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준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며,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 송혜선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어머니,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가지셨군요!” 그 말에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뎌 거의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설마 남준이가 다 들은 걸까?!’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남준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버텼다. 마치 가라앉는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은 부표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남준아, 이 일은 너무 중대한 문제야. 절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사실이 부동건의 귀에 들어간다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었다. 송혜선뿐만 아니라, 남준 역시 부씨 가문에서 완전히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게 분명했다. “남준아, 방금 있었던 일은 그냥 모르는 척해 줘. 너는 부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다. 이 사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어. 내가 너의 미래를 망치게 해선 안 되잖니.” 이 순간, 송혜선의 태도는 평소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오직 현재의 지위와 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부동건과 함께하며 온갖 굴욕을 참아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 모든 노력이 이렇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는 없었다. “하! 미래요?” 남준은 비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조롱했다. ‘내가 과연 이런 것에 신경이나 쓸까?’ 송혜선은 지금 남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남준아, 나는 너의 엄마야. 절대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지금 네가 가장 중요한 건 다영이와 잘 지내면서 정씨 가문을 안정적으로 잡는 거야. 그리고 연말 이사회에서 상혁이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DL그룹을 확실히 장악해야 해...” 남준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고,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만하세요!” 송혜선은 순간 당황했다.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흔들렸고, 모든 것이 그녀의 통제 범위를 벗어
부동건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혼사를 이런 일로 자신이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최고의 산부인과 의료팀을 준비해.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병원 전체가 책임져야 할 거야.”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조진숙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이 송혜선 뱃속의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이미 그의 태도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만약... 부동건 이 사람이 송혜선 그 여자가 뒤에서 벌인 짓들을 알게 된다면? 허!’ 조진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자업자득, 스스로 망할 뿐이야.’ 하루 종일, 부동건은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조진숙은 눈치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속으로는 하연에게 미안함이 스며들었다. “하연아, 네가 너무 고생하는구나...” “이모, 무슨 말씀세요! 고생이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이모가 계시니까 저랑 상혁 씨는 언제나 든든해요.” 하연은 살짝 어리광을 부리며 조진숙의 팔짱을 끼었다. 하연은 확신에 차 있었다. 다른 것은 모두 부질없었고, 자신과 상혁의 혼사는 어떤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단단한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밖에서 뭐라든 결국 우리 사이에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굳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신경 쓰며 흔들릴 필요는 없잖아요.”하연이 웃으며 조진숙을 위로했다. “난 네가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이다.” 조진숙이 조용히 말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조진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요!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조진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뱃속의 아이만 아니라면 그 여자는 아무런 수단도 남아 있지 않아. 그런데 이 양반은 그걸 철석같이 믿고 휘둘리고 있으니. 머리는 새하얗게 새고, 판단력도 흐려져서 정작 자
동남아 지사의 책임자는 줄곧 정규인이 맡아왔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남준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치켜올리며,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지금 회장님께서 무척 바쁘셔서 그 일을 처리할 시간이 없으실 거야. 그러니 그 문서 나한테 맡겨. 나중에 내가 대신 전달해드릴게.” 조금 당황한 듯한 비서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어렸다. “그게... 아무래도 그건 좀 안될 것 같습니다.” 순간, 남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위화감을 은근히 조성하며 물었다. “왜? 나를 못 믿겠어?” 비서는 부동건 회장을 오랫동안 보좌하며 이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나름의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아닙니다, 상무님.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단지 전 이 일이 꽤 중대한 사안인지라 회장님께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회장님께서 정 그렇게 바쁘시다면, 제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남준은 부동건의 비서처럼 하찮은 인물조차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평소에 직원들에게 너무 관대했던 것 같군. 비서마저 내 말을 무시하다니.’“그래?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그럼 오래 기다리게 될 텐데...” 남준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그 속의 미세한 기류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하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남준은 대담하게 손을 휘저으며 비서의 어깨를 단숨에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퍼진 위험한 기운에 비서는 깜짝 놀랐고, 심지어 목소리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상... 상무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준은 냉소를 머금은 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전방을 응시한 눈빛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앞에서 꼼수를 부리던 마지막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그의 목소리는 연기처럼 가벼웠으나, 그 단어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말을 듣자마자, 비서는 다리가 풀려버렸다. 비서는 몸
이 말을 한 사람은 무역협회 회장의 딸인 전서나이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자신의 뛰어난 가문의 배경을 믿고, 언제나 타인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던 명문가 아가씨였다. 서나 곁에 있던 그녀의 추종자들이 하나둘 맞장구치며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그러게요! 정말 안타깝네요. 우리나라의 수많은 명문가 아가씨들의 이상형이 저렇게 가버리다니, 생각할수록 아깝죠!” “그러니까요, 이혼녀는 진짜 품격이 떨어지죠!” 명문가의 아가씨 몇 명이 웃음을 터뜨리며 모여 있었고, 그 사람들의 조롱 섞인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공기를 가르며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히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상황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서나가 누군가에게 의해 머리채를 잡혀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주변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당장 서나를 놔줘!” “너, 서나가 누구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감히 손을 대는 거야!” “너 정말 이렇게 까불다가 우리 업계에서 매장당하고 싶어?” “...”소란스러운 외침이 이어졌지만, 주슬기는 그 명문가 아가씨들의 헛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서나의 얼굴은 술기운에 붉게 물들어 있었고, 주슬기의 손아귀에는 갈수록 힘이 더해졌다.“뭐야? 오늘 집에서 양치질 안 하고 나왔어? 입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은데?” 서나는 당황해하며 외쳤다. “너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주슬기는 냉소를 머금으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주서나의 뺨을 향해 정확히 내리꽂았다. 짝! 고막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서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서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아악!” 서나는 비명을 질렀다. “뭐해! 너희들 가만히 있지 말고 당장 나 좀 도와줘!” 그제야 서나의 추종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
무역협회 회장 전영철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 그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보디가드이 들어섰고, 웅장한 연회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서나는 이 모습을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외쳤다. “아빠, 저를 좀 구해주세요!” 전영철의 얼굴은 단호하고 엄중했다.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멍하니 뭐 해? 당장 가서 아가씨를 빨리 구하지 않고.” 보디가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주슬기는 갑자기 몰려드는 보디가들로 인해 당황하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당신들 뭐야, 왜 이래!!” 주슬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보디가드 몇 명이 거리를 좁히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상태였던 주슬기는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아빠, 저 여자 당장 내쫓아버려요! 업계에서 저 여자를 당장 퇴출시켜버려야 해요! 우리나라 안에서 ZT그룹이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요!!” 아빠라는 뒷배가 자신의 뒤에서 버티고 있자 비굴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서나는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녀의 기세가 한층 더 당당해 보였다. 양옆으로 서 있던 보디가드들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길을 내주었다. 전영철은 압도적인 기세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주 대표님, 우리 전씨 가문이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주슬기는 술기운이 가신 듯 머리를 한 차례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에 자신은 단지 순간적인 충동에 서나에게 손을 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일이 커진 듯했다. 주슬기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태연한 척 말했다. “아니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한 거요?” 주슬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단지 전서나 씨가 허튼소리를 하는 게 거
“최 사장님.” 전영철은 자세를 낮추며, 그러나 여전히 어른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했다. “단지 사적인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인데, 왜 최 사장님께서 참견하시는 겁니까?” 하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의 원인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는 게 과연 적절한 판단일까요?” “게다가, 제가 보기엔 주 대표님이 이유 없이 난리를 피울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말이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맞아. 주 대표님은 평소에는 항상 예의 바르고 단정한 분이셔, 이런 자리에서 실수를 하실 분은 아니신데, 분명 뭔가 사정이 있을 겁니다.” “그래 맞아 우린 그저 주 대표님이 손을 댄 것만 봤을 뿐,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거잖아.”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할 리는 없는 거잖아. 이건 원인을 밝혀야 할 문제 같은데.” “...”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전영철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속으로는 이 우유부단한 사람들을 욕하고 있었다. ‘정말, 사람 마음은 갈대라 더니 바람이 부니까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 마음 하고는!’“전 회장님도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먼저 진실을 밝히고 나서 결론을 내리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하연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듣기로는 이 호텔에 전 구역 CCTV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사각지대가 없는 고화질로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툭 던지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CCTV가 있다면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니야? 그럼 모든 게 명확해질 텐데.” “요즘 CCTV 화질이 얼마나 좋은데, 금방 원인과 결과가 다 드러날 거야.” 구경꾼들의 흥미가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하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전 회장님, 이 제안, 꽤 괜찮은 것 같네요.” 전영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질문의 화살은 주슬기에게로 향했다. 전서나는 마치 이미 답을 확신한 듯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주슬기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다른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 사람 DL그룹의 부상혁 대표님 아니야? 오늘 여기에 있었던 거야?” 사람들 틈에서 한 남자의 길고 우아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과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부상혁이라는 남자만의 독특한 아우라였다. ‘부상혁...’ 주슬기는 입을 열려다 멈췄고, 상혁의 존재가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겼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은 듯했다. 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주 대표님, 무슨 말이라도 하셔야죠. 모두 우리를 보고 있잖아요.” 서나의 말의 그제서야 주슬기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길은 여전히 자신도 모르게 부상혁을 따라갔다. 상혁은 사람을 가로질러 하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둘은 마주 보고 미소를 주고받았고, 하연은 자연스럽게 상혁의 팔짱을 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상혁의 눈빛에는 따뜻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깊은 연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침 이 근처에서 협상할 일이 있었는데 방금 협상이 끝났거든 그래서 네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들른 거야.” 하연은 그의 말을 듣고 피식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기로는 방금 당신이 있던 곳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완전히 반대던데요. 여기가 근처라니, 그게 말이 돼요?”말하면서 그녀는 작은 손으로 상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부상혁 대표님, 당신의 속마음은 너무 뻔히 보이는걸요.” 둘의 자연스러운 연인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을 찌르듯 강렬했다. 특히나 주슬기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다. 서나도 당연히 부상혁을 알고 있었다. 부상혁은 사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과 같은
사교 자리를 한 바퀴 돈 뒤, 하연은 약간 피로함을 느껴서 틈을 타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가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주슬기를 마주쳤다. 주슬기는 오늘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주슬기는 하연을 본 순간 자세를 약간 바로잡았다. “주 대표님, 여기 혼자 계셨군요.” 하연은 주슬기를 유심히 살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자존심 때문인지, 주슬기는 솔직한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해서 최 사장님을 피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지 않나요? 최 사장님이 정말 그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 슬기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최 사장님과 부상혁 대표님이 너무 잘 어울려서요. 솔직히 보는 게 좀 거북하더군요.”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하연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쓰시면 앞으로는 더 피곤할 텐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슬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마치 지금 자신이 승자라고 저한테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애초에 우리는 제대로 경쟁조차 해본 적 없으니까요.” ‘부상혁의 마음은 처음부터 최하연에게 기울어 있었어. 경쟁이라고 하기에도 웃긴 거지, 내 완패일 뿐이니까.’ “최하연 씨, 당신 정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나요?” 이번엔 주슬기가 하연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 섰고, 주슬기는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질문을 꺼냈다. “최하연 씨도 잘 알잖아요. 최하연 씨와 그 사람이 함께하면 온갖 소문이 뒤따를 거라는 걸... 그런 말들을 어떻게 막을 건데요?” ...차 안. 하연의 표정은 한껏 무거워 보였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주슬기와의 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 상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