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내내 방에만 갇혀 지냈고 장태양은 소식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그날 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숨 막히는 가슴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막 계단을 내려오던 중 갑자기 눈이 캄캄해지면서 의식을 잃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달리는 차에 묶여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바로 내 앞에 유미연이 앉아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화려한 모습이 아니었고 얼굴은 팅팅 부어 비참해 보이기까지 했다.“이희주, 드디어 깨어났구나!”깨어난 나를 보며 유미연은 이를 악물고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네가 왜 여기 있어, 원하는 게 뭐야!”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이미 머릿속으로는 짐작하고 있었다.“원하는 게 뭐냐고? 그러는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서은이가 죽었는데 넌 왜 안 죽어?”유미연은 갑자기 흥분했다.“빌어먹을 너희 때문에 태양 오빠가 날 때린 것도 모자라 나랑 단우까지 쫓아냈어!”“잘됐네. 당연히 그래야지.”고개를 홱 들어 화가 나서 그녀를 노려보았다.“네가 우리한테 들러붙지 않았어도 서은이는 죽지 않았어.”“그래서 뭐? 누가 오빠 옆에 붙어 있으래?”유미연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나랑 오빠는 소꿉친구고 우리야말로 천생연분이야.”“소꿉친구가 뭐? 그래봤자 내연녀는 내연녀야!”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네가 날 죽여도 장태양은 아내를 사별한 사람이고 넌 영원히 떳떳하지 못한 내연녀야!”“너!”유미연은 내 말에 제대로 자극받아 홱 손을 들고 내 뺨을 세게 때렸다.얼굴이 옆으로 돌려지고 입가에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이희주, 잘 들어.”유미연이 다가와서 또박또박 말했다.“서은이의 죽음은 내가 다 꾸민 일이야! 단우한테 아픈 척하라고 시킨 것도 나고 기사님에게 일부러 데리러 오라고 알리지 않은 것도 나고 목소리를 합성한 것도, 심지어 차 안에서 늑대에게 공격당하게 한 것도 내가 창문에 수작 부린 거야.”“유미연! 너 가만 안 둬!”나는 성난 암사자처럼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그녀의 살점을 물어뜯어
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나를 멈춰 서게 했다.환한 거실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식탁에는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채 달콤한 과자 향이 공기를 가득 채우는 즐거운 모습이 펼쳐졌다.반면 내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장태양과 유미연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꼭 붙어있었다.시어머니는 맞은편에 앉아 유미연의 아들 단우를 품에 안고 과자를 조금씩 먹이고 있었다.아이의 작은 얼굴은 과자 부스러기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깔깔거리는 모습이 내 딸을 떠오르게 했다.과자... 내 딸...심장이 심하게 뛰고 눈앞이 침침해지며 기절할 뻔했다.“어머, 언니 왔네요? 명절날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요?”유미연은 매서운 눈빛으로 입구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녀는 말하면서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과시하는 듯 일부러 장태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장태양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번쩍 떠올랐다.“명절날에는 좀 웃을 수 없어? 그리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좀 깔끔하게 하고 다니라고. 미연이 좀 따라 배워.”흐트러진 옷과 뒤집어쓴 먼지를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겠는데 그는 걱정이 아니라 불만과 혐오감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심호흡하고 차갑게 그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장태양, 딸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옆에 있던 시어머니는 내 질문을 듣고 품에 있는 아이를 토닥거리며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 말 할 염치가 있니? 네가 낳은 애는 너처럼 철이 없어. 명절날에도 밖에 돌아다니기나 하고. 단우를 봐...”“뭐라고요?”몸을 똑바로 세우고 시어머니를 잔뜩 노려보며 잇새로 겨우 소리를 뱉어냈다.날카롭고도 낯선 내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리면서 자리에 있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그들은 지금처럼 실성한 내 모습을 본 적이 없다.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장태양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화난 표정으로 나에게 삿대질했다.“이희주,
고개를 들어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지금 이 남자는 내 눈에 너무나 낯설고 역겨운 존재였다.“뭐가?”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태도야?”장태양은 불쾌한 기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물었잖아. 표정이 왜 그래?”“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왜 우리 딸을 차에 혼자 남겨뒀어? 왜, 대체 왜!”장태양은 무슨 대단한 농담을 들은 듯 비웃었다.“이희주, 미친 거야? 그때 차가 고장 났고 단우가 갑자기 열이 나서 구급차를 불러야 했는데 구급차는 세 명밖에 태울 수 없어서 서은이는 차에 뒀어.”“구급차에 세 사람밖에 못 탄다고?” 그의 말을 반복하며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심장을 꽉 쥐고 있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그래, 그게 뭐?” 장태양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아니면 미연이랑 애를 벌판 한가운데서 기다리게 할까? 게다가 서은이 데리러 갈 사람도 보냈어. 잠깐인데 대체 뭐가 문제야?”“사람을 보내? 잠깐이라고?” 나는 격렬하게 일어나 그가 내민 손을 뿌리치며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장태양, 그 망할 잠깐 때문에 우리 딸이...”목이 메어 더 이상 그 잔인한 말을 할 수 없었고 장태양은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말해줄게. 서은이가...”심호흡을 깊게 하고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서은이가 늑대 무리에게 물려서... 죽었어.”그 말을 내뱉는 순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심연에 떠밀려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온몸이 얼어붙은 채 눈앞이 캄캄해졌다.장태양은 잠시 멈칫하다가 소리쳤다.“이희주, 너 정말 미쳤구나? 이젠 딸한테 저주까지 퍼부으며 엉뚱한 이야기를 지어내? 정말 양심도 없네!”그의 눈에 담긴 경멸과 조롱이 날카로운 칼처럼 내 가슴을 찔러 고통스럽게 했다.“무슨 뜻이야?”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날 못 믿는 거야
단번에 서은이 목소리와 비슷하지만 우리 딸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분명 문제가 있는 음성이다.장태양을 노려보며 분명하게 말했다.“장태양, 저 음성 메시지 수상해. 자세히 들어봐, 평소랑 다르지 않아?”하지만 장태양은 내 말을 믿지 않고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이희주,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이제 와서 또 무슨 거짓말을 지어내려고?”심호흡하며 내 안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이렇게 말했다.“거짓말 아니야! 날 믿어. 서은이는 진짜...”이때 옆에 있던 유미연이 날카로운 어투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언니, 계속 억지 부릴 거예요? 거짓말이 들통났는데 아직도 막무가내로 구네요.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오빠가 바보 같아요?”장태양은 화가 나서 유미연을 데리고 방을 나가며 조롱하듯 문을 쾅 닫았다.나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절망에 사로잡혔다.‘장태양, 변했어. 이젠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됐어.’한 이불 덮고 자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믿네. 진짜 나와 우리 딸을 걱정한 적은 있을까?나는 천천히 일어나 딸의 옷장으로 걸어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딸의 옷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딸의 온기를 느끼듯 하나하나 어루만지다 보니 눈시울이 붉어졌다.딸아이의 옷, 장난감, 책 등 딸아이가 좋아하는 모든 물건을 가방에 담았다.집으로 가자, 이 추운 곳에서 벗어나자.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방 밖으로 나오니 거실에 유미연만 남은 채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내가 나오는 것을 본 그녀는 잡지를 내려놓더니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녀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이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그런데 유미연이 일어나서 내 앞을 가로막더니 두 팔로 팔짱을 끼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이렇게 빨리 짐 싸서 나가는 거야? 어떻게든 꾸역꾸역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나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왜, 내가 너무
무표정한 얼굴로 팔찌를 빼 쓰레기통에 아무렇지 않게 버리면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장태양 같은 쓰레기 난 필요 없어. 갖고 싶으면 너나 재활용 해.”“너...”유미연은 화가 나서 몸을 벌벌 떨면서 나한테 홱 다가와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했다.“이희주,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해? 지금 네 꼴을 봐. 넌 그냥 버림받은 아줌마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잘난 척 해?”나는 겁 없이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내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뭐가 됐든 난 장태양과 당당히 결혼한 아내고 넌 그저 남의 가정 파탄 낸 내연녀일 뿐이야.”택시에 올라타서 정리된 딸의 유품을 품에 꼭 안았다.서은이, 우리 아가,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널 지켜주지 못했어...서은이의 귀엽게 웃는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고 앳된 목소리로 ‘엄마’라고 부르던 게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았다.장태양과 나는 대학 동창으로 졸업 후 순조롭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가정 환경이 우월한 장태양은 회사를 물려받았고 난 조건은 평범했지만 배운 사람이라 우리 둘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특히 서은이가 태어난 후 장태양은 ‘딸바보'가 되어 매일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서은이를 안은 채 뽀뽀하고 놀아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일상이 됐다.주말이면 장태양은 회사 일을 제쳐두고 서은이와 나를 데리고 놀이터나 공원에 가서 한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된 기분이었고 그런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던 어느 날,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유미연이라는 여자가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났다.장태양은 다른 사람이 된 듯 나와 서은이에게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유미연 모자는 살갑게 챙기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그제야 유미연이 장태양의 소꿉친구였고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며 사랑에 빠졌는데 대학에 가기 전 유미연의 가족이 갑자기 작별 인사도 없이 출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수
그 후 며칠 동안 로봇처럼 서은이 일을 마무리했다. 내딛는 한 걸음이 칼끝을 밟는 듯 지옥이고 아팠다.써늘한 장례식엔 나 혼자였다.친척이나 친구도, 눈물이나 웃음도 없이 그저 끝없는 슬픔과 절망만이 나를 압도했다.후회와 자기혐오가 독사처럼 내 마음을 갉아먹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다.서은이 장례를 마치고 따라갈지 생각도 했었다. 가는 길에 서은이 혼자면 외로울 테니까.온갖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장태양의 문자 하나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내 온몸을 싸늘하게 했다.[이제 충분해? 서은이는, 어디로 데려갔어?][와서 미연이한테 사과하면 그냥 넘어갈게.]당연한 듯한 그의 오만한 말투는 날 잘못한 사람으로 몰아갔다.그 문자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장태양, 네 착한 동생이 네 딸을 죽인 건 알고 있어?그렇게 잘 챙겨주겠다던 서은이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난 건 알아?문득 그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충격? 후회? 아니면... 무관심?[사과를 원해? 그래, 나 여기 있어. 데리러 와.]주소가 적힌 문자 메시지를 전송한 다음 힘에 겨워 손마디가 하얗게 변한 채로 휴대폰을 꽉 쥐었다.장태양이 한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직접 보여줄 거다.장태양이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들어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사과한다니 됐어. 진작 이러면 좀 좋아? 나랑 미연이는 그냥 남매라고 몇 번을 얘기해! 그리고, 여긴 뭐 하는 데야? 재수 없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선은 벽에 걸린 사진으로 향했다.확대된 영정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녀는 서은이었다.멍하니 자리에 굳어진 장태양의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몇 초 후, 그는 정신을 차렸고 분노가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이희주, 또 뭐 하는 거야? 이런 걸 왜 붙여? 왜 우리 딸을 저주해!”그는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사진을 가리켰다.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냉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얼마나 멍청하면 아직도 서
장태양의 손바닥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지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말도 안 돼... 이럴 수가...”나는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말도 안 돼? 서은이는 죽었어! 네가 초원에 버려두고 가서 늑대 무리한테 찢겨 죽었다고!”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무슨 소리야? 서은이는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거짓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해!”나는 울부짖었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겼다.“그날 왜 서은이를 차에 혼자 두고 왔어? 왜 한적한 곳에 혼자 두고 왔어!”장태양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떨렸지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말해! 서은이 데리러 가라고 기사님 보냈다며? 근데 왜 기사님은 아무것도 모른대?”쉬지 않고 몰아붙이며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그는 고통스럽게 머리를 움켜쥔 채 바닥에 무력하게 앉아있었다.“나... 난 엄마 전화를 받고 단우가 갑자기 심각하게 아프다고 해서...”“그래서 서은이를 차에 혼자 두고 왔어? 그게 친딸을 버린 이유야? 그날 밤 돌아왔을 때 단우는 아주 멀쩡했어! 게다가 아무리 급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다른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어?”화가 치밀어 그의 말을 가로챘다.“구급차가 세 명만 태울 수 있다고 해도 머리를 굴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지는 않았어? 어린 딸을 두고 떠나야만 했냐고! 서은이가 늑대에게 갈기갈기 찢기고 뼈도 남지 않았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해 봤어? 네가 그러고도 아빠야!”내 질문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장태양은 할 말이 없어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그는 서은이 사진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 뺨을 세게 치며 용서를 빌었다.“서은아,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돌아와 줄래... 아빠가 이렇게 빌게...”눈앞의 장면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 분노가 치밀어 올라 나는 그에게 달려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며 그를 밀쳐냈다.“넌 미안하다고 말할 자격도 없어! 넌 서은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