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은 지민건과 통화를 마친 후 유유자적하게 몸을 돌렸다.이때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주현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송재이도 울었었다.그가 ‘술집 아가씨’라고 욕할 때 눈물을 훔쳤었다.그런 말은 어떤 여자든 굴욕으로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심지어 송재이는 창녀가 아닌데...서러움과 괴로운 감정이 점점 더 북받쳤겠지.설영준은 뒤에 있는 난간을 잡고 차가운 시선으로 주현아를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주현아는 마치 서러움을 당한 초등학생처럼 한 마디 관심해주니 감정이 격해졌다.꾹 참았던 눈물이 한순간 울컥 쏟아지고 슬픔에 빠져버렸다.그녀는 설영준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영준 씨, 나 약혼반지 잃어버렸어.”설영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3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어쩌다가?”“그게 그러니까... 화장실 갈 때 반지 빼서 세면대 옆에 놓아두고 안에서 볼일 보고 다시 나왔더니 반지가 사라졌어...”주현아는 진심으로 속상했다. 그 반지는 설영준이 선물한 반지였으니까.이제 곧 약혼식도 치러야 하고 약혼식 때 그 반지를 껴야 하는데 지금 잃어버리면 어떡하라는 거지?주현아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왠지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설영준은 아무 말이 없었고 주현아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살짝 격앙된 듯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영준 씨가 찾아봐 줘. 손님들 아직 다 안 갔으니 CCTV 돌려봐 봐. 분명 누군가 훔쳐 갔을 거야! 흑흑...”설영준은 결국 그녀의 뜻대로 집사를 불러와 반지를 보았는지 물었다.집안에서 물건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자 집사들은 전부 자신이 의심을 당할까 봐 그에게 반지를 본 적이 없다고 해명하기 바빴다.집안의 모든 CCTV도 점검했는데 거실이며 복도 전부 정상 작동이었다.유독 1층 복도의 화장실과 가까운 곳에 달린 CCTV가 공교롭게도 고장이 나버렸다!주현아는 카메라를 돌려보면 누가 반지를 가져갔는지
그날 지민건과의 짧은 만남이 마지막일 거라고 송재이는 생각했다.하지만 며칠 뒤의 한 오후.지민건은 사람들로 가득한 연습실에 나타났다.송재이는 피아노 앞에 앉아 음정을 고르고 있었다.그때 서유리가 송재이의 귓가에 속삭였다.“재이 씨, 어떤 남자가 재이 씨 찾는데.”송재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건이 보였다.그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이를 본 오케스트라 단장도 화들짝 놀라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재이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송재이도 영문을 몰랐다.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당황해하며 지민건을 일으켜 세웠다.“뭐 하는 거야? 얼른 일어나, 일어나서 얘기해.”“재이야, 내가 인터넷에 네 사진 올리고 그런 음란한 유언비어를 퍼트린 건 네가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일부러 복수하려고 그런 거야. 네가 유부남한테 꼬리치지 않은 것도 알고, 그날 차에서 찍은 그 애정행각 사진은 다 내가 포토샵 한 거야. 이 일로 인한 명예 훼손은 내가 다 배상할게. 내가 잘못했어. 나 바라는 거 없어. 그냥 너에게 용서를 빌 뿐이야.”지민건은 하루 만에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정말 중간이라는 게 없이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그는 송재이가 휘말렸던 유언비어를 전부 씻어주고 그 구정물을 자기가 다 뒤집어쓰고 있었다.지민건은 생김새로 보면 점잖고 얌전한 스타일이었다.만약 지민건이 뒤에 그런 비열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송재이도 그를 인간쓰레기와 전혀 연관 짓지 못했을 것이다.남자가 돼서 자존심도 없이 이렇게 그녀 앞에 꿇어 있다. 통곡하며 애원하는 지민건을 보며 송재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울며 애원하자 뒤에서 송재이를 왈가왈부했던 사람들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하여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지민건이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로 봐서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설마 정말 송재이를 오해한 걸까?연지수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이 난리판을 구경하고 있었다.그녀는 오히려 이 일
이튿날.송재이는 씩씩거리며 설영준의 회사로 향했다.그가 일하는 회사에 온 건 처음이었다.예전에는 별장을 지키면서 그가 오면 언제든 만족해 주어야 하는 그런 여자에 불과했다.비서 여진은 노크하고 대표이사 사무실로 들어갔다.테이블 뒤에 앉아 있는 설영준에게 송재이라는 여자가 찾아왔다고 보고했다.사실 여진도 심장이 벌렁거렸다.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설영준은 무시하기 일쑤였다.하지만 송재이는 당당했고 고작 몇 마디로 여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여진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하고는 설영준에게 보고하러 들어갔다.머리를 숙이고 뭔가를 쓰고 있던 설영준은 바로 들여보내라고 했다.펜슬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와 함께 설영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들여보내세요.”뭔가 일찍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영준 씨.”송재이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설영준은 이미 소파에 앉아서 손에 든 서류를 보고 있었다.사실 송재이는 오늘 설영준에게 따지러 온 것이다.“지민건이 어제 우리 오케스트라로 찾아와서 울며불며 무릎까지 꿇었는데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영준 씨가 보냈어?”“꿇어 마땅한 거 아닌가?”설영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송재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내 화풀이를 위해서다?”설영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송재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테이블에 놓은 담배를 하나 꺼냈다.송재이는 원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설영준이 담배를 피우려 하자 임신한 게 떠올라 바로 언성을 높였다.“담배 피우지 마!”설영준이 멈칫했다.그는 종래로 그녀 앞에서 담배 피우는 걸로 눈치를 본 적이 없었다.전에는 그녀도 별로 불만이 없었고 이렇게 큰소리로 그와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설영준은 코웃음을 치더니 눈을 찌푸렸다.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며 날카로워졌다.송재이는 갑자기 얼음물 샤워라도 한 듯 순간 모든 광기가 사그라들었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아까보다는 기세가 많이 누그러들었다.“지민건이 나더러 영준 씨 찾아와서 고소 철회하
그날 설씨 가문 저택의 발코니에서 설영준은 송재이를 ‘창녀’라고 했다.송재이는 이를 잊을 수 없었다. 이는 그녀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었다.매번 떠올릴 때마다 화가 나면서도 그런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설영준은 멈칫하더니 이내 송재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이 무엇을 하려는지 대략 알아챘다. 하지만 여기는 사무실이었다.“미쳤어? 우린 이미 헤어졌고, 영준 씨는 지금 약혼녀까지 있는 사람이야…”“그렇다고 너를 가지지 못하는 건 아니지.”설영준은 마치 귀가 먹은 것처럼 송재이를 안고 책상으로 향하더니 위에 놓여 있던 파일을 전부 바닥으로 쓸어내렸다.서류들이 이리저리 발 디딜 틈이 없이 바닥에 흩뿌려졌다.송재이의 마음도 그 종이처럼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도대체 어떤 사람을 좋아한 거야 나는?’원칙과 기준이 없는 사람이었다.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아무 부담 없이 그녀에게 이런 짓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다.설영준은 송재이의 몸을 확 번졌다. 그 바람에 송재이의 아랫배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죽는 한이 있어도 협조하기 싫었지만 아랫배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남자가 여자를 가지려고 마음만 먹으면 여자의 체력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었다. 오늘은 피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송재이의 뇌리를 스쳤다.이를 악문 송재이는 설영준이 그녀가 입은 치마의 벨트를 풀려 할 때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설영준이 고개를 들어보니 송재이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었다. 송재이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영준 씨 짐승이에요?”그를 이렇게 속된 말로 욕한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하지만 설영준은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전에 그도 그녀에게 상처 되는 말을 했으니 이걸로 퉁치면 된다고 생각했다.송재이는 이렇게 욕하면서도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집스럽게 반항했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지금 매우 가까웠다.옅지만 익숙한 향기가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청아하면서도 매혹적인 게 송재이 그 자체였다.순수하면서
설영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몸의 쾌감 덕분인지 그의 인내심은 평소보다 더 좋았다.그는 차분하게 그녀를 쳐다보며 설명했다.“저번에 도영이가 때려눕힌 그 학생 병원비 대준 거 돌려주는 거야.”송재이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어딘가 궁색해 보였다.그녀는 상황이 어쩌다 또 이렇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그녀는 또 일방적으로 당했다.혹시나 반항했다가 그를 자극하기라도 하면 애가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녀는 설영준의 품이 좋았고 그 품이 그립고 애틋한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송재이는 고개를 숙이고 용모를 단정히 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간질거렸다.그녀는 옆에 놓인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설영준 대표님, 나는 이런 원칙이 없는 행위가 수치스러워. 이게 마지막이길 바라. 아니면 마음의 부담이 클 것 같아.”송재이가 이렇게 말했다.“나랑 사랑을 나누는 게 수치스러워?”설영준은 담배가 당기기 시작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아까 얻었던 쾌감은 금세 짜증으로 바뀌었다.“이렇게 몰래 사랑을 나누는 게 수치스럽지 않다고?”송재이가 고른 단어는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라 생각했다.이 말을 뒤로 송재이는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신은 하이힐이 바닥과 부딪히며 또각또각하는 소리가 났다.그리고 그 소리는 설영준의 귓가에서 점점 멀어졌다.그녀가 떠나고 나서도 공기 속엔 아직 그녀의 향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설영준은 의자를 돌려 바깥을 내다봤다.그렇게 혼자 사무실에 앉아 그 누구도 찾아오지 말기를 바랐다.…지민건이 공정 회사에 고소당한 일은 금세 그 판에서 소문났다.합의서를 손에 넣지 못한 지민건은 180억을 배상해야 했다.이 돈은 설영준과 같은 사람에겐 별문제 아니었지만 지민건과 같은 작은 사장에겐 생존이 걸린 큰 문제였다.한바탕 치르고 나니 지민건의 회사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랫동안 공들여 세운 회사가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이다.지민건은
하지만 한 주간 미행해도 송재이의 하루 일과는 심플하기 그지없었다.오케스트라에 가지 않으면 가정교사로 일하는 집으로 가서 수업하는 게 전부였다.가끔 유은정, 문예슬과 나가서 밥 먹고 쇼핑하고 여자들끼리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이상하다고 느낄만한 점이 없었다.문예슬은 귀국하자마자 집에서 운영하는 회사로 들어가 간단한 업무를 받아 진행하고 있다.위로 오빠가 2명 있는데 아버지가 남아 선호 사상이다 보니 말로는 문예슬에게 회사 업무를 배우라고 하지만 사실 업무적으로 그녀에게 바라는 게 별로 없었고 맨날 남자 친구를 찾을 것을 요구했다.문씨 집안 내외의 눈에 여자는 얼른 좋은 남자를 찾아 시집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문예슬도 찾고 싶긴 했지만 마땅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부모님은 늘 돈을 중히 여기다 보니 소개해 준 사람을 보면 돈은 많았지만 어디 내놓지 못할 그런 외모가 대부분이었다.설씨 집안 내외의 결혼기념일 파티에 다녀온 뒤로 문예슬은 설영준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당연히 전에도 설영준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문씨 집안의 지위는 최근 몇 년이 되어서야 경주시에서 점점 떠올랐다.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정말 놀라웠다.마침 유은정이 문예슬에게 물었다.“그럼 넌 어떤 남자를 찾고 싶은데?”문예슬의 눈동자가 대뜸 반짝반짝 빛났다.“설영준 씨 같은 사람이면 바로 결혼하지.”옆에 앉은 송재이는 이 말에 하마터면 손에 든 젓가락이 파르르 떨렸다.하지만 문예슬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아쉽다는 듯 한탄했다.“나도 그냥 그 얼굴에 빠진 거지. 설준영 씨는 약혼녀가 있잖아. 주현아 씨는 참 팔자도 좋아.”송재이와 설영준이 한동안 만났다는 사실은 유은정만 알고 있었다.유은정은 몰래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고 있는 송재이를 힐끔 쳐다봤다. 송재이의 태연한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제 다 내려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박경은 매일 지민건에게 송재이의 행적을 보고했지만 다 보잘것없는 일상이었고 지민건도 이내 지
다음날, 지민건이 주현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그 역시 많은 사람을 걸쳐 주현아의 연락처를 얻었다.주현아는 지민건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최근 그의 회사가 줄곧 곤경에 처해있고 파산할 날이 머지않다고 했다.주현아는 이런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제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지민건의 목소리가 들렸다.“현아 씨는 제 정보에 관심을 가질 텐데요. 현아 씨 약혼자랑 관련된 일이에요.”주현아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지민건은 돈이 없어 주현아더러 고급스러운 클럽에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VIP룸을 예약하라고 했다.‘약혼자와 관련이 있다’라는 상대의 그 한 마디가 주현아는 호기심을 확 사로잡았다.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지민건의 요구를 승낙한 후 약속 장소로 떠났다.주현아는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나갔다.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열고 지민건과 약속한 룸으로 들어간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지민건 씨, 전화로 말한 제 약혼자와 관련된 일이란 게 대체 뭐죠?”지민건은 오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던지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크라프트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주현아는 애초에 설영준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그와 연관된 일이라면 유난히 예민해지고 조심스러울 따름이다.이제 막 크라프트 봉투를 열려던 찰나, 지민건이 다시 가져갔다.그는 마치 주현아를 놀리는 듯싶었다.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니 한꺼번에 통쾌하게 건네고 싶진 않았다.“이봐요!”“조건부터 말할게요. 200억 내놔요.”지민건은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다.그는 지금 배상금 180억을 물어야 하고 나머지 20억은 자신에게 주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이다.주현아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지민건 씨, 이 안에 뭐 금이라도 들어있나요? 부르는 게 값인가요?!”지민건은 눈썹을 치켰다.“어떤 여자가 당신 약혼자의 애를 임신했어요. 이제 곧 낳을 예정이래요!”“네?”“아직 설영준
송재이는 마치 긴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설씨 일가.그날 설도영은 또 강제로 피아노를 배우게 되자 한창 위층에서 심술을 부리며 한사코 내려오지 않았다.오서희는 설도영을 찾으러 올라갔고 텅 빈 거실에 송재이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따분하게 앉아있었고 창밖의 뜨거운 햇살이 집안에 스며들어 그녀의 몸을 비췄다. 순간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차올랐다.“실례지만 누구신지...”이때 문득 중저음의 감미로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정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말투였다.송재이는 어렴풋이 고개 들어 아래에서 위로 쭉 훑어보았더니 멀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잘생긴 얼굴에 기품이 차 넘치고 눈가에는 여자를 매혹시킬 고고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그 순간, 그녀는 마치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그 뒤로 뭔가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당황해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송재이입니다. 오서희 사모님께서 오늘부터 피아노 과외를 해달라고 부탁하셔서요...”그때 그녀는 살짝 겁에 질린 채 소녀의 천진난만함과 솔직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두 눈동자는 한없이 맑고 깨끗했다.그게 바로 송재이와 설영준의 첫 만남이다.나중에 설영준이 몹쓸 짓과 몹쓸 말을 수없이 해왔지만 첫 만남이 그토록 아름다웠던지라 그녀의 마음이 찢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그 첫 만남으로 그녀는 평생을 지체했다.22살 되던 그해, 송재이는 사랑의 시련을 맞닥뜨렸다....송재이는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어렴풋이 눈을 떠보니 어두컴컴한 작은 방 안에 있었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이곳은 병원 병실이었다.문 앞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왔는데 뜻밖에도 주현아와 지민건이었다!‘저 둘이 왜 동시에 여기로 온 걸까?’송재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 앉으려 했는데 그제야 손에 수액을 맞고 있는 걸 발견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