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날이 좋다고 생각합니다.”조진숙이 빠르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 날짜라면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니, 두 아이를 위해 더 세심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럼 약혼식은 그날로 정합시다.”최동신이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렸다.두 집안 어른들이 뜻을 모아 약혼 날짜를 확정 지었다. 이어 두 집안은 초대할 손님 명단과 연회 준비 사항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화기애애했고, 온 집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하연은 핸드폰을 꺼내 ‘미녀4총사’ 단톡방에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설이 지난 후 다섯 번째 날 약혼식! 친구들, 모두 참석 필수야!]가장 먼저 정예나가 답장을 보냈다. [드디어 날짜가 정해졌구나! 축하해! 꼭 시간 맞춰 갈게!] 서여은도 바쁜 인터뷰를 마친 뒤 메시지를 확인하고 빠르게 응답했다. [마침 휴가라 시간 여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이어 여은이도 농담조로 덧붙였다. [축하해, 우리 하연이 좋은 사람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이제 리틀 하연이 빨리 태어나면 더 좋겠네.] [리틀 상혁도 괜찮지 않을까? 친구야, 힘내!] 모두들 장난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하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었는데, 무심코 먼발치에 앉아 있는 상혁을 슬쩍 보았다. 오늘 상혁은 맞춤 제작한 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한껏 품위가 느껴졌다.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배 위에 얹었다. ‘우리 둘... 피임한 적이 없었는데, 혹시... 이미 임신한 건 아니겠지?’ 하연은 조심스레 상상해 보았다. ‘나와 부상혁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 생각해 보니, 나쁘진 않아...’ ‘미녀4총사’ 단톡방에서는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신가흔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예나가 참지 못하고 가흔을 태그했다. [우리 가흔 디자이너님,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조봉규는 보양식을 내려놓고 다정하게 송혜선의 어깨를 주물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그깟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진짜 중요한 건 바로 DL그룹이지 안 그래?” 그 말에 송혜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봉규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남준이가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 성과도 눈에 띄고, 그룹 내에서도 꽤 인정받고 있어. 그리고 연말 이사회 때까지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라고.” 송혜선은 눈을 들어 조봉규와 시선을 맞췄다. ‘만약 남준이가 DL그룹 이사회 집행이사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깟 예물이 무슨 대수겠어? 나도 좀 더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해.’ 송혜선의 화는 조금씩 누그러졌고, 얼굴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조봉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보양식을 들고 직접 그녀의 입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남준이는 지금 정씨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고, 또 다른 이사들도 차근차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현재로서는 승산이 아주 크다는 걸 알고 있잖아.” 송혜선은 마침내 보양식을 몇 모금 들이켰고, 금세 한 그릇을 비웠다. “이제야 제대로 먹네. 지금은 몸을 보살피는 게 가장 중요해...” 송혜선은 눈을 흘기며 조봉규를 타박했다. “당신도 참, 정말 나를 걱정하는 게 맞아? 아니면 그저 뱃속에 있는 이 아이만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당신 지금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내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야.” 송혜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입에서는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그 최하연이라는 여자는 겨우 이혼녀 아니야? 그저 조진숙의 아들이 눈여겨봤으니 최씨 가문에 기를 쓰고 붙으려 하는 거겠지. 뒤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그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침실 안에 있는 둘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고, 송혜선은 비명을 질렀다. 조봉규의 손이
남준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며,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 송혜선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어머니,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가지셨군요!” 그 말에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뎌 거의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설마 남준이가 다 들은 걸까?!’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남준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버텼다. 마치 가라앉는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은 부표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남준아, 이 일은 너무 중대한 문제야. 절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사실이 부동건의 귀에 들어간다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었다. 송혜선뿐만 아니라, 남준 역시 부씨 가문에서 완전히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게 분명했다. “남준아, 방금 있었던 일은 그냥 모르는 척해 줘. 너는 부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다. 이 사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어. 내가 너의 미래를 망치게 해선 안 되잖니.” 이 순간, 송혜선의 태도는 평소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오직 현재의 지위와 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부동건과 함께하며 온갖 굴욕을 참아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 모든 노력이 이렇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는 없었다. “하! 미래요?” 남준은 비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조롱했다. ‘내가 과연 이런 것에 신경이나 쓸까?’ 송혜선은 지금 남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남준아, 나는 너의 엄마야. 절대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지금 네가 가장 중요한 건 다영이와 잘 지내면서 정씨 가문을 안정적으로 잡는 거야. 그리고 연말 이사회에서 상혁이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DL그룹을 확실히 장악해야 해...” 남준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고,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만하세요!” 송혜선은 순간 당황했다.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흔들렸고, 모든 것이 그녀의 통제 범위를 벗어
부동건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혼사를 이런 일로 자신이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최고의 산부인과 의료팀을 준비해.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병원 전체가 책임져야 할 거야.”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조진숙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이 송혜선 뱃속의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이미 그의 태도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만약... 부동건 이 사람이 송혜선 그 여자가 뒤에서 벌인 짓들을 알게 된다면? 허!’ 조진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자업자득, 스스로 망할 뿐이야.’ 하루 종일, 부동건은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조진숙은 눈치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속으로는 하연에게 미안함이 스며들었다. “하연아, 네가 너무 고생하는구나...” “이모, 무슨 말씀세요! 고생이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이모가 계시니까 저랑 상혁 씨는 언제나 든든해요.” 하연은 살짝 어리광을 부리며 조진숙의 팔짱을 끼었다. 하연은 확신에 차 있었다. 다른 것은 모두 부질없었고, 자신과 상혁의 혼사는 어떤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단단한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밖에서 뭐라든 결국 우리 사이에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굳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신경 쓰며 흔들릴 필요는 없잖아요.”하연이 웃으며 조진숙을 위로했다. “난 네가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이다.” 조진숙이 조용히 말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조진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요!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조진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뱃속의 아이만 아니라면 그 여자는 아무런 수단도 남아 있지 않아. 그런데 이 양반은 그걸 철석같이 믿고 휘둘리고 있으니. 머리는 새하얗게 새고, 판단력도 흐려져서 정작 자
동남아 지사의 책임자는 줄곧 정규인이 맡아왔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남준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치켜올리며,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지금 회장님께서 무척 바쁘셔서 그 일을 처리할 시간이 없으실 거야. 그러니 그 문서 나한테 맡겨. 나중에 내가 대신 전달해드릴게.” 조금 당황한 듯한 비서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어렸다. “그게... 아무래도 그건 좀 안될 것 같습니다.” 순간, 남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위화감을 은근히 조성하며 물었다. “왜? 나를 못 믿겠어?” 비서는 부동건 회장을 오랫동안 보좌하며 이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나름의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아닙니다, 상무님.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단지 전 이 일이 꽤 중대한 사안인지라 회장님께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회장님께서 정 그렇게 바쁘시다면, 제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남준은 부동건의 비서처럼 하찮은 인물조차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평소에 직원들에게 너무 관대했던 것 같군. 비서마저 내 말을 무시하다니.’“그래?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그럼 오래 기다리게 될 텐데...” 남준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그 속의 미세한 기류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하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남준은 대담하게 손을 휘저으며 비서의 어깨를 단숨에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퍼진 위험한 기운에 비서는 깜짝 놀랐고, 심지어 목소리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상... 상무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준은 냉소를 머금은 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전방을 응시한 눈빛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앞에서 꼼수를 부리던 마지막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그의 목소리는 연기처럼 가벼웠으나, 그 단어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말을 듣자마자, 비서는 다리가 풀려버렸다. 비서는 몸
이 말을 한 사람은 무역협회 회장의 딸인 전서나이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자신의 뛰어난 가문의 배경을 믿고, 언제나 타인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던 명문가 아가씨였다. 서나 곁에 있던 그녀의 추종자들이 하나둘 맞장구치며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그러게요! 정말 안타깝네요. 우리나라의 수많은 명문가 아가씨들의 이상형이 저렇게 가버리다니, 생각할수록 아깝죠!” “그러니까요, 이혼녀는 진짜 품격이 떨어지죠!” 명문가의 아가씨 몇 명이 웃음을 터뜨리며 모여 있었고, 그 사람들의 조롱 섞인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공기를 가르며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히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상황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서나가 누군가에게 의해 머리채를 잡혀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주변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당장 서나를 놔줘!” “너, 서나가 누구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감히 손을 대는 거야!” “너 정말 이렇게 까불다가 우리 업계에서 매장당하고 싶어?” “...”소란스러운 외침이 이어졌지만, 주슬기는 그 명문가 아가씨들의 헛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살짝 고개를 돌린 서나의 얼굴은 술기운에 붉게 물들어 있었고, 주슬기의 손아귀에는 갈수록 힘이 더해졌다.“뭐야? 오늘 집에서 양치질 안 하고 나왔어? 입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은데?” 서나는 당황해하며 외쳤다. “너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주슬기는 냉소를 머금으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주서나의 뺨을 향해 정확히 내리꽂았다. 짝! 고막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서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서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아악!” 서나는 비명을 질렀다. “뭐해! 너희들 가만히 있지 말고 당장 나 좀 도와줘!” 그제야 서나의 추종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
무역협회 회장 전영철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 그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보디가드이 들어섰고, 웅장한 연회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서나는 이 모습을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외쳤다. “아빠, 저를 좀 구해주세요!” 전영철의 얼굴은 단호하고 엄중했다.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멍하니 뭐 해? 당장 가서 아가씨를 빨리 구하지 않고.” 보디가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주슬기는 갑자기 몰려드는 보디가들로 인해 당황하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당신들 뭐야, 왜 이래!!” 주슬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보디가드 몇 명이 거리를 좁히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상태였던 주슬기는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아빠, 저 여자 당장 내쫓아버려요! 업계에서 저 여자를 당장 퇴출시켜버려야 해요! 우리나라 안에서 ZT그룹이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요!!” 아빠라는 뒷배가 자신의 뒤에서 버티고 있자 비굴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서나는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녀의 기세가 한층 더 당당해 보였다. 양옆으로 서 있던 보디가드들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길을 내주었다. 전영철은 압도적인 기세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주 대표님, 우리 전씨 가문이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주슬기는 술기운이 가신 듯 머리를 한 차례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에 자신은 단지 순간적인 충동에 서나에게 손을 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일이 커진 듯했다. 주슬기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태연한 척 말했다. “아니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한 거요?” 주슬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단지 전서나 씨가 허튼소리를 하는 게 거
“최 사장님.” 전영철은 자세를 낮추며, 그러나 여전히 어른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했다. “단지 사적인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인데, 왜 최 사장님께서 참견하시는 겁니까?” 하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의 원인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는 게 과연 적절한 판단일까요?” “게다가, 제가 보기엔 주 대표님이 이유 없이 난리를 피울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말이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맞아. 주 대표님은 평소에는 항상 예의 바르고 단정한 분이셔, 이런 자리에서 실수를 하실 분은 아니신데, 분명 뭔가 사정이 있을 겁니다.” “그래 맞아 우린 그저 주 대표님이 손을 댄 것만 봤을 뿐,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거잖아.”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할 리는 없는 거잖아. 이건 원인을 밝혀야 할 문제 같은데.” “...”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전영철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속으로는 이 우유부단한 사람들을 욕하고 있었다. ‘정말, 사람 마음은 갈대라 더니 바람이 부니까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 마음 하고는!’“전 회장님도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먼저 진실을 밝히고 나서 결론을 내리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하연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듣기로는 이 호텔에 전 구역 CCTV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사각지대가 없는 고화질로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툭 던지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CCTV가 있다면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니야? 그럼 모든 게 명확해질 텐데.” “요즘 CCTV 화질이 얼마나 좋은데, 금방 원인과 결과가 다 드러날 거야.” 구경꾼들의 흥미가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하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전 회장님, 이 제안, 꽤 괜찮은 것 같네요.” 전영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남준을 믿고 기다린 게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모든 걸 걸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남준 씨, 난 그냥...” “그냥 뭐요?” 다영은 고개를 저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에 떠돌던 소문들 때문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것뿐이에요.”“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남준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 있는 다영은 남준의 말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꼭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언제나 남준 씨의 편이에요. 당신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부르면 돼요. 항상 곁에 있을 거니까요.”‘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내가 도와서 얻게 해줄 거야. 그게 DL그룹이라 해도...’ 그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굳은 결심을 다졌다....새해를 맞이하는 밤.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렸고, 도시는 환희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기쁨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하연은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부터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어났어?” 상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은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시예요?” 상혁이 곧바로 답했다. “아직 일러. 11시밖에 안 됐어.” “11시?” 하연은 예상외로 늦은 시간에 살짝 놀랐다. 그 순간 상혁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조금 더 자도 돼.”그러나 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연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남준 씨, 지금 당신 날 피한 거예요?” 다영은 손에 쥔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남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마치 남이 된 것 같은 이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남준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요.” 다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차 뒤쪽을 돌아 조수석 문 앞에 섰고, 문을 열어 차에 탔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놓인 정교한 포장 상자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영은 상자를 들고서 물었다. “남준 씨, 이거... 내 선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멈추지 않고 상자를 열고 있었다.남준은 살짝 찌푸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다영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디자인된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푸른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다영은 감탄하며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한 미소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한테 걸어줄 수 있어요?”남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남아공에서 천연으로 채굴된 최고급 보석입니다. 순도와 투명도가 모두 최상급이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 높아 전 세계에 단 하나뿐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죠.’ 그때 들렸던 매장의 직원 설명이 귀에 맴돌았다.
“나... 나 술 안 취했어.” 남준은 말끝이 흐려졌고, 아까의 당당한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하연은 남준의 이상한 태도를 감지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상혁이 어느새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혼자 있는 남자의 긴 그림자가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졌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오빠...” 하연은 입을 열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상혁은 모든 상황을 이미 이해한 듯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편안한 눈빛을 주었다. 단 한 번의 눈맞춤으로 하연은 마음속에 있던 불안함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신뢰가 있었다.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바람이 차니까 빨리 들어가자.”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알았어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 맞물리고,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서로에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장면은 남준의 가슴 깊은 곳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남준은 표정만큼은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하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DS그룹 연말 행사가 있다고 해서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들렸어, 마침 형도 여기 있었네.”상혁은 하연의 손을 살며시 감싼 채 고개를 들고 남준을 바라보았다. 상혁의 눈빛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왜 이젠 DS그룹 일에도 신경이 쓰여? 모르는 사람은 보면 네가 DL그룹 버리고 DS그룹으로 옮기려는 줄 알겠어.” 남준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상혁의 말에는 은근한 경계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남준은 불리한 상황임을 깨닫고 억지로 웃으며 변명했다. “형,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분위기나 좀 보려고 들른 거야.”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이미 간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