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층층이 쌓인 예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붉은 보자기로 곱게 포장된 예물 상자에는 정성껏 준비한 혼수 품목들이 담겨 있었다. 예단 비단부터 예복, 신부의 웨딩 슈즈까지, 모든 것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전통적인 결혼 떡과 한과, 그리고 혼례식에 쓰일 용과 봉황 모양의 화려한 촛대까지도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준비된 예물은 이번 약혼의 중요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붉은 보자기에 둘러싸인 예물들은 저마다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고 있었다. 약혼식을 위해 엄선된 물품들은 그 자체로 부씨 가문이 이번 혼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함 속의 장신구들은 각기 다른 빛을 발하며 고귀하고 섬세한 느낌을 자아냈고, 붉은 보자기와 청홍색 장식들이 마당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보자기를 든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저택의 뜰을 가득 메웠고, 그 모습은 마치 축복의 행렬과도 같았다. 최씨 가문의 저택 뜰을 가득 채운 예물들은 부씨 가문이 신부를 향한 진심을 담아 준비한 것이었으며, 그 정성과 재력은 이번 약혼에 대한 기대와 존중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조진숙은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을까 염려하는 듯 정중하게 물었다.“사돈 어르신,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최동신은 이 압도적인 광경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조진숙은 늘 세심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불만족스러울 만한 부분이 없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부씨 가문은 이미 충분히 성의를 보여줬으니, 더 이상 번거롭게 할 필요 없습니다.” “번거롭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진숙은 진심 어린 미소로 말했다. “우리 두 집안은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사이고, 하연이는 제가 직접 키우다시피 한 아이입니다. 하연이는 비록 제 양딸이지만, 저는 친딸과 다를 바 없이 하연이를 소중히 여기며 키웠습니다. 이제 하연과 상혁
“저도 그날이 좋다고 생각합니다.”조진숙이 빠르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 날짜라면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니, 두 아이를 위해 더 세심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럼 약혼식은 그날로 정합시다.”최동신이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렸다.두 집안 어른들이 뜻을 모아 약혼 날짜를 확정 지었다. 이어 두 집안은 초대할 손님 명단과 연회 준비 사항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화기애애했고, 온 집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하연은 핸드폰을 꺼내 ‘미녀4총사’ 단톡방에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설이 지난 후 다섯 번째 날 약혼식! 친구들, 모두 참석 필수야!]가장 먼저 정예나가 답장을 보냈다. [드디어 날짜가 정해졌구나! 축하해! 꼭 시간 맞춰 갈게!] 서여은도 바쁜 인터뷰를 마친 뒤 메시지를 확인하고 빠르게 응답했다. [마침 휴가라 시간 여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이어 여은이도 농담조로 덧붙였다. [축하해, 우리 하연이 좋은 사람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이제 리틀 하연이 빨리 태어나면 더 좋겠네.] [리틀 상혁도 괜찮지 않을까? 친구야, 힘내!] 모두들 장난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하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었는데, 무심코 먼발치에 앉아 있는 상혁을 슬쩍 보았다. 오늘 상혁은 맞춤 제작한 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한껏 품위가 느껴졌다.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배 위에 얹었다. ‘우리 둘... 피임한 적이 없었는데, 혹시... 이미 임신한 건 아니겠지?’ 하연은 조심스레 상상해 보았다. ‘나와 부상혁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 생각해 보니, 나쁘진 않아...’ ‘미녀4총사’ 단톡방에서는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신가흔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예나가 참지 못하고 가흔을 태그했다. [우리 가흔 디자이너님,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조봉규는 보양식을 내려놓고 다정하게 송혜선의 어깨를 주물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그깟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진짜 중요한 건 바로 DL그룹이지 안 그래?” 그 말에 송혜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봉규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남준이가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 성과도 눈에 띄고, 그룹 내에서도 꽤 인정받고 있어. 그리고 연말 이사회 때까지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라고.” 송혜선은 눈을 들어 조봉규와 시선을 맞췄다. ‘만약 남준이가 DL그룹 이사회 집행이사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깟 예물이 무슨 대수겠어? 나도 좀 더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해.’ 송혜선의 화는 조금씩 누그러졌고, 얼굴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조봉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보양식을 들고 직접 그녀의 입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남준이는 지금 정씨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고, 또 다른 이사들도 차근차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현재로서는 승산이 아주 크다는 걸 알고 있잖아.” 송혜선은 마침내 보양식을 몇 모금 들이켰고, 금세 한 그릇을 비웠다. “이제야 제대로 먹네. 지금은 몸을 보살피는 게 가장 중요해...” 송혜선은 눈을 흘기며 조봉규를 타박했다. “당신도 참, 정말 나를 걱정하는 게 맞아? 아니면 그저 뱃속에 있는 이 아이만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당신 지금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내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야.” 송혜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입에서는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그 최하연이라는 여자는 겨우 이혼녀 아니야? 그저 조진숙의 아들이 눈여겨봤으니 최씨 가문에 기를 쓰고 붙으려 하는 거겠지. 뒤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그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침실 안에 있는 둘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고, 송혜선은 비명을 질렀다. 조봉규의 손이
남준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며,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 송혜선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어머니,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가지셨군요!” 그 말에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뎌 거의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설마 남준이가 다 들은 걸까?!’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남준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버텼다. 마치 가라앉는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은 부표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남준아, 이 일은 너무 중대한 문제야. 절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사실이 부동건의 귀에 들어간다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었다. 송혜선뿐만 아니라, 남준 역시 부씨 가문에서 완전히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게 분명했다. “남준아, 방금 있었던 일은 그냥 모르는 척해 줘. 너는 부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다. 이 사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어. 내가 너의 미래를 망치게 해선 안 되잖니.” 이 순간, 송혜선의 태도는 평소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오직 현재의 지위와 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부동건과 함께하며 온갖 굴욕을 참아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 모든 노력이 이렇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는 없었다. “하! 미래요?” 남준은 비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조롱했다. ‘내가 과연 이런 것에 신경이나 쓸까?’ 송혜선은 지금 남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남준아, 나는 너의 엄마야. 절대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지금 네가 가장 중요한 건 다영이와 잘 지내면서 정씨 가문을 안정적으로 잡는 거야. 그리고 연말 이사회에서 상혁이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DL그룹을 확실히 장악해야 해...” 남준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고,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만하세요!” 송혜선은 순간 당황했다.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흔들렸고, 모든 것이 그녀의 통제 범위를 벗어
부동건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혼사를 이런 일로 자신이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최고의 산부인과 의료팀을 준비해.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병원 전체가 책임져야 할 거야.”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조진숙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이 송혜선 뱃속의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이미 그의 태도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만약... 부동건 이 사람이 송혜선 그 여자가 뒤에서 벌인 짓들을 알게 된다면? 허!’ 조진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자업자득, 스스로 망할 뿐이야.’ 하루 종일, 부동건은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조진숙은 눈치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속으로는 하연에게 미안함이 스며들었다. “하연아, 네가 너무 고생하는구나...” “이모, 무슨 말씀세요! 고생이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이모가 계시니까 저랑 상혁 씨는 언제나 든든해요.” 하연은 살짝 어리광을 부리며 조진숙의 팔짱을 끼었다. 하연은 확신에 차 있었다. 다른 것은 모두 부질없었고, 자신과 상혁의 혼사는 어떤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단단한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밖에서 뭐라든 결국 우리 사이에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굳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신경 쓰며 흔들릴 필요는 없잖아요.”하연이 웃으며 조진숙을 위로했다. “난 네가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이다.” 조진숙이 조용히 말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조진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요!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조진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뱃속의 아이만 아니라면 그 여자는 아무런 수단도 남아 있지 않아. 그런데 이 양반은 그걸 철석같이 믿고 휘둘리고 있으니. 머리는 새하얗게 새고, 판단력도 흐려져서 정작 자
동남아 지사의 책임자는 줄곧 정규인이 맡아왔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남준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치켜올리며,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지금 회장님께서 무척 바쁘셔서 그 일을 처리할 시간이 없으실 거야. 그러니 그 문서 나한테 맡겨. 나중에 내가 대신 전달해드릴게.” 조금 당황한 듯한 비서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어렸다. “그게... 아무래도 그건 좀 안될 것 같습니다.” 순간, 남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위화감을 은근히 조성하며 물었다. “왜? 나를 못 믿겠어?” 비서는 부동건 회장을 오랫동안 보좌하며 이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나름의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아닙니다, 상무님.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단지 전 이 일이 꽤 중대한 사안인지라 회장님께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회장님께서 정 그렇게 바쁘시다면, 제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남준은 부동건의 비서처럼 하찮은 인물조차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평소에 직원들에게 너무 관대했던 것 같군. 비서마저 내 말을 무시하다니.’“그래?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그럼 오래 기다리게 될 텐데...” 남준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그 속의 미세한 기류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하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남준은 대담하게 손을 휘저으며 비서의 어깨를 단숨에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퍼진 위험한 기운에 비서는 깜짝 놀랐고, 심지어 목소리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상... 상무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준은 냉소를 머금은 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전방을 응시한 눈빛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앞에서 꼼수를 부리던 마지막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그의 목소리는 연기처럼 가벼웠으나, 그 단어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말을 듣자마자, 비서는 다리가 풀려버렸다. 비서는 몸
이 말을 한 사람은 무역협회 회장의 딸인 전서나이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자신의 뛰어난 가문의 배경을 믿고, 언제나 타인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던 명문가 아가씨였다. 서나 곁에 있던 그녀의 추종자들이 하나둘 맞장구치며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그러게요! 정말 안타깝네요. 우리나라의 수많은 명문가 아가씨들의 이상형이 저렇게 가버리다니, 생각할수록 아깝죠!” “그러니까요, 이혼녀는 진짜 품격이 떨어지죠!” 명문가의 아가씨 몇 명이 웃음을 터뜨리며 모여 있었고, 그 사람들의 조롱 섞인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공기를 가르며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히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상황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서나가 누군가에게 의해 머리채를 잡혀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주변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당장 서나를 놔줘!” “너, 서나가 누구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감히 손을 대는 거야!” “너 정말 이렇게 까불다가 우리 업계에서 매장당하고 싶어?” “...”소란스러운 외침이 이어졌지만, 주슬기는 그 명문가 아가씨들의 헛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서나의 얼굴은 술기운에 붉게 물들어 있었고, 주슬기의 손아귀에는 갈수록 힘이 더해졌다.“뭐야? 오늘 집에서 양치질 안 하고 나왔어? 입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은데?” 서나는 당황해하며 외쳤다. “너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주슬기는 냉소를 머금으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주서나의 뺨을 향해 정확히 내리꽂았다. 짝! 고막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서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서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아악!” 서나는 비명을 질렀다. “뭐해! 너희들 가만히 있지 말고 당장 나 좀 도와줘!” 그제야 서나의 추종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
무역협회 회장 전영철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 그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보디가드이 들어섰고, 웅장한 연회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서나는 이 모습을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외쳤다. “아빠, 저를 좀 구해주세요!” 전영철의 얼굴은 단호하고 엄중했다.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멍하니 뭐 해? 당장 가서 아가씨를 빨리 구하지 않고.” 보디가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주슬기는 갑자기 몰려드는 보디가들로 인해 당황하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당신들 뭐야, 왜 이래!!” 주슬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보디가드 몇 명이 거리를 좁히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상태였던 주슬기는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아빠, 저 여자 당장 내쫓아버려요! 업계에서 저 여자를 당장 퇴출시켜버려야 해요! 우리나라 안에서 ZT그룹이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요!!” 아빠라는 뒷배가 자신의 뒤에서 버티고 있자 비굴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서나는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녀의 기세가 한층 더 당당해 보였다. 양옆으로 서 있던 보디가드들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길을 내주었다. 전영철은 압도적인 기세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주 대표님, 우리 전씨 가문이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주슬기는 술기운이 가신 듯 머리를 한 차례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에 자신은 단지 순간적인 충동에 서나에게 손을 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일이 커진 듯했다. 주슬기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태연한 척 말했다. “아니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한 거요?” 주슬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단지 전서나 씨가 허튼소리를 하는 게 거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