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결혼이 헛된 망상이었을까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660 챕터

제11화 함께 있기 싫어

방금 병실에 들어가 아이의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깁스를 한 모습이 마냥 처참할 따름이었다.송재이가 설도영을 데리고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했음에도 상대방 부모는 대노하며 모진 욕설을 퍼부었다.처음 겪는 광경에 송재이도 당황스러워 얼굴이 빨개졌다.나중에 설도영이 듣다못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반박에 나섰다.“이봐요, 그러게 누가 댁 아드님 할 짓 없이 딴 여자애 나시 끈 잡아당겨서 망가뜨리래요? 본인이 더러운 행패를 부렸으니 얻어맞아도 싸요! 기왕 때리는 김에 확 죽여버릴 걸 그랬어요!!”사춘기 남자애들은 이성의 끈을 놓으면 걷잡을 수 없이 미쳐가는 법이다. 송재이는 설도영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어린놈의 자식이 뭘 이렇게 기고만장해? 우리 아들 털끝 하나 건드린 것까지 싹 다 돌려받을 거야!”상대가 펄쩍 뛰며 쏘아붙였다.“너 딱 기다려. 반드시 고소한다 내가!”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복도의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잘됐네요. 우리도 마침 법적 절차를 밟을 생각이었는데, 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 있는 박 변호사님께 직접 얘기하세요.”순간 송재이는 심장이 철렁거렸다.설도영도 고개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형!”송재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슈트 차림의 설영준은 창밖의 은은한 햇빛이 쏟아지자 조각 같은 얼굴이 유난히 더 빛났다.그의 준수한 외모는 뭇사람들 중에서 확연히 돋보이는 외모이고 송재이가 수년간 봐온 젊은 남자 중에 금욕의 매력을 내뿜는 아찔한 남자였다.고작 며칠을 못 봤을 뿐인데 지금 또다시 한없이 낯선 느낌이 든다.친형이 오자 설도영도 좀 전보다 목소리에 힘이 났다.설영준은 그를 힐긋 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설도영, 넌 돌아가서 얘기해!”이 한마디에 아이는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설영준의 뒤에는 정장 차림의 키 큰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박윤찬은 여기서 송재이를 보니 살짝 의외라는 듯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지금 급선무는 설도영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박윤찬은 마른기침을 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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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왜 이렇게 안절부절이야?

병원을 나선 송재이는 속이 울렁거려 너무 괴로웠다.그녀는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토하기 시작했다.다 토한 후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 한 병 사서 길옆에 선 채로 한 모금씩 들이켰다.이때 누군가가 갑자기 어깨를 툭 내리쳤고 화들짝 놀란 송재이는 하마터면 생수병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다행히 설영준이 재빨리 생수병 밑굽을 받아들었는데 물이 튀기며 그의 옷소매를 다 적셨다.설영준은 눈썹을 찌푸리고 송재이를 쳐다봤다.“귀신 봤어?”송재이는 가슴 찔린 듯 입을 닦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길거리에 설영준과 단독으로 서 있으려니 그녀는 저절로 스트레스가 쌓였다.설영준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뭘 보는 거야?”“여기 카메라 있어? 누가 또 몰래 촬영하는 거 아니지?”“왜 이렇게 경계하는데?”설영준은 그녀의 잔뜩 긴장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았다.송재이는 시선을 올리고 정색하며 그에게 말했다.“당신은 약혼녀 이외의 여자랑 엮이면 풍류가 넘친다는 말을 듣지만 난 아니야. 파렴치하게 내연녀 노릇이나 한다고 손가락질해.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결백함을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영준 씨가 내 생각 좀 해서 거리를 유지해줬으면 좋겠어.”송재이는 뭐가 이렇게 급해서 다음 연애 상대를 만나려고 안달인 걸까? 설영준이 그녀의 앞길을 막기라도 할까 봐?설영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고고한 기품은 늘 완벽 그 자체였다.길을 지나가던 젊은 여자들도 저도 몰래 뒤돌아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우와, 너무 잘생겼어. 혹시 연예인 아님?”당장 뛰쳐 가서 포옹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 지경이었다.유독 송재이만 그를 멀리 피하고 싶어 한다.이 남자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한없이 짙은 눈빛은 얼른 외면하고 싶었다.“너한테 덤터기 씌운 일은 이미 다 해결했잖아. 뭘 더 걱정하는 거야?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데?”말을 마친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송재이는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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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녀는 예뻤다

계속 비꼬려고 했지만 그녀의 빨개진 눈시울을 본 순간 목이 메었다.설영준은 여자를 다그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 설도영의 일로 짜증이 확 밀려온 듯싶다.그는 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기분을 한결 가라앉힌 후 담담하게 말했다.“됐다.”곧이어 차에 시동을 걸었다.“바래다줄게.”무슨 남자가 기분 전환이 이렇게 빠르지?그래도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으니 한편으론 숨이 트였다.설영준과 함께한 3년 동안 사실 그녀는 이 차에 타본 적이 별로 없다. 둘의 데이트 장소는 설영준의 집이거나 그의 장하 별장 침대 위였다.잠자리를 가졌던 남녀는 그래도 어딘가 다르겠지.설영준에게 자신이 몇 번째 여자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설영준은 첫 남자였다.남자의 생리적 인식과 그런 방면의 체험은 전부 설영준한테서 얻었다.지금 그리 넓지 않은 차 안에 단둘이 있으니 송재이는 썩 편하지만은 않아 창밖으로 머리를 기울였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설도영에게 걸려온 전화였다.송재이는 옆에서 운전하는 설영준을 힐긋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말씀이 딱 맞아요. 우리 형이 모질게 굴 때면 진짜 소름이 끼친다니까요...”설도영은 생각할수록 울분이 차올라 끝내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아이는 맨 마지막에 애원 조로 말했다.“쌤이 우리 형한테 사정하면 안 돼요? 나 진짜 사고 안 치고 열심히 학교 다닐게요. 그러니까 여름 방학에 여행 가게 해줘요, 네?”송재이가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설영준은 동생의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그녀가 내뱉었던 ‘모질게 군다’는 그 말까지...“너희 형이 어떤 사람인데 내 말을 들을 리가 있겠어?”송재이는 눈 딱 감고 용기 내어 반박했다.자신이 설영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란 걸 이 아이에게 알려야 한다. 설영준이 그녀를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건 설도영의 착각일 뿐이니까.또한 송재이는 옆에 있는 설영준에게도 알려야 한다. 자신은 본분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절대 불합리한 망상 따위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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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설영준, 나 괴롭히지 마!

한참 후 그녀가 생각했던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송재이는 눈을 감고 있어서 설영준이 얼마나 사람을 질식시켜버릴 것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는지 전혀 모른다.그는 송재이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됐어’라는 말만 내뱉었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송재이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송재이는 잠시 뒤에야 눈을 떴다.“얼굴에 속눈썹 묻어서.”설영준이 말했다.“떼어냈어.”그는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좀전의 야릇한 제스처와 그윽한 눈빛은 그녀만의 착각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화나서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다만 그녀는 화를 낼 수가 없다.여기서 발끈하면 본인이 뭘 기대했는지, 얼마나 엉큼한 상상을 했는지 인정하는 셈이 되니까.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속으로 쉴 새 없이 되뇌었다.‘우린 이미 헤어졌어. 설영준은 지금 여자가 생겼다고. 한 인간으로서 딴 여자의 약혼자에게 망상을 품을 순 없어! 그건 너무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야!’...송재이의 생각이 점점 더 골로 갔다.잠시 후 뒤에서 울리는 경적에 설영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웃음기를 거두었다.방금 그녀를 놀리며 반응을 지켜보았는데 이렇게 깨고소할 수가 없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장난은 장난에 불과하다.설영준은 별안간 웃음기를 싹 거두고 아예 차 방향을 틀었다.송재이는 반응이 느려 잠시 넋 놓고 있다가 물었다.“어디 가?”그녀는 지금 일부러 설영준을 피하려고 하지만 설영준은 아예 그런 생각이 없는 듯싶다.송재이는 제발 좀 남자로서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주현아를 위해서라도 자꾸만 전 애인인 그녀와 엮이는 건 그릇된 일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어디 가는데? 나 안 가.”송재이의 반항은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설영준은 여전히 그녀의 집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송재이는 이렇게 일방적인 설영준이 너무 싫다.이제 막 버럭 화내려 할 때 설영준이 입을 열었다.“나랑 같이 백화점 가서 선물 골라줘. 여자한테 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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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너무 낯선 이 남자

너무 가까이 붙어 가면 몰래 사진 찍히거나 지인에게 들킬 수 있으니까...설영준은 자꾸만 움츠려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 함께 있을 땐 단 한 번도 단둘이 나와서 쇼핑한 적이 없었고 그 또한 송재이를 데리고 나올 생각조차 없었다!어느덧 헤어지고 나니 함께 백화점에 오게 될 줄이야.진열대 앞에 서서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상대방의 취향이나 품위를 물으며 어떤 스타일의 쥬얼리를 맞춰줄지 고민했다.설영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딱 세 단어만 말했다.“겸손하고 소탈하고 단아한 거로 해.”매장 직원이 열성적으로 다가와 두 사람에게 몇 가지 매우 고급스러운 목걸이와 액세서리를 보여줬다.이탈리아 브랜드인 이 제품들은 디자인이나 퀄리티 모두 일품이었다.송재이가 하나 고르자 매장 직원이 꺼내서 그녀에게 착용해 주었는데 너무 잘 어울렸다.새하얀 피부가 광택이 나는 진주와 아주 잘 어울렸고 한결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설영준은 거울 앞에 서서 실내의 밝은 조명을 받으며 묵묵히 그녀를 쳐다봤다.3억2천만 원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송재이도 그의 소비 수준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고개 들어 한마디 물었다.“이건 어때?”설영준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더니 매장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매장 직원들은 이렇게 통쾌한 부자 고객들을 제일 좋아한다. 직원은 신나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지금 바로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기다리는 동안 설영준의 시선은 여전히 진열대의 액세서리에 꽂혀 있었다.그는 무심코 송재이에게 말했다.“너도 하나 골라봐. 사줄게 내가.”자그마치 그의 곁에 3년이나 있었으니.진열대의 물건은 아무거나 대충 하나 골라도 몇천만 원대부터 몇억 원대에 달한다. 이 금액은 설영준에게 껌값에 불과하지만 송재이에겐 1, 2년 연봉 수준이다.그녀는 잠시 넋 놓고 있다가 웃으며 답했다.“그새 잊었네. 말했잖아, 난 전 남친 물건 같은 건 남기지 않아.”말을 마치니 또다시 가슴이 찔렸다.그에게 있어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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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손 까딱하면 넘어올까

식사를 이어가던 중 송재이가 아침에 설영준이 택배로 보내온 선물을 식탁에 올려놨다.“도영아, 이거 대신 너희 형한테 전해줘.”“이게 뭔데요?”“상관 말고 넌 그냥 전해주면 돼.”설도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송재이는 의리 넘치게 바로 가주었다.지금 이건 고작 물건 하나 전해주라는 부탁이니 설도영도 흔쾌히 허락할 줄 알았는데 아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수저를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거 혹시 쌤이 우리 형한테 돌려주는 이별 선물이에요? 그런 거라면 나 못 줘요. 괜히 나중에 나한테만 화풀이할 거라고요...”송재이는 가슴이 꽉 막혔다.요 녀석의 말투를 들으니 그녀와 설영준 사이를 진작 알아챈 듯싶다!어쩌면 사진 스캔들보다 더 빨리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한 송재이는 더 껄끄러워졌다!“너희 형 그렇게까지 시비 못 가리는 사람 아니야. 이 일로 너랑 화내지도 않을 거고, 그리고 또...”송재이는 설영준과 좋게 끝낸 사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만약 좋게 끝낸 사이라면 설영준이 그녀를 차단할 필요가 있을까.차단당한 일만 떠올리면 울화가 저절로 치밀었다.“쌤은 우리 형에 대해 제법 잘 아시네요. 형이 어떤 성품인지도 잘 알고요.”설도영은 그녀의 말에서 흠을 잡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송재이는 입술을 앙다물었다.역시 그 형에 그 동생이라니까. 아주 쌍으로 그녀를 속 썩이는 재주가 있다!“난 잘 몰라. 그 사람은 한때 나의 고용주였을 뿐이야.”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담담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고용주면 쌤이 직접 주시지 뭣 하러 나보고 전해주래요? 거짓말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마음 찔려서 감히 우리 형 못 만나는 거예요?”설도영이 맑은 두 눈을 깜빡이며 더없이 순수한 척했다.“...”송재이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인제 보니 설영준만 잘 알지 못한 게 아니라 설도영을 가르친 보람도 없었다.결국 그녀 스스로 마주해야 한다.헤어질 때 설도영이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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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그녀는 너무 진지해

이 남자가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아마도 육체적인 욕구겠지.섹스는 할 수 있어도 미래는 줄 수 없는, 늘 그래왔던 남자니까.다만 송재이는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와 작별한 후 설도영도 차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서 설도영은 방금 편의점에서 산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설영준에게 전화했다.“형, 나 금방이면 집 도착해요.”전화기 너머로 설영준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몇 살인데 아직도 이런 걸 얘기해?”“방금 재이 쌤이랑 같이 저녁 먹었어요. 내가 지금 돈 없는 걸 알고 쌤이 사주셨어요.”설도영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잠시 후 설영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늘 밤에 송재이 선생님이랑 같이 밥 먹었다고?”“네.”설도영은 일부러 3초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재이 쌤 혹시 형 짝사랑해요?”순간 설영준은 미간을 구겼지만 동생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설도영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름이 아니라 쌤 화장실 갈 때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휴대폰이 식탁 위에 있길래 우연히 봤거든요. 휴대폰 잠금 화면이 글쎄 형 사진이더라고요. 뭐 물론 형이 워낙 잘생겼으니까 쌤이 짝사랑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죠...”“나중에 돌아오고 나서 왜 형 사진을 잠금 화면으로 해두었냐고 물었더니 쌤이 엄청 수줍어하면서 절대 형한테 말하지 말랬어요. 역시 짝사랑하는 여자들은 수줍음이 많다니까요. 형도 쌤 좋아하면 좀 먼저 나서봐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영준이 전화를 툭 꺼버렸다.송재이는 설도영을 잘 몰라도 설영준은 제 동생을 너무 잘 안다.이 아이가 했던 말이 헛소리일 가능성이 매우 클지 몰라도 일단 그 점을 제쳐두고 동생의 말이 의외라고 느껴지진 않았다.3년 동안 송재이는 티 날 정도로 설영준을 줄곧 좋아했으니까.하지만 그녀처럼 어리고 단순한 여자는 설영준에게 육체적인 이끌림 이외에 다른 방면으론 딱히 매력이 없다.목걸이를 선물한 것도 그날 진열대에서 착용해봤을 때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대뜸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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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육체만 개입된 사이

임신한 연유 때문일까, 요즘 들어 송재이는 쉽게 지치고 피곤해진다.비행시간이 고작 3시간인데 그녀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들었다.잠에서 깼을 때 몸에 담요가 덮여 있었다.그녀는 비몽사몽 한 채로 눈을 뜨고 활짝 웃는 서유리와 눈이 마주쳤다.송재이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 곧게 앉았다.담요는 아무래도 서유리가 덮어준 듯싶다. 그녀는 고마운 뜻으로 서유리에게 웃어 보였다.“방금 꿈꿨어요. 잠꼬대도 했고요.”서유리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송재이는 흠칫 놀라서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뭐랬는데요?”“너 미워, 망할 놈... 이랬어요.”서유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송재이는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서유리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니 차마 입밖에 내뱉지 못할 더한 말도 한 듯싶다.“재이 씨 연애하죠?”서유리가 가까이 다가오며 오지랖 넓은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늘 온화하고 진중한 타입이라 누군가의 사생활에 이토록 관심을 가진 적이 거의 없다. 적어도 송재이는 서유리를 이렇게 생각한다.“아니요.”송재이는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그치만 사랑하지도 않는데 미워한다는 게 말이 돼요? 재이 씨 꿈속의 그 남자 대체 누구예요?”지금은 설영준과 헤어져서 그렇다고 쳐도 한때 함께했을 때도 그녀는 절대 설영준의 이름을 내뱉을 리가 없다.둘은 떳떳한 사이가 아니니까. 송재이는 이 룰을 잘 지켜야 한다. 그녀는 오직 설영준이 한때 침대에서 욕구를 푸는 여자에 불과했다.둘은 서로의 육체에 개입할 순 있어도 삶에 개입할 순 없다.지금 다시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송재이의 마음이 복잡해질 따름이었다.후회되지는 않아도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서유리는 그녀를 놀리려던 생각이었는데 이토록 우울하고 쓸쓸해 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얼마 전에 어떤 남자의 차에서 키스했던 사진이 게시판을 뜨겁게 달궜던 게 떠올랐다.사진 속 송재이는 키스를 당할 때 설레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서유리는 아직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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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흥 돋게 한 곡 연주해

오서희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청량하고 우아한 목소리에서 이 나이대 여성들 특유의 진중함이 묻어났다.송재이는 3년간 설도영을 가르치면서 매주 설씨 일가로 찾아가 진실된 오서희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듣기 좋게 얘기해서 오서희는 보이는 것처럼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송재이는 살짝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네, 사모님. 무슨 일이세요?”오서희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재벌가 사모님들은 다들 사교 능력이 뛰어난 법이다. 일단 송재이에게 근황을 물으며 다정한 척을 했고 이에 송재이는 황송한 마음으로 일일이 회답했다.오서희는 돌연 화제를 바꾸고 본론에 들어갔다.“송 선생님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랑 우리 그이 결혼 30주년이거든요...”오서희가 초대를 보내오다니.마지막으로 오서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사직 의사를 밝혔다.오서희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담담하게 머리를 끄덕일 뿐 딱히 그녀를 만류하진 않았다.송재이가 떠나려 할 때 그녀가 불쑥 등 뒤에서 이 한마디를 내던졌다.“그래도 제 분수는 아네요. 제 것이 아닌 물건은 노리지 말아요!”송재이는 몇 초간 넋 놓고 있다가 머리를 홱 돌렸다.오서희는 이미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방금 그런 말을 한 사람이라곤 전혀 상상이 안 갔다.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는 표정 변화에 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송 선생님? 시간 되시죠?”오서희가 직접 전화까지 한 이상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건 제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무례한 행위이다.송재이는 귀한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입술을 꼭 깨물었다.“네, 꼭 갈게요.”...시간이 빨리 흘러 어느새 토요일이 되었다.송재이는 설씨 일가로 가기 전에 우선 백화점에 들렀다.지난번에는 설영준을 도와 선물을 고르러 갔지만 이번에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누군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러 가는 자리인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송재이는 문득 설영준이 선물 사러 갈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50대 여자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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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거들떠보지 않아

1층 거실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설씨 일가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재벌 가문이었다.송재이는 오서희에게 끌려 이곳에 오니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다.선물을 주고 목걸이도 설영준에게 돌려준 후 핑계를 둘러대고 떠나려던 참인데 이때 마침 설도영이 가까운 곳에서 달려오더니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오셨어요, 재이 쌤!”아이는 자연스럽게 송재이를 잡아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쌤, 그날 내가 다툰 일 엄마한테 안 일렀죠?”송재이가 힐긋 째려보자 설도영은 가슴 찔리듯 겸연쩍게 웃었다.“쌤은 의리가 넘쳐서 절대 안...”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위층에서 주현아가 우아한 기품을 뽐내며 걸어 내려왔다.50대로 보이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내려왔는데 아마 그녀의 아빠일 듯싶었다.주현아는 송재이를 마주 보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송 선생님.”주현아가 거실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를 가리키며 말했다.“방금 2층에서 들었는데 영준 씨 어머님, 아버님께 직접 한 곡 연주해주시겠다고요? 제가 뭘 놓친 건 아니죠?”오서희가 눈썹을 들썩거렸다.“아니야, 마침 잘 왔어. 송 선생님은 평소에 흔히 연주하지 않아. 오늘처럼 특별한 날이니까 한 곡 연주하는 거야. 선생님, 꼭 해주실 거죠?”오서희는 홀가분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정작 송재이를 거절하지 못하게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약 여기서 거절하면 그녀만 오서희의 체면을 짓밟는 셈이 된다.송재이는 줄곧 한쪽 옆에 서 있었다.아까 문밖에서 누군가가 운을 뗄 때부터 기분이 불쾌했고 오서희가 그녀 대신 이 상황을 무마할 줄 알았는데 아예 잘못짚었다.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빗나간 격이다!오서희와 주현아가 서로 맞장구를 치는 걸 보니 진작 이러려고 계획한 듯싶었다!송재이는 옆을 힐긋 바라봤다.설영준은 손에 찻잔을 들고 아무렇지 않게 옆 사람들과 담소를 나눴다. 마치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또 어쩌면 그는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수 있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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