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선은 한 걸음 물러서며 몸이 휘청거렸고, 뒤에 있던 조봉규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상혁은 차갑게 송혜선을 내려다보며 거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집으로 돌아가 푹 쉬세요. 임신 중이시니, 남준이 일은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송혜선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떻게 샵을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그녀는 영혼 없는 시체처럼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까의 오만함과 당당함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역시 뱀을 제압하려면 급소를 정확히 찔러야 하는 법. 상혁은 송혜선의 치명적인 약점을 정확히 겨냥해 단 한 번에 그녀의 정신을 무너뜨렸다.“혜선아,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뱃속의 아이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 조봉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송혜선은 조봉규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안 돼.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우리 남준이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어.”...같은 시각, 부남준의 개인 저택. 조용한 방 안에서, 비서는 은행 이체 확인서를 남준에게 건넸다. “상무님, 지시하신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체 확인서에는 몇백억의 금액이 표시되어 있었고, 수취인의 이름은 분명히 ‘정규인’이었다. 남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고, 비서는 이내 물러났다. 넓은 방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남준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정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은 보냈어요. 조금 있다가 계좌 확인해 봐요.” 전화를 받은 정규인의 목소리에는 들뜬 기색이 가득하며 눈이 반짝이며 거의 흥분한 상태였다. [이렇게 빨리요? 상무님은 역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정규인은 며칠 동안 빚을 갚기 위해 가진 재산을 다 팔았지만, 그 금액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남준의 자금 덕분에 마침내 숨통이
전날 밤, F국에는 폭설이 내렸다. 대지는 눈으로 덮여 순백의 세상으로 변했고, 입김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얼음 결정이 되어 흩어졌다. 이른 아침에 하연이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그 바람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지만, 눈빛만큼은 반짝이며 기쁨이 가득했다. “우와, 눈이 이렇게 많이 쌓였어!” 정원에는 발목을 훌쩍 넘는 두께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하연은 장난기가 발동해, 도구를 들고 나가 작은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눈사람의 몸통은 크고 탄탄하게 머리는 몸통보다는 작고 동글동글하게 만들었다. 돌 두 개를 눈으로 사용해 깊고 생동감 있는 눈을 표현했고, 당근 하나를 얼굴 중앙에 꽃아 코로 사용해 귀엽고 장난기 넘치는 분위기를 더했다. 눈사람을 완성한 하연은 눈밭에 서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상혁에게 보냈다. [부 대표님? 어때요? 예쁘죠?] 메시지는 거의 즉시 답장이 왔다. [예쁘네. 하지만 우리 공주님만큼은 아니야.]하연은 피식 웃으며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바깥 날씨가 많이 추워요. 오늘 꼭 옷 따뜻하게 입어요.] 다시 온 메시지에 하연은 화면을 빠르게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최 사장님.] 집으로 들어오자, 하연의 얼굴이 빨갛게 얼어 있는 것을 본 최동신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날씨도 춥고 눈이 와서 길도 안 좋은데, 오늘은 회사에 가지 말고 집에서 재택근무 하는 게 어떻겠니? 문서는 정 실장한테 보내면 되는 일이고 아니면 화상으로 하던가 해서 집에서 처리해도 괜찮잖아.” 하연은 할아버지의 걱정이 느껴졌지만, 연말이 다가오며 업무가 너무 많아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연은 최동신의 팔짱을 끼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대신 오늘은 일찍 퇴근할게요. 저녁에 저랑 같이 샤브샤브 드시는 건 어떠세요?” 최동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도 정말 일
“이모님, 고마워요.” 전복죽의 맛은 담백하고 느끼하지 않았다. 하연은 숟가락으로 죽을 한 입 떠먹으며 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메스꺼움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온몸이 한결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그릇 담겨있던 전복죽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하연은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 먼저 출근할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오거라.” 많은 눈 내렸고, 도로의 상황이 좋지 않아 최동신이 계속 안전을 당부했다. 차는 눈길 탓에 속도를 낮춰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차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기사가 급히 차에서 내려 점검하더니 말했다. “최 사장님, 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아무래도 견인차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하연에게는 중요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지각을 피하기 위해 하연은 어떻게 든 회사에 가야 했기에 우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길을 걸으며 택시를 잡기 위해서 호출 앱을 켰다. 도로 옆이어서 그런지 찬 바람이 더 부는 듯했고 그 매서운 바람을 맞으니 온몸이 얼어붙을 듯 추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외투를 여미며 핸드폰으로 막 택시 호출을 하려는 순간, 하연의 눈앞에 빨간색의 눈에 띄는 BMW 미니가 앞에 멈춰섰다. 하연의 눈빛이 의아해할 때 곧 창문이 내려갔고 정교한 옆모습이 드러났다. “최 사장님, 제 차를 타고 가시죠.” 주인공은 바로 주슬기였다! 지난번 연회 이후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연은 슬기의 호의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거의 반사적으로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주 대표님. 제가 이미 택시 호출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연이 호출했음에도 택시는 한참이 지나도 잡히지 않았다. 슬기는 이미 이 상황을 예측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고, 하연 앞까지 걸어와 차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눈 오는 날엔 택시 잡기 힘
주슬기와 부상혁은 그렇게 오랜 시간 알면서도, 부상혁이 주저 없이 ZT그룹에 직접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상혁의 방문은 슬기에게 의외였고 기쁨이었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선 슬기는 억누를 수 없는 들뜬 어조로 말했다. “상혁 씨, 무슨 일로 갑자기 날 찾아온 거예요?” 상혁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호칭 속에는 슬기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슬기의 기쁨과 달리, 상혁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입을 열었다. “주 대표님, 일단 이야기 좀 잠시 나누시죠.” 상혁이 ‘주 대표님’이라고 부른 순간, 그의 단어 선택은 슬기와의 분명한 선을 그었고, 슬기의 모든 환상을 산산이 부숴버렸다.슬기의 얼굴에 드리운 기쁨도 이내 수그러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어젯밤 연회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상혁은 서두를 생략하며 이번 방문의 목적을 명확히 했다. 슬기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당신이 그 모든 사실을 알았다는 거예요?” 그 수치스러운 말들과 소문들이 상혁의 귀에 들어갔다니, 슬기는 생각만 해도 치욕스러웠다. “세상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상혁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마치 날씨를 논하는 듯 말했다. “현재 전씨 가문의 모든 세력은 뿌리째 뽑혔습니다. 전씨 가문이 소유한 모든 프로젝트는 ZT그룹으로 이관될 겁니다.” 상혁의 방식은 언제나 빠르고, 냉혹하며 정확했다. 상대방이 숨 돌릴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의 행동은, 단 며칠 만에 오래된 전씨 가문 기업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슬기를 더욱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왜 그렇게 큰 이익을 전부 포기하고 제게 넘기겠다는 겁니까?” 상혁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냥, 주 대표님에게 진 빚을 갚는 거죠.” 슬기는 상혁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주 대표님, 꽤 자신만만 하신가 봐요?” 하연은 서슴없이 받아쳤다. 말 속에는 상혁을 향한 단단한 신뢰가 느껴졌다. “다만, 그 자신감이 조금 엉뚱한 데 쓰인 것 같네요.” 하연의 기세는 상대를 압도했다. 슬기는 이내 두 손을 들며 항복하듯 말했다.“최 사장님, 그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건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이미 인정했어. 내가 졌다는 걸...’‘어쩌면 처음부터 나에게 이길 가능성은 없었을지도 몰라.’‘단지 내 마음속의 미련과 집착이 나를 흔들었을 뿐이야.’‘그 집념이 오히려 나를 가로막아, 내 위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지...’“그래도, 최 사장님이 이렇게 긴장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적어도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지. 이 사랑의 경쟁에서, 부상혁은 혼자 애쓰고 있던 게 아니었어. 역시 이 남자의 인생에서 단 한 명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부상혁이 마침내 최하연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쩌면 나는 만족해야 할지도 몰라.’‘왜냐하면 내가 바랐던 건 단 한 가지였으니까... 바로 부상혁이 행복해지는 것.’슬기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저는 진심으로 최하연 사장님과 부상혁 대표님이 앞으로 행복하게 함께하시길 바랍니다.”창밖으로 다시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찬바람 속에서 눈발은 바람을 따라 춤을 추었다. 그렇게 추운 날씨에도, 어떤 이들의 얼굴에는 봄바람이 가득했다. 정규인은 직원 몇 명을 데리고 허락도 없이 당당하게 DL그룹에 들어섰다. 그는 거침없는 태도로 상혁의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부 대표님!!!” 정규인의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묻어났고, 심지어 문을 두드릴 생각도 없이 그대로 안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으며 얼굴은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있었고, 기품 있는
“부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규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원신민이 조심스레 들어오며 말했다. “대표님, 경찰서에서 오신 분들이 정 사장님과 관련된 사항을 확인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규인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뭐라고요?” 원신민은 대답하지 않고 반 발짝 물러섰다. 그 순간,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경찰들은 정규인에게 문서를 내밀며 공식적으로 말했다. “정규인 씨, 당신은 직무상 횡령 혐의로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가주시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정규인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법을 어긴 적 없는 성실한 시민입니다.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겁니다!” 그가 아무리 애써 변명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차가운 수갑이 정규인의 손목에 채워졌고, 그는 경찰들에게 연행되었다. 정규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접한 부남준은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다. “횡령된 자금은 다 채웠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의 부하가 급히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변호사를 붙였고, 정 사장님에게 뚜렷한 증거가 없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남준은 머리가 복잡 해지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방 안을 서성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규인은 남준의 여러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만약 정규인이 구속된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발설한다면, 남준의 앞날도 암울해질 게 분명했다. “안 돼,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어.” 남준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질문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아직 여기에 있나?” “예, 아직 있습니다.” “사람을 붙여서 정규인의 아내와 아이를 잘 감시해. 도망가지 못하게 해.” 남준
황연지가 떠난 후, 정지철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부남준을 바라보았다. 정지철도 현재 상황이 부남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즉, 작은 실수라도 있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정지철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정규인 쪽에 문제가 생긴 이상, 그쪽 사람들이 변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잖아. 지금 당장 동남아 쪽은 누군가 가서 수습해야 해. 남준아, 네가 직접 가보는 게 어떻겠니?”이 제안은 남준이 이미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그쪽 사람들을 잘 다독이고, 그 지역 사업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정규인이 돌아오지 않아도 큰 틀에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정지철은 남준의 말을 받으며 덧붙였다. “정규인이 그곳에서 오래 자리 잡으면서 적도 꽤 많아졌을 거야. 듣자 하니, 정규인의 부하 중에 오대식이라는 자와 과거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어쩌면 그 인물이 돌파구가 될지도 모를 거야.”그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고, 서로 말없이 합의를 이뤘다.“아버님께서 어느 정도 계획을 미리 준비를 해두신 것 같군요.” 남준은 정지철의 계획에 신뢰를 표했지만, 여전히 고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제가 직위 해제된 상태라 공개적으로 그곳에 가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눈빛을 깊게 드리우며 복잡한 상황을 곰곰이 생각했다. “게다가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사회 쪽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더 큰 손실입니다.” 이사회가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변수가 생긴다면, 남준이 그간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될 수 있었다. 정지철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이사회는 걱정하지 마. 이미 절반 이상의 이사들을 내 손 안에 두고 있으니, 자네가 자리에 없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 내가 확실히 지킬 테니까.”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자네가 동남아로 가는 데 필요한 준비는 내가 모두 해놓을 테니, 그 부분도 신경 쓰지 말게.”남준은 정지
송혜선은 자연스럽게 부동건의 품에 앉아 두 팔을 부동건의 목에 걸었다. 부동건을 깊이 바라보는 송혜선의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아직 상혁이랑 남준이가 있잖아요. 설령 힘들어지더라도, 제 뱃속에 있는 이 아이가 나중에도 회장님일을 도울 수도 있잖아요.” 부동건은 애정 어린 손길로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당신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을 가진 아이로. 오빠 둘이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 주니, 세상 물정 모르는 고운 아가씨로 살아도 괜찮잖아.” 부동건의 말에는 분명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성공적인 사업, 다정한 아내, 그리고 완벽한 자녀 구성... 그는 모든 것을 바랐다. 하지만 말을 하며 부동건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조진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때 그와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던 조진숙의 모습이 문득 스쳤다. 젊은 시절의 조진숙은 첫 아이를 낳고 모든 애정을 상혁에게 쏟아부었다. 그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린 상혁이 하나면 충분해요. 이 아이에게 모든 사랑과 힘을 쏟아 주고, 이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책임져 줍시다.” 부동건은 조진숙의 뜻에 따라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래, 상혁이만 있으면 돼.” 그 약속은 그 당시엔 진심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진심이었지만, 진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변화무쌍한 법이다.그 후 송혜선이 나타났고, 부동건은 실수를 저질렀으며, 부남준이 태어났다.모든 것이 원래의 궤도에서 어긋나기 시작했고, 그 시절 부동건이 조진숙에게 했던 약속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한없이 어리석고 덧없어 보였다.부동건의 얼굴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곧 말끝을 바꿨다. “아이만 무사히 태어날 수만 있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나는 다 좋아.” 마침 그때, 그의 손바닥에 가벼운 태동이 느껴지면서 감동한 듯 중얼거렸다. “이 작은 녀석이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는 모양이네!” 그 따뜻한 순간이 부동건의 마음에 남아 있던 어둠을 조금은 씻어 주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
떠나기 전, 부동건은 마지막으로 남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비록 너를 본사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지사의 전망은 여전히 밝다. 남준아, 이 기회를 잘 살려 내가 기울인 정성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이사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떠났다. 순식간에 넓은 회의실에는 상혁과 남준 단둘만 남게 되었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준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겼네요, 형님.”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서 원래부터 누구의 것이었는지, 오늘로 분명해졌을 뿐이다.” 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대꾸했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승패는 병가상사일 뿐, 그저 순간의 결과에 불과하겠지요.” 상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동남아 시장은 기회의 땅이지. 남준아, 이 기회를 잘 활용해라. 너의 전임자였던 정규인의 사례처럼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상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참, 깜빡할 뻔했네. 정규인의 사건이 곧 재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 남준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남준은 곧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꿰뚫은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규인의 입은 아직 단단히 닫혀 있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중요한 정보는 불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지만...” “하지만 뭐 말입니까?” 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형님, 말씀은 끝까지 하셔야죠.” 상혁은 몇 걸음을 걸어 남준의 바로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고경수는 제법 많은 걸 실토했다고 하던데. 정규인은 거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거야. 게다가 정규인의 아내가 뭔가 중요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하고... 그게 네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부동건과 부남준의 대립을 본 이사회 임원들은 공기의 분위기를 읽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부동건의 목소리가 임원들을 붙잡았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분들입니다.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동건의 한 마디에, 임원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동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깊은 회한과 슬픔을 내비쳤다. 부씨 가문 형제가 서로 다투는 모습은 부동건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김에, 오늘 여러분께 제 마음속에 있는 말 몇 마디 전하고자 합니다.” “회장님,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우리는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장 이사가 먼저 나서서 지지를 표명하자, 다른 이사들도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DL그룹이 누구에게 넘어가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것입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사회의 임원들은 이제 그의 뜻과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한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동건은 주석 자리에 앉아, 깊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항상 두 형제가 화합하고 협력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부동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이내 시선을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상혁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냉담한 태도를 풍기고 있었다. “동남아 시장에서 남준이가 해낸 일은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킨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남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진수용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정지철의 허위 비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형님의 결백이 밝혀진 셈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사회에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DL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후계자를 확정하는 것입니다.” 남준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 이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진실은 이미 밝혀졌으니, 이제 우리 모두 이 일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 이사는 고개를 돌려 이사회 임원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부상혁 대표님이 결백하다면, DL그룹의 수장을 계속 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부상혁 대표님을 계속 지지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이건 부동건 회장님께서도 바라셨을 일일 겁니다.” 지 이사 역시 곧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사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다른 이사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발언 이후, 나머지 이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맞습니다.” “저도 부상혁 대표님을 지지합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했던 왕 이사 마저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세 명의 이사가 상혁에게 지지를 보내며, 상혁과 남준 형제간의 대립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그러나 조금 전까지 남준을 지지하던 진수용과 오국정은 서로 눈을 마주친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이 두 사람도 상황이 끝났음을 깨달았다.하지만 직장에서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는 것은 큰 금기 이기때문에 진수용과 오국정은 처음부터 잘못된 편을 들었기에, 끝까지 그 길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너무도 빠르게 뒤바뀌었고, 남준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한 표는 여기 없었다. 바로 부동건의 손에 있었다. 남준은 부동건을 배제하고 네 표를 확보해 승리를 확정 지으려 했으나,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
“이럴 수는 없어...!” 정지철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뒤에 있던 의자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의자의 손잡이를 꽉 잡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계약들이 모두 가짜라는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위조된 계약서였다고?” 그의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지철은 점차 자신을 의심하며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만약 이 계약들이 위조된 것이라면? 도장이 가짜라면? 그렇다면 그의 모든 비난은 단지 무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문서 위조라는 중대한 범죄가 될 수 있을 텐데...’“아니야, 아니야.” 정지철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지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기엔 뭔가 문제가 있어.” 그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너야. 그래, 너 맞지! 이 모든 게 네가 한 짓이야.” 정지철은 무언가 깨달은 듯,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혼자서 고함을 질렀다. 그의 떨리는 손을 들어 상혁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 모든 게 네가 만든 함정이야! 내가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린 거잖아. 너야말로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이야! 이건 모두 네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계산한 일이야!” 정지철의 비난에도 상혁은 아무런 동요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혁은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했다. 정지철은 모든 걸 잃은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으며 머릿속에서 최근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어쩐지...’정지철은 이번에 이렇게 순조롭게 모든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상혁은 항상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약점을 잡히게 놔둘 리가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