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은 갑작스럽게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연아, 네가 생각해 봐. 우리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흔이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하성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끄며, 한숨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오빠가 말은 그 때 그 사진들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하연은 전에 가흔이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그 사진이 두 사람의 이별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임이 분명했다. “사진 문제는 내가 이미 해명했어. 가흔이도 사진 때문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가흔이는 나를 진심으로 믿지 않았어.” 하성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하연은 조용히 하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빠, 의심이 되면 직접 확인해 봐야지. 이렇게 추측만 하고 있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거 잘 알잖아.” 하성은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바라보며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가흔이... 나를 피해 해외로 도망가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찾겠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성은 동생의 말투에서 뭔가 눈치챘는지 물었다. “하연아, 솔직히 말해. 너 혹시 가흔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하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빠, 연애라는 건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오해가 있으면 풀고, 시간을 들여 서로를 이해해야 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물었다. “요즘 오빠 행복했어?” 하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표정은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럼 가흔이를 찾아가요. 직접 만나서 가흔의 진심을 들어봐요.” “만약 가흔이가 여전히 나를 만나기 싫어한다면?” 하성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그럼 오빠는 더 노력해야죠. 언젠가 가흔이도 마음을 열 거예요.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래 사랑했잖아요. 그런 사
“걱정 마십시오. 저도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정지철은 말하며 얼굴에 잠시 음험한 기색을 띠었다가 이내 웃음으로 돌려놓았다. “게다가 이제 진 이사님의 지지까지 더해졌으니, 제 승산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괜히 염려했군요.” “머지않아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면, 남준이가 반드시 우리에게 든든한 보답을 할 겁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길 바랍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잔을 부딪치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이어서 술잔을 들이켰다. 한쪽에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남준은 입꼬리에 묘한 웃음을 띤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술집을 나서자, 진수용은 이미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 내 주량으로는 절대 취한 적이 없었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더 이상은 힘들어... 힘들어...” “진 이사님의 천배불취라는 명성은 우리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과음하신 것 같습니다.” 정지철은 웃으며 운전기사에게 손짓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번 실력을 겨뤄보겠습니다.” “그럼, 그럼! 꼭 한 번 다시 겨뤄야지...” 정지철은 진수용을 부축해 차에 태우며 알랑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 돌아가 푹 쉬십시오.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까요.” 차 문이 닫히고, 차량이 출발하며 먼지와 함께 멀어졌다. 남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정지철의 옆에 섰다. 그의 시선은 차가 사라지는 방향을 향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진 이사는 오늘 술도 얼마 안 마셨는데 이렇게 취하다니?” 정지철의 얼굴은 점차 굳어졌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다 늙은 여우 주제에, 내 앞에서 큰소리만 치더니.” “보아하니 진 이사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 같네요.”남준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덧붙였다.정지철은 차갑게 웃으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의 눈
차 문이 열리자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두 명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진수용을 차에서 강제로 끌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진수용은 몸부림치며 그들의 제압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진 이사님!” 그 순간, 맞은편 차량의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면서 냉혹한 옆얼굴이 드러났다. “너는 누구야?” 진수용이 외쳤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으며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한 부를 진수용에게 던졌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진 이사님께 경고를 하나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정지철의 사람이군.” 진수용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차 안에 있는 남자도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진 이사님, 어떤 일은 충분히 생각하고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사님께서는 현명한 사람일 테니, 이걸 다 보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창문을 올렸다. 진수용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도 손을 놓았다. 잠시 후, 엔진에 시동이 걸리더니 차량은 빠르게 사라졌다. 진수용은 손에 든 서류를 급히 펼쳤다. 서류를 모두 읽은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수용 이사에게 무슨 선물을 준 겁니까?” 차 안에서,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건물을 바라보며 부남준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준은 설마 정지철이 아직도 이런 뒷수단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지철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여유 있게 대답했다. “오늘 밤 진수용의 태도를 보니, 진수용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들더구나.” 돈도, 명예도 진수용을 움직일 수 없었고, 다만... 진수용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건 오직 몇 가지 ‘보여주기 어려운 치부’뿐이었다. “이 바닥에서 수십 년을 구르다 보면, 누구든 뒤가 깨끗할 리 없지. 진수용도 자기 비밀을 완벽히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면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지.
“아빠!” 민찬이 달려들며 정규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와 친근함이 가득했다. ‘아빠’는 마치 천둥처럼 허징인의 귀에 울려 퍼졌다. 허징인은 순간 얼어붙었고,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은 어느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규인은 허리를 굽혀 열 살 난 정민찬을 품에 안고는, 이미 싸매어진 짐들을 한 번 쓱 훑어보고 냉랭하게 물었다. “아들, 아빠한테 말해봐.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민찬이는 아직 어렸지만, 주변의 긴장감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듯 조심스럽게 허징인 쪽을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귀엽게 눈을 굴리며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빠, 저번에 약속했던 변신 로봇은요?” 정규인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일 사줄게. 그런데 지금은 방에 가서 좀 쉬어. 아빠가 엄마랑 할 얘기가 있어.” 정규인은 시터에게 눈짓을 보냈고, 시터는 눈치를 챈 듯 서둘러 민찬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거대한 거실에는 허징인과 정규인 단둘만이 남았다. “이 짐들은 뭐야? 어딜 가려고?” 정규인은 허징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더불어 서늘한 칼날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손은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그저 민찬이하고 함께 잠깐 여행 가려던 것뿐이야.” “그래?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당신은 맨날 바쁘잖아. 우리 일을 언제 신경 쓴 적이나 있어? 그냥 근처로 며칠 다녀올 생각이었어.” 쾅! 정규인은 갑자기 커피 테이블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허징인, 당신 내가 바보로 보여?” 허징인은 정규인의 눈빛을 마주하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다음 순간, 정규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허징인의 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당신!! 감히 나를 배신해?!” 허징인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정규인이 허징인인에게 시신이라도 온전히 남겨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투에 담긴 살기는 허징인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을 몰고 왔다. 허징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정규인의 팔을 붙잡으며, 눈물이 끊어진 실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 돼... 당신... 우리... 우리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그래, 정말 오랜 세월이었다. 무명 시절, 가난하고 초라했던 그 시절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함께 걸어온 세월이었지.' ‘그동안, 내가 허징이라는 여자에게 부족한 건 없었다고 자부한다. 맞아, 딴 여자와 바람을 피운 적은 있다. 그건 확실히 내가 잘못한 부분이고, 내가 길을 잘못 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에서는, 난 우리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얻은 대가는 대체 무엇이었나?'정규인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허징인, 그런 말을 당신이 입에 올리다니 웃기지 않냐? 내가 벌어온 돈으로 밥 먹고 살면서, 당신!! 팔꿈치는 왜 밖으로 굽는 거야? 이게 맞는 거냐?” “알다시피, 나란 사람, 배신만큼은 절대 용납 못 한다는 거 당신도 잘 알 텐데. 하필이면 당신이 내 금기를 건드렸어.” 정규인의 말투는 점점 차가워졌고, 그의 눈은 핏발이 서며 붉어졌다. 두 손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등의 핏줄이 불쑥불쑥 드러났다.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었지만, 왜, 왜 하필 허징인 당신인 거야?’ 정규인은 무엇보다 실망했고, 분노했다. 허징인에게 화풀이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한순간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모든 업무가 바쁘게 돌아갔으니, 하연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막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정태훈의 서류 더미를 보았다. “사장님, 이 문서들 싸인 부탁드립니다.” 하연은 약간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안으로 가져와.” 태훈은 곧장 서류를 들고
“사부인, 제 생각엔 우리 빨리 날짜를 잡고, 뒤에 할 일들도 서둘러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사부인’이라는 한마디의 말이 두 집안의 관계를 단숨에 가까워지게 했다. 하미주는 그동안 송혜선에 대해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 부동건이 송혜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 부씨 가문 내에서 송혜선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격상되었기에, 하미주가 품고 있던 불만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저는 언제나 상관없습니다. 아이들만 좋다고 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송혜선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잘됐네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아는데, 며칠 내로 모셔서 다영이에게 맞춤 드레스를 준비하게 할게요.” 정다영은 부끄러운 얼굴로 부남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준 씨랑 결혼할 수만 있다면, 저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건 안 되지요. 결혼은 평생 한 번뿐인 중요한 일이니까 허투루 할 수 없죠.” 송혜선의 말은 하미주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하미주에게는 소중한 하나뿐인 딸이기에, 부씨 가문과의 혼사가 정씨 가문에 큰 이득이 되는 일이기는 했어도 딸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처음에는 송혜선이 첩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하미주였지만, 송혜선의 일 처리 방식과 단호한 태도를 보면서 하미주도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이제는 오히려 송혜선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그렇죠, 결혼은 중요한 일인 만큼 전통을 따라야죠.” 하미주는 한마디 덧붙이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하지만 다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괜찮아요. 젊은 사람들은 간소하고 실용적인 걸 선호해요. 우리도 결혼식을 간단하게 하면 돼요.” “사부인께서는 걱정 마세요. 다영이는 제가 친딸처럼 아낄 테니 절대 서운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송혜선은 예비 시어머니
정다영은 부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희 정말 잘 지낼 거예요.”...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하늘에서 가늘고 촘촘한 눈송이가 흩날리며 내렸고, 금세 땅 위에는 얇은 눈이 덮였다. “최 사장님, 눈이 오네요.” 식당 밖으로 나오자, 이 도시는 마치 새 옷을 갈아입은 듯했다. “갑작스러운 눈이라니,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워질 것 같네요.” “최 사장님, 그래도 사람 마음은 따뜻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거래처 사람의 농담 섞인 말에 하연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든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혁이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혁은 오늘 옅은 카멜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하얀색 머플러를 들고 하연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하연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하연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했다. “여기엔 왜 온 거예요?” “정 실장이 네가 여기서 고객을 만나서 일 얘기를 한다고 해서 왔지.” 거래처 사람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최 사장님, 업계에서 이미 최 사장님과 부 대표님의 좋은 소문이 돌던데, 이제 보니 사실인가 봐요.” 상혁은 하연을 단번에 품 안에 끌어안으며 강렬한 소유욕을 드러냈다. “결혼식 때 청첩장은 꼭 보내 드리겠습니다.” ... 차 안에서 하연은 문득 식당에서 부남준을 봤던 것이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방금 식당에서 누굴 봤는지 맞춰볼래요?” 상혁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은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방금 저 사람들이 나올 때 우연히 봤어.” 상혁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방금 차 안에서 부씨 가문과 정씨 가문의 어른들이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어른들이 함께 있는 걸 보니, 결혼 얘기를 나눈 모양이네요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층층이 쌓인 예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붉은 보자기로 곱게 포장된 예물 상자에는 정성껏 준비한 혼수 품목들이 담겨 있었다. 예단 비단부터 예복, 신부의 웨딩 슈즈까지, 모든 것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전통적인 결혼 떡과 한과, 그리고 혼례식에 쓰일 용과 봉황 모양의 화려한 촛대까지도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준비된 예물은 이번 약혼의 중요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붉은 보자기에 둘러싸인 예물들은 저마다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고 있었다. 약혼식을 위해 엄선된 물품들은 그 자체로 부씨 가문이 이번 혼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함 속의 장신구들은 각기 다른 빛을 발하며 고귀하고 섬세한 느낌을 자아냈고, 붉은 보자기와 청홍색 장식들이 마당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보자기를 든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저택의 뜰을 가득 메웠고, 그 모습은 마치 축복의 행렬과도 같았다. 최씨 가문의 저택 뜰을 가득 채운 예물들은 부씨 가문이 신부를 향한 진심을 담아 준비한 것이었으며, 그 정성과 재력은 이번 약혼에 대한 기대와 존중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조진숙은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을까 염려하는 듯 정중하게 물었다.“사돈 어르신,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최동신은 이 압도적인 광경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조진숙은 늘 세심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불만족스러울 만한 부분이 없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부씨 가문은 이미 충분히 성의를 보여줬으니, 더 이상 번거롭게 할 필요 없습니다.” “번거롭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진숙은 진심 어린 미소로 말했다. “우리 두 집안은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사이고, 하연이는 제가 직접 키우다시피 한 아이입니다. 하연이는 비록 제 양딸이지만, 저는 친딸과 다를 바 없이 하연이를 소중히 여기며 키웠습니다. 이제 하연과 상혁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