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인이 허징인인에게 시신이라도 온전히 남겨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투에 담긴 살기는 허징인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을 몰고 왔다. 허징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정규인의 팔을 붙잡으며, 눈물이 끊어진 실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 돼... 당신... 우리... 우리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그래, 정말 오랜 세월이었다. 무명 시절, 가난하고 초라했던 그 시절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함께 걸어온 세월이었지.' ‘그동안, 내가 허징이라는 여자에게 부족한 건 없었다고 자부한다. 맞아, 딴 여자와 바람을 피운 적은 있다. 그건 확실히 내가 잘못한 부분이고, 내가 길을 잘못 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에서는, 난 우리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얻은 대가는 대체 무엇이었나?'정규인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허징인, 그런 말을 당신이 입에 올리다니 웃기지 않냐? 내가 벌어온 돈으로 밥 먹고 살면서, 당신!! 팔꿈치는 왜 밖으로 굽는 거야? 이게 맞는 거냐?” “알다시피, 나란 사람, 배신만큼은 절대 용납 못 한다는 거 당신도 잘 알 텐데. 하필이면 당신이 내 금기를 건드렸어.” 정규인의 말투는 점점 차가워졌고, 그의 눈은 핏발이 서며 붉어졌다. 두 손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등의 핏줄이 불쑥불쑥 드러났다.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었지만, 왜, 왜 하필 허징인 당신인 거야?’ 정규인은 무엇보다 실망했고, 분노했다. 허징인에게 화풀이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한순간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모든 업무가 바쁘게 돌아갔으니, 하연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막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정태훈의 서류 더미를 보았다. “사장님, 이 문서들 싸인 부탁드립니다.” 하연은 약간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안으로 가져와.” 태훈은 곧장 서류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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