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기절한 사도현을 끌고 거센 불바다를 뚫고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지금의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사도현과 같이 바닥에 드러눕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찬 바람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차설아를 스쳐 지나갔다.그렇게 차설아는 처음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위잉! 위잉! 위잉!”소방차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소방대원들은 불을 끄려고 구조장비를 챙기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몸은 좀 어때요?”흰색 가운을 입은 구조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차설아와 사도현에게 다가오며 물었다.차설아는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서고는 까매진 얼굴로 말했다.“저는 괜찮으니 이 사람 빨리 살려주세요. 다리가 부러져서 당장 처치가 필요해요!”“이 사람은 저를 구하기 위해 다친 거예요. 무슨 수를 쓰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꼭 이 사람을 살려야 해요. 제발요...”차설아가 구조대원들의 팔을 붙잡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방금 사도현의 상태를 잠깐 살펴봤었다.사도현 오른쪽 종아리뼈가 선명하게 튀어나왔는데 부상이 매우 심각한 듯했다.만약 사도현이 이 일 때문에 다리를 못 쓰게 된다면 차설아는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꼭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구조대원은 차설아를 위로하며 의식을 잃은 사도현을 구급차에 태웠다.차설아도 원래 차에 타려고 했는데, 뒤돌아보니 이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린 저택을 바라보고는 마음이 한없이 아팠다.그녀는 갑자기 뭔가 떠올렸는지 얼굴색이 확 어두워졌다.그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바다로 뛰어들려고 했다.“이봐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너무 위험하니 당장 거기서 나와요!”소방대원이 그녀를 말렸다.하지만 차설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제 물건, 저에게 엄청 중요한 물건이 아직 안에 있어요. 그거 가지러 가야 해요!”“불길이 너무 세요, 지금 들어가면 죽음을 자초하는 거라고요. 아무리 중요한 물건이라고 해도 생명보다 더 중요할 수 없으니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요...
다행히도 오도자의 그림은 높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아직 불타지 않았다. 그는 소화기로 주변의 불을 끄고는 재빠르게 그림을 챙겼다.하지만 차설아가 말한 ‘지도’는 위층 침실에 있었기 때문에 찾으러 가기엔 상당히 위험했다...“돌아오라고, 성도윤. 미친 짓 그만하고 빨리 돌아와!”차설아는 목이 터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그녀는 참다못해 직접 불바다로 뛰어들 셈이었다.하지만 멀리서, 성도윤은 아빠가 가장 사랑했던 그림을 든 채 불길에서 걸어 나왔다.성도윤은 차설아와 똑같이 얼굴이 연기에 그을려 시커메졌다. 그는 손에 화상을 입었고, 옷과 바지는 너덜너덜해진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그는 자기를 애타게 기다린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품에 든 그림을 꺼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미안해, 나 최선을 다했어. 당신이 말한 지도는 도저히 못 찾겠어.”차설아는 남자의 초라하지만 진정성 있는 모습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바보 아니야? 불에 타서 죽으면 어떻게 해? 당신이 죽으면 나도 더는 살 수 없다고. 그걸 몰라서 그래?”그녀는 주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어 곧바로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치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은 듯, 다시는 놓지 않으려 했다.“...”커다란 몸집의 성도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손에 그림을 쥔 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활활 타오르는 불 때문에 미친 듯이 더웠는데, 지금 이 순간, 마치 감전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릿했다.‘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여자가 처음 이렇게 마음을 다해 안겼던 것 같은데?’예전에 성도윤은 차설아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긴 했지만 차설아는 항상 주눅이 들어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운 사랑을 그에게 전하고 있었다.“자, 그만 울어. 나 성도윤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있나? 바다에 절대 빠지지도 않고, 불에도 절대 타죽지 않으니 걱정 안 해도 돼.”성도윤은 보기 드물게 눈물을 흘리는 차설아를 위로하며 말했다.차설아
차설아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의문의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고는 꼼짝하지 않았다.그녀의 뽀얀 얼굴에는 불그스름한 홍조가 띠었다.‘이 녀석...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성도윤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앞쪽을 바라보고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미안, 잘못 잡았어.”말을 마친 그는 다시 손바닥을 기어에 올리고는 여유롭게 출발하기 시작했다.스포츠카는 ‘씽’ 소리를 내며 도로를 질주했다.차설아의 가슴은 지금 질주하는 스포츠카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방금... 나 플러팅을 당한 거야?’“도윤 씨, 방금 플러팅 한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운전에 집중한 남자를 바라봤다. 뾰로통한 얼굴은 다람쥐처럼 아담하고 귀여웠다.성도윤이 눈썹을 치켜들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차설아를 힐끔 보고는 되물었다.“당신 생각은 어떤데?”차설아는 턱을 만지며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한테 플러팅 한 것 같아. 하지만 플러팅 기술이 너무나도 구려.”‘손을 잡으려면 멋있게 확 잡아야지, 뭘 또 잘못 잡았다고 그래? 차라리 눈이 멀었다고 하지.’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차설아는 계속 도발했다.“도현 씨한테 여심 공략 비법을 전수받았다며? 그런데 왜 아직도 그렇게 형편없는 거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보네.”얼굴색이 확 어두워진 성도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사도현, 이 배신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사도현에게서 여심 공략 비법을 배운 것마저 부끄러운 일인데, 이 녀석이 감히 차설아한테 말해? 내 체면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거야?’하지만 사도현을 생각한 성도윤은 곧바로 얼굴이 굳어졌다.“그 녀석, 지금 몸 상태는 좀 어때? 구조대원들의 말에 의하면 꽤 많이 다쳤다고 하던데.”차설아도 우수에 찬 눈빛으로 걱정스럽게 말했다.“많이 다치긴 했어, 오른쪽 종아리뼈가 에어컨 실외기에 맞아 부러졌거든. 날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다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 은혜를 어떻게 갚
성도윤은 당연히 차를 세우지 않았고, 오히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차씨 저택은 이미 폐허로 되었어. 허울만 남았는데 큰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디로 가려고?”“어디든 돼, 큰집만 아니면 돼!”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전셋집을 구해도 되고, 집을 하나 사도 돼. 이 넓은 세상에 나 차설아가 있을 곳이 없겠어?”“그럴 필요 없어!”성도윤도 단호하게 말했다.“큰집은 당신이랑 공동명의로 되어있잖아, 큰집도 당신의 집이라고. 이제 며칠 후에 당신 명의로 모두 넘겨줄 테니까 그때면 큰집은 완전히 당신 소유야.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팔아도 좋아.”성도윤의 말에 차설아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큰집은 시가가 2000억은 넘었기 때문이다.성도윤에게서 2000억의 선물을 받았는데 계속 눈치 없이 주절거리면 안 되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차설아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날 쫓아낼 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서.”“뭐라고?”성도윤은 제대로 못 들은 듯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차설아는 얼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큰집도 좋다고. 넓으니까 마음에 들어.”“좋은 건 알아가지고.”성도윤은 그제야 따지지 않고 집중해서 차를 큰집 쪽으로 몰았다.임채원이 떠난 후로 큰집은 마침내 이전의 평화를 되찾았다.차설아를 가장 놀라게 한 건, 바로 장미가 가득 심어졌던 정원은 다시 해바라기가 줄지어 있었다. 차씨 저택의 해바라기처럼 똑같이 화사하게 피어났기에 차설아는 기분이 좋았다.각박하게 굴었던 하인들은 차설아를 보더니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심지어 감격의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다.“너무 잘됐네요. 사모님께서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언젠간 사모님께서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집사인 이 아주머니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차설아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했다.“이 아주머니, 나를 내쫓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맞아주시네요.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이 아주머니의 얼굴은 빨개지더니 곧이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사 이 아주머니는 성도윤이 차설아의 편을 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짐을 챙기고는 나가버렸다.떠나기 전, 그녀는 성도윤이 없는 틈을 타 몰래 차설아를 협박했다.“흥, 이미 이혼한 마당에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 오늘 날 내쫓았으니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기다려, 이제 행복한 나날들은 모두 끝나버렸으니!”차설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 아주머니가 쉽게 안 바뀌었을 줄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날 미워했잖아요. 여기를 떠나게 한 건 오히려 이 아주머니에게 잘된 일이 아닌가요? 더 따진다면 퇴직금도 못 받을 줄 알아요.”“차설아, 당신 정말 지독하네.”이 아주머니가 표독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그녀는 별장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소영금에게 전화를 걸었다.“큰사모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차설아 그년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도련님의 혼을 쏙 빼놓아 별장을 독차지하고는 저를 곧바로 내쫓았어요. 그리고 임채원 씨의 죽음도 차설아와 연관이 있다고 하던데...”이 아주머니는 무려 30분 동안 전화로 차설아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다. 물론 80%의 내용은 차설아를 모함하기 위해 일부러 지어낸 얘기였다.그 말을 들은 소영금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표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채원이의 죽음이 그년과 연관 있을 줄 알았어. 태어나지도 못한 차설아에게 당한 내 손주, 참 불쌍해라. 차설아,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차설아가 큰집에 다시 살기로 한 후, 이 아주머니를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하인들도 모두 집에서 내보냈다.그렇게 천 평에 달하는 독채의 큰 별장에는 오직 성도윤과 차설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말을 하면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텅 비었다.성도윤은 그녀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그 사람들 다 내쫓고선 이 큰 집을 어떻게 관리하려고 그래? 새로운 사람들을 구할 생각인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난 팔다리가 있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물론 차설아도 그보다 나은 건 아니었다.사도현의 얘기에 차설아도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좋아, 그럼 각자 정리 좀 하고 같이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두 사람은 서로 다른 욕실로 향하고는 재빨리 씻었다.하지만 어색한 상황이 발생했다.두 사람 모두 이곳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갈아입을 옷이 없어 타올을 몸에 두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차설아가 욕실에서 나오고는 아무 옷 한 벌 걸치려고 했다. 성도윤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어색한 상황에서 서로 마주치고 말았다.성도윤은 대놓고 차설아를 훑어보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부터 뽀얀 피부의 발까지 말이다.차설아는... 더 강렬한 눈빛으로 성도윤을 훑어봤다. 심지어 손으로 한 번 그의 몸을 만져보고도 싶었다.“도윤 씨, 요즘 또 운동하러 갔어? 선명한 복근이 거의 트레이너급이란 말이야.”차설아는 전에 ‘사지가 마비되고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던’ 성도윤을 돌봤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제멋대로 성도윤의 몸을 만질 수 있었는데 말이다.성도윤은 눈썹을 치켜들더니 도도하게 말했다.“당신 몸매도 생각한 것보다는 훌륭하네. 다만 배가 좀 나왔어, 다이어트 좀 해.”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이 녀석 입에서 칭찬을 바란 내가 잘못이지. 아이를 둘이나 임신하고 있는데 당연히 배가 클 수밖에 없지! 그리고 몸매가 생각한 것보다 훌륭해? 전에 내 몸매를 못 봤었던 것처럼 말하네!’두 사람은 옷을 찾아 입으려고 했는데, 이때 성도윤의 어머니인 소영금이 노발대발하며 닥쳐들었다.그녀는 이미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성도윤과 차설아가 타올만 두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뭐야, 두 사람? 다시 합친 거야?”소영금은 두 사람 사이에 가로서고는 차설아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이런 재수탱이 같은 년, 정말 뻔뻔스럽구나. 내 아들은 이미 너를 집에서 내쫓았어, 그런데도 염치없이 이렇게 입고선 내 아들을 유혹해?”목청이 큰 소영금 때문에 차설아는 머리가 지끈
소영금은 도도하고 잘 웃지도 않은 아들이 그녀의 앞에서 차설아 이 재수탱이와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건 지구에서 외계인을 본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아들, 왜 그래? 전엔 저년을 똑바로 쳐다도 안 보더니, 지금은 관심이 생긴 거야? 설마 정말 차설아를 유혹하려는 건 아니지?”성도윤은 그저 어깨를 들썩이더니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소영금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만약 차설아 이 재수탱이가 성도윤한테 잘 보이려는 거면 몰라도, 성도윤이 오히려 차설아를 유혹하고 있으니 소영금은 이 상황이 답답했고, 더는 기고만장할 명분도 없어졌다.“아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면 마가 씐 거야?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누굴 유혹하면 안 좋아, 그런데 왜 하필 이 재수탱이인데?”소영금은 워낙 성질이 사나운 사람이기 때문에 화가 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성도윤에게 손을 쓰기 시작했다.그녀는 성도윤을 두들겨 때리면서 훈수를 뒀다.“정신 차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여자가 없어서 이미 이혼당했던 차설아를 유혹해? 사람은 뒤돌아보는 거 아니야, 왜 나도 성씨 가문도 체면을 차리지 못하게 이러는 건데? 차설아는 소영금이 성도윤을 마구 때리자 재빨리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소영금의 말을 바로잡았다.“여사님, 말을 똑바로 하셔야죠. 저는 당신 아들에게 이혼을 당했던 여자가 아니라, 정확히 당신 아들과 이혼했던 여자입니다. 그리고 도윤 씨는 뒤돌아보지도 않았어요, 예전엔 저를 유혹한 적이 없었거든요.”물론 술에 취하고 두 사람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게 맞다. 하지만 차설아는 그날 밤은 두 사람이 서로 원해서 생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도윤이 자기를 유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소영금은 더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 성도윤을 더 세게 때리며 말했다.“들었어? 저 여자는 너한테 마음도 없었다잖아. 그런데도 저 여자한테 몸을 바치려고 해? 얼른 옷 찾아서 입어!”성도윤의 얼굴은 별다른 표정 없이 덤덤했
임채원을 향한 밑도 끝도 없는 보호는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은 거나 다름없었다.그런 남자한테 설렌 감정을 느꼈으니 차설아는 자신이 한심했다.“그럼 두 분 천천히 얘기를 나누세요. 저는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차설아는 이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사도현의 상황이었다.그녀는 두 걸음 나아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성도윤에게 말했다.“도윤 씨, 채원 씨를 숨기려면 잘 숨겨. 만약 나한테 들킨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죽은 사람을 다시 사라지게 만드는 건 법에 어긋나지 않으니까.”물론 이건 차설아의 경고뿐이었다. 임채원이 다른 짓을 더 못하게 최선을 다하라는 성도윤을 향한 그녀의 경고였다.하지만 그녀의 이 한마디 경고는 결국 일파만파를 일으키게 되는데...차설아가 떠난 후, 소영금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저 재수탱이 말을 들어보니, 채원이는 아직 안 죽은 거야?”“네.”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의 얼굴색은 한껏 어두워졌다.그는 아직도 차설아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왜 임채원을 향한 차설아의 원한이 그렇게 깊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다행이야, 그럼 내 손주도 아직 살아있다는 거네?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 성씨 가문의 아이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소영금은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두 손을 모으면서 하느님께 고마움을 전하고 있었다.성도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어이가 없었다.“제가 죽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기회도 많을 거잖아요.”“흥, 네가 살아있으면 뭐 해, 여자에게 손도 대지 않으면서. 네가 스님이랑 다를 게 뭐야? 채원이가 재주 좋아서 네 아이를 임신해 그렇지, 네가 채원이한테 마음이라도 있어? 만약 아이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아이가 생기긴 힘들 거야...”소영금은 성도윤을 잘 알고 있었다.어려서부터 워낙 차갑고 도도했기에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니 차설아와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했어도 그녀에게 손 한 번 대지 않았던 거고.임채원이 그의 아이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