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 남짓한 남자가 일어서 분노에 찬 얼굴로 책상을 퍽 치며 말했다.“너 그게 무슨 뜻이야! 내 동생은 죽어도 싸다는 거야?”“그럼 저는요? 전 무슨 잘못이 있어서 다쳐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엽준수에게 칼에 찔려 아직도 병원에 누워있는 친구는 또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장소월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를 잃고 감옥에 갔다고 하여 상대방 쪽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사망자를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6,70년대 생으로 시골에서만 생활했기에 교육을 받지 못했고 법률 지식도 아주 희박하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말해도 그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하지만 장소월은 시골 사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할머니는 어릴 적 시골에서 살았었는데 당시엔 먹고 입는 것조차 구하기 힘들었고 글자도 깨우치지 못한 문맹이었다. 할아버지는 쌀 한 가마니를 대가로 할머니를 아내로 맞이했다.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할아버지는 동네 양아치로 빈둥거리며 살다가 34살이 되던 해에 누군가와 싸우는 바람에 숨을 거두었다.이런 불행 속에서도 할머니는 종래로 다른 사람을 원망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작은 힘으로라도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려 했다.“만약 그날 밤 그들이 절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 죽어있는 사람은 저였을 거예요!”“죽었다고 하여 그 사람이 옳은 행동을 한 건 아니라고요.”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보기엔 제 학생의 말이 맞습니다. 엽준수의 가족분들, 저희가 이미 경찰서에 연락했으니 곧 엽준수를 데리고 올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피해자는 직접 올 수 없으니 그의 친구들이 대신 올 겁니다. 그들은 그날 밤 사건의 목격자이기도 합니다.”옆에 서 있던 중년 여자가 씩씩거리던 남자를 한쪽으로 끌고 가 무언가 속삭였다.얼마 후 남자가 돌연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희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필경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일이니 천만 원만 주세요. 그럼 저희도 더는 이
휴게실에 앉아있던 장소월이 따뜻한 물이 담겨 있는 컵을 감싼 채 기성은에게 물었다.“전연우가 엽준수의 일을 대체 어떻게 처리한 거예요?”기성은은 문어구에 서서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했다.“아가씨, 모르는 게 좋아요. 전 대표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말끔히 해결할 거예요.”얼마 후 건물 입구에서 누군가 도착한 듯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본 순간 장소월은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네이비색 정장에 고귀한 분위기의 강영수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너... 여긴 왜 왔어?”뒤에 서 있던 오부연이 말했다.“강한 그룹은 제운 고등학교에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자한 회사라 일이 생겼다는 소식에 온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소월 아가씨죠.”강영수가 말했다.“오 집사.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죄송합니다. 도련님.”장소월은 시선을 거두고 불안한 듯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귀찮게 해서 미안해. 이번 일은 전... 오빠가 학교에 누가 되지 않게 잘 처리할 거야.”“소월아, 우리 사이에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네 일은 이제 내 일과도 같아. 너 손 다쳤다면서? 봐봐...”강영수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자신의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난 괜찮아. 거의 다 나았어.”오부연이 말했다.“아가씨, 도련님에게 보여주세요. 도련님이 며칠 내내 아가씨를 걱정했어요.”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오묘한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곳엔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장소월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강영수는 곧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에 오부연은 방에서 나간 뒤 문을 닫았다.장소월은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걸 불편해하는지라 순간 몸이 경직되어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소월아? 너 지금 날 무서워하는 거야?”강영수는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했다. 매번 단둘이 있을 때면 이렇듯 심하게 경계했다. 마치 그가 그녀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듯 말이다
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실은 그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다. 회사의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녀를 도우려 왔으니 말이다. 장소월은 서울에서 강영수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일에 그가 직접 나설 필요는 전혀 없지만 오직 그녀를 위해 발걸음을 한 것이다...그가 그녀에게 잘해줄 수록 그녀는 더 큰 부담감을 느꼈다. 그의 이 깊은 마음을 온전히 받아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강영수도 아직은 어린 나이이다. 앞으로 생길 가능성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그와 하룻밤이라도 함께 보내고 싶어 접근하는 여자는 아주 많다. 때문에 강영수는 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때 그녀가 강영수를 지옥에서 끌어내온 일로 목숨을 빚졌다고 생각해 이런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면 너무도 과분하다. 이미 충분히 갚고도 남았으니 말이다.그날 강영수가 그녀에게 준 생일 선물과 그녀를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은 두 번의 생을 거쳐오면서 받은 가장 큰 서프라이즈였다.장소월은 처음부터 그에게 무언가를 받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강영수는... 그녀의 계획 밖의 사람이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을 가능성은 없다.강영수에게 지금보다 더 큰 권력이 쥐어져있어 그녀를 장씨 집안이라는 마귀소굴에서 구해낼 수 있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한때는 다정하고 능력 있는 그에게 마음이 동하긴 했지만 말이다.“좀 괜찮아졌어?”남자가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입술에 가까이 가져갔다. 시원한 입김을 상처에 불어주니 한결 시원했다.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손등에 있는 문신을 똑똑히 보았다. 강용의 몸에 새겨진 것과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장소월이 물었다.“이 문신 도안에 무슨 의미가 있어?”강영수가 덤덤히 말했다.“그런 거 없어. 그저 당시 꽂혔던 거로 새겼을 뿐이야.”장소월은 그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큰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한 시간 남짓 지나자
전연우는 학교에서 온 전화를 받은 뒤 곧바로 회의를 취소하고 학교로 달려왔다. 사실 이런 일은 기성은만 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전연우가 직접 걸음을 할 필요는 전혀 없는 일이다.기성은이 조심스레 말했다.“정말 엽준수를 퇴학시키실 겁니까? 10년의 처벌을 받게 하고요? 제가 알기론 아가씨의 행동 때문에 시작된 일입니다.”전연우가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깊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도 소월이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아닙니다.”“네가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지 기억해.”전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기성은이 자세를 곧추 세우고 말했다.“전 대표님만을 위해 일합니다.”당시 그가 전연우의 곁에 머무르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그녀의 목숨은 전연우의 것이나 다름없었다.전연우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준 것이다.전연우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너한테 월급을 주는 건 내가 아니야!”장소월은 더더욱 불안해졌다. 전연우는 학교의 일에 대해선 종래로 물은 적이 없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날개를 달아 장씨 가문을 박차고 나오는 건 허황된 망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이제 많이 영리해졌다. 하지만... 그 영리함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벌을 받게 되었다.휴게실.장소월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강영수의 눈빛을 피했다.“오빠가 일을 끝낸 것 같아. 난 나가봐야겠어.”그녀는 문을 열고 다급히 걸어 나갔다. 한 손엔 강영수가 준 약을 들고서 말이다.전연우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담배를 별로 피우지 않는다.기성은이 장소월이 오고 있음을 알리자 전연우는 채 피지 않은 담뱃불을 끄고는 휴지통에 버렸다.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전연우를 본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휴게실에서 나오는 강영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람핀 현장
진봉이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날 밤 지나갔던 모든 차량을 조사해보았는데 사고 차량은 폐차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관한 정보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제 생각에 그 사고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강영수가 눈을 질근 감았다.“조사할 필요 없어.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으니까.”그 말을 들으니 진봉은 대표님이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장소월은 전연우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으며 아래로 내려갔다.학교 문 앞에서 백윤서와 인시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인시윤이 장소월에게 다가가 말했다.“너 괜찮아? 미안해! 내가 고 선생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었어. 괜히 그것 때문에 엽준수가 널 오해했잖아.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나 ㅂ고 선생님한테 얘기해 네 시험지를 가져왔어. 소월아, 너 진짜 대단해!”장소월은 멍하니 시험지를 쳐다보았다.역시... 그녀는 인시윤의 힘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합격한 것이다.이 사실을 확인하자 그녀는 마음속에서 무거운 바위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고... 고마워요...”“그리고...”인시윤이 장소월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오빠가 넌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했어. 엽준수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엄마는 요독증 말기래. 설사 이번에 치료를 받았다고 해도 수술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소월아, 네 잘못이 아니야. 나 이번 일로 오빠한테 처벌을 받았는데 글쎄 시를 300번이나 베끼래.”“그래...”처벌을 받는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우리 오빠가 나한테 했던 두 번째 한 마디 때문에 난 처벌을 받아도 행복해.”백윤서가 말했다.“괜찮으면 됐어요. 엽준수는 감옥에 가게 되는 거예요?”전연우가 대답했다.“그럴 거야.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지.”6년 아니면 10년?전연우가 관여하면 종신형을 받을지도 모른다.천만 원을 요구했다가 한 푼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
“네가 칼을 막아줬어도 장소월은 너한테 고마워하지도 않아.”그때, 장소월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엽시연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장소월도 양반은 못 되겠네.”아직 문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은 돌연 자리를 뜨는 장소월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장소월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전연우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장소월의 행동을 지켜보았다.“고마워!”장소월이 마음을 담아 말하고는 허리를 폈다.“병원에 못 가봐서 정말 미안해. 괜찮아?”재덕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괜찮아요. 의사 선생님께서 상처가 깊지 않으니 며칠만 치료하면 된다고 했어요.”엽시연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시끄러워! 장까지 배 밖으로 나왔는데 상처가 깊지 않다고? 이제 와 착한 척하지 말고 꺼져. 꼴 보기 싫으니까.”재덕이 엽시연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형,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내 말이 틀렸어? 예전에 우릴 얕잡아보고 무시한 게 누군지 잊었어?”“강용, 쟤 학교에서도 저렇게 착한 척해?”엽시연이 강용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예전엔 화도 잘 냈는데 지금은 많이 누르고 있어.”“전엔 내가 너희들한테 편견이 있었다는 거 인정해.”장소월이 솔직히 털어놓았다.“난 혼자 있는 게 익숙해서 너희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몰랐어. 미안해.”“다시 내 소개를 할게. 난 장소월이라고 해...”그녀가 손을 내밀자 재덕이 약간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전 재덕이에요.”“고마워.”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장소월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장소월은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거기엔 장소월의 꾀도 숨겨져 있었다.오늘 밤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할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하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분명 분위기는 훨씬 화기애애해질 것이다.그들과 헤어지고 인시윤과 함께 돌아가던 중 인시윤이 물었다.“너 무슨 말을 한 거야?”장소월이 말했다.
마지막 수업을 남겨두고 장소월은 학교를 나섰다.오후 네 시 반, 경찰서 취조실.엽준수가 머리를 밀고 죄수복을 입은 채 어두운 눈동자로 멍하니 한곳을 쳐다보며 진술실 안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얇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혼자 온 것이었다.그녀가 벽에 걸려있는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엽준수도 마찬가지로 전화기를 들었지만 시선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향하지 않았다.경찰이 나가자 장소월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에 온 건 아무도 모르니까.”엽준수는 이미 많은 고초를 당해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악에 받쳐 소리쳤다.“내가 어떤 꼴로 있는지 보고 싶어서 왔어? 이제 만족해? 장소월, 넌 돈 많은 부모님을 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넌 날 망쳤어.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거야! 난 그저 엄마의 치료비를 벌고 싶었을 뿐인데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 내 인생은 네가 망친 거야! 나 널 죽이지 못한 게 미친 듯이 후회돼!”장소월은 맑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엽준수,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돈이 있었다고 해도 네 엄마는 그 수술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넌 그냥 나한테 졌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던 거야.”장소월은 그의 동공이 당황한 듯 확장되는 것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아마 그의 정곡을 찔렀을 것이다.그녀가 말을 이어갔다.“난 예전 성적이 가장 낮은 반의 꼴등이었어. 그래서 6반에선 내가 부정행위로 반을 옮길 기회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었지. 그리고 내가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것도 넌 아마 인시윤의 도움이 작용했다고 생각해 질투하고 불공평하다고 느꼈겠지... 사실 나도 나 자신을 의심한 적 있어. 정말 다 내 잘못인가?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건가? 라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 난 알게 됐어. 난 틀리지 않았어. 난 그저 내 인생에 깃든 모든 불행
장소월은 떠날 때 엽준수에게 만점에 근접한 시험지를 남겨주었다.점수를 본 순간, 그는 살을 에이는 얼음 구덩이에 들어간 듯 부들부들 떨었다.그가 틀렸다.그가 틀린 것이다!장소월의 말처럼 허영심 때문에 사채까지 쓰며 억지로 제운 고등학교에 오는 게 아니었다. 엄마를 죽이고 모든 걸 망쳐버린 건 다름 아닌 엽준수 자신이다.18세 소년은 경찰서 안에서 시험지를 꽉 움켜쥔 채 서럽게 울부짖었다.그게 무엇이든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이건 변하지 않는 이 세상의 이치다!장소월이 경찰서에서 나왔을 땐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골목길 안에서 그녀와 같은 검은색 교복을 입고 바짓자락을 거두어올린 소년이 책가방을 메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고개를 들고 눈꽃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장인이 빚어놓은 듯 준수했다. 하얀 눈꽃 한 송이가 코끝에 내려앉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강용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평소 사고뭉치 악동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강용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그녀에게 걸어갔다.“밥 사준다며?”“그래서 계속 이곳에서 기다린 거야?”“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뭔데!”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몇 마디만 나누면 곧바로 삐딱해진다.장소월은 그를 무시해버린 채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강용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한동안의 침묵 끝에 강용이 입을 열었다.“저번에 했던 말 여전히 유효해?”장소월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유효기간은 이미 지났어.”“흥! 양심도 없는 년!”장소월은 사실 아주 느리게 걷고 있었다. 그 역시 일부로 발걸음을 늦추는 것 같았다.“마지막이야!”“...”“강용, 마지막이야. 내일도 오지 않으면 다시는 널 기다리지 않을 거야.”강용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알았어.”저녁 식사는 구영관에서 하기로 했다.이곳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
송시아가 이토록 반쯤 미치광이 같은 모습으로 변할 줄은 기성은도 예상하지 못했다.“거추장스러운 것!”송시아는 전연우의 무명지에서 은색 반지를 빼내 바닥에 던져버렸다.“이건 대표님의 물건입니다. 송시아 씨, 대표님이 깨어나셔서 찾으면 어쩌려고 그래요?”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장소월은 한번 또 한 번 전연우를 해쳤어요. 전연우 성격에 어떻게 장소월 그 나쁜 년을 가만 놔둘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기 비서가 연우 씨 옆에서 일한 오랜 세월을 생각해 이곳에 오는 걸 허락할게요. 하지만... 기 비서를 제외한 다른 쓸데없는 사람은 절대 들어오게 하면 안 돼요.”“장소월은 연우 씨를 죽이려 했어요. 난 절대 쉽게 장소월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곧 경찰에 신고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야죠. 그리고 나와 전연우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똑똑히 보여줄 거예요. 평생 땅을 치며 후회하겠죠.”기성은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송 부대표님이 실망하실 텐데 이걸 어쩌죠. 실은 대표님께선... 처음부터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예상하고 계셨어요. 결혼식을 치르기 전 이미 법무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사모님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일러두셨거든요.”“뭐라고요?”송시아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기성은을 쳐다보았다.“연우 씨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연우 씨...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말해봐요! 대체 그 이유가 뭐냐고요!”송시아는 미쳐버렸다. 완전히 미쳐버렸다!기성은은 눈을 내리뜨리고 눈앞의 여자를 쳐다보았다.“대표님이 뭘 하시려는 지는 저와 송 부대표님 모두 잘 알고 있잖아요.”기성은은 병실에서 전해져 오는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기성은 역시 대표님이 왜 이러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자신의 목숨으로 도박을 하다니...기성은이 집에 돌아왔을 땐 저녁 8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안에서 비쳐나오는 밝은 조명을 보
소민아는 멀어져가는 그의 곧게 뻗은 건장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기성은이 조금 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게 다른지는 당장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 후, 돌연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른 그녀가 중얼거렸다.“오늘... 나한테 시끄럽다며 짜증 내지 않았어. 평소 같았으면 욕 된통 먹었을 텐데.”소민아는 기분이 좋아져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기성은이 없으니 그녀는 마음 놓고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기성은은 예전 그녀가 신었던 슬리퍼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 슬리퍼는 기성은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사준 물건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자체 제작한 것이었는데 가격은 몇십만 원이 넘었다.소민아는 보통 집에서 몇천 원짜리 저가의 슬리퍼를 신곤 한다. 그녀는 바로 기성은이 준 그 슬리퍼로 갈아신었다.그가 나간 지 30분이 지났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인덕션을 끄고 조심스레 구멍으로 내다보았다. 불청객 주가은이었다.주가은이 여기엔 왜 왔단 말인가?소민아는 현관에 있는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고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외투까지 벗어 던지고 야한 하얀색 민소매 끈을 드러낸 채 문을 열었다.“자기야, 이렇게나 빨리 돌아온 거야?”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주가은의 눈앞에 소민아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주가은의 얼굴엔 여전히 담담한 미소가 걸려있었다.“소민아 씨?”소민아는 팔짱을 끼고 나른하게 문에 기대어 섰다.“주가은 씨였네요!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들어와서 앉아요! 마침 밥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성은 씨는 한 시간 뒤에 돌아올 거예요.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어요.”“아니에요. 오늘은 물건을 돌려주려고 온 거예요.”주가은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가리켰다.“이건 기성은 씨가 저번에 제 차에 두고 내렸던 옷이에요. 이미 다 세탁했어요. 돌려줄게요.”소민아가 말했다.“우리 성은 씬 정말 너무 덤벙거려서 문제예요. 어떻게 옷을 두고 내릴 수가 있어요. 주가은 씨한테 신세를 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