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세면대에 몸을 숙이고 거의 속이 텅 빌 정도로 구토를 쏟아냈다. 상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손으로 하연의 등을 토닥이며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하연아, 좀 괜찮아졌어?” 물을 마시고 난 후 하연의 속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괜찮아요.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하민은 여전히 걱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뭘 잘못 먹은 건가? 의사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빨리 좀 오라고 해!” 곧바로 따라온 아름은 하연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하연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 씨, 혹시 이런 증상 얼마나 됐어요?” 하연은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한 이틀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름은 하연의 손을 잡고 조용히 귀에 대고 물었다. “그럼 혹시... 그날이 언제였어요?” “그날?” 하연은 한참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은 듯 대답했다. “이번 달엔 안 온 것 같아요.” 그녀는 평소 생리 주기가 정확했지만 이번 달은 이미 반달이나 늦어진 상태였다. 하연은 뭔가 어렴풋이 깨달은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난달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아름은 마음속에서 이미 거의 확신을 얻었다. “그럼 잘 생각해 봐요. 구토 말고도 다른 증상이 있었는지? 몸이 평소보다 나른하거나 잠이 많이 온다든가? 이런 증상이요.” 이 말에 하연은 순간 멍하니 얼어붙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편, 상혁은 하연과 아름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하연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아름은 미소를 띠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눈에는 환한 빛이 가득했다. “하연이는 괜찮아요.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죠.” “축하? 대체 무슨 말이야?” 하민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름은 손으로 하민의 어깨를
아름의 얼굴이 붉어졌고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자연스럽게 있다 보면 천천히 순리대로 생기는 거죠...” 하민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 천천히 순리대로.” ... 조진숙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기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손에 잔뜩 임산부에게 좋은 보양식을 들고 찾아왔다.“하연아, 이건 다 몸에 좋은 거야. 집에 있는 이모님한테 부탁해서 꼭 챙겨 먹어. 입덧이 심하면 여기 신선초나 도라지를 좀 먹어봐. 입덧을 가라앉히는 데 좋아서 훨씬 편해질 거야.”조진숙은 일일이 꼼꼼하게 챙겨주며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지금 임신 초기에는 네 몸이 제일 중요하단다.” 조진숙은 하연의 손을 꼭 잡으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임신 초기 3개월은 아직 불안정하니 충분히 쉬어야 해. 일은 밑에 사람들에게 맡겨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하연은 조진숙의 어깨에 기대며 친근하게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난 그냥 지금이 너무 행복할 뿐이야. 곧 설이고 올해는 너희 둘 다 내 곁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 같구나.” 조진숙의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곧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감정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혼식 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 약혼식이 끝나면 바로 결혼식 준비를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에 대해 하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도 돼요.” 하지만 조진숙은 단호했다. 부모로서 자녀들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둘을 존중하고 응원하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 세상의 편견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명문가 출신의 여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했다. 조진숙은 하연이 이런 세상의 편견이나 험담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 딸.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결혼식은 꼭 성대하고 아름답게 치를 거다.” 조진숙은
송혜선의 마음속 질투심은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송혜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이토록 기뻐하는 상황에서, 만약 하연의 뱃속에서 정말로 부씨 가문의 장손이 태어난다면, 자신과 부남준의 위치는 크게 흔들릴 것임을. 그녀는 부드럽게 설득하려 했다. “회장님, 보양식 같은 건 하연이 쪽에서도 충분히 알아서 준비를 했을 거예요. 우리까지 굳이 하연이 보양식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부동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그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 “당신 말은 내가 괜히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거야?” 송혜선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회장님,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은 이미 인내심을 잃은 듯 보였다. “그만해! 이 집에서 당신이 나를 가르칠 위치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줬더니 본인의 위치를 잊은 모양이군.”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몸조리나 잘하고 있어. 다른 일들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 말을 끝낸 그는 소매를 휘날리며 방을 나갔고, 송혜선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다. 부동건이 나가자, 조봉규가 시중드는 가정부를 물리고 송혜선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때에 왜 괜히 회장님 심기를 건드리는 거야.” 송혜선은 가라앉지 않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최하연이 임신했어.” 조봉규의 손이 순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하연이랑 부상혁이 오래전부터 함께 있었잖아.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굳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고.” 송혜선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 정말 몰라. 이 아이는 부씨 가문 3대의 첫 번째 아이야.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저 노인네가 벌써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면, 진짜 장손이라도 태어나면 어깨가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
송혜선의 마음속 질투심은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송혜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이토록 기뻐하는 상황에서, 만약 하연의 뱃속에서 정말로 부씨 가문의 장손이 태어난다면, 자신과 부남준의 위치는 크게 흔들릴 것임을. 그녀는 부드럽게 설득하려 했다. “회장님, 보양식 같은 건 하연이 쪽에서도 충분히 알아서 준비를 했을 거예요. 우리까지 굳이 하연이 보양식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부동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그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 “당신 말은 내가 괜히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거야?” 송혜선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회장님,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은 이미 인내심을 잃은 듯 보였다. “그만해! 이 집에서 당신이 나를 가르칠 위치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줬더니 본인의 위치를 잊은 모양이군.”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몸조리나 잘하고 있어. 다른 일들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 말을 끝낸 그는 소매를 휘날리며 방을 나갔고, 송혜선에게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다. 부동건이 나가자, 조봉규가 시중드는 가정부를 물리고 송혜선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때에 왜 괜히 회장님 심기를 건드리는 거야.” 송혜선은 가라앉지 않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최하연이 임신했어.” 조봉규의 손이 순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하연이랑 부상혁이 오래전부터 함께 있었잖아.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굳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고.” 송혜선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 정말 몰라. 이 아이는 부씨 가문 3대의 첫 번째 아이야.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저 노인네가 벌써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면, 진짜 장손이라도 태어나면 어깨가
아름의 얼굴이 붉어졌고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자연스럽게 있다 보면 천천히 순리대로 생기는 거죠...” 하민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 천천히 순리대로.” ... 조진숙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기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손에 잔뜩 임산부에게 좋은 보양식을 들고 찾아왔다.“하연아, 이건 다 몸에 좋은 거야. 집에 있는 이모님한테 부탁해서 꼭 챙겨 먹어. 입덧이 심하면 여기 신선초나 도라지를 좀 먹어봐. 입덧을 가라앉히는 데 좋아서 훨씬 편해질 거야.”조진숙은 일일이 꼼꼼하게 챙겨주며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지금 임신 초기에는 네 몸이 제일 중요하단다.” 조진숙은 하연의 손을 꼭 잡으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임신 초기 3개월은 아직 불안정하니 충분히 쉬어야 해. 일은 밑에 사람들에게 맡겨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하연은 조진숙의 어깨에 기대며 친근하게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난 그냥 지금이 너무 행복할 뿐이야. 곧 설이고 올해는 너희 둘 다 내 곁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 같구나.” 조진숙의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곧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감정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혼식 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 약혼식이 끝나면 바로 결혼식 준비를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에 대해 하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도 돼요.” 하지만 조진숙은 단호했다. 부모로서 자녀들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둘을 존중하고 응원하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 세상의 편견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명문가 출신의 여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했다. 조진숙은 하연이 이런 세상의 편견이나 험담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 딸.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결혼식은 꼭 성대하고 아름답게 치를 거다.” 조진숙은
하연은 세면대에 몸을 숙이고 거의 속이 텅 빌 정도로 구토를 쏟아냈다. 상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손으로 하연의 등을 토닥이며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하연아, 좀 괜찮아졌어?” 물을 마시고 난 후 하연의 속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괜찮아요.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하민은 여전히 걱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뭘 잘못 먹은 건가? 의사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빨리 좀 오라고 해!” 곧바로 따라온 아름은 하연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하연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 씨, 혹시 이런 증상 얼마나 됐어요?” 하연은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한 이틀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름은 하연의 손을 잡고 조용히 귀에 대고 물었다. “그럼 혹시... 그날이 언제였어요?” “그날?” 하연은 한참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은 듯 대답했다. “이번 달엔 안 온 것 같아요.” 그녀는 평소 생리 주기가 정확했지만 이번 달은 이미 반달이나 늦어진 상태였다. 하연은 뭔가 어렴풋이 깨달은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난달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아름은 마음속에서 이미 거의 확신을 얻었다. “그럼 잘 생각해 봐요. 구토 말고도 다른 증상이 있었는지? 몸이 평소보다 나른하거나 잠이 많이 온다든가? 이런 증상이요.” 이 말에 하연은 순간 멍하니 얼어붙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편, 상혁은 하연과 아름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하연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아름은 미소를 띠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눈에는 환한 빛이 가득했다. “하연이는 괜찮아요.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죠.” “축하? 대체 무슨 말이야?” 하민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름은 손으로 하민의 어깨를
“나 오래 잤어요?” 하연은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는 잠깐 눈만 붙이려 했는데, 깊이 잠들어 버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많은 일을 처리하는 최 사장님께서 잠시 쉬는 건 당연한 일이죠.” 상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연은 그제야 문득 떠올랐다. “큰일 났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책상으로 가보니 모든 서류가 정리된 채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심지어 노트북에 있던 최신 보고서까지 이미 검토와 승인까지 완료된 상태였다. “당신이 다 처리했어요?” 상혁의 업무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지만, 이번에는 효율이 지나치게 빨랐다.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어...” 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그녀의 노트북을 닫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 사장님, 그럼 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하연은 기분이 매우 좋아져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 마트 가서 샤브샤브 재료 사러 가요.”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사뒀어.” 하연은 상혁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고 상혁을 바라보는 눈에서는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듯 반짝 반짝거렸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부 대표님이 준비까지 다 해 주셨으니, 이제 우리 바로 집으로 가면 되겠네요.” 오늘 밤 최씨 가문의 본가는 유난히 분주했다. 하연과 상혁이 막 도착했고, 곧이어 최하민과 예아름도 함께 들어섰다.오늘 하민과 아름은 평소와 다르게 더 행복한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하민은 한 손으로 아름의 손을 꽉 잡고, 다른 손으로는 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냈다. 하민은 단정하고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희 혼인신고 했습니다.” 최동신은 미소를 머금고 매우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실은 이미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 “축하한다. 앞으로는 더 행복하게 살 거라! 너희가 이렇게 가
[그래, 퇴근하고 바로 데리러 갈게.]상혁은 단번에 승낙했다. 영상 속의 하연은 하품을 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 며칠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요. 아마도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상혁은 그녀의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왔다. [일은 잠시 내려놓고, 조금 쉬어. 네 몸이 먼저야.] 하연은 눈꺼풀이 감길 듯 무거워지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봐요.] 상혁은 전화를 끊으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원신민이 그제야 다가섰다. “대표님, 부남준 상무님이 동남아로 떠나셨습니다.” 그 말에 상혁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고,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냉담한 기운으로 변했다. 방금 전까지 따뜻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각진 얼굴에는 감정이라곤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고, 상혁의 태도는 차분하면서도 극도로 냉철했다. 상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움직임 하나는 빠르네.” 원신민은 느껴지는 압박감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보고를 이어갔다. “듣기로는 이건 회장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부상혁은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우리 송 여사님께서 꽤 열심히 그분 귓가에 대고 속삭였나 보네.” 그의 말에는 냉소가 가득했다. “아마 회장님께서 부남준 상무님을 동남아로 보내 경험을 쌓게 하시려는 것 같아요. 거기서 정규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회사로의 복귀 가능성도 훨씬 높아질 거고요.”원신민은 계속해서 분석을 이어갔다.“동남아가 최근 몇 년간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른 곳이잖아요. 아마 그곳에서 입지를 다지고 성과를 낸다면 누가 봐도 다시 재기하기에는 정말 알짜배기인 자리인 거죠.”상혁은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말을 덧붙였다.“정규인의 자리는 동남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 중 하나야. 하지만 정규인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신임과 인맥을 남준이가 단기간에 무너뜨리긴 쉽지 않을 거야. 만약 성공한
송혜선은 자연스럽게 부동건의 품에 앉아 두 팔을 부동건의 목에 걸었다. 부동건을 깊이 바라보는 송혜선의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아직 상혁이랑 남준이가 있잖아요. 설령 힘들어지더라도, 제 뱃속에 있는 이 아이가 나중에도 회장님일을 도울 수도 있잖아요.” 부동건은 애정 어린 손길로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당신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을 가진 아이로. 오빠 둘이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 주니, 세상 물정 모르는 고운 아가씨로 살아도 괜찮잖아.” 부동건의 말에는 분명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성공적인 사업, 다정한 아내, 그리고 완벽한 자녀 구성... 그는 모든 것을 바랐다. 하지만 말을 하며 부동건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조진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때 그와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던 조진숙의 모습이 문득 스쳤다. 젊은 시절의 조진숙은 첫 아이를 낳고 모든 애정을 상혁에게 쏟아부었다. 그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린 상혁이 하나면 충분해요. 이 아이에게 모든 사랑과 힘을 쏟아 주고, 이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책임져 줍시다.” 부동건은 조진숙의 뜻에 따라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래, 상혁이만 있으면 돼.” 그 약속은 그 당시엔 진심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진심이었지만, 진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변화무쌍한 법이다.그 후 송혜선이 나타났고, 부동건은 실수를 저질렀으며, 부남준이 태어났다.모든 것이 원래의 궤도에서 어긋나기 시작했고, 그 시절 부동건이 조진숙에게 했던 약속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한없이 어리석고 덧없어 보였다.부동건의 얼굴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곧 말끝을 바꿨다. “아이만 무사히 태어날 수만 있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나는 다 좋아.” 마침 그때, 그의 손바닥에 가벼운 태동이 느껴지면서 감동한 듯 중얼거렸다. “이 작은 녀석이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는 모양이네!” 그 따뜻한 순간이 부동건의 마음에 남아 있던 어둠을 조금은 씻어 주
황연지가 떠난 후, 정지철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부남준을 바라보았다. 정지철도 현재 상황이 부남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즉, 작은 실수라도 있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정지철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정규인 쪽에 문제가 생긴 이상, 그쪽 사람들이 변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잖아. 지금 당장 동남아 쪽은 누군가 가서 수습해야 해. 남준아, 네가 직접 가보는 게 어떻겠니?”이 제안은 남준이 이미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그쪽 사람들을 잘 다독이고, 그 지역 사업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정규인이 돌아오지 않아도 큰 틀에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정지철은 남준의 말을 받으며 덧붙였다. “정규인이 그곳에서 오래 자리 잡으면서 적도 꽤 많아졌을 거야. 듣자 하니, 정규인의 부하 중에 오대식이라는 자와 과거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어쩌면 그 인물이 돌파구가 될지도 모를 거야.”그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고, 서로 말없이 합의를 이뤘다.“아버님께서 어느 정도 계획을 미리 준비를 해두신 것 같군요.” 남준은 정지철의 계획에 신뢰를 표했지만, 여전히 고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제가 직위 해제된 상태라 공개적으로 그곳에 가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눈빛을 깊게 드리우며 복잡한 상황을 곰곰이 생각했다. “게다가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사회 쪽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더 큰 손실입니다.” 이사회가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변수가 생긴다면, 남준이 그간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될 수 있었다. 정지철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이사회는 걱정하지 마. 이미 절반 이상의 이사들을 내 손 안에 두고 있으니, 자네가 자리에 없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 내가 확실히 지킬 테니까.”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자네가 동남아로 가는 데 필요한 준비는 내가 모두 해놓을 테니, 그 부분도 신경 쓰지 말게.”남준은 정지
“부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규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원신민이 조심스레 들어오며 말했다. “대표님, 경찰서에서 오신 분들이 정 사장님과 관련된 사항을 확인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규인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뭐라고요?” 원신민은 대답하지 않고 반 발짝 물러섰다. 그 순간,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경찰들은 정규인에게 문서를 내밀며 공식적으로 말했다. “정규인 씨, 당신은 직무상 횡령 혐의로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가주시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정규인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법을 어긴 적 없는 성실한 시민입니다.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겁니다!” 그가 아무리 애써 변명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차가운 수갑이 정규인의 손목에 채워졌고, 그는 경찰들에게 연행되었다. 정규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접한 부남준은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다. “횡령된 자금은 다 채웠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의 부하가 급히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변호사를 붙였고, 정 사장님에게 뚜렷한 증거가 없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남준은 머리가 복잡 해지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방 안을 서성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규인은 남준의 여러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만약 정규인이 구속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발설한다면, 남준의 앞날도 암울해질 게 분명했다. “안 돼,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어.” 남준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질문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아직 여기에 있나?” “예, 아직 있습니다.” “사람을 붙여서 정규인의 아내와 아이를 잘 감시해. 도망가지 못하게 해.” 남준
“주 대표님, 꽤 자신만만 하신가 봐요?” 하연은 서슴없이 받아쳤다. 말 속에는 상혁을 향한 단단한 신뢰가 느껴졌다. “다만, 그 자신감이 조금 엉뚱한 데 쓰인 것 같네요.” 하연의 기세는 상대를 압도했다. 슬기는 이내 두 손을 들며 항복하듯 말했다.“최 사장님, 그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건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이미 인정했어. 내가 졌다는 걸...’‘어쩌면 처음부터 나에게 이길 가능성은 없었을지도 몰라.’‘단지 내 마음속의 미련과 집착이 나를 흔들었을 뿐이야.’‘그 집념이 오히려 나를 가로막아, 내 위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지...’“그래도, 최 사장님이 이렇게 긴장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적어도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지. 이 사랑의 경쟁에서, 부상혁은 혼자 애쓰고 있던 게 아니었어. 역시 이 남자의 인생에서 단 한 명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부상혁이 마침내 최하연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쩌면 나는 만족해야 할지도 몰라.’‘왜냐하면 내가 바랐던 건 단 한 가지였으니까... 바로 부상혁이 행복해지는 것.’슬기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저는 진심으로 최하연 사장님과 부상혁 대표님이 앞으로 행복하게 함께하시길 바랍니다.”창밖으로 다시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찬바람 속에서 눈발은 바람을 따라 춤을 추었다. 그렇게 추운 날씨에도, 어떤 이들의 얼굴에는 봄바람이 가득했다. 정규인은 직원 몇 명을 데리고 허락도 없이 당당하게 DL그룹에 들어섰다. 그는 거침없는 태도로 상혁의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부 대표님!!!” 정규인의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묻어났고, 심지어 문을 두드릴 생각도 없이 그대로 안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으며 얼굴은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있었고, 기품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