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아마도 육체적인 욕구겠지.섹스는 할 수 있어도 미래는 줄 수 없는, 늘 그래왔던 남자니까.다만 송재이는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와 작별한 후 설도영도 차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서 설도영은 방금 편의점에서 산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설영준에게 전화했다.“형, 나 금방이면 집 도착해요.”전화기 너머로 설영준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몇 살인데 아직도 이런 걸 얘기해?”“방금 재이 쌤이랑 같이 저녁 먹었어요. 내가 지금 돈 없는 걸 알고 쌤이 사주셨어요.”설도영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잠시 후 설영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늘 밤에 송재이 선생님이랑 같이 밥 먹었다고?”“네.”설도영은 일부러 3초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재이 쌤 혹시 형 짝사랑해요?”순간 설영준은 미간을 구겼지만 동생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설도영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름이 아니라 쌤 화장실 갈 때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휴대폰이 식탁 위에 있길래 우연히 봤거든요. 휴대폰 잠금 화면이 글쎄 형 사진이더라고요. 뭐 물론 형이 워낙 잘생겼으니까 쌤이 짝사랑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죠...”“나중에 돌아오고 나서 왜 형 사진을 잠금 화면으로 해두었냐고 물었더니 쌤이 엄청 수줍어하면서 절대 형한테 말하지 말랬어요. 역시 짝사랑하는 여자들은 수줍음이 많다니까요. 형도 쌤 좋아하면 좀 먼저 나서봐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영준이 전화를 툭 꺼버렸다.송재이는 설도영을 잘 몰라도 설영준은 제 동생을 너무 잘 안다.이 아이가 했던 말이 헛소리일 가능성이 매우 클지 몰라도 일단 그 점을 제쳐두고 동생의 말이 의외라고 느껴지진 않았다.3년 동안 송재이는 티 날 정도로 설영준을 줄곧 좋아했으니까.하지만 그녀처럼 어리고 단순한 여자는 설영준에게 육체적인 이끌림 이외에 다른 방면으론 딱히 매력이 없다.목걸이를 선물한 것도 그날 진열대에서 착용해봤을 때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대뜸 카드
임신한 연유 때문일까, 요즘 들어 송재이는 쉽게 지치고 피곤해진다.비행시간이 고작 3시간인데 그녀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들었다.잠에서 깼을 때 몸에 담요가 덮여 있었다.그녀는 비몽사몽 한 채로 눈을 뜨고 활짝 웃는 서유리와 눈이 마주쳤다.송재이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 곧게 앉았다.담요는 아무래도 서유리가 덮어준 듯싶다. 그녀는 고마운 뜻으로 서유리에게 웃어 보였다.“방금 꿈꿨어요. 잠꼬대도 했고요.”서유리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송재이는 흠칫 놀라서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뭐랬는데요?”“너 미워, 망할 놈... 이랬어요.”서유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송재이는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서유리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니 차마 입밖에 내뱉지 못할 더한 말도 한 듯싶다.“재이 씨 연애하죠?”서유리가 가까이 다가오며 오지랖 넓은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늘 온화하고 진중한 타입이라 누군가의 사생활에 이토록 관심을 가진 적이 거의 없다. 적어도 송재이는 서유리를 이렇게 생각한다.“아니요.”송재이는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그치만 사랑하지도 않는데 미워한다는 게 말이 돼요? 재이 씨 꿈속의 그 남자 대체 누구예요?”지금은 설영준과 헤어져서 그렇다고 쳐도 한때 함께했을 때도 그녀는 절대 설영준의 이름을 내뱉을 리가 없다.둘은 떳떳한 사이가 아니니까. 송재이는 이 룰을 잘 지켜야 한다. 그녀는 오직 설영준이 한때 침대에서 욕구를 푸는 여자에 불과했다.둘은 서로의 육체에 개입할 순 있어도 삶에 개입할 순 없다.지금 다시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송재이의 마음이 복잡해질 따름이었다.후회되지는 않아도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서유리는 그녀를 놀리려던 생각이었는데 이토록 우울하고 쓸쓸해 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얼마 전에 어떤 남자의 차에서 키스했던 사진이 게시판을 뜨겁게 달궜던 게 떠올랐다.사진 속 송재이는 키스를 당할 때 설레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서유리는 아직 누군가
오서희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청량하고 우아한 목소리에서 이 나이대 여성들 특유의 진중함이 묻어났다.송재이는 3년간 설도영을 가르치면서 매주 설씨 일가로 찾아가 진실된 오서희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듣기 좋게 얘기해서 오서희는 보이는 것처럼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송재이는 살짝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네, 사모님. 무슨 일이세요?”오서희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재벌가 사모님들은 다들 사교 능력이 뛰어난 법이다. 일단 송재이에게 근황을 물으며 다정한 척을 했고 이에 송재이는 황송한 마음으로 일일이 회답했다.오서희는 돌연 화제를 바꾸고 본론에 들어갔다.“송 선생님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랑 우리 그이 결혼 30주년이거든요...”오서희가 초대를 보내오다니.마지막으로 오서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사직 의사를 밝혔다.오서희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담담하게 머리를 끄덕일 뿐 딱히 그녀를 만류하진 않았다.송재이가 떠나려 할 때 그녀가 불쑥 등 뒤에서 이 한마디를 내던졌다.“그래도 제 분수는 아네요. 제 것이 아닌 물건은 노리지 말아요!”송재이는 몇 초간 넋 놓고 있다가 머리를 홱 돌렸다.오서희는 이미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방금 그런 말을 한 사람이라곤 전혀 상상이 안 갔다.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는 표정 변화에 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송 선생님? 시간 되시죠?”오서희가 직접 전화까지 한 이상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건 제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무례한 행위이다.송재이는 귀한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입술을 꼭 깨물었다.“네, 꼭 갈게요.”...시간이 빨리 흘러 어느새 토요일이 되었다.송재이는 설씨 일가로 가기 전에 우선 백화점에 들렀다.지난번에는 설영준을 도와 선물을 고르러 갔지만 이번에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누군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러 가는 자리인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송재이는 문득 설영준이 선물 사러 갈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50대 여자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1층 거실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설씨 일가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재벌 가문이었다.송재이는 오서희에게 끌려 이곳에 오니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다.선물을 주고 목걸이도 설영준에게 돌려준 후 핑계를 둘러대고 떠나려던 참인데 이때 마침 설도영이 가까운 곳에서 달려오더니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오셨어요, 재이 쌤!”아이는 자연스럽게 송재이를 잡아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쌤, 그날 내가 다툰 일 엄마한테 안 일렀죠?”송재이가 힐긋 째려보자 설도영은 가슴 찔리듯 겸연쩍게 웃었다.“쌤은 의리가 넘쳐서 절대 안...”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위층에서 주현아가 우아한 기품을 뽐내며 걸어 내려왔다.50대로 보이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내려왔는데 아마 그녀의 아빠일 듯싶었다.주현아는 송재이를 마주 보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송 선생님.”주현아가 거실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를 가리키며 말했다.“방금 2층에서 들었는데 영준 씨 어머님, 아버님께 직접 한 곡 연주해주시겠다고요? 제가 뭘 놓친 건 아니죠?”오서희가 눈썹을 들썩거렸다.“아니야, 마침 잘 왔어. 송 선생님은 평소에 흔히 연주하지 않아. 오늘처럼 특별한 날이니까 한 곡 연주하는 거야. 선생님, 꼭 해주실 거죠?”오서희는 홀가분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정작 송재이를 거절하지 못하게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약 여기서 거절하면 그녀만 오서희의 체면을 짓밟는 셈이 된다.송재이는 줄곧 한쪽 옆에 서 있었다.아까 문밖에서 누군가가 운을 뗄 때부터 기분이 불쾌했고 오서희가 그녀 대신 이 상황을 무마할 줄 알았는데 아예 잘못짚었다.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빗나간 격이다!오서희와 주현아가 서로 맞장구를 치는 걸 보니 진작 이러려고 계획한 듯싶었다!송재이는 옆을 힐긋 바라봤다.설영준은 손에 찻잔을 들고 아무렇지 않게 옆 사람들과 담소를 나눴다. 마치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또 어쩌면 그는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수 있다.송
송재이는 주위 사람들을 쭉 훑어보다가 결국 주현아에게 시선이 멈췄다.그녀는 입가에 번진 미소를 미처 수습하지 못했다.어쩌면 오늘은 주현아가 오서희에게 뭐라고 꼬드겨서 오서희가 친히 송재이를 초대한 듯싶다. 뭇사람들 앞에서 따끔하게 혼낼 예정이지!송재이가 연주를 거절하면 오서희도 절대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다.문예슬과 설도영이 송재이를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자마자 오서희의 싸늘한 눈빛에 식겁하여 뒤로 물러섰다.문예슬은 난감한 표정으로 송재이를 쳐다봤고 설도영도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못 도와주겠다며 말하고 있었다.송재이는 시선을 거두고 오서희와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분위기가 살얼음판에 도달했고 송재이는 더는 설영준이 나서서 도와주길 바라지도 않았다.하지만 기대가 없음에도 상처받은 심장은 너덜너덜해져서 한없이 가라앉았다.“송 선생님만 연주하면 뭐가 재밌겠어요?”이때 문득 감미로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려 보니 인파들 속에서 박윤찬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그는 송재이의 옆에 서서 큰 키로 그녀의 시선을 거의 다 가렸다. 송재이는 앞이 안 보여 어떤 남자가 지금 미간을 구기고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박윤찬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인 후 오서희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실례가 안 된다면 저랑 재이 씨가 함께 연주해도 될까요?”흥을 돋우려면 한 사람보단 당연히 둘이 더 떠들썩한 법이다.오서희는 입을 벌렸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윤찬이 이미 몸을 돌려 송재이를 향해 눈썹을 들썩거리며 눈빛으로 그녀의 뜻을 물었다.그가 지금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걸 송재이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오늘 만약 오서희의 체면을 짓밟았다면 송재이는 앞으로 더는 경주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나름 좋은 방법이다.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뭇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박윤찬과 나란히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피아노
송재이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기회를 봐가며 그에게 목걸이를 돌려준 후 자리를 떠나려 했다.이때 설영준이 전화를 받았는데 업무상의 내용인 듯싶었다.그는 차분하게 통화를 마치고 컵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맞은편에 있는 설동훈에게 말했다.“저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말을 마친 후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송재이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따라갔다.잠시 후 설영준이 손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송재이는 복도에 서서 머리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그녀도 인기척 소리에 고개 들어 설영준을 쳐다봤다.설영준의 눈빛은 한없이 차분했다. 둘은 눈을 마주쳤지만 그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곧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송재이가 황급히 쫓아갔다.“영준 씨, 나 줄 거 있어.”설영준은 지금 새 여친이 생겨서 송재이에게 시큰둥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그녀는 매정하게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설영준이 단번에 허락했다.“발코니로 따라와.”“뭐?”송재이가 넋 놓고 있자 설영준이 고개 돌려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줄 거 있다면서!”말을 마친 후 복도 끝의 발코니로 걸어갔다.송재이는 눈을 깜빡이다가 얼른 그를 따라갔다.밤바람이 조금은 차갑게 몸에 스며들었다.가을이 되니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했다.송재이는 얇게 입었던지라 무심코 제 몸을 감싸 안았다.설영준은 난간 앞에 서서 몸을 돌리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왠지 모르게 그의 눈빛에는 항상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어떠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한편 송재이는 이런 걸 고민할 여지 없이 가방에서 목걸이를 꺼내 그에게 돌려줬다.“전에 택배로 보내준 거 돌려줄게.”“왜? 마음에 안 들어?”설영준은 힐긋 쳐다볼 뿐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돌려받을 기미가 없었다.송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너무 비싸. 이런 걸 받을 이유가 없어...”“왜 없어?”그의 물음에 송재이는 가슴이 움찔거렸다. 곧이어 설영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너랑 3년이나
“송 선생님이 선물을 대신 전해주라고 해서요.”설영준이 불쑥 말을 꺼내며 방금 송재이가 건넨 보석함을 오서희에게 전했다.“자, 받으세요.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대요 송 선생님이.”오서희와 송재이 모두 흠칫 놀랐다.오서희는 방금 다른 손님들과 얘기를 나눌 때 일부러 흘리듯 투덜댔었다.송재이처럼 하찮은 집안의 여자들은 역시 룰을 잘 모른다고, 빈손으로 초대에 응하는 게 무슨 경우냐고 잔뜩 불만을 토로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경우지?진짜 가난해서 아무것도 살 능력이 안 돼 공짜로 한 끼 얻어먹으려고 온 줄 알았더니 인제 와서 선물을 덥석 건넬 줄이야!설영준이 산 목걸이로 지금 송재이에게 체면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그녀는 괴롭고 난처할 따름이었다.설영준이 대체 왜 이렇게 나오는 걸까? 그녀는 이 남자를 힐긋 쳐다봤다.방금 사모님이 그토록 난감하게 굴 땐 선뜻 나서지도 않더니 지금 왜 도와주고 있지?변덕스러운 이 남자의 마음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송재이는 별수 없이 일단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었다.재벌가 사모님들은 발코니 입구에 서서 오서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석함을 여는 걸 지켜보았다.눈썰미가 좋은 누군가는 이 목걸이가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그리고 또 더 눈치 빠른 누군가가 거침없이 쏘아붙였다.“어머? 이상하네. 이 목걸이는 오늘 영준이가 선물한 것과 똑같잖아요. 그 세트랑 정말 똑같아요!”송재이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방금 말을 꺼낸 사람은 평소에 오서희와 친하게 지내는 서보경 사모님이다.다들 함께 어울려서 화투도 종종 치곤 한다.겉보기엔 친한 것 같아도 실은 암묵적으로 서로 헐뜯으며 복잡한 질투의 심리가 얽혀 있다.서보경은 금세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더 오버하며 외쳤다.“어머나, 세상에. 내가 뭐랬어요! 이거 완전 똑같은 거잖아요!”그녀는 웃으며 송재이와 설영준을 번갈아 보았다.“우리 영준이랑 도영의 피아노 선생님 안목이 이렇게나 똑같을 줄이야. 무슨 목걸이도 똑
설영준이 음침한 눈빛으로 얼굴을 들었다.송재이는 이미 인파를 가르고 자리를 떠났다.설씨 일가의 대문을 나선 후에야 눈물을 쓱 닦았다.방금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 그런 말을 내뱉었다.조금 충동적이긴 하지만 단언컨대 그녀의 진심이다.너무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그제야 외투를 놓고 나온 게 생각났다.다만 지금 이 상황에 다시 돌아가서 외투를 챙길 수도 없었다.그녀는 저 자신을 꼭 감싸 안으며 시린 마음을 추슬렀다.이때 갑자기 어깨에 외투가 하나 걸쳐졌는데 고개 들어 보니 박윤찬이 옆에 와 있었다.“재이 씨, 택시 잡아드릴까요?”오늘 밤에 박윤찬은 그녀를 두 번이나 도와줬다.송재이는 너무 감격스러웠다.방금 대문 앞에 서서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바람에 아직도 얼굴에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이를 본 박윤찬이 옷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넸다.“고마워요.”송재이가 티슈를 받고 이제 막 머리를 돌렸는데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그는 바로 지민건이었다!대문 앞의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비치자 그 남자의 초췌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덥수룩한 수염과 초라한 몰골, 바람에 흩날리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왠지 더 안쓰러워 보였다.“지민건?”송재이가 물었고 박윤찬은 그녀의 시선 따라 머리를 돌렸다.“지민건 씨가 대표님을 일주일이나 찾아다녔는데 종일 안 만나주셨거든요.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지민건이 왜요?”설영준이 전에 그의 프로적트를 하나 취소한 건 송재이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고작 프로젝트 하나 손해 봤다고 이 지경으로 몰락한다는 말인가?“요즘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나 맡았는데 상대측에서 지민건 씨를 고소했대요. 원래 계약하기로 한 건축회사도 설한 그룹 계열사였다고 하네요. 우연인지는 몰라도 지민건 씨는 지금 두 번이나 피해를 보았는데 두 번 다 대표님과 연관이 있지 뭐에요.”현재 그 건축회사에서 지민건에게 법원 소환장을 보낸 상태이다. 상대가 고소를 취하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