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화살은 주슬기에게로 향했다. 전서나는 마치 이미 답을 확신한 듯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주슬기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다른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 사람 DL그룹의 부상혁 대표님 아니야? 오늘 여기에 있었던 거야?” 사람들 틈에서 한 남자의 길고 우아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과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부상혁이라는 남자만의 독특한 아우라였다. ‘부상혁...’ 주슬기는 입을 열려다 멈췄고, 상혁의 존재가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겼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은 듯했다. 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주 대표님, 무슨 말이라도 하셔야죠. 모두 우리를 보고 있잖아요.” 서나의 말의 그제서야 주슬기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길은 여전히 자신도 모르게 부상혁을 따라갔다. 상혁은 사람을 가로질러 하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둘은 마주 보고 미소를 주고받았고, 하연은 자연스럽게 상혁의 팔짱을 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상혁의 눈빛에는 따뜻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깊은 연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침 이 근처에서 협상할 일이 있었는데 방금 협상이 끝났거든 그래서 네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들른 거야.” 하연은 그의 말을 듣고 피식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기로는 방금 당신이 있던 곳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완전히 반대던데요. 여기가 근처라니, 그게 말이 돼요?”말하면서 그녀는 작은 손으로 상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부상혁 대표님, 당신의 속마음은 너무 뻔히 보이는걸요.” 둘의 자연스러운 연인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을 찌르듯 강렬했다. 특히나 주슬기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다. 서나도 당연히 부상혁을 알고 있었다. 부상혁은 사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과 같은
사교 자리를 한 바퀴 돈 뒤, 하연은 약간 피로함을 느껴서 틈을 타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가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주슬기를 마주쳤다. 주슬기는 오늘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주슬기는 하연을 본 순간 자세를 약간 바로잡았다. “주 대표님, 여기 혼자 계셨군요.” 하연은 주슬기를 유심히 살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자존심 때문인지, 주슬기는 솔직한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해서 최 사장님을 피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지 않나요? 최 사장님이 정말 그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 슬기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최 사장님과 부상혁 대표님이 너무 잘 어울려서요. 솔직히 보는 게 좀 거북하더군요.”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하연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쓰시면 앞으로는 더 피곤할 텐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슬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마치 지금 자신이 승자라고 저한테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애초에 우리는 제대로 경쟁조차 해본 적 없으니까요.” ‘부상혁의 마음은 처음부터 최하연에게 기울어 있었어. 경쟁이라고 하기에도 웃긴 거지, 내 완패일 뿐이니까.’ “최하연 씨, 당신 정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나요?” 이번엔 주슬기가 하연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 섰고, 주슬기는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질문을 꺼냈다. “최하연 씨도 잘 알잖아요. 최하연 씨와 그 사람이 함께하면 온갖 소문이 뒤따를 거라는 걸... 그런 말들을 어떻게 막을 건데요?” ...차 안. 하연의 표정은 한껏 무거워 보였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주슬기와의 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 상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원신민의 업무 처리 속도는 매우 빨랐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CCTV 자료가 상혁의 이메일로 전달되었다. 상혁은 사무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윤곽선을 가진 그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고, 어둠 속에 잠겨 표정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한쪽에 서 있던 원신민이 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 지시하신 대로 처리 완료했습니다.” 어제 모임과 관련된 인물들... 예외 없이, 모두 응당한 대가를 치렀다. 어젯밤, F국은 그야말로 피바람이 몰아치는 혼돈의 밤이었다. 밤 11시를 막 넘긴 시각, 전씨 가문 산하의 기업들이 일제히 해커들의 공격을 받았다. 내부 시스템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고위층의 기밀 자료들이 모조리 유출되었다. 단 한순간에, 전씨 가문은 상업계의 집중 표적이 되어버렸다.전영철은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서 화가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길래 전화를 하는 거야! 내일 말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 그러나 전화기 너머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큰일났습니다. 회사가 곧 망하게 생겼습니다!] 이 말에 전영철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대표님, 당장 인터넷을 확인해 보세요! 대표님 과거의 모든 비리 자료가 전부 까발려졌고, 심지어 경찰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전영철의 손은 떨리기 시작하며 마음속은 공포로 가득 찼다. 그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서둘러 전화를 끊고 웹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영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십여 년 전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일이 모두 드러난 것이다. [대표님, 경찰이 지금 대표님 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도망?’ ‘맞아! 지금 내가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어!’ 전영철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눈에는
부씨 가문 본가.부동건은 동남아시아쪽 소식을 듣고 난 뒤 서재에서 한참 동안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남준이... 이 놈의 자식, 감히 이렇게 큰일을 나한테 보고도 안하고 멋대로 처리를 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송혜선이 갓 우려낸 최고급 녹차를 들고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온몸에 분노를 두른 부동건이었다. 요 며칠 동안 컨디션을 잘 관리한 덕분에 송혜선의 안색은 한결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살짝 걱정 섞인 그녀의 물음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송혜선의 이런 부드러운 태도는 거친 감정을 진정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미 화가 극에 달한 부동건은 송혜선의 얼굴을 보자마자 더욱 불같이 타올랐다. “누가 들어오래?” 분노를 삼킨 낮은 목소리였다.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불룩한 배를 이끌며 그의 앞에 다가가 차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아주머님한테 부탁해서 회장님을 위해 우려낸 차예요. 따뜻할 때 드세요.” “나가!” 그녀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회장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탁자 위로 부동건의 손이 강하게 내려치며 큰 소리를 냈다. 그 충격에 송혜선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부동건은 냉소를 머금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던졌다. “네 훌륭한 아들이 한 짓을 직접 확인해 봐!” 송혜선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서류가 바닥에 흩어지며 떨어졌다. 부동건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움켜쥐며 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부동건의 새로운 비서는 이미 저택 아래서 부동건을 기다리고 있었고, 부동건이 내려오자 비서는 주눅 든 얼굴로 다가갔다. “회장님!” “30분 안에 모두에게 모이라고 전해. 긴급회의 할 거라고.” 그날의 폭풍은 DL그룹 전체를 강타했고, 회의는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이
[상무님, 저 감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정규인은 완전히 방향을 잃은 채 안절부절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가면 이번 생은 끝입니다. 상무님, 어떻게든 이번에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이 고비만 넘기게 해 주세요.]“내가 무슨 수로...!” 남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전에 경고했었잖아요. 적당히 하고 그만두라고... 내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정규인도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한 번 자극되면 멈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부상혁이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나올 줄 몰랐어요... 명백히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다른 야심 있는 자들을 철저히 제거하려는 거예요. 심지어 상무님까지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걸 보면 말이에요.”정규인은 다급히 대답하며 남준의 도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남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정 사장님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자금 부족을 메우는 게 우선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요.” 이 말에 정규인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상무님, 그 말은 저를 돕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정규인은 초조하게 말했다. [제가 돈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끌지 않았겠죠. 이미 집이며 주식이며 팔아도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밖에 없습니다. 결국 감옥으로 가라는 건가요?]그는 이를 갈며 마음속으로 부정했다. ‘안 돼. 난 감옥에 갈 순 없어.' [상무님, 잊지 마세요. 우리 둘은 같은 배를 탄 사이입니다.] 정규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남준이 이 시점에서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가면, 상무님도 혼자 깨끗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남준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지며, 그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졌다. “정 사장님, 지금 그 말은 무슨 뜻으로 하시는 거죠?”정규인은 감추고 있던 ‘비상카드’를 꺼내듯 천천히
다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국자를 들고 국 한 그릇을 떠내어 남준에게 내밀었다. “제 음식 손맛이 어떤지 한 번 봐주세요.” 다영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몇 시간이나 끓인 거예요. 제 체면 좀 살려주세요.” 남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그냥 놔두세요. 나중에 먹을게요.” 하지만 다영은 물러서지 않았고, 남준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안 돼요. 국은 식으면 맛이 없어요.” 둘 사이에 잠시 신경전이 오갔는데, 결국 남준은 소파에 앉아 국을 받아 들었다. 그는 한 모금 떠먹으며 살짝 맛을 보았다. “어때요? 맛있죠?” 다영은 남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미소를 지었다. 둘은 매우 가까이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남준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런 일은 아줌마에게 맡겨요. 다영 씨가 직접 할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한가하기도 하고 남준 씨한테 직접 해주고 싶었어요.” 다영은 남준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그리고요, 남준 씨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건 제겐 행복한 일이에요.” 남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영 씨, 나는 다영 씨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어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가로막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덮었다. 다영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은은한 꽃 향기가 풍겼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제가 결정할 일이에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남준 씨, 이건 제 선택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갈비탕을 끓이는 게 나에겐 분명 기쁨이었어.' ‘그리고 내가 남준 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뿐인 건 아니잖아.'“남준 씨,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도와줄게요. 그게... DL그룹 전체라 해도
상혁은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확고한 대답에 연지는 속으로 환호하며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고,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제가 반드시 두 배로 열심히 일해서 꼭 대표님께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상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 웃음은 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그래, 황 비서의 능력을 믿어.” 확신의 말을 듣고 연지는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곧이어 상혁이 말의 방향을 틀었다. “다만, 그전에 황 비서가 내게 작은 일을 하나 도와줬으면 좋겠어.” 말이 끝나자 연지의 얼굴에 스친 미소가 살짝 굳으며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일’이 결코 단순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만약 그녀가 이 일을 거절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넓은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으며 적막감이 감돌았다. 연지는 사무실에 겨우 15분 정도 머물렀고, 바로 서둘러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원신민이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꽃다발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상혁의 시선이 꽃다발로 향했다. 한겨울에도 장미는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햇살 아래 더욱 화사하고 매혹적으로 보였다. “대표님, 이렇게 예쁜 꽃이라면 최 사장님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응.”부상혁은 가벼운 소리로 답하며, 마치 하연이 꽃다발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냥 거기에 놔둬. 퇴근할 때 가져갈게.” “알겠습니다.” 원신민은 꽃다발을 책상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나서 문서 정리를 하며 상혁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다 방금 연지가 떠날
상혁은 자연스럽게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귀 가까이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오래든 상관없어.” 하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부 대표님, 참을성 하나는 최고네요.” “그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지.” 상혁은 미소를 띠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하연을 향해 내밀었고, 눈앞에 화려한 붉은 장미 꽃다발이 나타났다. 하연의 눈이 반짝였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여자들은 꽃을 좋아해서, 꽃을 자주 선물해주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진다더군.” 그래서 부상혁도 한 번 두 사람의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하연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급히 꽃다발을 받아 들고 장미 향을 맡았다. 향긋한 꽃내음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이제는 인터넷으로 공부도 하시네요?” 상혁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 “네 반응을 보니, 공부한 보람이 있군.” “맞아요, 부 대표님.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해주세요.” 둘은 눈을 맞추며 미소를 나눴다. ...돌아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웠다. 하루 종일 일한 하연은 피로에 지쳐 있었고, 차 안에서 연신 하품을 했다. 상혁은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졸리면 잠깐 눈 좀 붙여. 도착하면 내가 깨워줄게.” 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잠들기 전,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나지막이 말했다. “진숙이 이모가 오후에 전화했어요. 맞춤 제작한 드레스가 항공편으로 도착했다고 하셨어요. 내일 오전에 우리 같이 보러 가요.” “그래, 알겠으니까 일단 좀 자.” 상혁의 대답을 듣고 하연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연은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더 많이 자는 듯했다. 그녀는 해가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