돌았다.“정말 빠르네.”그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폭탄을 보내지 않은 걸 보면 봐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구승재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입을 다시 다물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의 정원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구승훈은 이곳에 리시안셔스를 가득 심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이 정원에서 강하리와 함께 늙어갈 거라 믿었다.하지만 텅 빈 지금의 주택은 그의 마음처럼 공허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약속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도 그 위에 놓여 있었다.구승훈은 반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자기야, 나 이혼하고 싶지 않아. 괜찮을까?”그러나 텅 빈 주택에는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다음 날, 드물게 햇살이 쨍쨍했다.강하리는 붉은색 긴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화장을 했다.가정 법원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도로 건너편에서 구승훈은 묵묵히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휴대폰은 계속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준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는 여전히 활기 넘쳤지만 구승훈이 앉아 있는 바 카운터 앞에는 텅 빈 술잔이 열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천아름은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식을 취소한 건 분명 구 대표님이면서 강하리보다 더 힘들어 보이네요.”구승훈은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서 술잔을 집어 들고 따라 마시며 말했다.“남자들에게 여자는 그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인가 봐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 구승훈에게 내밀었다.“결혼식 날, 우리 하리 사진이에요.”구승훈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메이크업실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강하리는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옆에는 천아름과 손연지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사진 속 강하리는 이후에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두 번 숨을 내쉬었다.“그날, 하리는...”천아름은 휴대폰 화면을 끄며 말했다.“그날 하리는 구 대표님을 찾으러 갔어요.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죠.”구승훈은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몸을 기울였다.천아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이유라고 물어봅시다. 구 대표님이 여태 사랑했던 여자는 강하리뿐이었잖아요. 분명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구승훈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깊게 빨아들인 후에야 대답했다.“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갑자기 재미없어져서, 결혼하기 싫어졌어요.”천아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어요. 지금이 재밌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하리 같은 여자는 아이가 있어도 구혼자가 줄을 설 걸요? 구 대표님, 후회하지나 말아요.”그녀는 의자에 걸쳐 둔 헬멧을 들고 구승훈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섰다.때마침 구승재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헬멧을 안은 채 나오는 천아름과 마주쳤다
하지만 몸은 탈진한 듯 힘이 빠졌다.그저 질렸을 뿐이라니.강하리는 웃으며 눈가의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강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임명우가 그녀의 등 뒤에서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요.”강하리는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대리운전을 불러 차를 맡긴 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고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그러나 강하리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하이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차가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졌다.강하리는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애초에 도박을 건 것은 자신이 아닌가?이제 패배를 인정할 때였다.하지만 가슴 한편이 텅 빈 듯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폐 깊숙이 스며드는 통증이 뼛속까지 얼어붙었다.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자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물은 투명한 이슬로 변했다.한편, 구승훈은 핸들을 부술 듯이 꽉 쥐고 천천히 움직였다.검은색 마이바흐는 그렇게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강하리의 뒤를 따라갔다.한참 뒤, 그는 결국 휴대폰을 들어 ‘강하리’라는 이름 위에서 머뭇거리다 이내 다른 번호를 눌렀다.“구승훈 씨, 전화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손연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화가 난 듯 소리쳤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서 홀로 걷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제가 잘못했어요.”“미안했다고 하면 다예요?”손연지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결혼하기 싫었으면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하리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사람들이 어떻게 수군거리는지 알기나 해요?”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꾸짖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한참을 쏟아내던 손연지가 한숨을 내쉬고 조용해진 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 데리러 와줘요.”손연지는 곧장 강하리에게 달려갔
강하리가 떠난 후,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구승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창가에 서 있었고 손에 든 은은한 불꽃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었다.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다 봤어요?”임명우가 빙긋 웃으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참 우연이네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임 대표님의 취미가 남의 사생활 엿듣기였나?”임명우는 옆으로 다가와 낮게 웃으며 아래층 불빛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저는 단지 강 대표님과 구 대표님 사이의 일에 관심이 많을 뿐인데요.”그는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아, 맞다. 구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강 대표님께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항상 구 대표님만 바라보았고 저는 다가갈 틈조차 없었죠. 한때는 포기했어요. 강 대표님이 저를 싫어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기회를 주시다니,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그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스며 있었다.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어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임명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이듯 말했다.“설마 구 대표님, 정말로 강 대표님을 포기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는 혹시나 연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저는 당당하게 강 대표님에게 다가가도 되겠네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날렵한 팔이 순식간에 움직였고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난 손가락이 임명우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쾅!순간,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임명우의 머리가 강화 유리에 부딪혔다.유리는 거미줄처럼 촘촘한 금이 번지며 위태롭게 흔들렸고 구승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의 임명우를 바라보았다.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깊은 눈동자에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무슨 수작을 부리든 상관없어. 하지만 강하리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넌 살아 있는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임명우는
강하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임 대표님, 사회적 거리 두기, 모르세요?”임명우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아무 반응도 없네요?”“장난에 굳이 반응할 필요가 있나요?”강하리는 무심하게 답했고 임명우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구승훈은 어떻게 생각할까요?”강하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이미 끝난 관계에 미련을 두는 게 아니었다.그가 그녀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떠난 그 순간부터, 모든 건 끝났으니까.“혹시 나중에 찾아와서 주먹이라도 날릴까요?”임명우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강하리는 조용히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임 대표님, 계속 장난칠 생각이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임명우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가벼운 농담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태도를 바꿔 다음 회의 내용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레스토랑 저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계속 신경에 거슬렸고 손에 쥔 젓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죄송하지만, 술 좀 주세요.”강하리는 갑자기 임명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임명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음을 지었다.“어이구, 강 대표님이 술 마시고 싶었나 봐요?”강하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임명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종업원을 불렀다.곧 레드 와인 한 병이 테이블에 놓였고 강하리는 잔을 들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셨다.그러나 와인 한 잔은 금세 다 비워졌고 술이 들어가자 강하리의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멀리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고 눈앞의 세상은 희미하게 번져갔다.구승훈은 자주 강하리를 냉정하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구승훈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 있을까?구승훈은 지금도 저쪽에
임명우가 강하리와 약속한 장소는 펠리스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순간,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잠깐만요! 구승훈 씨, 빨리요!”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바로 그때, 임희주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강하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강 대표님, 우연이네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가볍게 웃었다.“결혼 증명서 받기 전까지는 저, 아직 구 대표님 아내예요.”짧은 한마디에 임희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이내 구승훈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강하리의 굳은 표정과 달리 구승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은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로 가득 찼다.임희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가볍게 웃었다.“구 대표님, 아내분께 인사 안 하세요?”강하리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단 네 글자. 그 짧은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 상처 난 마음을 다시 한번 깊숙이 베어냈다.강하리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결혼식도 제멋대로 취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이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1층에서 68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분 남짓이었지만 강하리에게는 두 시간처럼 길고도 고통스러웠다.마침내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강하리는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임명우는 미소를 머금고 구승훈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강하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우리도 나가요.”임희주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구승훈의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고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짧게 입을 열었다.“가요.”임희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정말 병
구승훈은 여전히 아파트 건물 아래에 서 있었다.연성시의 겨울은 눈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잔뜩 움츠린 채 목을 움직이며 대답했다.“알았어. 최대한 빨리 간다고 전해줘.”짧게 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준봉은 끊긴 휴대폰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강하리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건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한참 뒤, 강하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봉을 바라보았다.“부탁드려요. 주식 양도는 이미 공증을 마쳤고 그가 줬던 옷과 장신구도 모두 정리해서 보냈어요. 구씨 가문 할아버지가 주신 재산도 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연정이 양육권은 제가 가질 겁니다.”마치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강하리는 짧게 말을 끝맺고 방을 나섰다.준봉은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을 나선 강하리는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서 주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구승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듯했다.또한, 연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았다.강하리가 결혼 증명서를 바꾸자고 했을 때, 적어도 잠시라도 망설일 줄 알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했다. 이성적인 태도 뒤에 감춰진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강하리는 시들어버린 정원을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결국 포기할 수 없었다.이렇게 오랜 시간 노력하며 그녀가 원했던 건 단지 구성훈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단순한 바람조차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이뤄지지 않는 꿈이 되어 버렸다.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차고 쪽에서 연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심준호는 연정이를 안고 땅에 떨어진 참
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차를 몰고 나온 순간부터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까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그저 추웠다.차 안의 에어컨을 최대로 올렸지만 차가운 공기는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창밖에는 녹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통화 중’ 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포기했다.그에게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었든, 결국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그동안 자신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강하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뒤따라오던 심준호와 손연지도 급히 차를 세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맨발로 차에서 내리는 강하리였다.운전하려고 하이힐을 벗어 던진 듯했지만 차가운 눈밭 위에서도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시들어 버린 꽃잎처럼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을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이제 그녀도 포기했다.그토록 오랫동안 얽매였던 남자를,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너무 지쳤고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녀를 떠난 건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남는 건 결국 상처뿐이었다.심준호는 다급히 코트를 벗어 강하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걱정하지 마. 삼촌이 너를 위해 꼭 복수해 줄게.”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강하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삼촌, 너무 힘들어.”심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삼촌이 있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저 심준호의 품에 기대어 쓰러질 듯 몸을 맡겼다.“하리야!”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