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지민건이 주현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그 역시 많은 사람을 걸쳐 주현아의 연락처를 얻었다.주현아는 지민건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최근 그의 회사가 줄곧 곤경에 처해있고 파산할 날이 머지않다고 했다.주현아는 이런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제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지민건의 목소리가 들렸다.“현아 씨는 제 정보에 관심을 가질 텐데요. 현아 씨 약혼자랑 관련된 일이에요.”주현아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지민건은 돈이 없어 주현아더러 고급스러운 클럽에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VIP룸을 예약하라고 했다.‘약혼자와 관련이 있다’라는 상대의 그 한 마디가 주현아는 호기심을 확 사로잡았다.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지민건의 요구를 승낙한 후 약속 장소로 떠났다.주현아는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나갔다.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열고 지민건과 약속한 룸으로 들어간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지민건 씨, 전화로 말한 제 약혼자와 관련된 일이란 게 대체 뭐죠?”지민건은 오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던지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크라프트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주현아는 애초에 설영준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그와 연관된 일이라면 유난히 예민해지고 조심스러울 따름이다.이제 막 크라프트 봉투를 열려던 찰나, 지민건이 다시 가져갔다.그는 마치 주현아를 놀리는 듯싶었다.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니 한꺼번에 통쾌하게 건네고 싶진 않았다.“이봐요!”“조건부터 말할게요. 200억 내놔요.”지민건은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다.그는 지금 배상금 180억을 물어야 하고 나머지 20억은 자신에게 주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이다.주현아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지민건 씨, 이 안에 뭐 금이라도 들어있나요? 부르는 게 값인가요?!”지민건은 눈썹을 치켰다.“어떤 여자가 당신 약혼자의 애를 임신했어요. 이제 곧 낳을 예정이래요!”“네?”“아직 설영준
송재이는 마치 긴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설씨 일가.그날 설도영은 또 강제로 피아노를 배우게 되자 한창 위층에서 심술을 부리며 한사코 내려오지 않았다.오서희는 설도영을 찾으러 올라갔고 텅 빈 거실에 송재이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따분하게 앉아있었고 창밖의 뜨거운 햇살이 집안에 스며들어 그녀의 몸을 비췄다. 순간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차올랐다.“실례지만 누구신지...”이때 문득 중저음의 감미로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정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말투였다.송재이는 어렴풋이 고개 들어 아래에서 위로 쭉 훑어보았더니 멀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잘생긴 얼굴에 기품이 차 넘치고 눈가에는 여자를 매혹시킬 고고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그 순간, 그녀는 마치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그 뒤로 뭔가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당황해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송재이입니다. 오서희 사모님께서 오늘부터 피아노 과외를 해달라고 부탁하셔서요...”그때 그녀는 살짝 겁에 질린 채 소녀의 천진난만함과 솔직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두 눈동자는 한없이 맑고 깨끗했다.그게 바로 송재이와 설영준의 첫 만남이다.나중에 설영준이 몹쓸 짓과 몹쓸 말을 수없이 해왔지만 첫 만남이 그토록 아름다웠던지라 그녀의 마음이 찢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그 첫 만남으로 그녀는 평생을 지체했다.22살 되던 그해, 송재이는 사랑의 시련을 맞닥뜨렸다....송재이는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어렴풋이 눈을 떠보니 어두컴컴한 작은 방 안에 있었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이곳은 병원 병실이었다.문 앞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왔는데 뜻밖에도 주현아와 지민건이었다!‘저 둘이 왜 동시에 여기로 온 걸까?’송재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 앉으려 했는데 그제야 손에 수액을 맞고 있는 걸 발견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
한편 이번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지민건은 소원대로 주현아와 약속한 금액의 수표를 받았다.300억이라!그는 그중 일부로 배상금을 물고 나머지는 남겨서 프로젝트에 임했다.비즈니스 업계의 모든 이가 그의 인생이 끝장일 거라고 여길 때, 뜻밖에도 지민건은 재기에 성공했다.다만 또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난 지민건은 전보다 훨씬 겸손해졌다.또한 매번 설영준과 동시에 참석해야 할 장소는 갖가지 이유를 둘러대며 회피했다.지민건은 설영준을 매우 증오한다.그러니까 주현아와 손을 맞잡고 그딴 짓을 계획했다!이젠 설영준의 아이를 유산 시켜 속으론 쾌재를 불렀지만 다시 그를 마주하자니 상대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숨 막히듯 마음이 찔리고 저도 몰래 비겁하게 머리를 숙이게 된다.그는 이렇게 심적으로 시달리는 게 너무 힘들어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해 다녔다....송재이는 아무런 조짐도 없이 아이를 유산 당했다.그녀는 심지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다. 그녀 배 속의 아이는 설영준의 아이였으니까.게다가 이건 사생아였다!일단 경찰들이 개입하면 아이 아빠에게 연락할 게 뻔하다.그럼 한때 그녀가 임신한 사실과 이 아이를 낳고 싶었던 사실까지 전부 폭로되는 게 아닌가?설영준이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분노? 증오? 혹은 경주에서 그녀를 매장시켜 더는 이 바닥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닐까?송재이는 자세히 생각해봤지만 설영준은 기껏해야 그녀의 몸에 살짝 미련을 가질 뿐 단 한 번도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없고 아이를 낳는 건 더 말할 가치도 없었다.나중에 아이가 유산 당한 걸 알게 되면 아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드디어 아무 걱정 없이 그와 조건이 비슷한 약혼녀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될 테니까.그땐 주현아를 칭찬하기도 바쁠 테지!송재이는 생각할수록 절망감에 휩싸였다.그녀는 이토록 침울하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일주일을 보냈다.단장은 원래 오랫동안 병가를 낸 그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하지만 일주일 후 다시 오케스트라에 나타난 그녀의 모
송재이는 다시 매일 오케스트라에 가서 리허설을 했다.이날 송재이는 금방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마침 위층에서 담배를 피우고 내려오는 연지수와 마주쳤다.연지수가 물었다.“이제 곧 수석 공모를 앞두고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휴가를 내는 거죠? 너무 자신만만한 거예요 아니면 자포자기하는 거예요?”평소 같으면 송재이는 무조건 그녀와 말싸움을 벌일 테지만 요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유산의 아픔이 아직 마음에 남아있고 그리 쉽게 가셔지지 않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연지수도 저기압인 송재이를 눈치채더니 미간을 구겼다.“요즘 우리 오케스트라에서 투자를 유치하고 있던데 단장님이 이 일로 정신없이 보내고 있어요. 시간 내서 단장님 앞에서 잘 좀 표현해 봐요. 어쩌면 다음에 자본가들과의 식사 자리에 우리를 데리고 갈지도 모르잖아요. 만에 하나 횡재가 떨어져서 어느 부자의 눈에 들지도 모르잖아요...”“대체 무슨 만에 하나가 그렇게 많아요?”송재이는 지금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시큰둥하게 그녀에게 반박했다. 시선조차 안 준 채 그녀에게 쏘아붙였다.“부자의 눈에 들면 그다음은요? 몇백억 투자해서 수석 피아니스트로 만들어준대요? 오케스트라의 일인자가 된대요? 드라마 좀 그만 봐요!”전에는 항상 연지수가 이상야릇한 말투로 송재이에게 쏘아붙였지만 오늘은 처음 송재이가 이토록 공격적인 말투로 그녀에게 반박했다.연지수는 평상시에 말재주가 뛰어나더니 지금 이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송재이가 수상하다는 걸 느꼈다.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송재이는 옷을 다 갈아입고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서 자리를 떠났다.송재이는 문밖을 나서면서 카톡을 확인했다.민효연의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송 선생님, 오늘 과외하러 와주실 수 있나요? 연우가 선생님을 엄청 그리워해요.]송재이는 병원에 입원한 며칠 동안 오케스트라에 병가를 냈을 뿐만 아니라 민효연한테도 휴가를 냈다. 그때 민효연의 답장은 이랬다.[푹 쉬어요.]송재이는 민효연의 말 속에 또 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연우 아빠입니다.”도정원은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그윽한 눈길로 송재이를 쳐다봤는데 은근 살펴보는 것 같기도 했다.한편 옆에 있던 민효연은 도정원이 자신을 ‘연우 아빠’라고 소개할 때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그녀는 대놓고 경멸하듯 코웃음을 쳤다!민효연은 머리를 갸웃거리고 애써 감정을 짓누르고 있었다.송재이는 그녀가 줄곧 제 팔을 꼬집는 걸 주의 깊게 살펴봤다.2층에서 은은한 인기척이 들려왔다.송재이가 머리를 들자 연우가 가정부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도정원을 본 아이는 정신이 흐리멍덩해졌다.연우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결국 가정부가 움츠리고 앉아 아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그제야 연우도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도정원이 늘씬한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가 연우를 덥석 끌어안았다.연우는 그가 낯설지는 않지만 또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다.아이는 새하얀 팔로 이 남자의 목을 엉성하게 안았다.송재이는 전에 몇 번 이리로 왔었지만 도정원은 오늘 처음 본다.민효연도 연우의 아빠가 어디 갔는지 말한 적이 없다.오늘 보니 도정원은 아빠로서 평소에 연우를 그다지 보살피고 신경 써주지 못한 듯싶었다.연우의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이 아이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외할머니인 민효연이 아무리 잘해줘도 연우의 부모를 대체할 순 없다.이렇게 되니 민효연이 도정원에게 시큰둥하고 원한이 맺혀있는 것도 가히 이해가 됐다!민효연은 결국 교양이 있는 사람이다.연우의 면을 봐서라도 부녀가 함께하는 걸 막지 않았다.연우 앞에서 그녀는 도정원에게 그리 차갑지도, 또 그리 살갑지도 않은 태도였다.도정원은 연우와 한참 친하게 지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아이가 처음엔 좀 무뚝뚝하더니 뒤로 가면서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연우는 도정원의 넥타이에 새겨진 꽃무늬가 신기한지 작은 손으로 줄곧 잡고 있었다.넥타이가 다 구겨졌지만 도정원은 전혀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과외 시간
송재이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티슈를 건네받으며 애써 담담한 척 눈물을 닦았다.“고마워.”그녀는 왜 울었는지 해명하지 않았고 심지어 방금 운 사람이 자신이 아닌 척했다.곧장 돌아앉더니 또다시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렸다.설영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려던 말을 멈췄다.이때 주방에서 갑자기 컵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민효연이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며 화를 냈다!도정원이 뒤따라오며 말했다.“사장님...”민효연은 고개도 안 돌린 채 2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반쯤 올라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 돌려 도정원에게 말했다.“연우 못 데려가. 그건 꿈도 꾸지 마.”그녀는 거의 이를 악물고 이 말을 내뱉었다.송재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도정원이 연우를 데려가려 한다고?’그 시각 도정원의 눈빛이 한없이 짙어졌다.그는 1층 계단에 서서 머리를 살짝 들고 대답했다.“저 연우 아빠예요. 연우는 제 딸이라고요.”“딸?”민효연이 눈썹을 치키고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도정원이 온 뒤로 민효연은 자꾸만 쉽게 화내고 흥분한다.그녀는 고개 돌려 가정부를 쳐다봤다.가정부는 옆에 서서 식겁한 채 몸을 벌벌 떨었다.민효연이 눈치를 주자 가정부는 황급히 앞으로 나아가 연우를 안고 2층에 올라갔다.결국 아래층에는 어른들만 몇 명 남게 됐다.민효연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숄을 움켜잡고 계단을 내려왔다.그녀는 비록 여자이지만 나이와 연륜을 무시할 순 없다.민효연은 강렬한 포스를 내뿜으며 도정원을 빤히 쳐다봤다.“너도 부모의 마음이 어떤 건지 잘 아나 보네? 네 아이만 네 아이야? 그럼 내 아이는?”민효연은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아주 담담하게 하지만 질문 조로 정색하며 쏘아붙였다.송재이는 그녀가 말하는 ‘아이’가 주현아는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주현아는 민효연의 둘째 딸이다.전에 설도영에게 들었는데 주씨 일가에 원래 큰딸이 한 명 더 있다고 한다.애초에 설영준과 혼약을 맺기도 했었다.다만 나중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혼약이 취
민효연의 별장은 교외에 있다.문밖을 나선 송재이는 한참 걷고 나서야 겨우 택시를 잡았다.늦가을의 밤은 늘 그렇듯 조금 쌀쌀했다.바람이 일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날을 세어보니 올해 구정은 2월이었다.이젠 고작 3개월밖에 안 남았다.이전 같으면 송재이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올해 그녀는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렸고 첫 아이까지 유산했으니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처량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고작 25살 어린 나이인데...동년배의 유은정은 갓 데뷔한 신인 아이돌의 사진과 영상을 보낸다거나, 신상 립스틱 색상을 의논하고 있는데 송재이는 정작 이런 것들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하지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절대 이렇지 않았다.송재이는 하이힐을 신고 평탄한 돌담길을 걸었다.그녀는 길을 걸을 때 바닥을 내려다보는 습관이 있어 고개를 반쯤 숙였다.가끔 바람이 불면 얼굴 양옆의 머리가 가볍게 흩날린다.그러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귀 뒤로 흘려넘긴다.사실 송재이 본인은 자신의 이 동작이 매우 여성스럽다는 걸 전혀 모른다.그녀와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차 한 대가 줄곧 천천히 그녀를 따라왔다.도정원은 조수석에 앉아 한 손을 차창에 걸치고 있었다.그도 똑같이 송재이를 한참 응시했다.그러다 결국 머리를 돌려 설영준을 바라봤다.“송 선생님이랑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되셨어요?”설영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3년이요.”“두 분 무슨 사이에요?”“연우 가르치기 전에 제 남동생 피아노 선생님이었어요.”“그리고요?”도정원이 눈썹을 들썩거리며 보기 드문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설영준과 송재이의 관계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걸 바로 알아챈 듯싶다.설영준은 그를 힐긋 쳐다봤다.도정원은 양손을 들어 항복하는 자세를 하며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그는 곧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송재이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살짝 눈에 익었어요...”“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이런 방식으
송재이는 탐구하는 듯한 설영준의 눈빛을 바로 느꼈다.잠시 후에야 그가 천천히 질문했다.“잘 지냈으면 좋겠어 못 지냈으면 좋겠어?”“뭐? 아니 난 그게 아니라...”그녀는 묻자마자 바로 후회돼서 이 화제를 대충 얼버무려 끝내려고 했다.설영준은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그는 다시 시동을 걸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나랑 현아 당연히 잘 지내지. 안 그러면 약혼 준비할 필요도 없잖아...”송재이의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설영준은 계속 말을 이었다.“그러는 넌? 나랑 끝내고 지민건 외에 또 다른 남자랑 데이트는 해봤어? 어떤 사람을 원하는 건데? 말해봐 봐.”설영준의 이 물음에 송재이는 진짜 진지하게 고민해봤다.사실 그녀의 요구도 그리 높은 건 아니다. 상대가 진솔하고 그녀와 경제력이 비슷하다면 앞으로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어 서로 도와주고 모든 일을 함께 상의하며 살아갈 수 있다.다만 이런 요구들을 입밖에 내뱉지 않았다. 얼마 전 그녀는 아이를 한 명 유산했으니까.다른 남자와 잔 거랑,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건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지금 송재이가 고려해야 할 것은 나중에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의 과거를 말해줄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이다.그녀가 솔직하게 고백했을 때 과연 이런 과거를 받아들이는 남자가 존재하긴 할까? 한때 딴 남자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를 여자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송재이는 문득 짜증이 밀려왔다!설영준을 만난 이후로 달콤했던 추억과 아픈 추억 모두 그의 의지대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이별한 후에도 설영준은 아무렇지 않았으나 그녀는 몸과 마음이 다 너덜너덜해지고 나중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문제가 돼버렸다.“지금은 내가 누군가를 고를 처지가 아니야. 상대가 날 싫어하는지부터 봐야 해!”송재이가 홧김에 말을 내뱉었다.그녀는 이젠 설영준에게 원망도 있고 증오도 있으며 내가 갖지 못한 이 사람을 누군가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아쉬움과 미련도 남아있다!“왜 널 싫어하는데?”차는 계속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