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국자를 들고 국 한 그릇을 떠내어 남준에게 내밀었다. “제 음식 손맛이 어떤지 한 번 봐주세요.” 다영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몇 시간이나 끓인 거예요. 제 체면 좀 살려주세요.” 남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그냥 놔두세요. 나중에 먹을게요.” 하지만 다영은 물러서지 않았고, 남준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안 돼요. 국은 식으면 맛이 없어요.” 둘 사이에 잠시 신경전이 오갔는데, 결국 남준은 소파에 앉아 국을 받아 들었다. 그는 한 모금 떠먹으며 살짝 맛을 보았다. “어때요? 맛있죠?” 다영은 남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미소를 지었다. 둘은 매우 가까이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남준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런 일은 아줌마에게 맡겨요. 다영 씨가 직접 할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한가하기도 하고 남준 씨한테 직접 해주고 싶었어요.” 다영은 남준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그리고요, 남준 씨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건 제겐 행복한 일이에요.” 남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영 씨, 나는 다영 씨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어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가로막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덮었다. 다영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은은한 꽃 향기가 풍겼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제가 결정할 일이에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남준 씨, 이건 제 선택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갈비탕을 끓이는 게 나에겐 분명 기쁨이었어.' ‘그리고 내가 남준 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뿐인 건 아니잖아.'“남준 씨,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도와줄게요. 그게... DL그룹 전체라 해도
상혁은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확고한 대답에 연지는 속으로 환호하며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고,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제가 반드시 두 배로 열심히 일해서 꼭 대표님께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상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 웃음은 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그래, 황 비서의 능력을 믿어.” 확신의 말을 듣고 연지는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곧이어 상혁이 말의 방향을 틀었다. “다만, 그전에 황 비서가 내게 작은 일을 하나 도와줬으면 좋겠어.” 말이 끝나자 연지의 얼굴에 스친 미소가 살짝 굳으며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일’이 결코 단순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만약 그녀가 이 일을 거절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넓은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으며 적막감이 감돌았다. 연지는 사무실에 겨우 15분 정도 머물렀고, 바로 서둘러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원신민이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꽃다발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상혁의 시선이 꽃다발로 향했다. 한겨울에도 장미는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햇살 아래 더욱 화사하고 매혹적으로 보였다. “대표님, 이렇게 예쁜 꽃이라면 최 사장님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응.”부상혁은 가벼운 소리로 답하며, 마치 하연이 꽃다발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냥 거기에 놔둬. 퇴근할 때 가져갈게.” “알겠습니다.” 원신민은 꽃다발을 책상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나서 문서 정리를 하며 상혁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다 방금 연지가 떠날
상혁은 자연스럽게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귀 가까이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오래든 상관없어.” 하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부 대표님, 참을성 하나는 최고네요.” “그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지.” 상혁은 미소를 띠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하연을 향해 내밀었고, 눈앞에 화려한 붉은 장미 꽃다발이 나타났다. 하연의 눈이 반짝였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여자들은 꽃을 좋아해서, 꽃을 자주 선물해주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진다더군.” 그래서 부상혁도 한 번 두 사람의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하연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급히 꽃다발을 받아 들고 장미 향을 맡았다. 향긋한 꽃내음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이제는 인터넷으로 공부도 하시네요?” 상혁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 “네 반응을 보니, 공부한 보람이 있군.” “맞아요, 부 대표님.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해주세요.” 둘은 눈을 맞추며 미소를 나눴다. ...돌아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웠다. 하루 종일 일한 하연은 피로에 지쳐 있었고, 차 안에서 연신 하품을 했다. 상혁은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졸리면 잠깐 눈 좀 붙여. 도착하면 내가 깨워줄게.” 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잠들기 전,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나지막이 말했다. “진숙이 이모가 오후에 전화했어요. 맞춤 제작한 드레스가 항공편으로 도착했다고 하셨어요. 내일 오전에 우리 같이 보러 가요.” “그래, 알겠으니까 일단 좀 자.” 상혁의 대답을 듣고 하연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연은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더 많이 자는 듯했다. 그녀는 해가
하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상혁을 밀어내고, 재빨리 욕실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나, 드레스 때문에 이모랑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어제 말했잖아요.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늦는다고요!” ...F국에서 가장 비싼 상업지구에 위치한 맞춤형 웨딩숍. 조진숙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넘기며 커피를 음미하던 그녀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모!” 하연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조진숙에게 뛰어왔고, 조금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조진숙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늦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말 안 해도 돼.” 하연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뒤따라온 상혁은 아예 잊은 듯했다. 매장 직원이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여사님!” 조진숙은 하연을 보며 말했다. “하연아, 얼른 드레스 입어보고 수정할 곳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연말 전에 디자이너가 휴가를 간다고 하니 그 전에 확정해야 하잖니. 너희 약혼식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지.” 이 드레스는 조진숙이 친구를 통해 특별히 의뢰한 독점 디자이너의 하이엔드 맞춤 드레스였다.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작품이었다. 하연의 치수에 맞춰 이미 조정된 상태로 항공 배송된 것이다. 하연이 피팅룸에서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오늘 하연은 옅은 핑크빛 립스틱을 발랐고, 골드 톤의 오프숄더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섬세한 어깨와 매끈한 종아리가 드러나는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10cm의 은빛 하이힐을 신은 하연은 완벽하게 안정된 모습이었다. “어머, 하연아! 정말 너무 아름답구나!” 조진숙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상혁을 힐끔 보며 덧붙였다. “아들아, 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하연이 같은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를 얻다니, 정말 복 받았구나.”상혁은 하
“우리 모자를 걱정해서 회장님이 특별히 조 선생님을 붙여 주셨죠. 그래서 항상 어디를 가든 제 옆에서 절 돌봐주고 있어요.” 송혜선은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신중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 말투 속에는 조봉규와의 관계를 철저히 부정하고자 하는 강한 의도가 배어 있었다.그녀는 혹시라도 뭔가 드러날까 두려운 듯했다.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이런 상황에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게 최선이야.’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공손하게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회장님께서 송 여사님을 정말 많이 신경을 쓰십니다. 제게 사모님을 잘 돌보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늦둥이기에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조진숙은 코웃음을 치며 두 사람의 말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곧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될 테니까, 우선은 내가 참아야 해. 그래 지금 실컷 둘이 기분 좋게 많이 웃고 즐겨, 그래야 나중에 더 큰 고통을 겪어도 후회가 없을 테니까.’ 속으로 비웃으며, 조진숙은 여유롭게 말했다.“그럼 더 잘 돌봐야겠네. 우리 모두 기대하고 있는 만큼 실망시키지 않아야 할 텐데.”조진숙의 말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어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심 어린 걱정을 가장한 이 한마디는 송혜선을 말문 막히게 했다. 송혜선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왠지 모를 무력감이 느껴졌다. 마치 힘껏 치던 주먹이 솜에 부딪힌 듯한 허탈함이었다. “송 여사님, 조 선생님하고 아주 잘 지내고 계신가 봐요. 방금 들어오실 때 두 분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 나누시는 걸 보니 알겠더라고요. 요즘 고용주와 고용인이 이렇게까지 조화롭게 지내는 건 참 드문 일인데 말이죠.”하연은 미소를 띠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송혜선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조 선생님 같은 책임감 있는 개인 의사는 정말 찾기 힘들죠. 송 여사님께서 잘 아끼셔야겠어요.” 하연의 반짝이는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 눈길에
송혜선은 한 걸음 물러서며 몸이 휘청거렸고, 뒤에 있던 조봉규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상혁은 차갑게 송혜선을 내려다보며 거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집으로 돌아가 푹 쉬세요. 임신 중이시니, 남준이 일은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송혜선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떻게 샵을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그녀는 영혼 없는 시체처럼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까의 오만함과 당당함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역시 뱀을 제압하려면 급소를 정확히 찔러야 하는 법. 상혁은 송혜선의 치명적인 약점을 정확히 겨냥해 단 한 번에 그녀의 정신을 무너뜨렸다.“혜선아,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뱃속의 아이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 조봉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송혜선은 조봉규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안 돼.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우리 남준이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어.”...같은 시각, 부남준의 개인 저택. 조용한 방 안에서, 비서는 은행 이체 확인서를 남준에게 건넸다. “상무님, 지시하신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체 확인서에는 몇백억의 금액이 표시되어 있었고, 수취인의 이름은 분명히 ‘정규인’이었다. 남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고, 비서는 이내 물러났다. 넓은 방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남준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정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은 보냈어요. 조금 있다가 계좌 확인해 봐요.” 전화를 받은 정규인의 목소리에는 들뜬 기색이 가득하며 눈이 반짝이며 거의 흥분한 상태였다. [이렇게 빨리요? 상무님은 역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정규인은 며칠 동안 빚을 갚기 위해 가진 재산을 다 팔았지만, 그 금액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남준의 자금 덕분에 마침내 숨통이
전날 밤, F국에는 폭설이 내렸다. 대지는 눈으로 덮여 순백의 세상으로 변했고, 입김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얼음 결정이 되어 흩어졌다. 이른 아침에 하연이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그 바람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지만, 눈빛만큼은 반짝이며 기쁨이 가득했다. “우와, 눈이 이렇게 많이 쌓였어!” 정원에는 발목을 훌쩍 넘는 두께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하연은 장난기가 발동해, 도구를 들고 나가 작은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눈사람의 몸통은 크고 탄탄하게 머리는 몸통보다는 작고 동글동글하게 만들었다. 돌 두 개를 눈으로 사용해 깊고 생동감 있는 눈을 표현했고, 당근 하나를 얼굴 중앙에 꽃아 코로 사용해 귀엽고 장난기 넘치는 분위기를 더했다. 눈사람을 완성한 하연은 눈밭에 서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상혁에게 보냈다. [부 대표님? 어때요? 예쁘죠?] 메시지는 거의 즉시 답장이 왔다. [예쁘네. 하지만 우리 공주님만큼은 아니야.]하연은 피식 웃으며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바깥 날씨가 많이 추워요. 오늘 꼭 옷 따뜻하게 입어요.] 다시 온 메시지에 하연은 화면을 빠르게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최 사장님.] 집으로 들어오자, 하연의 얼굴이 빨갛게 얼어 있는 것을 본 최동신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날씨도 춥고 눈이 와서 길도 안 좋은데, 오늘은 회사에 가지 말고 집에서 재택근무 하는 게 어떻겠니? 문서는 정 실장한테 보내면 되는 일이고 아니면 화상으로 하던가 해서 집에서 처리해도 괜찮잖아.” 하연은 할아버지의 걱정이 느껴졌지만, 연말이 다가오며 업무가 너무 많아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연은 최동신의 팔짱을 끼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대신 오늘은 일찍 퇴근할게요. 저녁에 저랑 같이 샤브샤브 드시는 건 어떠세요?” 최동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도 정말 일
“이모님, 고마워요.” 전복죽의 맛은 담백하고 느끼하지 않았다. 하연은 숟가락으로 죽을 한 입 떠먹으며 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메스꺼움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온몸이 한결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그릇 담겨있던 전복죽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하연은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 먼저 출근할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오거라.” 많은 눈 내렸고, 도로의 상황이 좋지 않아 최동신이 계속 안전을 당부했다. 차는 눈길 탓에 속도를 낮춰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차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기사가 급히 차에서 내려 점검하더니 말했다. “최 사장님, 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아무래도 견인차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하연에게는 중요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지각을 피하기 위해 하연은 어떻게 든 회사에 가야 했기에 우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길을 걸으며 택시를 잡기 위해서 호출 앱을 켰다. 도로 옆이어서 그런지 찬 바람이 더 부는 듯했고 그 매서운 바람을 맞으니 온몸이 얼어붙을 듯 추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외투를 여미며 핸드폰으로 막 택시 호출을 하려는 순간, 하연의 눈앞에 빨간색의 눈에 띄는 BMW 미니가 앞에 멈춰섰다. 하연의 눈빛이 의아해할 때 곧 창문이 내려갔고 정교한 옆모습이 드러났다. “최 사장님, 제 차를 타고 가시죠.” 주인공은 바로 주슬기였다! 지난번 연회 이후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연은 슬기의 호의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거의 반사적으로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주 대표님. 제가 이미 택시 호출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연이 호출했음에도 택시는 한참이 지나도 잡히지 않았다. 슬기는 이미 이 상황을 예측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고, 하연 앞까지 걸어와 차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눈 오는 날엔 택시 잡기 힘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