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우가 문 앞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 부장님,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이곳에서 안현우를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안타깝지만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안현우는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최근 그녀는 골치 아픈 사건들을 겪고 있었다. 오늘도 그 일 때문에 상담을 나누러 온 것이었는데 우연히 강하리를 만났다.이렇게 만났으니 그는 그녀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강 부장님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나 피하는 건가?”강하리는 마음속으로 짜증이 몰려왔다. 그녀는 지금 안현우를 보면 구역질이 났다.그녀는 도대체 자기가 이 남자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설마 그녀가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기에 이렇게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 걸까?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송유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송유라를 위해 그녀와 맞서 싸우는 걸까?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하리는 이 남자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안 대표님도 제가 왜 이러는지 잘 아실 텐데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강하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더 이상 좋은 말투로 말할 수가 없었다.안현우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고 매번 강하리를 잡았다.“그날 내가 한 제안 생각해 봤어요? 걱정하지 마요. 돈을 얼마든지 협상 가능하니까.”강하리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화가 나서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안현우 씨 도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예요?”안현우는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 그렇게 고상한 척할 필요 없어. 그저 돈 있는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 것뿐이잖아?”강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적어도 인간이 여야죠.”이번에는 안현우도 화를 냈다. 그는 앞으로 나서서 강하리의 목을 잡았다.“강하리, 좋게 대해줄 때 잘해. 앙탈 부리지 말고.”강하리는 그에게 목이 졸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안현우, 난 당신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한순간에 모든 인내심이 사라졌다.“임 변호사님 못 본 걸로 하시죠.”그는 임정원을 뿌리치며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려고 했다.임정원은 주변 사람들에게 재빨리 눈짓했다.“신고해.”안현우는 비웃음을 날렸다.“임 변호사님, 연성시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임정원이 웃었다.“당연히 일하고 싶죠. 하지만 너도 이런 상황이 저의 사무실에서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요?”안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한 번도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특히 방금 강하리에게 맞은 뺨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강하리 같은 여자가 감히 그에게 손을 대다니.그는 임정원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내가 못 본 척하면 된다고 했지. 못 알아들었어?”임정원은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안현우를 바라보았다.“안 대표님, 여기에는 감시 카메라가 다 설치되어 있습니다.”안현우는 비웃으며 임정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감시 카메라가 있으면 뭘 어쩔 건데? 그렇다고 내가 널 못 때릴 것 같아?”그는 요즘 회사 일 때문에 원래부터 화를 많이 참은 상태였다. 방금 강하리 같은 여자에게도 맞았으니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회의실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강하리는 재빨리 앞으로 나와 임정원을 부축했다.“임 변호사님 괜찮으세요?”임정원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강하리는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신고하셨어요?”“네 신고했습니다.”안현우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안씨 가문의 세력은 구씨 가문 보다는 약했지만 이런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을 정도로 약하진 않았다.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강 부장, 내가 지금 승훈이한테 당장 너하고 잠자리를 갖는다고 하면 승훈이가 어떤 반응일 것 같아?”“안현우, 그만해.”강하리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두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임정원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안현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안현우는 임정원이 주먹을 휘두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신을 차린 뒤 바로 다시 주먹을 날렸다. 순간 응접실 안은
남자는 회색 코트를 입고 몸에는 바깥의 산들바람이 묻어있는 듯했다. 그가 그냥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강하리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머리가 어질어질해 났다. 그녀는 분명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구승훈이 여기에 올 줄은 몰랐다.게다가 방금 임정원과 나눈 얘기를 구승훈이 들었을지 확신을 할수 없었다. 임정원은 구승훈을 보자마자 이마를 찌푸렸다. 이건 너무 우연이었다. 오히려 안현우는 구승훈을 보자 얼굴에는 얄미운 미소가 번져 나왔다. "승훈아 들었지? 이건 내가 꾸민 일이 아니야. 연성 시에서 못 돌아다닐지 걱정되지도 않는지 오늘 임 변호사가 강 부장을 위한답시고 날 때리기까지 했어." 구승훈은 안현우를 봤다가 눈길을 강하리에게 돌렸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웃었다. "하여간 강 부장은 문제 일으키는 데는 뭐 있어." 강하리의 얼굴은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구승훈은 다가가서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쓰다듬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너 때문에 다퉜다고?" "아니에요!" 강하리는 바로 부인해 나섰다. "그럼 뭔데? 설명해 봐." 강하리는 안현우를 째려봤다."안 대표님이 저를 성추행 하려고 하셔서 임 변호사님께서는 저를 지키려고 손을 댄 것뿐이에요." 안현우는 한발 물러서면서 웃었다. "강 부장이 나한테 꼬리 치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안현우!" 강하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평생 이렇게 악마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강하리는 도무지 그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전에도 원활하게 협력하는 사이였는데 말이다. 지금 강하리 눈에 안현우는 그저 변태로밖에 안 보였다. 안현우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으면 안달 난 사람 같았다.그녀가 불행하고 화를 내야만 속이 후련해 보였다. 안현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강 부장님, 인정하기 싫으세요?" 강하리의 입술은 깨물었다. 그녀는 구승훈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런 적 없다고 하소연했다.안현우는 계속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구승훈의 눈섭은 한껏 위로 치켜올랐다.그는 미소를 머금고 강하리를 쳐다봤지만 어떤 기쁨도 그의 표정에서 찾을 수 없었다.“강 부장, 나랑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뭔데?”강하리는 옆에 있던 임정원한테 눈짓을 하며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임정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져다봤다.“오래 걸리지 않을 거에요.”강하리가 다그치자 임정원은 마지 못해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임정원이 나간 후,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시선을 돌렸다.“대표님, 임 변호사님께서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으셔서요.”구승훈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듯, 되려 강하리의 손목을 꽉 잡고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쇄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그래서?”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니까 임 변호사님께서 먼저 가시게 하는게 좋지 않을가요?”구승훈은 비웃듯 말했다.“강 부장,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데?”강하리는 임정원이 구승훈의 두번째 도우미가 될까 두려웠다.도우미는 구승훈의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해고된거로 끝났지만, 만약 구승훈이 진심으로 화를 내면 임정원은 더 이상 보경시에 남을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임정원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강하리는 사실 구승훈의 의도를 이해했다. 구승훈은 그녀에게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구승훈의 악의적인 미소를 보며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곧 개정이라 지금 번역사를 바꾸는 것은 어려워요." "나와 뭔 상관인데? 강하리, 이 사람은 너가 아니면 안되는거야?" 강하리는 속이 부글부글 타올랐지만 지금은 구승훈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속에서 불타오르는 화를 꾹 참고 말했다."대표님께서 전에 제가 이 알바를 하는 걸 허락해 주셨잖아요."구승훈의 얼굴은 점차 굳어갔다. 그는 강하리를 보며 기쁨과 분노가 공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강 부장이 어떤 알바를 하던 간섭하지 않을게. 하지만 강 부장도 내가 뭘 하든간섭하
강하리는 발버둥치기 시작했다.방금 그런 일을 겪은 상황에서 그녀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구승훈은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구승훈은 평소 강압적이지만, 이런 면에서는 더 잘 표현된다.강하리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몸 곳곳이 뜨거워졌다.구승훈은 그녀의 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강하리의 몸은 나른해졌다.구승훈의 늘씬한 허벅지도 그 틈을 타서 그녀의 다리 사이로 힘껏 파고 들어갔다.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엘리베이터 거울에 환히 비춰지고 있었다.강하리는 눈을 떴다가 인츰 다시 감았다.구승훈은 피식 웃고는 뻔뻔하게 그녀를 놀려댔다."강 부장, 몸이 왜 이렇게 나른해졌어?”구승훈은 침대 위에서 그야말로 개자식이었다.잠자리를 가질때마다 강하리에게 얼굴을 붉히는 말들을 퍼부었다.그러나 오늘날 강하리는 수치심을 느꼈다.마음은 원하지 않았지만 몸은 마음과 달리 저절로 반응했다.구승훈도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이 좋아졌다.강하리는 아마 전에 춤을 배웠어서 유연한 편이었다.하여 구승훈이 침대 위에서 어떤 자세를 요구하던지 그에게 맞춰줄 수 있었다.사실 오늘 그 두 남자가 강하리를 두고 싸운게 구승훈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강하리는 누가 봐도 정말 매력적이었다.그러나 구승훈은 그녀의 목에 있는 손자국을 보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의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 낙인찍혔다니.구승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오늘 어떻게 안현우한테 꼬리를 치셨나? 강 부장?”안현우의 이름 석자를 듣자 강하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비로소 구승훈의 말 속에 담긴 악랄함을 알아차렸다."대표님은 제가 정말 그를 꼬셨다고 생각하세요?”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는 당연히 강하리가 안현우를 꼬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에 응어리가 떨어지지 않자 강하리 한테 태클을 걸고 싶었다."안 꼬셨어?"구승훈이 턱을 꼬집으며 힘을 주자 그녀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졌다.강하리는 썩소를
구승훈이 들고 온건 음기 붓기 제거제였다."미안, 아까는 내가 급해서, 좀 거칠었지?”강하리의 표정은 잔뜩 어색해 졌다.잠시 후, 평소의 공손함과 거리감이 다시 회복되었다."제가 직접 바르면 돼요.”구승훈은 실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혼자서 되겠어?”강하리는 그 약을 슬쩍 보았다."네."하지만 구승훈은 약을 내주지 않고 그녀를 자기 앞으로 잡아당겼다."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본적 없는 것도 아닌데.”강하리의 표정은 삐걱거렸다. 그녀와 구승훈의 관계는 거리감이 있었다.어쨌든 그녀는 여전히 구승훈 한테 돈을 받고 있으니, 그와 잠자리를 갖는 것까지는 괜찮았다.하지만 그와 이런 친밀한 행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진짜 저 혼자 바를 수 있어요.”그녀는 그 약을 손에 넣으려 시도를 했지만, 구승훈은 끝내 주지 않았다.구승훈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자, 강하리는 결국 포기했다.그는 약을 다 발라주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잠깐 누워 쉬고있어. 조금 후 다른 약 또 먹어야 해.”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약이요?”"피임약.”강하리는 그제서야 방금 구승훈이 콘돔을 끼지 않았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사실 지금은 약을 먹든 안 먹든 상관이 없었다.어차피 임신도 못 하는 상황이다.하지만 아마 구승훈이 마음이 놓이지 않나 보다.지난번 예상치 못한 임신은 이미 그의 금기를 어긴 셈이다.이런 마당에 구승훈은 그녀가 또 임신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얼마 지나지 않아 피임약이 배달되었다.강하리는 세상 평온하게 약을 목구멍으로 넘궜다.구승훈은 그녀의 기분이 상했다는 걸 대충 알아차렸다."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말자.”강하리는 어이없는 듯 픽 웃었다. 그런 실수는 다시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일어날 기회조차 없었다."네, 알아요.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두 번 다시 임신하지 않을 거예요.”구승훈은 그녀가 토라진 줄만 알고 비아냥댔다."강
강하리는 슬며시 눈을 떴다.구승훈은 주섬주섬 그녀한테 옷을 입혀줬다."왜 또 열이 나는 거지? 어디가 불편해?”강남은 가슴이 심하게 출렁거려 온몸이 찌뿌드드했다.숨이 가빠지고 뭔가 목구멍에 막힌 것 같았다."승훈 씨, 저 숨을 못 쉬겠어요.”그녀는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구역질하다가 구토를 하였다.구승훈은 한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안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구승훈은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리를 병원으로 옮겼습니다.의사는 그녀의 상태를 이해한 후 바로 알레르겐을 검사하더니 물었다."혹시 피임약 드셨어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고는 한 번 먹은 적 있다고 답했다.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말했다. "네, 그래, 환자분은 피임약 알레르기가 있으세요. 약은 이미 처방했고, 이따가 수액을 맞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환자분의 알레르기 반응은 매우 심각하니까 가능한 피임약을 복용하지 마세요.”구승훈은 머리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떠난 후 병실은 조용해졌다.구승훈은 침대 옆에 앉아서 한참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다음부터는 꼭 콘돔 낄게.”강하리가 임신하면 안 되는 것은 그의 마지노선이었기에 줄곧 콘돔을 잘 꼈었다.지난번은 뜻밖의 사고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너무 급했다."네, 감사합니다.”강하리의 목소리는 몹시 차분했다.말투에는 거리감이 잔뜩 느껴졌다.구승훈은 그녀의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만 해도 거슬렸다.사실 그동안 강하리의 태도는 늘 그랬다.예의는 있지만 항상 거리를 뒀다.일부러 삐딱하게 구는 것 같았다.구승훈은 한동안 그런 강하리가 신경이 쓰였지만 나중에는 그냥 내버려뒀다.충분히 짜증 내다가 자연스레 넘어갈 꺼라 생각했다.구승훈도 늘 이만한 일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다만 한 달이 지나도록 그녀가 계속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구승훈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침대에 누워 숨쉬기도 힘들어 하는 그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 간호사가 약을
"죄송합니다, 구승훈 님. 방금 전에 나간 간호사는 인턴이라 아직 미흡해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그 송유라 팬, 바로 해고하세요.”간호사의 얼굴색이 변했다.이분이 말로만 듣던 송유라의 남자 친구면 설마 송유라 팬을 해고하라고 할지 의문이들던 중 문득 환자로 누워있던 강하리가 생각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강하리를 보니 증상은 피임약 알레르기로 인한 기관지 경색이었다.간호사님은 눈빛이 번쩍이더니 강하리를 이상한 눈빛으로 봤다.강하리는 그 눈빛을 무시한 채 링거를 맞은 후 눈을 감았다.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좀 괜찮아졌어?”강하리가 입원 후 의사는 그녀에게 항알레르기약을 처방했다.그러나 증상이 심한 탓에 수액을 투여하기로 한 것이다.약을 복용한 후 그녀의 증상은 다소 완화되었다."좀 괜찮아졌어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배고프지 않아?”“아니요.”강하리는 배가 고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간간이 토하고 싶었다."배 안 고파도 좀 먹어, 먹을 것 좀 사 올게.”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터벅터벅 병실 밖을 나섰다.강하리는 마음이 쓰렸다.비록 이 남자를 떠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이렇게 구승훈과 송유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칼에 베이는 듯 슬펐다.그녀는 붉어진 눈을 손으로 슬며시 가렸다.강하리가 일곱 살 되던 해에 구승훈을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안타깝게도,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어릴 적 구승훈은 그녀의 어린 시절의 몇 안 되는 즐거운 기억이다.강하리는 그 후 여러 해 동안 힘들거나 아플 때 그 기억을 달콤하게 되새겼다.그녀도 줄곧 구승훈을 평생 달콤한 추억으로 되새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구승훈은 그녀에게 있어서 달콤한 사탕 같은 존재이기도 했지만 마약같은 존재이기도했다.그녀는 이미 달콤한 사탕 맛을 봤기에 이 마약을 끊을 수가 없었다.지금, 구승훈은 그의 첫사랑을 손에 거머쥔 채 행복에 겨워했다그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말하면 고통 없이 죽게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 다물고 버틴다면 당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거든.”차갑게 말을 내뱉은 구승훈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임희주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외쳤다.“구 대표님, 저... 저 당신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했어요...”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 아무도 듣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곧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형수님.”구승재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섞여 있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좀 피곤하거든요.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구승재는 멍하니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형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지만 그 메시지조차, 아무런 응답 없이 그대로 묻혀버렸다.구승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구승훈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안 됐냐?”대답 대신, 구승재는 말없이 다가가 그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눌러 껐고 재떨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잠시 후, 노민준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담배 끊든가 안정제 맞든가. 선택해.”구승훈은 그를 빤히 보더니 침대 위로 몸을 기댔고 노민준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강하리가 유엔 인맥까지 써서 약리학자 세 명 데려온 거 알고는 있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 그 사람들 상담료가 어느 정도인 줄 알아? 분 단위도 아니고 초 단위로 계산된다. 다 너 살리려고 이 난리인데 넌 진심으로 그 노력을 다 무시하고 싶은 거냐?”그 말에 구승훈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약리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