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선은 자연스럽게 부동건의 품에 앉아 두 팔을 부동건의 목에 걸었다. 부동건을 깊이 바라보는 송혜선의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아직 상혁이랑 남준이가 있잖아요. 설령 힘들어지더라도, 제 뱃속에 있는 이 아이가 나중에도 회장님일을 도울 수도 있잖아요.” 부동건은 애정 어린 손길로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당신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을 가진 아이로. 오빠 둘이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 주니, 세상 물정 모르는 고운 아가씨로 살아도 괜찮잖아.” 부동건의 말에는 분명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성공적인 사업, 다정한 아내, 그리고 완벽한 자녀 구성... 그는 모든 것을 바랐다. 하지만 말을 하며 부동건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조진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때 그와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던 조진숙의 모습이 문득 스쳤다. 젊은 시절의 조진숙은 첫 아이를 낳고 모든 애정을 상혁에게 쏟아부었다. 그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린 상혁이 하나면 충분해요. 이 아이에게 모든 사랑과 힘을 쏟아 주고, 이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책임져 줍시다.” 부동건은 조진숙의 뜻에 따라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래, 상혁이만 있으면 돼.” 그 약속은 그 당시엔 진심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진심이었지만, 진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변화무쌍한 법이다.그 후 송혜선이 나타났고, 부동건은 실수를 저질렀으며, 부남준이 태어났다.모든 것이 원래의 궤도에서 어긋나기 시작했고, 그 시절 부동건이 조진숙에게 했던 약속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한없이 어리석고 덧없어 보였다.부동건의 얼굴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곧 말끝을 바꿨다. “아이만 무사히 태어날 수만 있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나는 다 좋아.” 마침 그때, 그의 손바닥에 가벼운 태동이 느껴지면서 감동한 듯 중얼거렸다. “이 작은 녀석이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는 모양이네!” 그 따뜻한 순간이 부동건의 마음에 남아 있던 어둠을 조금은 씻어 주
[그래, 퇴근하고 바로 데리러 갈게.]상혁은 단번에 승낙했다. 영상 속의 하연은 하품을 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 며칠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요. 아마도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상혁은 그녀의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왔다. [일은 잠시 내려놓고, 조금 쉬어. 네 몸이 먼저야.] 하연은 눈꺼풀이 감길 듯 무거워지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봐요.] 상혁은 전화를 끊으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원신민이 그제야 다가섰다. “대표님, 부남준 상무님이 동남아로 떠나셨습니다.” 그 말에 상혁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고,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냉담한 기운으로 변했다. 방금 전까지 따뜻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각진 얼굴에는 감정이라곤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고, 상혁의 태도는 차분하면서도 극도로 냉철했다. 상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움직임 하나는 빠르네.” 원신민은 느껴지는 압박감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보고를 이어갔다. “듣기로는 이건 회장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부상혁은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우리 송 여사님께서 꽤 열심히 그분 귓가에 대고 속삭였나 보네.” 그의 말에는 냉소가 가득했다. “아마 회장님께서 부남준 상무님을 동남아로 보내 경험을 쌓게 하시려는 것 같아요. 거기서 정규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회사로의 복귀 가능성도 훨씬 높아질 거고요.”원신민은 계속해서 분석을 이어갔다.“동남아가 최근 몇 년간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른 곳이잖아요. 아마 그곳에서 입지를 다지고 성과를 낸다면 누가 봐도 다시 재기하기에는 정말 알짜배기인 자리인 거죠.”상혁은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말을 덧붙였다.“정규인의 자리는 동남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 중 하나야. 하지만 정규인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신임과 인맥을 남준이가 단기간에 무너뜨리긴 쉽지 않을 거야. 만약 성공한
“나 오래 잤어요?” 하연은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는 잠깐 눈만 붙이려 했는데, 깊이 잠들어 버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많은 일을 처리하는 최 사장님께서 잠시 쉬는 건 당연한 일이죠.” 상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연은 그제야 문득 떠올랐다. “큰일 났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책상으로 가보니 모든 서류가 정리된 채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심지어 노트북에 있던 최신 보고서까지 이미 검토와 승인까지 완료된 상태였다. “당신이 다 처리했어요?” 상혁의 업무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지만, 이번에는 효율이 지나치게 빨랐다.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어...” 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그녀의 노트북을 닫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 사장님, 그럼 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하연은 기분이 매우 좋아져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 마트 가서 샤브샤브 재료 사러 가요.”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사뒀어.” 하연은 상혁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고 상혁을 바라보는 눈에서는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듯 반짝 반짝거렸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부 대표님이 준비까지 다 해 주셨으니, 이제 우리 바로 집으로 가면 되겠네요.” 오늘 밤 최씨 가문의 본가는 유난히 분주했다. 하연과 상혁이 막 도착했고, 곧이어 최하민과 예아름도 함께 들어섰다.오늘 하민과 아름은 평소와 다르게 더 행복한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하민은 한 손으로 아름의 손을 꽉 잡고, 다른 손으로는 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냈다. 하민은 단정하고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희 혼인신고 했습니다.” 최동신은 미소를 머금고 매우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실은 이미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 “축하한다. 앞으로는 더 행복하게 살 거라! 너희가 이렇게 가
하연은 세면대에 몸을 숙이고 거의 속이 텅 빌 정도로 구토를 쏟아냈다. 상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손으로 하연의 등을 토닥이며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하연아, 좀 괜찮아졌어?” 물을 마시고 난 후 하연의 속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괜찮아요.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하민은 여전히 걱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뭘 잘못 먹은 건가? 의사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빨리 좀 오라고 해!” 곧바로 따라온 아름은 하연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하연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 씨, 혹시 이런 증상 얼마나 됐어요?” 하연은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한 이틀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름은 하연의 손을 잡고 조용히 귀에 대고 물었다. “그럼 혹시... 그날이 언제였어요?” “그날?” 하연은 한참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은 듯 대답했다. “이번 달엔 안 온 것 같아요.” 그녀는 평소 생리 주기가 정확했지만 이번 달은 이미 반달이나 늦어진 상태였다. 하연은 뭔가 어렴풋이 깨달은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난달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아름은 마음속에서 이미 거의 확신을 얻었다. “그럼 잘 생각해 봐요. 구토 말고도 다른 증상이 있었는지? 몸이 평소보다 나른하거나 잠이 많이 온다든가? 이런 증상이요.” 이 말에 하연은 순간 멍하니 얼어붙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편, 상혁은 하연과 아름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하연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아름은 미소를 띠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눈에는 환한 빛이 가득했다. “하연이는 괜찮아요.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죠.” “축하? 대체 무슨 말이야?” 하민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름은 손으로 하민의 어깨를
아름의 얼굴이 붉어졌고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자연스럽게 있다 보면 천천히 순리대로 생기는 거죠...” 하민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 천천히 순리대로.” ... 조진숙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기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손에 잔뜩 임산부에게 좋은 보양식을 들고 찾아왔다.“하연아, 이건 다 몸에 좋은 거야. 집에 있는 이모님한테 부탁해서 꼭 챙겨 먹어. 입덧이 심하면 여기 신선초나 도라지를 좀 먹어봐. 입덧을 가라앉히는 데 좋아서 훨씬 편해질 거야.”조진숙은 일일이 꼼꼼하게 챙겨주며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지금 임신 초기에는 네 몸이 제일 중요하단다.” 조진숙은 하연의 손을 꼭 잡으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임신 초기 3개월은 아직 불안정하니 충분히 쉬어야 해. 일은 밑에 사람들에게 맡겨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하연은 조진숙의 어깨에 기대며 친근하게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난 그냥 지금이 너무 행복할 뿐이야. 곧 설이고 올해는 너희 둘 다 내 곁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 같구나.” 조진숙의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곧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감정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혼식 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 약혼식이 끝나면 바로 결혼식 준비를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에 대해 하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도 돼요.” 하지만 조진숙은 단호했다. 부모로서 자녀들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둘을 존중하고 응원하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 세상의 편견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명문가 출신의 여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했다. 조진숙은 하연이 이런 세상의 편견이나 험담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 딸.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결혼식은 꼭 성대하고 아름답게 치를 거다.” 조진숙은
송혜선의 마음속 질투심은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송혜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이토록 기뻐하는 상황에서, 만약 하연의 뱃속에서 정말로 부씨 가문의 장손이 태어난다면, 자신과 부남준의 위치는 크게 흔들릴 것임을. 그녀는 부드럽게 설득하려 했다. “회장님, 보양식 같은 건 하연이 쪽에서도 충분히 알아서 준비를 했을 거예요. 우리까지 굳이 하연이 보양식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부동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그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 “당신 말은 내가 괜히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거야?” 송혜선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회장님,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은 이미 인내심을 잃은 듯 보였다. “그만해! 이 집에서 당신이 나를 가르칠 위치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줬더니 본인의 위치를 잊은 모양이군.”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몸조리나 잘하고 있어. 다른 일들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 말을 끝낸 그는 소매를 휘날리며 방을 나갔고, 송혜선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다. 부동건이 나가자, 조봉규가 시중드는 가정부를 물리고 송혜선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때에 왜 괜히 회장님 심기를 건드리는 거야.” 송혜선은 가라앉지 않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최하연이 임신했어.” 조봉규의 손이 순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하연이랑 부상혁이 오래전부터 함께 있었잖아.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굳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고.” 송혜선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 정말 몰라. 이 아이는 부씨 가문 3대의 첫 번째 아이야.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저 노인네가 벌써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면, 진짜 장손이라도 태어나면 어깨가
부동건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부상혁을 따로 불렀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상혁의 태도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했다. 곧은 자세로 한쪽에 서 있었다. 부동건은 아들을 보며 얼굴 가득 기쁨을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있지 말고 앉아, 오늘은 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나 나누자.” 탁자 위에 놓인 찻주전자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부동건은 능숙하게 찻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랐다. 그의 손놀림에는 세월이 묻어나는 노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차 한 잔을 따르더니 부상혁에게 내밀었다. “올해 새로 나온 좋은 녹차다. 한 번 맛보아라.” 상혁은 잔을 들어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맑고 푸른 차빛이 잔 속에서 아른거리며 은은하게 빛났다.“괜찮은데요. 목 넘기도 부드럽고 여운이 깊네요. 좋은 차네요.” 상혁은 짧게 평가한 뒤 잔을 내려놓았다. 부동건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따가 비서한테 네 쪽에 하나 보내라고 말해 놓으마.” “그럼 감사하죠 아버지.” 상혁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객관적이고 정중했지만 정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하지만 부동건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두 부자는 단둘이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만나더라도 주로 업무 이야기에 그쳤고, 오늘처럼 함께 차를 마시며 앉아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드물었다. 그런 만큼 부동건은 자연스레 감회가 밀려왔다. “네가 DL그룹을 처음 맡았던 때가 떠오르는구나. 그땐 겨우 열여덟 살이었지.” 부동건의 눈빛은 어느새 회상에 젖어 있었다. “그 당시 넌 너무 젊고 패기만 넘쳐 보여서 내가 네가 이 자리를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단 몇 년 만에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성과를 냈지.”“심지어 중간에 DL그룹을 내려놓고 너만의 회사를 설립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 고집스러운 DL그룹 원로 이사들조차 너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니 말이다.” 부동건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뛰어난 아들이
상혁은 부동건의 말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한 태도였다. 바로 그때, 상혁의 핸드폰에 하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출발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뭐 하고 있어요?] 그는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회사에 있어.] [아직도 안 끝났어요?] 하연이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가 따라붙었는데, 살짝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상혁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두드렸다. [곧 끝나 조금 있다가 보자.] [넹, 부 대표님.]하연은 말 잘 듣는 학생이 선생님한테 보내듯 답장을 보내왔다. 상혁의 눈빛에는 어느새 부드러움이 가득해졌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버지, 그럼 하고 싶은 말씀이 더 남으셨으면 그건 남준이한테나 들려주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상혁의 단호한 태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고, 부동건에게 체면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상혁아, 나는 진심에서 하는 말인데...” 부동건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긴 한숨만 내쉬면서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과 풀리지 않는 걱정이 어른거렸다. 상혁이 복도로 나오자, 그곳에서 원신민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원신민은 상혁이 나오자마자 바삐 뒤따랐다. “대표님, 교도소 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고경수가 새로운 증거를 대량으로 제출했는데, 정규인을 철저히 몰아넣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상혁은 담담히 대꾸했다. “고나희의 죽음은 고경수에게 가장 큰 상처였어. 이번엔 그저 이자 정도를 챙기는 셈이야. 결국 개싸움일 뿐이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원신민이 이어 말했다. “정규인은 이미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검찰 쪽에서 증거를 고정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말로는 내년 초쯤 재판이 열릴 예정이며, 최소 20년형 이상은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경제 범죄는 보통 다른 사건보다 형량이 무겁다. 게다가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