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의 모든 챕터: 챕터 201 - 챕터 210

303 챕터

제201화

성유리는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원유진이 들어오고 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음 손님을 맞이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곳으로 오신 것을 환영...” 다음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성유리는 인사말을 제대로 못 끝냈고 표정도 조금 굳어갔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내 정신을 다잡아 더욱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도착했는지도 몰랐다. 박한빈의 뒤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아하니 방금 원유진과 성유리가 나눈 대화를 그가 똑똑히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성시원에게로 다가가더니 악수를 청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두 사람은 짧은 악수를 마치고 빠르게 서로에게서 손을 뗐다. 성유리는 박한빈을 오래 쳐다보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 오늘 찾아온 손님은 족히 천 명이 넘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한 성유리는 얼굴 근육이 아파 나기까지 했다. 뒤에 있는 행사들은 성유리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 틈을 타 복도로 나갔다. 잠시 바람을 쐬며 숨을 고른 성유리는 가방 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를 두고 나온 사실을 발견했다. 가방 안을 샅샅이 더 뒤졌지만 라이터는 보이지 않았고 성유리는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은 성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급히 뒤돌아보느라 손에 들린 담배도 숨기지 못한 성유리를 박한빈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비록 이젠 그의 눈빛이 어떻든 신경을 쓰지 않는 성유리였지만 박한빈이 미간을 찌푸릴 때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박한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박 대표님이 왜 지금 이 시간에 여기 계시는 거죠? 안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성유리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손에 들린 담배를 끊어 버린 뒤 쓰레기통
더 보기

제202화

그 시각, 연회장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급히 진행된 결혼식이었지만 아무런 실수도 없이 무사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덧 신랑과 신부가 서로 반지를 교환하는 시간이자 이 결혼식의 하이라이트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성유정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갑자기 말했다. “오늘 결혼식을 올리려는 선택을 누가 했는지 알아요?” 진무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유정이 또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성유리, 우리 언니가 그랬어요.” “아직 우리 언니 좋아하죠? 결과는? 제 기분 좀 망치겠다고 무열 오빠까지 끌어들였잖아요.” 진무열은 성유정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순서대로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성유정은 덤덤한 그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빨을 꽉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언니는 제가 시집가면 성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봐요. 미련하기도 하지? 그냥 우리 아빠한테 제 이런 꼴을 보게 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요. 기다려요. 제가 가져야 하는 물건은 어떻게든 다 뺏어오겠으니까. 그래서 오빠는...” 성유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성유정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저녁에 있는 성유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왔던 윤청하는 이미 성시원의 품에 안겨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했고 성시원은 이성을 잃고 의사를 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일 “효녀”인 성유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역시 내 결혼식이 순조롭게 끝날 리가 없지.’ 성유정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사방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입구 쪽에서 성유리를 발견한 성유정은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두 손을 꼭 쥐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가식적인 년! 더러
더 보기

제203화

성유리는 진무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과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가족들은 윤청하가 젊었을 적에 찍어둔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걸어두었다. 성유리는 사진 속 윤청하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장례식 당일, 금성에는 갑자기 큰 비가 쏟아졌고 기온은 작년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성유리는 두꺼운 외투로 갈아입고 묘지 앞에 서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청하의 유골함은 빠르게 묘지 안에 안장되었고 그녀의 혼을 기리는 목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성유리는 윤청하가 정말 떠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성유리가 그녀에 대한 사랑과 원망의 감정은 윤청하의 죽음을 따라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때, 성유리는 윤청하가 눈을 감는 그날이 떠올랐다. 미안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청하는 성유리를 불러 자신의 앞에 세워두었다. 그때 윤청하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그날의 공기마저도 성유리는 다 기억이 났다. 성유리를 잃어버리기 전에 윤청하는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보살펴줬었다. 늘 성유리를 안고 잠에 들었고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흐르는 땀도 닦아주던 윤청하에 대한 기억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를 묵묵히 쳐다보던 윤청하는 눈을 감았고 성유리는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빗방울들은 점점 거세게 떨어져 성유리의 옷깃을 적셨지만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는 성유리의 옆에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성유리는 스스로 두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그쳤고 장례는 빠르게 끝이 났다. 손님들을 다 돌려보낸 뒤, 성시원이 성유리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나랑 같이 집에 가지 않겠니?”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성유정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성유정은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았고 성유리는 성시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같이 가요.” 
더 보기

제204화

“성 대표님, 전 대표님이랑 단둘이 밥 드시러 가는 건가요? 그분도 참...” 성유리와 통화 중이던 비서가 문득 하던 말을 멈췄다. 사실 비서의 말을 끝까지 못 들었지만 성유리는 비서의 뜻을 다 알고 있었다. 전 대표는 연성에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에 전 대표가 특별히 성유리랑 단둘만의 식사를 하자고 했으니 비서가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아요. 같이 저녁만 먹으면 되니까.” 성유리는 비서를 안심시키며 대답했고 그녀는 오히려 큰 걱정이 없어 보였다. 이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차 문을 닫고 내렸다. 오늘 식사 자리는 성유리가 예약을 했는데 혹시나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들을 대비하기 위해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미리 나오는 차들이 밥상 위에 다 차려졌을 때, 마침 진 대표도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성 대표님을 기다리게 했네요.” “괜찮아요.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다 정상이었다. 하지만 와인을 몇 잔 마시고 나서부터 전 대표는 슬슬 다른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했다. “성 대표님도 연성에 오신 지 이젠 몇 달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 “3개월 됐어요.” 성유리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을 해줬다. “적응은 잘해 나가고 계십니까?” “네. 다 전 대표님 덕분이죠.” 성유리는 조용히 전 대표가 내민 손을 비키며 술잔을 들었다. “받으세요. 제가 따라드릴게요.” 전 대표는 성유리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 성 대표님이 노력하신 덕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챙겨주는 건 금상첨화를 이루기 위함이고.” “그럼 금상첨화가 되게끔 도와주신 전 대표님께 감사드려야겠네요.” 옅게 웃으며 대답하는 성유리를 보던 전 대표가 술잔을 들어 부딪히며 대답했다. “별말씀을.” 저녁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잘 흘러갔다. 몇 번이나 슬금슬금 손을 내밀며 다가오
더 보기

제205화

그 여자는 식당 밖으로 나오다가 어딘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자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보던 성유리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검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 낯선 번호판이었지만 차의 모양과 디자인은 성유리가 제일 익숙한 것이었다. 그건 바로 박한빈이 제일 좋아하는 차였다. 성유리는 잠시 멍해서 차를 쳐다보다 택시를 잡는 것도 잊어버리고는 뒤를 돌아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오셨어요?” 여자는 기사가 내려 문을 열어주자 밝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검은색 코트에 화려하고 진한 금색의 단추와 무늬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가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져 딱 봐도 잘생긴 남자는 여자가 옆에 앉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박 대표님?” 가만히 있는 박한빈을 여자가 다시 불렀지만 그는 옆을 힐끔 쳐다만 볼 뿐이었다. “갑시다.” 박한빈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자 여자 또한 입을 굳게 닫았다.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자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올라가실래요?” 여자의 물음에 박한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내 박한빈의 뜻을 알아챈 여자는 결국 포기를 해야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여자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박한빈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의 기사가 터지고 나서부터 여자는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일을 했고 돈도 많이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박한빈과 만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좋은 자원들이 계속 들어왔다. 여성은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왜 그 업계의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면 승승장구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팬이 많고 영화가 흥행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돈을 버는 기계로 보일 뿐만 아니라 장난감 취급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요즘 박한빈을 따라다니며 인생의 달콤한 맛을 맛봤으니 여성은 자연스레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박
더 보기

제206화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의심되는 점이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사는 층수를 눌렀다. 서훈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두 자리 숫자를 보다가 성유리에게 다시 물었다. “성유리 씨는 이곳에서...” 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성유리는 서훈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전화를 받았다. “조 대표님? 저예요.” “대표님도 계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알았더라면 가서 술 한 잔 따라드릴 텐데.”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나중에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지은 죄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당연하죠. 장소는 대표님께서 정하세요.” 널찍한 엘리베이터 안에는 서훈과 성유리 둘뿐인지라 성유리의 목소리가 아무리 낮다 해도 서훈은 잘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성유리 층수에 도착하자 두 사람의 통화는 마침 끝이 났다.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서 비서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니요. 별거 아닙니다. 제 여자 친구도 이쪽에 혼자 있어서 혹시 괜찮으시면 소개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서로 챙겨주고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서훈은 하려던 물음을 끝내 내뱉지 못했고 급히 다른 말을 지어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성유리는 서훈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여기 보안이 아주 잘돼있어요. 서비스도 되게 좋고요.” 서훈은 성유리의 대답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뗐다. “네. 알겠습니다.” 성유리는 서훈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내리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서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내 그가 내려야 할 층수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서훈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만약 성유리가 서훈을 따라 들어왔다면 어두운 집안을 발견할 거고 여자 친구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 성유리는 요즘 자신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
더 보기

제207화

성유리는 남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전 조 대표님께서 바쁘실까 봐 그랬죠. 조 대표님이랑 밥 한 끼 먹으려 하는 사람이 저 빼고도 너무 많아서 아직 제 순서가 안 온 줄 알았어요.” 예쁜 그녀의 미소에 조 대표는 기분이 풀렸는지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지금 시간이 넘쳐나는데 성 대표님은 언제 저한테 밥을 사주시려나?” 성유리는 옆에 있던 술 한 잔을 들어 조 대표의 손에 건네주며 대답했다. “저야 당연히 아무 때나 괜찮죠. 내일 조 대표님 비서분을 통해서 연락드릴까요?” “뭐 그렇게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제 번호 있지 않으십니까?” 조 대표는 술잔을 쥐고는 성유리의 손을 어루만졌다. 뚱뚱한 편이 아닌 조 대표는 얼굴도 꽤 잘생겼지만 성유리는 그를 볼 때마다 느끼하다는 생각이 들고 보기 거북했다. 아무리 불편하고 싫어도 성유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오늘 집에 가서 식당 제대로 찾아봐야겠네요. 내일 전화 드릴게요.”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고 성유리는 조 대표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애를 썼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어 광대마저 아파지기 시작할 때, 입구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 사람이 배지수인가?” 성유리는 옆에 있던 사람들이 토론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성유리가 의아해하고 있던 그때, 다른 사람이 말했다. “맞아. 이번에 연극영화 대학 졸업한 사람이라는데 도대체 전생에 무슨 일을 했기에 저렇게 운이 좋은지 모르겠다니까.” “그냥 보기에는 별로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성유리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배지수라는 여성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저 여자가 박한빈 씨 새로운 여자 친구구나.’ 연예계와 그들의 일하는 업계는 사실 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오늘 연회에 참석한 배우와 가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은 배지수가 박한빈이 아닌 매니저와 같이 왔다는 사실이다. 성유리는 배지수를 힐끔 쳐다보고는 그녀에게서
더 보기

제208화

성유리는 사실 오늘 밤 술을 별로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연회장에서는 미처 못 느꼈지만 모든 것이 끝이나자 목이 너무 간질거려 참기 힘들었다. 성유리는 가는 길 내내 기침을 했고 호텔 밖으로 나오자 불어오는 찬 바람에 목은 더욱 간질거리고 아파왔다. 그녀의 기사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성유리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비서에게로 전화를 하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 대표님!” 어딘가 불길한 청아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성유리는 배지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안 가셨네요?” 밝게 웃으며 묻는 배지수에게 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여줬다. “기사님이 아직 안 오셨어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곧 오실 거예요.” “저도 괜찮아요. 시간도 늦었는데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배지수는 성유리에게 친한 척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잡힌 손을 빼내려는 순간, 배지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저 여기 있어요!” 배지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격동돼 있었다. 성유리는 이미 배지수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예상했기에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파오는 목 때문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배지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병원 먼저 모셔다드릴까요?” 성유리는 뒤를 돌아 기침을 하더니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자는 이미 그녀들의 앞에 서 있었다. “한빈 오빠, 저희 성 대표님 모셔다드릴까요? 어디 아프신 것 같은데 기사분도 연락이 안 된대요.”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남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응.” 박한빈은 배지수의 말에 짧게 대답을 해줬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성유리는 기침을 애써 참
더 보기

제209화

게다가 지금 마침 남자랑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으니 배지수는 내심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박한빈을 등에 업고 자신의 위치를 더욱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내려야 하는 층에 도착했고 박한빈은 먼저 내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긴장한 탓에 손에서도 땀이 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배지수가 박한빈을 보며 물었다. “저 먼저 씻을까요?” “응.” 박한빈은 짧은 대답만 했지만 배지수의 얼굴을 터질 듯 빨개졌다. 배지수는 방 안에 있는 박한빈을 한 번 더 힐끔 쳐다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떨려 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전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 안에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연성의 밤이 금성의 밤보다 조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축 기술의 발전으로 연성 또한 높은 빌딩과 화려한 조명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박한빈은 창문 너머 빌딩의 불빛만 조용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성유리의 눈빛이 떠올랐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이 경계하던 눈빛과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가던 뒷모습. ‘얼마 만에 보는 거지?’ 박한빈은 한참을 생각하다 마지막으로 성유리를 본 곳이 윤청하의 장례식장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그날 박한빈도 장례식장을 찾았지만 도착했을 때 시간이 꽤 늦었던 터라 바로 제일 뒤쪽에 서 있었다. 박한빈은 아직도 떨리던 성유리의 어깨와 꽉 쥔 두 주먹을 선명하게 기억났다. 성유리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박한빈이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안색과 참으려고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박한빈이 그날 성유리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뒤에 있는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배지수가 수건 한 장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진한 화장을 지운 배지수의 민낯은 청순했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배지수의 눈을 보고는 순간 가슴이
더 보기

제210화

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김서영의 입에서 처음 전해 들었었다. 김서영은 성유리가 박성훈이 고른 박한빈의 결혼 상대라고 알려주었다. 그쯤 성씨 가문에서 애타게 찾고 있던 성유리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된 터라 김서영은 핑계 삼아 성유리를 데리러 가라는 말도 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결혼 상대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았고 김서영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박한빈은 끝내 성유리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다 두 사람의 결혼이 가문들 사이 무언의 계약이라고 여겼다. 심지어는 결혼하는 박한빈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김서영은 세상에서 박한빈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박한빈이 한사코 거부했다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박한빈이 성유리와의 결혼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오늘에서야 박한빈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이 성유리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 말이다. 좋아하니까 성유리와 결혼을 하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전에 박한빈은 성유리와 오직 육체적인 욕망을 해결하는 사이라고만 생각했다. 필경 성유리는 자신의 아내이자 제일 잘 맞는 반쪽이라고 느꼈으니까. 육체적인 욕망을 빼고도 사실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치기 싫었지만 소유욕이 강해지면 질수록 이혼이 하고 싶었다. 그런 감정은 성유리가 아니어도 다른 여자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박한빈은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허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늘 성유리를 제일 먼저 선택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면 그녀를 제일 먼저 버렸다. 성유리는 항상 박한빈이 마음대로 버려버리는 “장난감”이었다. 상인으로서 박한빈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에 능했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고 성유리가 자신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너무 낮게 평가했다. 박한빈은 문득 성유리와 갓 결혼
더 보기
이전
1
...
1920212223
...
31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