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
공항 로비에 서 있던 최하연은 잠잠해진 핸드폰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아마도 오랫동안 한씨 가문에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가벼웠다.오가는 여행객들을 보던 하연은 생각에 잠겼다.‘B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좀 싱숭생숭하네.’‘그래도 괜찮아,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거야.’그녀는 단순히 한서준의 사랑이 식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라리 깔끔하게 떠나주는 게 더 나아.’하연은 곧장 공항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했고, 이미 D국행 티켓을 예매한 상태였다.처음 그녀는 가족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B시에 머물렀다.이번에 D국에서 열린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그녀와 서준을 만나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이 프로젝트를 HT그룹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서준은 감사해하기는커녕 그녀 혼자 보냈다.이제 하연 차례였다.“안녕하십니까, 손님. 이 티켓은 현재 잠겨 있어 당분간 처리할 수 없습니다.”비즈니스 카운터 직원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잠겨 있다고요?”믿을 수 없던 하연은 온몸이 얼어붙었다.“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회사 계좌로 예매하셨나요? 방금 환불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하연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그녀는 서준의 비서였기에 회사에서 만들어준 대부분의 계좌는 HT그룹이 관리했다.그리고 신분증은...얼마전 회사 인사부에서 어떤 것을 등록해야 한다며 들고 간 상태였다.하연은 너무 긴장해 손이 덜덜 떨렸다.그녀는 상처밖에 남지 않은 이 도시를 하루 빨리 떠나고 싶어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죄송해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그녀는 가장자리로 걸어가 휴대폰을 꺼내 HT그룹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고, 사용할 수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떴다.하연은 머리속이 새하얘졌다.‘어떻게 내
한서준의 약혼자?최하연과 한서준은 비밀 결혼을 했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가 서준의 비서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그럼 민혜경을 가리키는 건가?’하연의 이혼협의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혜경은 HT그룹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나중에 그녀는 한때 하연이 잤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서준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할 것이다.이 생각에 하연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마워요.”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인사팀 사무실을 나갔다.제이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아이고, 최 비서가 대표님을 좋아하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다 알 수 있는데, 해고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그는 컴퓨터를 보며 말했다.“아, 또 재밌는 일이 생기겠네~”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구동후를 만났다.“최 비서님, 오셨네요.”그녀의 캐리어를 본 동후는 틀림없이 하연이 신분증을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신분증이 있는 회의실을 가리켰다.“비서님 신분증은 대표님께 드렸어요. 아직 회의 중이신데, 아직 세 번째 회의예요. 급하시면 제가 말씀드릴까요?”“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하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릴게요.”“네, 알겠습니다. 커피 한 잔 갖다 드릴까요?”동후는 서준이 그녀를 해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연은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가 많아 그녀를 해고하면 당장 적당한 직원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하연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K국식 핸드드립 커피예요, 배운지 얼마 안 됐지만요.”“전 정말 괜찮아요.”서준과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었던 하연은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이 말을 들은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가 서준에게 서류를 건넸다.하연은 대표실 앞을 지나가다 회의실 쪽을 힐끗 쳐다봤다.문틈사이로 보인 회의실 내부에는 여러 사람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그녀는
최하연은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민혜경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어 거절했다.그리고 민혜경의 부탁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기에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하연의 신분증이 아직 한서준에게 있으니 마지막으로 잡다한 일을 맡기로 했다. 더불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하연은 심호흡을 한 뒤 동의했다.“알겠습니다.”“그럼 부탁할게요.”그렇게 말한 후 혜경은 화장실을 나갔다.임신 후 모성애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이 잠시 있었지만, 여전히 혜경에게서 풍겨 나오는 자신감과 화려함은 하연과 대조적이었다.과거 하연은 부유한 집안의 그늘 아래 혜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하연은 초라한 신세였다.엄청난 격차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린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은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서준은 흑설탕 3 티스푼과 우유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회의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서준을 발견하지 못했다.‘벌써 대표실로 들어간 건가?’하연은 커피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안에서 들려온 것은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혜경의 목소리였다.하연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표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서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혜경을 발견했다.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니 하연은 진정할 수 없었고 심장은 고통으로 뛰고 있었다.대표실로 들어온 하연을 본 혜경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여기에 두고 나가시면 돼요.”혜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단숨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그 순간 하연은 직감
하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상혁을 밀어내고, 재빨리 욕실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나, 드레스 때문에 이모랑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어제 말했잖아요.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늦는다고요!” ...F국에서 가장 비싼 상업지구에 위치한 맞춤형 웨딩숍. 조진숙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넘기며 커피를 음미하던 그녀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모!” 하연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조진숙에게 뛰어왔고, 조금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조진숙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늦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말 안 해도 돼.” 하연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뒤따라온 상혁은 아예 잊은 듯했다. 매장 직원이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여사님!” 조진숙은 하연을 보며 말했다. “하연아, 얼른 드레스 입어보고 수정할 곳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연말 전에 디자이너가 휴가를 간다고 하니 그 전에 확정해야 하잖니. 너희 약혼식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지.” 이 드레스는 조진숙이 친구를 통해 특별히 의뢰한 독점 디자이너의 하이엔드 맞춤 드레스였다.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작품이었다. 하연의 치수에 맞춰 이미 조정된 상태로 항공 배송된 것이다. 하연이 피팅룸에서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오늘 하연은 옅은 핑크빛 립스틱을 발랐고, 골드 톤의 오프숄더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섬세한 어깨와 매끈한 종아리가 드러나는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10cm의 은빛 하이힐을 신은 하연은 완벽하게 안정된 모습이었다. “어머, 하연아! 정말 너무 아름답구나!” 조진숙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상혁을 힐끔 보며 덧붙였다. “아들아, 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하연이 같은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를 얻다니, 정말 복 받았구나.”상혁은 하
상혁은 자연스럽게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귀 가까이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오래든 상관없어.” 하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부 대표님, 참을성 하나는 최고네요.” “그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지.” 상혁은 미소를 띠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하연을 향해 내밀었고, 눈앞에 화려한 붉은 장미 꽃다발이 나타났다. 하연의 눈이 반짝였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여자들은 꽃을 좋아해서, 꽃을 자주 선물해주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진다더군.” 그래서 부상혁도 한 번 두 사람의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하연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급히 꽃다발을 받아 들고 장미 향을 맡았다. 향긋한 꽃내음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이제는 인터넷으로 공부도 하시네요?” 상혁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 “네 반응을 보니, 공부한 보람이 있군.” “맞아요, 부 대표님.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해주세요.” 둘은 눈을 맞추며 미소를 나눴다. ...돌아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웠다. 하루 종일 일한 하연은 피로에 지쳐 있었고, 차 안에서 연신 하품을 했다. 상혁은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졸리면 잠깐 눈 좀 붙여. 도착하면 내가 깨워줄게.” 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잠들기 전,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나지막이 말했다. “진숙이 이모가 오후에 전화했어요. 맞춤 제작한 드레스가 항공편으로 도착했다고 하셨어요. 내일 오전에 우리 같이 보러 가요.” “그래, 알겠으니까 일단 좀 자.” 상혁의 대답을 듣고 하연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연은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더 많이 자는 듯했다. 그녀는 해가
상혁은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확고한 대답에 연지는 속으로 환호하며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고,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제가 반드시 두 배로 열심히 일해서 꼭 대표님께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상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 웃음은 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그래, 황 비서의 능력을 믿어.” 확신의 말을 듣고 연지는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곧이어 상혁이 말의 방향을 틀었다. “다만, 그전에 황 비서가 내게 작은 일을 하나 도와줬으면 좋겠어.” 말이 끝나자 연지의 얼굴에 스친 미소가 살짝 굳으며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일’이 결코 단순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만약 그녀가 이 일을 거절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넓은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으며 적막감이 감돌았다. 연지는 사무실에 겨우 15분 정도 머물렀고, 바로 서둘러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원신민이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꽃다발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상혁의 시선이 꽃다발로 향했다. 한겨울에도 장미는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햇살 아래 더욱 화사하고 매혹적으로 보였다. “대표님, 이렇게 예쁜 꽃이라면 최 사장님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응.”부상혁은 가벼운 소리로 답하며, 마치 하연이 꽃다발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냥 거기에 놔둬. 퇴근할 때 가져갈게.” “알겠습니다.” 원신민은 꽃다발을 책상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나서 문서 정리를 하며 상혁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다 방금 연지가 떠날
다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국자를 들고 국 한 그릇을 떠내어 남준에게 내밀었다. “제 음식 손맛이 어떤지 한 번 봐주세요.” 다영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몇 시간이나 끓인 거예요. 제 체면 좀 살려주세요.” 남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그냥 놔두세요. 나중에 먹을게요.” 하지만 다영은 물러서지 않았고, 남준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안 돼요. 국은 식으면 맛이 없어요.” 둘 사이에 잠시 신경전이 오갔는데, 결국 남준은 소파에 앉아 국을 받아 들었다. 그는 한 모금 떠먹으며 살짝 맛을 보았다. “어때요? 맛있죠?” 다영은 남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미소를 지었다. 둘은 매우 가까이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남준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런 일은 아줌마에게 맡겨요. 다영 씨가 직접 할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한가하기도 하고 남준 씨한테 직접 해주고 싶었어요.” 다영은 남준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그리고요, 남준 씨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건 제겐 행복한 일이에요.” 남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영 씨, 나는 다영 씨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어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가로막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덮었다. 다영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은은한 꽃 향기가 풍겼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제가 결정할 일이에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남준 씨, 이건 제 선택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갈비탕을 끓이는 게 나에겐 분명 기쁨이었어.' ‘그리고 내가 남준 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뿐인 건 아니잖아.'“남준 씨,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도와줄게요. 그게... DL그룹 전체라 해도
[상무님, 저 감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정규인은 완전히 방향을 잃은 채 안절부절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가면 이번 생은 끝입니다. 상무님, 어떻게든 이번에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이 고비만 넘기게 해 주세요.]“내가 무슨 수로...!” 남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전에 경고했었잖아요. 적당히 하고 그만두라고... 내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정규인도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한 번 자극되면 멈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부상혁이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나올 줄 몰랐어요... 명백히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다른 야심 있는 자들을 철저히 제거하려는 거예요. 심지어 상무님까지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걸 보면 말이에요.”정규인은 다급히 대답하며 남준의 도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남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정 사장님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자금 부족을 메우는 게 우선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요.” 이 말에 정규인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상무님, 그 말은 저를 돕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정규인은 초조하게 말했다. [제가 돈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끌지 않았겠죠. 이미 집이며 주식이며 팔아도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밖에 없습니다. 결국 감옥으로 가라는 건가요?]그는 이를 갈며 마음속으로 부정했다. ‘안 돼. 난 감옥에 갈 순 없어.' [상무님, 잊지 마세요. 우리 둘은 같은 배를 탄 사이입니다.] 정규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남준이 이 시점에서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가면, 상무님도 혼자 깨끗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남준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지며, 그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졌다. “정 사장님, 지금 그 말은 무슨 뜻으로 하시는 거죠?”정규인은 감추고 있던 ‘비상카드’를 꺼내듯 천천히
부씨 가문 본가.부동건은 동남아시아쪽 소식을 듣고 난 뒤 서재에서 한참 동안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남준이... 이 놈의 자식, 감히 이렇게 큰일을 나한테 보고도 안하고 멋대로 처리를 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송혜선이 갓 우려낸 최고급 녹차를 들고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온몸에 분노를 두른 부동건이었다. 요 며칠 동안 컨디션을 잘 관리한 덕분에 송혜선의 안색은 한결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살짝 걱정 섞인 그녀의 물음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송혜선의 이런 부드러운 태도는 거친 감정을 진정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미 화가 극에 달한 부동건은 송혜선의 얼굴을 보자마자 더욱 불같이 타올랐다. “누가 들어오래?” 분노를 삼킨 낮은 목소리였다.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불룩한 배를 이끌며 그의 앞에 다가가 차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아주머님한테 부탁해서 회장님을 위해 우려낸 차예요. 따뜻할 때 드세요.” “나가!” 그녀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회장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탁자 위로 부동건의 손이 강하게 내려치며 큰 소리를 냈다. 그 충격에 송혜선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부동건은 냉소를 머금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던졌다. “네 훌륭한 아들이 한 짓을 직접 확인해 봐!” 송혜선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서류가 바닥에 흩어지며 떨어졌다. 부동건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움켜쥐며 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부동건의 새로운 비서는 이미 저택 아래서 부동건을 기다리고 있었고, 부동건이 내려오자 비서는 주눅 든 얼굴로 다가갔다. “회장님!” “30분 안에 모두에게 모이라고 전해. 긴급회의 할 거라고.” 그날의 폭풍은 DL그룹 전체를 강타했고, 회의는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이
원신민의 업무 처리 속도는 매우 빨랐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CCTV 자료가 상혁의 이메일로 전달되었다. 상혁은 사무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윤곽선을 가진 그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고, 어둠 속에 잠겨 표정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한쪽에 서 있던 원신민이 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 지시하신 대로 처리 완료했습니다.” 어제 모임과 관련된 인물들... 예외 없이, 모두 응당한 대가를 치렀다. 어젯밤, F국은 그야말로 피바람이 몰아치는 혼돈의 밤이었다. 밤 11시를 막 넘긴 시각, 전씨 가문 산하의 기업들이 일제히 해커들의 공격을 받았다. 내부 시스템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고위층의 기밀 자료들이 모조리 유출되었다. 단 한순간에, 전씨 가문은 상업계의 집중 표적이 되어버렸다.전영철은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서 화가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길래 전화를 하는 거야! 내일 말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 그러나 전화기 너머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큰일났습니다. 회사가 곧 망하게 생겼습니다!] 이 말에 전영철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대표님, 당장 인터넷을 확인해 보세요! 대표님 과거의 모든 비리 자료가 전부 까발려졌고, 심지어 경찰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전영철의 손은 떨리기 시작하며 마음속은 공포로 가득 찼다. 그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서둘러 전화를 끊고 웹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영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십여 년 전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일이 모두 드러난 것이다. [대표님, 경찰이 지금 대표님 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도망?’ ‘맞아! 지금 내가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어!’ 전영철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눈에는
사교 자리를 한 바퀴 돈 뒤, 하연은 약간 피로함을 느껴서 틈을 타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가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주슬기를 마주쳤다. 주슬기는 오늘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주슬기는 하연을 본 순간 자세를 약간 바로잡았다. “주 대표님, 여기 혼자 계셨군요.” 하연은 주슬기를 유심히 살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자존심 때문인지, 주슬기는 솔직한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해서 최 사장님을 피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지 않나요? 최 사장님이 정말 그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 슬기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최 사장님과 부상혁 대표님이 너무 잘 어울려서요. 솔직히 보는 게 좀 거북하더군요.”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하연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쓰시면 앞으로는 더 피곤할 텐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슬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마치 지금 자신이 승자라고 저한테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애초에 우리는 제대로 경쟁조차 해본 적 없으니까요.” ‘부상혁의 마음은 처음부터 최하연에게 기울어 있었어. 경쟁이라고 하기에도 웃긴 거지, 내 완패일 뿐이니까.’ “최하연 씨, 당신 정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나요?” 이번엔 주슬기가 하연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 섰고, 주슬기는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질문을 꺼냈다. “최하연 씨도 잘 알잖아요. 최하연 씨와 그 사람이 함께하면 온갖 소문이 뒤따를 거라는 걸... 그런 말들을 어떻게 막을 건데요?” ...차 안. 하연의 표정은 한껏 무거워 보였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주슬기와의 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 상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질문의 화살은 주슬기에게로 향했다. 전서나는 마치 이미 답을 확신한 듯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주슬기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다른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 사람 DL그룹의 부상혁 대표님 아니야? 오늘 여기에 있었던 거야?” 사람들 틈에서 한 남자의 길고 우아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과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부상혁이라는 남자만의 독특한 아우라였다. ‘부상혁...’ 주슬기는 입을 열려다 멈췄고, 상혁의 존재가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겼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은 듯했다. 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주 대표님, 무슨 말이라도 하셔야죠. 모두 우리를 보고 있잖아요.” 서나의 말의 그제서야 주슬기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길은 여전히 자신도 모르게 부상혁을 따라갔다. 상혁은 사람을 가로질러 하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둘은 마주 보고 미소를 주고받았고, 하연은 자연스럽게 상혁의 팔짱을 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상혁의 눈빛에는 따뜻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깊은 연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침 이 근처에서 협상할 일이 있었는데 방금 협상이 끝났거든 그래서 네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들른 거야.” 하연은 그의 말을 듣고 피식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기로는 방금 당신이 있던 곳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완전히 반대던데요. 여기가 근처라니, 그게 말이 돼요?”말하면서 그녀는 작은 손으로 상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부상혁 대표님, 당신의 속마음은 너무 뻔히 보이는걸요.” 둘의 자연스러운 연인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을 찌르듯 강렬했다. 특히나 주슬기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다. 서나도 당연히 부상혁을 알고 있었다. 부상혁은 사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과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