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관제탑으로 연락을 넣었다.진태성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KR2991이 특수한 상황이라 먼저 착륙해야 해. 우선 좀 기다려.”나는 버럭 소리쳤다.“우리가 지금 있는 지역이 마침 천둥번개 지역으로 의심돼...”진태성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정세현, 그만 좀 해. 본인이 안전하게 착륙하겠다고 이젠 거짓말까지 하네. 왜? 이젠 하영이 곧 죽는다는 소리는 못 하겠어?”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진태성, 이거 규칙에 어긋나. 이 비행기에 삼백 명도 넘게 타 있다고!”“당신도 다른 비행기에 탄 몇백 명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었잖아!”진태성은 버럭 소리쳤다.“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목숨만 중요하지? 어쩜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이야?”건너편에서 임정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와, 태성 오빠, 여기가 오빠가 일하는 관제탑이야? 나 이런 곳 처음 와 봐...”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던 심장이 또다시 바닥으로 추락했고,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아팠다.하영이도 아빠가 일하는 곳이 궁금하다며 수없이 참관하고 싶다고 부탁했었다.심지어 하영의 6살 생일날, 내가 대신 하영의 소원이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그때 진태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간을 좁히며 거절했다. ‘하영이도 이젠 다 컸는데 왜 아직도 제멋대로야? 그곳은 일하는 곳이야, 관계자도 아닌 사람이 마구 들어갈 수 있는 줄 알아?’라면서.그런데 지금 딸의 시체도 채 식기 전에 진태성은 임정안을 관제탑에 데려갔다.순간 코웃음이 나왔다.“진태성, 비행기 사고라도 나면, 당신 징계받을 거야! 지난번 징계 때도 내가 당신 계속 공항에서 일하게 하려고 돈을 얼마나 처박았는지 알기나 해?”“웃기는 소리 하지 마!”진태성은 냉소를 지으며 내 말을 끊더니 마이크에 대고 버럭 소리쳤다.“정세현, 당신 정말 추하다. 내가 설마 모를 줄 알았어? 그때 정안이가 나 대신 징계 취소해 주지 않았으면 나 벌써 일자리 잃었어. 그런데 당신은 내 상황 뻔히
극한의 분노에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다시 진태성을 연결했다.하지만 관제탑에서 이번에는 아예 우리 비행기와의 모든 연락을 끊어버렸다.나는 진태성의 도움뿐만 아니라 관제탑에 있는 다른 동료들한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비행기는 미친 듯이 요동쳤고, 좌석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 비명, 심지어는 통곡 소리까지 들려왔다.승무원이 조종실로 들어오는 찰나, 객실에서 고객들의 욕설이 흘러 들어왔다.“뭔 비행기가 이따위야? 오늘 여기서 죽는 거야?”“기장이 원한을 사서 이 사달이 났다던데. 젠장, 기장 한 명 때문에 우리 목숨도 위험하게 생겼네.”“운전은 왜 해? 당장 기어 나와 사과나 해라!”심지어 일부 고객들은 내 딸까지 욕했다.“이 여자애가 기장 딸이라던데, 이 계집이 아니면 우리가 이런 사고를 당할 일은 없었을 텐데!”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그런 사람을 욕해주었다.“망자에 대한 존중은 좀 지킵시다! 우리는 아직 죽은 거 아니잖아요! 기장님 좀 믿어 보자고요!”고객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이 사회가 어떤지 단번에 드러났다.그때 승무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기장님, 밖에 상황을 점점 공제하기 어렵습니다...”나는 복잡한 조종대의 각종 버튼을 주시하며 심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주 기장, 이제 믿을 건 우리뿐이에요.”주정우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식은땀을 흘렸다.“자신 있어요?”내 말에 주정우는 심호흡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우리는 이미 관제탑의 버림을 받은 상태다.그렇다고 다른 항공기의 비행을 방해할 수 없기에 나는 평소에 가본 적 없는 선로를 따라 한 바닷가로 향했다.다행히 천둥번개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구사일생으로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마지막 순간, 항공기 안 고객들은 누구도 욕설을 퍼붓지 않았다.그들은 모두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키거나 조용히 울거나, ‘죽음’을 기다렸다.하지만 비행기가 성공적으로 착륙하는 수간,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허리 굽혀 경
나는 나풀거리는 사망 증명서를 받아 들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던 사람이 이렇게 무게도 안 나가는 종잇장이 되어버렸다.나는 흐리멍덩한 상태로 뒤돌아섰다. 하지만 내가 떠나려고 할 때, 진태성이 손을 뻗어 그 종잇장을 빼앗아 갔다. 그의 낯빛은 무척 어두웠다.“그럴 리가...”진태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때 옆에 서 있던 임정안이 그의 옆에 바싹 붙더니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정말 감쪽같네? 세현 언니, 이건 어디서 만든 거예요?”그 순간 진태성은 멈칫했다.그러더니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손에 든 사망 증명서를 갈기갈기 찢어 내 쪽으로 던졌다.날카로운 종이 모서리가 마침 내 오른쪽 볼을 베었다.하지만 진태성은 보는 체도 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가짜 사망증명서를 떼는 건 불법이야. 이봐요, 간호사님, 이 여자랑 짜고 이런 연기 하다가 본인도 골로 간다는 거 몰라요?”간호사는 미간을 팍 구겼다.“무슨 헛소리예요? 이분 따님은 정말...”“그만.”진태성은 간호사의 말을 자르더니 나를 역겹다는 바라봤다.“당신의 그 가식적인 얼굴만 봐도 속이 메슥거려!”그때 수많은 기자들이 안으로 몰려들면서 내 쪽으로 마이크를 들이밀었다.“정 기장님, 영웅이 되셨는데 하실 말씀 없나요?”“이번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기장님 따님분이 유일하다던데, 이에 대해 어떻게 셍각하십니까?”“하!”짤막한 웃음소리가 단숨에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그 순간 마이크와 카메라는 모두 진태성을 가리켰다.진태성은 눈썹을 치며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다들 속았어요! 이 여자는 공을 세우려고 자기 딸이 죽었다는 거짓말까지 했다고요. 기자라는 작자들이 어쩜 사실 확인도 안 해요?”그때 기자 한 명이 놀란 듯 물었다.“그 말은 정 기장님의 따님이 사망한 게 아니라는 겁니까?”그 말이 떨어진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다들 수군거리며 나를 손가락질했고, 얼굴에는 나를 경멸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때 한 기자가 입을
다시 태어난 후, 나는 항상 뭔가를 잊은 것만 같았다.하지만 나를 비웃는 듯 건넨 임정안의 말에 무심코 나를 일깨워주었다.전생에 딸과 함께 방에 갇힌 뒤 나는 진태성에게 애원했었다. 어떻게 처자식한테 이럴 수 있냐고.그랬더니 진태성이 하는 말이 ‘처자식? 쟤가 내 딸인지도 모르는데!’였다.너무 믿을 수가 없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정태성은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정세현, 너 주정우 그 자식이랑 진작 붙어먹었지?”나는 충격적인 말에 몸이 굳었다.그랬더니 진태성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그때 왜 정신이 팔려 해고될 뻔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 당신과 주정우 그 자식이 예약한 호텔 기록을 봐서 그랬어.”“그리고 당신의 위로가 가장 필요할 때 일주일이나 사라졌었지? 뭐? 휴가? 주정우 그 자식이랑 커플 여행이라도 다녀왔겠지! 그런데 감히 내 앞에서 하영이 내 친딸이라고 말해?”꽁꽁 묶인 나는 절망에 빠져 해명했지만, 돌아오는 건 진태성의 분풀이였다.나는 알려주고 싶었다. 주정우와 호텔을 예약한 기록은 출장 때문이었고, 일주일 동안 휴가를 낸 건 진태성이 징계를 피할 수 있도록 접대하러 다니며 술 먹느라 위출혈로 입원했었다고.하지만 진태성은 나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그때는 진태성이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오늘 그 의문이 모두 풀렸다.임정안이 중간에 손을 쓴 게 틀림없다.사람들의 책문을 받으며 나는 임정안을 밀쳐버렸다.그랬더니 임정안은 불쌍한 척 쓰러지며 눈물을 글썽였다.“세현 언니, 난 그냥 언니를 도와주려고 한 건데, 왜 호의마저 무시해요?”진태성은 단숨에 달려와 내 뺨을 후려 갈겼다.그러고는 임정안을 다정하게 부축하더니 안쓰러운 듯 말했다.“정안아, 괜찮아?”임정안은 처연하게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세현 언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나를 바라보는 진태성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정세현, 당신 입으로 딸이 죽었다며? 당신처럼 악독한 여자나 당신
진태성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공포에 질려 뒷걸음쳤다. 그러면서 계속 입으로 중얼거렸다.“아니야... 그냥 가벼운 심장 질환이잖아. 이건 가짜야... 그래, 이건 가짜라고!”진태성은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이를 갈았다.“정세현, 어디서 이렇게 감쪽같은 인형까지 구해왔어? 아주 깜빡 속겠어!”하지만 말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진태성도 이 아이가 자기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하기 싫었을 뿐.그때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대체 무슨 이리죠?”“정 기장님 딸이 정말 사망했는데 남편이 왜 모르는 거예요?”“아직도 모르겠나? 남자 옆에 불여우가 붙었잖아! 딱 봐도 뻔하지 뭐, 저 여자가 중간에서 이간질했고, 쓰레기 남편은 그거에 홀랑 넘어갔네, 뭐!”이 말 한마디에 여론은 180도 바뀌었다.나를 향했던 폭언들은 방향을 틀어 진태성과 임정안에게로 향했다.그때 임정안이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진태성에게 뭔가를 속닥거렸다.진태성은 깨달음을 얻은 듯 낯빛이 싹 변하더니 허리를 곧게 펴고 버럭 소리쳤다.“그래! 정말 죽었으면 뭐? 내가 죽인 것도 아니잖아!”진태성은 냉소를 지으며 나에게 삿대질했다.“정세현, 저 애가 내 딸인지 아닌지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이 여자가 바람을 피워 다른 남자랑 아이를 낳았습니다!”진태성의 멍청함에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은 생각도 없어, 나는 딸애의 시신을 밀면서 밖으로 나갔다.장의차는 벌써 밖에 도착해 있었다.그런데 진태성은 미친 사람처럼 이내 뒤쫓아 왔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망신 줘야 직성이 풀리는 듯. 심지어는 주정우의 팔을 잡아당겨 주먹을 휘둘렀다.“당신이 바람피운 상대가 여기 있잖아. 변명 더 해 봐!”주정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저요?”“아직도 발뺌할 거야? 너 정세현과 호텔도 잡았잖아. 그것도 부인할 생각이야?”임정안의 낯빛은 그 순간 어두워지더니 얼른 정태성의 팔을
순간 장내는 떠들썩해졌다.진태성의 얼굴도 바로 어두워졌다.“그건 정서현이 백을 믿고 순서를 앞당겨 착륙하려고 해서...”“진태성, 관제사로 몇 년 동안 일했는데 규칙도 잊었어? 비행기에 생사를 오가는 환자가 있으면 앞당겨 착륙하는 게 당연해!”진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임 팀장이 말을 이었다.“정 기장이 휴가 다녀온 일주일 동안 뭐 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내가 알려주지! 네가 공항에서 잘리는 거 막아보겠다고 상관 비위 맞추며 술 마셔대는 바람에 위출혈로 입원했어!”“정 기장은 네놈 걱정할까 봐 비밀로 하고 혼자 버틴 거야. 안 그러면 그 사고를 치고 왜 그렇게 가벼운 처분만 받았겠어? 그 정도 사고는 해고할 명분이 충분했어.”임 팀장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풋 쉬었다.“참 한심하다, 한심해! 정 기장이 얼마나 잘해줬는데 감사한 줄도 모르고. 이제는 하다 하다 딸 잃은 정 기장한테 그런 누명을 씌워?”진태성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임정안한테 사실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 도망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인파 속에서 진태성은 혼자 외롭게 굳어 있었다.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이럴 수가. 대체 왜 이런 거지? 정안이 분명 자기가 인맥으로 내 퇴사를 막아줬다고 했는데. 그 때문에 미안해서 정안한테 더 잘해준 건데, 그 사람이 왜... 당신이야?”진태성은 망연한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점차 공허해지다가 결국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점점 솟아났다.나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진태성, 당신과 함께 산 몇 년 동안, 난 당신한테 미안한 짓 한 적 한 번도 없어. 정우 씨랑은 그냥 동료 사이야. 선 넘은 적 없어. 전에 당신만 바라보고 뭐든 도우려고 했던 내가 바보였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야.”“그리고 하영은...”내 눈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쩍였다.“당신 친딸이 맞아. 아니면 내가 천벌을 받을 거야.”내가
임 팀장의 말에 의하면 진태성이 조사를 받던 도중, 미친 듯이 무릎 꿇고 시간을 달라며 부탁하더니 친자 확인 건사를 의뢰했다고 한다. 그것도 긴급 건으로.그리고 결과가 나오자 99% 일치하다는 친자확인서를 꼭 쥔 채 절망한 듯 무릎 꿇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딸, 내 딸. 아빠가 너를 죽였어. 아빠가 잘못했어...”그 뒤로 나는 더 이상 진태성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시에서 주는 표창장을 받고 두둑한 보너스도 받은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임 팀쟝은 더 생각해 보라며 나를 말렸지만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때 진태성을 가볍게 처분한 것도 제가 백을 이용한 것이니 규정에 어긋납니다. 이 일을 아는 사람들도 많으니 해명하기도 애매할 거고요. 제가 가면 그래도 말할 명분이라도 생기잖아요.”임 팀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정 기장 요즘 영웅이야. 누가 그런 자잘한 것까지 들먹이며 정 기장 트집을 잡겠어?”나는 싱긋 웃었다.“인터넷은 양날의 검과 같아요. 언제 여론이 저한테 칼을 겨눌지 모르잖아요.”내 말에 한참 고민하던 임 팀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앞으로 뭘 하려고?”“예전부터 딸과 함께 남극에 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거든요. 이제 긴 휴가도 받았겠다, 남극에서 1년 정도 여행하다가 일 찾으려고요.”“그래, 휴식기를 갖는 것도 좋지.”퇴사 수속을 마친 다음 날, 나는 어쩔 수 없이 진태성과 만났다.그날 진태성이 관제탑에서 한 행동이 인명 사고와 직결되지는 않았지만 공공 안전을 위협한 범죄에 속한다. 물론 지금은 보석 상태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경찰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진태성을 만났을 때, 그의 뒤에는 여경 한 명이 서 있었다.그 여경은 나를 보자마자 감격하며 인사해 왔다.“정 기장님! 기장님은 제 우상입니다. 우리 여성들의 귀감이기도 하고요.”여경과 악수를 한 뒤 고개를 돌려 진태성을 봤더니 그는 무척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이혼 얘기하러 왔어.”나는 이혼 합의서를 진태성 앞에 내밀었다.“재
다시 진태성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남극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났다.신호도 없는 곳에서 지낸 지 한 달 동안, 나는 함께 남극에 온 대원들과 부쩍 가까워져 매일 새로운 걸 탐험하러 다녔다.비록 주위가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몸도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마음만은 들끓었다.그날 어렵게 신호를 잡은 나는 구석에 몰래 숨어 가족에게 전화했다.하지만 핸드폰을 집어 든 순간 누구에게 문자를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카톡을 열어 보니 백통이 넘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지루하게 하나하나 넘기던 그때, 주정우가 보낸 문자가 내 눈에 띄었다. 그는 진태성의 근황을 알려 주었다.내가 남극으로 떠난 뒤, 진태성의 판결 결과도 나왔다. 그는 그 사건으로 일자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도 잃고 딸도 잃은 채 5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그 결과를 들은 순간 진태성의 멘탈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거액을 들여 사립탐정을 고용했고, 끝내 임정안의 행적을 찾아냈다.그때 임정안은 마침 해외 비자를 발급받아 해외로 도피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진태성이 막아섰고, 공항에서 과도를 꺼내 그녀를 스물 몇 번이나 찔렀다.임정안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진태성은 인파속에서 미친 듯이 웃어댔다.“다시 돌아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난 여전히 이런 결말이냐고?”말을 마친 진태성은 피 묻은 과도를 높이 들어 자기 심장에 내리꽂았다.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 진태성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이번에 다시 시작할 거야.”“한 번만 다시 시작하면 이번에는 제대로 선택할 수 있어.”“세현아, 하영아, 안 그래?”그 말을 끝으로 진태성은 영원히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질지 누가 알까?나는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주정우에게 답장하려고 했으나,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해 봐도 문장을 끝맺지 못해 결국 포기했다.핸드폰이 꺼지는 순간, 검은 액정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남자는 내 뒤에서 내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