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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작가: 소심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9:42:56
남편은 택시를 잡더니 젠틀하게 주완선을 차에 앉히고 따라 들어갔다.

저런 자상함을 난 언제 느껴봤더라?

...

나는 바보처럼 가게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남편이 없어도 충분했다.

나는 콜택시를 부르고 기사의 도움으로 우산을 쓴 채 차에 탔다. 더 젖지 않으려면 우산을 써야 했다.

나이가 들면 자칫하면 병이 나기 십상이니까, 내 스스로 자신을 아껴야 한다.

남편은 내가 집에 도착한 지 2시간이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굳은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우정희, 내가 가게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가 당신 데리러 가려고 쫄딱 젖은 거 알아?”

나는 이제 막 따른 따뜻한 물을 내려놓고 되물었다.

“얼마나 멀길래 내가 당신을 2시간이나 기다려야 해?”

남편은 순간 켕기는 게 있는지 더 이상 나에게 따지지 않았다.

“빨래 좀 하고 깨끗한 옷 좀 가져다줘.”

남편의 말에 그제야 그의 옷이 흠뻑 젖었고 머리도 젖어 얼굴에 찰싹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남편은 금방 벗은 옷을 내 발 밑에 던졌다.

지금껏 하인 다루듯 명령하는 말투에도 늘 고분고분 행동하던 나였다. 남편이 밖에서 고생하고 들어왔으니, 아내가 되어서 내조를 잘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남편의 명령에 따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런 생활 방식이 싫어졌다.

나는 발 밑에 있는 더러운 옷을 신경 쓰지 않고 앨범을 꺼내 물었다.

“설명 좀 필요하지 않아?”

늘 만만하기만 하던 내가 끈질기게 앨범 일을 물고 늘어지자 남편은 눈살을 찌푸리며 노교수의 태도를 취했다. 마치 내가 나쁜 학생이라도 되는 듯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애초에 나랑 완선은 부득의하게 헤어졌어. 나중에 완선이 찾아왔는데, 이미 결혼도 하고 애도 있는 데다, 당신이 필요해서 이혼 안 한 거야. 벌써 수십 년도 지난 인연이야, 어릴 적 꿈 좀 이루는 게 뭐 어때서? 그동안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데, 그런 것마저 따져야겠어?”

나는 눈을 내리깐 채 남편의 어이없는 ‘변명’을 들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처음으로 이 일방적인 혼인을 직시했다.

나랑 이혼하지 않은 게 내가 필요해서라니.

그렇겠지, 하루 세 끼, 매일 입는 옷, 집안 위생, 그리고 아이들 등하교까지 내가 책임졌으니...

집안의 잡다하고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느라 나는 예쁜 처녀에서 점점 촌스러운 아줌마가 되어버렸고, 아줌마에서 점점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었다.

한숨이 났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고, 남편과 입씨름할 힘도 사라졌다.

“당신 옷은 당신이 알아서 빨아. 난 피곤해서 먼저 쉴게.”

...

내 태도에 비를 맞은 남편은 더욱 화를 냈다. 이윽고 낮은 소리로 ‘어이가 없네’라고 중얼거리며 본인 옷을 들고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새로 바꾼 세탁기를 남편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몸을 웅크리고 반나절 애써 봤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추위를 탔는지 재채기를 해댔다. 그러다가 결국은 터덜터덜 걸어와 나에게 작동 방법을 물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흐르자 화장실에서 세탁기 작동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은 어두운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오더니 옷장에서 옷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입던 하늘색 스웨터 어디 있어?”

그 말에 나는 아예 몸을 돌렸다. 눈에 보이는 게 없으면 마음이 오히려 편할 테니까.

방 안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건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전의 고요함 같았다.

그러다 남편은 끝내 터졌는지 대충 옷 몇 벌을 잡아 침대에 던져 버렸다. 이윽고 갈라진 목소리로 억울한 듯 말했다.

“이미 설명도 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심술부릴 건데? 이래서 계속 살 수 있겠어?”

단추가 달린 옷이 마침 아직 아물지 않은 내 이마 위의 상처에 부딪혀 너무 아팠다.

‘습’하고 숨을 들이마시자 남편이 흠칫 놀라더니 다급히 다가와 쩔쩔매며 물었다.

“언제 다쳤어? 당신이 다친 거 몰랐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온 신경이 그 앨범에 있었으니 내 상처를 봤을 리가 있나.

나는 남편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봤다.

젊었을 때, 나는 남편의 이 껍데기에 속아 바보처럼 결혼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는 남이 마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슬픔이 밀려왔지만 아주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계속 같이 살기 힘들면 같이 안 살면 되지.”

그 말을 하고 나니 남편에 대한 모든 감정을 가볍게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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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9화

    남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져 말을 잇지 못했다. 눈 밑에 드리운 고통은 너무나 선명했다.아들 역시 넋이 나간 제 아버지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엄마.”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아 세 사람과 나를 격리했다.그 뒤로 남편의 소식을 들은 건 3개월 뒤다.그때쯤 나는 외국어 기초를 다 익혀 겨우겨우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아들이 갑자기 나에게 전화해 남편이 입원했다는 걸 알렸다.가스 중독이라고 했다.주완선이 요리를 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갑자기 다툼이 있었고, 결국 가스를 끄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다행히 관리사무소에서 마침 전기 수리를 하러 도착한 덕에 두 사람을 제때 구조되었다.중독이 심하지 않았던 주완선은 치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하지만 신호섭에게 마음이 식은 건지 짐을 챙겨 떠나갔다.떠나기 전 심지어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그쪽이 이겼어요. 현실이 사랑보다 더 큰 게 문제였어요. 난 현실에 진 거예요.]나는 한 번도 주완선과 승부를 겨룰 생각이 없었다. 남편의 마음이 누구한테 있을지 관심 갖지도 않았다.사랑은 내 나이에 좇을 게 아니었으니까.나는 답장을 하지 않고 주완선을 차단했다.아들은 계속 나더러 병원에 가보라고 부탁해 왔지만 여전히 그 변명이었다.[완선 이모가 떠났어요. 아버지도 많이 아프시고요. 계속 엄마 이름만 되뇌여요.][마음의 병인 것 같아요. 엄마가 보러 온다면 그 어떤 약보다 더 효과 있을 거예요.]나는 외국어책을 덮고 가볍게 대답했다.“내가 의사도 아닌데, 뭐 하러 나를 찾아? 네가 잘 보살펴줄 거라고 믿어.”내 말에 말문이 막혔는지 전화 건너편에서 내 말에서 긴 침묵이 이어지더니 한숨소리가 들렸다.대체 뭘 후회하는 건지....나는 떠나는 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막 비행기에 오르려고 할 때, 아들이 남편을 부축한 채로 나에게 걸어왔다.남편은 손에 든 봉투를 힘겹게 건넸다.분명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온 힘을 다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8화

    시온이는 주완선의 이상한 사랑 관념에 세뇌되었던 거였다. 내연녀의 신분이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인터넷에서 연애를 하고 있었다.며느리는 너무 어이없어 그날 밤 바로 아들에게 전화해 그를 볼러냈다.“당신 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좀 봐!”며느리는 시온이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과 연애하면서 나눈 대화를 자기 남편에게 보여주었다.핸드폰을 쥐고 보면 볼수록 아들의 미간은 찡그러졌다.그러다가 끝까지 읽은 뒤 바로 시온을 훈육했다.그러자 시온이 울며 빽 소리쳤다.“다 완선 할머지가 가르쳐줬단 말이에요. 완선 할머니는 배운 분이라고 완선 할머니를 선생님처럼 대하라고 했잖아요!”아들은 흠칫 놀라 주완선을 바라봤다.“완선 이모, 우리는 이모를 믿어서 아이를 맡겼던 거예요. 전에 엄마가 대신 봐줬을 때는 이런 일 없었다고요.”주완선은 뻘쭘해서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옆에 있던 남편이 테이블을 탕 치며 언성을 높였다.“그만해. 쪽팔리지도 않아?”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은 각자의 생각을 했다.나중에 며느리는 시온을 데리고 떠났고, 아들도 주완선에 대한 필터가 없어져 버렸다.시아버님도 그 상황 때문에 골머리를 알았다고 며느리가 말해줬다.그 일이 있고 나서 며느리와 아들이 잔뜩 선물을 들고 찾아와 시온이를 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어머님, 이제야 누가 정말 좋은 사람인지 알겠어요. 어머님이 집에 있을 때, 우리는 항상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집과 아이한테 관심을 주지 못했어요. 그때마다 어머님이 모든 걸 적절하게 안배해 주셨던 거였더라고요.”며느리가 나에게 차를 다르며 내 아들에게 눈치를 줬다.요 며칠 집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신경을 쓰고 낮에는 또 출근까지 해서인지, 아들의 눈에는 핏발이 가득 섰다.나를 보는 아들의 눈빛은 더 이상 예전처럼 거만하지 않았다.마치 서러운 일을 당한 작은 새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뉘우쳤다.“엄마, 저 정말 힘들어요. 한식구끼리 원한 지고 살 필요 없잖아요. 전에는 제가 복에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7화

    그날 나와 남편 그리고 주완선이 가정법원 앞에서 나눴던 대화를 누가 촬영했는지 인터넷에 올라온 거다.나는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노출됐다.[백년해로는 무슨, 쓰레기와 세컨드가 늙어서까지 붙어먹은 거네!][그날 목격한 사람 꽤 있음. 저 할아버지가 조강지처랑 이혼하는데, 세컨드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비 걸었음. 정말 늙어서까지 저러고 싶을까? 어떻게 저 나이 먹도록 상도덕이 없을까?]이 일은 인터넷에서 불거져 사진관마저 불륜을 선전한다는 질타를 받아 마지못해 해명에 나섰다.본인들은 그저 사진만 찍었을 뿐이라고. 게다가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꾸준히 찍어 당연히 부부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이다.그 해명에 네티즌은 더욱 분노했다.[저 할아버지 내가 다니던 대학의 외국어학과 교수였음. 정말 빈틈없는 분이셨는데, 사적으로 이런 사람일 줄이야.][바람피운 것도 모자라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붙어 먹었다니.][젊었을 때 인성도 답 나오네.]...주완선은 일이 이렇게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줄은 몰랐다.그러다가 대체 누구인지, 주완선더러 신호섭과 먼저 함께 살다가 나중에 두 사람이 젊었을 때부터 사랑했는데 겨우 다시 만나 어렵게 함께 있는 거라는 해명을 하라고 했다.내가 떠난 후로 남편의 생활은 점차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밥해주는 사람도, 청소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매일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옷과 양말, 심지어 속옷까지 세탁기에 함께 넣고 돌리는가 하면, 물건은 여기저기 버려져 있어 찾지 못하는 상황이 허다했다.게다가 마침 여름방학 때라 아들과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아이까지 맡겨버렸다.집안일을 할 여자가 필요하기도 했고, 밖에서 도우미를 구하는 것도 싫었던 남편은 주완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그리고 주완선이 집에 들어온 첫날, 주완선은 내 남편과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가족사진을 찍은 뒤 인터넷에 올렸다.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구구절절 써 내려갔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6화

    이웃집에 사는 혜자 언니가 문을 벌컥 열더니 버럭 소리쳤다.“뭔 개소리여? 나이 60이 늙은 건 맞지만 죽지는 않았잖여? 아직도 20년은 거뜬히 살 수 있을 텐데! 너 같은 아들놈과 같이 살면 1년 사는 것도 고통이여! 무슨 낯짝으로 여기서 지랄이여, 지랄은! 내가 다 부끄럽구먼.”혜자 언니의 파이팅 넘치는 샤우팅에 아들은 말문이 막혀 슬그머니 떠나버렸다....3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나와 남편은 결국 가정법원에서 이혼 판결문을 받았다.이혼 판결문을 받는 순간처럼 홀가분했던 적이 없다.반평생의 부담을 단번에 내려놓은 기분이었다.하지만 남편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미간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남편은 이혼 판결문을 손에 구겨 쥐고 할 말 있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호섭 씨.”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남편을 불렀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주완선이었다.내가 이혼을 번복할까 봐 걱정됐는지 주완선은 아침 일찍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이혼증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주완선은 천천히 나에게로 걸어오더니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주완선이라고 해요. 호섭 씨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이에요. 그때 비 오던 날, 내가 감기에 걸릴까 봐 호섭 씨가 설명도 못 하고 나 데려다줬어요. 젊었을 대 결혼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아 서로를 놓지 못하고 웨딩 촬영으로 아쉬움을 만회하려고 한 거예요.”나는 주완선이 내민 손을 바라봤다. 궂은일 한 번 안 해본 데다 관리도 잘 받은 손이었다.그에 반해 내 손은 이미 쭈글쭈글 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투성이였다.나는 그저 예의상 싱긋 웃고는 악수를 받앋 주지 않았다.“알아요. 그동안 쥐새끼처럼 몰래 만나느라 고생했어요. 이제 우리가 이혼했으니 꿈을 이룰 수 있겠네요.”굳이 내 앞에 와서 위세를 부린다면, 나도 상대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내 말에 지나가던 젊은 행인들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주완선을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5화

    저녁 무렵, 아들과 며느리는 이미 열이 내린 남편을 집으로 모셔왔다.한번 앓고 나니 남편은 갑자기 늙어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아들은 내가 제 뺨을 때린 게 원망스러웠는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며느리만 나에게 인사했다. 손녀 역시 나에게 달려와 애살스럽게 나를 불러댔다.“할머니, 할아버지랑 헤어지지 마세요. 시온이는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같이 있는 게 좋아요.”아들이 이런 지저분한 일을 시온이한테까지 얘기할 줄은 몰랐다.나는 손녀의 말랑말랑한 볼을 주무르며 싱긋 웃었다.“할머니랑 할아버지가 헤어져도 할머니는 시온이 보러 자주 갈게.”아들이 그 말들 듣더니 옆에서 콧방귀를 뀌었다.남편은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물었다.“꼭 그래야겠어?”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며느리는 시온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어린 손녀가 가니 나도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식구가 다 모였으니 이혼에 대해 제대로 논해 보자고”남편은 눈살을 팍 구겼다. 내가 왜 이 일을 계속 물고 늘어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본인은 아무 잘못 없다고 생각했으니까.그때 아들이 나한테 버럭 화를 냈다.“아버지 이제 막 퇴원했는데 좀 그만하시면 안 돼요? 우리가 엄마 유일한 가족이잖아요. 이혼하고 나서 혼자 살 수 있으시겠어요?”두 부자는 내 나이에 절대 혼자 살지 못할 거라면서 돌아가며 비꼬았다.남편은 아마 잊은 모양이다. 본인이 빈털터리였던 시절, 내가 저와 함께 시작해 보겠다고 단호하게 부모 곁을 떠났다는 것을.그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면서도 남편이 시험에 몰두할 수 있도록 식생활도 돌봐야 했다.나중에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고 임신을 한 뒤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전향했었다.내가 그동안 참아 왔다고 남자의 그늘 아래에서 기생할 줄밖에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나는 이제 고작 60이다. 일하지 않더라도 연금보험이 있고, 이혼하면 재산 분할도 할 수 있기에 남편과 아들이 없다고 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나는 두 사람의 말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4화

    남편은 이혼하자는 말도, 그렇다고 하기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나와 말도 하기 싫다는 듯 대화를 거부하는 바람에 우리 사이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전날 비를 맞은 뒤 제때 조치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나이를 먹어 몸이 예전보다 많이 안 좋아졌는지, 남편은 이튿날 미열이 났다.예전 같았으면 남편이 조금만 아파도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식사도 내가 먹을 1인분만 준비하고, 식사를 마친 뒤 공원에서 운동하고 친구들과 쇼핑도 즐겼다.심지어 며칠 뒤 혼자 나가 살 집도 보러 다녔다.더 이상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으니 너무 홀가분했다.내가 이혼하려 한다는 얘기는 곧바로 아들 귀에 들어갔다.아직 외국에 있던 아들은 처음에는 내가 며칠만 삐져 있다가 금방 풀리겠지 생각했던 모양이다.그러다 남편의 미열이 고열로 번지면서, 이웃집에서 대신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실려 갔는데도 내가 신경도 쓰지 않자 그제야 심각성을 인식했다.아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다급히 귀국했다.며느리는 병원에서 시아버지를 간호했고, 아들은 집에 와서 내 죄를 따져 물었다.“엄마, 대체 언제까지 화낼 작정이에요? 아버지가 엄마 때문에 화병 나서 입원했잖아요!”아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얼굴에 노기가 잔뜩 했다.“나이가 몇인데 이 나이에 무슨 이혼이에요?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 다 웃어요. 둘이 서로 포용하면 안 돼요? 좀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지 마요.”전에는 해외에 있는 아들의 일에 지장을 줄까 봐, 남편을 도와 거짓말을 한 걸 따져 묻지 못했는데, 지금이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네 아버지와 주완선 일 알지?”아들은 흠칫 놀라다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그 일 때문에 이혼하겠다고 한 거예요? 사진 좀 찍는 게 뭐 어때서요? 엄마, 제가 엄마를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도 성공한 사람이에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직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해요.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3화

    남편은 택시를 잡더니 젠틀하게 주완선을 차에 앉히고 따라 들어갔다.저런 자상함을 난 언제 느껴봤더라?...나는 바보처럼 가게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나 혼자서도 충분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남편이 없어도 충분했다.나는 콜택시를 부르고 기사의 도움으로 우산을 쓴 채 차에 탔다. 더 젖지 않으려면 우산을 써야 했다.나이가 들면 자칫하면 병이 나기 십상이니까, 내 스스로 자신을 아껴야 한다.남편은 내가 집에 도착한 지 2시간이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굳은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우정희, 내가 가게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가 당신 데리러 가려고 쫄딱 젖은 거 알아?”나는 이제 막 따른 따뜻한 물을 내려놓고 되물었다.“얼마나 멀길래 내가 당신을 2시간이나 기다려야 해?”남편은 순간 켕기는 게 있는지 더 이상 나에게 따지지 않았다.“빨래 좀 하고 깨끗한 옷 좀 가져다줘.”남편의 말에 그제야 그의 옷이 흠뻑 젖었고 머리도 젖어 얼굴에 찰싹 붙어 있는 게 보였다.남편은 금방 벗은 옷을 내 발 밑에 던졌다.지금껏 하인 다루듯 명령하는 말투에도 늘 고분고분 행동하던 나였다. 남편이 밖에서 고생하고 들어왔으니, 아내가 되어서 내조를 잘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남편의 명령에 따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지금, 나는 이런 생활 방식이 싫어졌다.나는 발 밑에 있는 더러운 옷을 신경 쓰지 않고 앨범을 꺼내 물었다.“설명 좀 필요하지 않아?”늘 만만하기만 하던 내가 끈질기게 앨범 일을 물고 늘어지자 남편은 눈살을 찌푸리며 노교수의 태도를 취했다. 마치 내가 나쁜 학생이라도 되는 듯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하면서.“애초에 나랑 완선은 부득의하게 헤어졌어. 나중에 완선이 찾아왔는데, 이미 결혼도 하고 애도 있는 데다, 당신이 필요해서 이혼 안 한 거야. 벌써 수십 년도 지난 인연이야, 어릴 적 꿈 좀 이루는 게 뭐 어때서? 그동안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데, 그런 것마저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2화

    그러다 갑자기, 남편의 눈이 반짝이더니 언제나 무뚝뚝하기만 하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그이의 눈빛을 따라 확인해 보니 한복을 입은 노파가 피팅룸 문 앞에 서 있었다. 은발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귀밑머리에 꽃을 단 채로.그 사람은 앨범에서 봤던 다른 주인공이었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우르릉 꽝꽝-시커먼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던 나는 처마 밑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비를 피했다.그때 점원 한 명이 사진관 표지판을 치우려고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 얼른 안으로 안내했다.“어, 어르신, 비가 많이 오는데 안으로 들어와서 비 좀 피하세요. 감기 걸리겠어요.”그와 동시에 영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남편분 데려와서 저희 사진관에서 사진 좀 찍으세요. 저희 사진관에 매년마다 와서 웨딩 사진 찍는 노부부가 계신데, 젊을 때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고 지금 찍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얼마나 보기 좋아요...”점원을 따라 뻣뻣하게 안으로 들어가던 내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머릿속에는 옛생각이 피어올랐다. 나와 남편은 중매쟁이를 통해 만난 사이다. 그때 남편은 시험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고, 나는 카운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 수중에 돈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결혼식은 간단한 술자리로 대체했고, 웨딩 사진 역시 나중에 돈이 생기면 찍자고 약속했었다.하지만 몇십 년을 기다린 결과, 그이가 다른 사람과 웨딩 사진을 찍은 걸 보게 될 줄이야.순간 스스로 웃음이 나면서 앞으로 이렇게 가망 없는 기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점원에게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남편은 허리를 숙여 상대의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그러자 상대가 얼굴을 붉히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나이도 있는 사람이 주접떨면 사람들 웃어.”남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문 앞에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 버리더니 불쑥 한마디

  • 60살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제1화

    오늘은 나와 내 남편 신호섭의 결혼기념일이다. 하지만 남편은 항상 이날만 되면 집을 나간다.결혼한 지 40 몇 년 동안, 모처럼 오는 낭만적인 기념일마다 남편은 나와 함께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혼자 아침을 먹고 바닥을 닦으며 서재를 지날 때 내 눈에 엉망이 된 서재가 들어왔다.나는 한숨을 푹 쉬며 걸레를 놓고 서재로 들어갔다.서재를 정리하다가 맨 위층에 도착했을 때, 책 한 권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두텁고 정교한 커버 끝부분이 내 이마에 떨어지면서 순간 고통이 전해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책이 아니라 웨딩 앨범이라는 걸 발견했다.사진 속에는 계속 동일한 남녀 한 쌍이 나왔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웨딩드레스와 슈트를 입고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남자는 내가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내 남편 신호섭.하지만 여자는 내가 아니었다.상처를 감싸 쥐고 있는 내내 머리가 어지러워 도대체 가슴이 아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이 아픈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은 작년에 찍은 사진이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열애에 푹 빠진 커플 같았다.사진 뒤에는 심지어 남편이 직접 쓴 문구가 적혀 있었다.[영원한 내 사랑.]자세히 살펴보니 사진 아래에는 모두 날짜가 찍혀 있었다.40살부터 60살까지, 검은 머리가 흰머리가 될 때까지 장장 20년간 한 해도 빠짐없었다.내 남편은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별의별 이유를 대가며 첫사랑과 웨딩 사진을 찍으러 갔던 거다.이건 너무 우스운 일 아닌가?나는 부들부들 떨며 앨범을 닫았다. 순간 어젯밤 남편이 떠날 때의 태도가 떠올랐다.그는 아들이 해외 출장을 가는데, 통역사가 잠깐 일이 있어 본인이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나는 당연히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퇴직하기 전에 외국어 교수였으니까.하지만 내가 해외 풍경도 구경할 겸 함께 가겠다고 했을 때 남편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다.“아들이 일하러 가는데,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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