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문이 열리자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두 명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진수용을 차에서 강제로 끌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진수용은 몸부림치며 그들의 제압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진 이사님!” 그 순간, 맞은편 차량의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면서 냉혹한 옆얼굴이 드러났다. “너는 누구야?” 진수용이 외쳤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으며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한 부를 진수용에게 던졌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진 이사님께 경고를 하나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정지철의 사람이군.” 진수용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차 안에 있는 남자도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진 이사님, 어떤 일은 충분히 생각하고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사님께서는 현명한 사람일 테니, 이걸 다 보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창문을 올렸다. 진수용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도 손을 놓았다. 잠시 후, 엔진에 시동이 걸리더니 차량은 빠르게 사라졌다. 진수용은 손에 든 서류를 급히 펼쳤다. 서류를 모두 읽은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수용 이사에게 무슨 선물을 준 겁니까?” 차 안에서,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건물을 바라보며 부남준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준은 설마 정지철이 아직도 이런 뒷수단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지철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여유 있게 대답했다. “오늘 밤 진수용의 태도를 보니, 진수용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들더구나.” 돈도, 명예도 진수용을 움직일 수 없었고, 다만... 진수용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건 오직 몇 가지 ‘보여주기 어려운 치부’뿐이었다. “이 바닥에서 수십 년을 구르다 보면, 누구든 뒤가 깨끗할 리 없지. 진수용도 자기 비밀을 완벽히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면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지.
“아빠!” 민찬이 달려들며 정규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와 친근함이 가득했다. ‘아빠’는 마치 천둥처럼 허징인의 귀에 울려 퍼졌다. 허징인은 순간 얼어붙었고,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은 어느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규인은 허리를 굽혀 열 살 난 정민찬을 품에 안고는, 이미 싸매어진 짐들을 한 번 쓱 훑어보고 냉랭하게 물었다. “아들, 아빠한테 말해봐.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민찬이는 아직 어렸지만, 주변의 긴장감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듯 조심스럽게 허징인 쪽을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귀엽게 눈을 굴리며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빠, 저번에 약속했던 변신 로봇은요?” 정규인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일 사줄게. 그런데 지금은 방에 가서 좀 쉬어. 아빠가 엄마랑 할 얘기가 있어.” 정규인은 시터에게 눈짓을 보냈고, 시터는 눈치를 챈 듯 서둘러 민찬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거대한 거실에는 허징인과 정규인 단둘만이 남았다. “이 짐들은 뭐야? 어딜 가려고?” 정규인은 허징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더불어 서늘한 칼날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손은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그저 민찬이하고 함께 잠깐 여행 가려던 것뿐이야.” “그래?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당신은 맨날 바쁘잖아. 우리 일을 언제 신경 쓴 적이나 있어? 그냥 근처로 며칠 다녀올 생각이었어.” 쾅! 정규인은 갑자기 커피 테이블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허징인, 당신 내가 바보로 보여?” 허징인은 정규인의 눈빛을 마주하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다음 순간, 정규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허징인의 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당신!! 감히 나를 배신해?!” 허징인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정규인이 허징인인에게 시신이라도 온전히 남겨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투에 담긴 살기는 허징인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을 몰고 왔다. 허징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정규인의 팔을 붙잡으며, 눈물이 끊어진 실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 돼... 당신... 우리... 우리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그래, 정말 오랜 세월이었다. 무명 시절, 가난하고 초라했던 그 시절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함께 걸어온 세월이었지.' ‘그동안, 내가 허징이라는 여자에게 부족한 건 없었다고 자부한다. 맞아, 딴 여자와 바람을 피운 적은 있다. 그건 확실히 내가 잘못한 부분이고, 내가 길을 잘못 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에서는, 난 우리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얻은 대가는 대체 무엇이었나?'정규인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허징인, 그런 말을 당신이 입에 올리다니 웃기지 않냐? 내가 벌어온 돈으로 밥 먹고 살면서, 당신!! 팔꿈치는 왜 밖으로 굽는 거야? 이게 맞는 거냐?” “알다시피, 나란 사람, 배신만큼은 절대 용납 못 한다는 거 당신도 잘 알 텐데. 하필이면 당신이 내 금기를 건드렸어.” 정규인의 말투는 점점 차가워졌고, 그의 눈은 핏발이 서며 붉어졌다. 두 손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등의 핏줄이 불쑥불쑥 드러났다.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었지만, 왜, 왜 하필 허징인 당신인 거야?’ 정규인은 무엇보다 실망했고, 분노했다. 허징인에게 화풀이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한순간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모든 업무가 바쁘게 돌아갔으니, 하연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막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정태훈의 서류 더미를 보았다. “사장님, 이 문서들 싸인 부탁드립니다.” 하연은 약간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안으로 가져와.” 태훈은 곧장 서류를 들고
“사부인, 제 생각엔 우리 빨리 날짜를 잡고, 뒤에 할 일들도 서둘러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사부인’이라는 한마디의 말이 두 집안의 관계를 단숨에 가까워지게 했다. 하미주는 그동안 송혜선에 대해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 부동건이 송혜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 부씨 가문 내에서 송혜선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격상되었기에, 하미주가 품고 있던 불만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저는 언제나 상관없습니다. 아이들만 좋다고 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송혜선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잘됐네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아는데, 며칠 내로 모셔서 다영이에게 맞춤 드레스를 준비하게 할게요.” 정다영은 부끄러운 얼굴로 부남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준 씨랑 결혼할 수만 있다면, 저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건 안 되지요. 결혼은 평생 한 번뿐인 중요한 일이니까 허투루 할 수 없죠.” 송혜선의 말은 하미주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하미주에게는 소중한 하나뿐인 딸이기에, 부씨 가문과의 혼사가 정씨 가문에 큰 이득이 되는 일이기는 했어도 딸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처음에는 송혜선이 첩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하미주였지만, 송혜선의 일 처리 방식과 단호한 태도를 보면서 하미주도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이제는 오히려 송혜선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그렇죠, 결혼은 중요한 일인 만큼 전통을 따라야죠.” 하미주는 한마디 덧붙이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하지만 다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괜찮아요. 젊은 사람들은 간소하고 실용적인 걸 선호해요. 우리도 결혼식을 간단하게 하면 돼요.” “사부인께서는 걱정 마세요. 다영이는 제가 친딸처럼 아낄 테니 절대 서운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송혜선은 예비 시어머니
정다영은 부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희 정말 잘 지낼 거예요.”...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하늘에서 가늘고 촘촘한 눈송이가 흩날리며 내렸고, 금세 땅 위에는 얇은 눈이 덮였다. “최 사장님, 눈이 오네요.” 식당 밖으로 나오자, 이 도시는 마치 새 옷을 갈아입은 듯했다. “갑작스러운 눈이라니,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워질 것 같네요.” “최 사장님, 그래도 사람 마음은 따뜻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거래처 사람의 농담 섞인 말에 하연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든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혁이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혁은 오늘 옅은 카멜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하얀색 머플러를 들고 하연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하연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하연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했다. “여기엔 왜 온 거예요?” “정 실장이 네가 여기서 고객을 만나서 일 얘기를 한다고 해서 왔지.” 거래처 사람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최 사장님, 업계에서 이미 최 사장님과 부 대표님의 좋은 소문이 돌던데, 이제 보니 사실인가 봐요.” 상혁은 하연을 단번에 품 안에 끌어안으며 강렬한 소유욕을 드러냈다. “결혼식 때 청첩장은 꼭 보내 드리겠습니다.” ... 차 안에서 하연은 문득 식당에서 부남준을 봤던 것이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방금 식당에서 누굴 봤는지 맞춰볼래요?” 상혁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은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방금 저 사람들이 나올 때 우연히 봤어.” 상혁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방금 차 안에서 부씨 가문과 정씨 가문의 어른들이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어른들이 함께 있는 걸 보니, 결혼 얘기를 나눈 모양이네요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층층이 쌓인 예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붉은 보자기로 곱게 포장된 예물 상자에는 정성껏 준비한 혼수 품목들이 담겨 있었다. 예단 비단부터 예복, 신부의 웨딩 슈즈까지, 모든 것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전통적인 결혼 떡과 한과, 그리고 혼례식에 쓰일 용과 봉황 모양의 화려한 촛대까지도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준비된 예물은 이번 약혼의 중요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붉은 보자기에 둘러싸인 예물들은 저마다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고 있었다. 약혼식을 위해 엄선된 물품들은 그 자체로 부씨 가문이 이번 혼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함 속의 장신구들은 각기 다른 빛을 발하며 고귀하고 섬세한 느낌을 자아냈고, 붉은 보자기와 청홍색 장식들이 마당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보자기를 든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저택의 뜰을 가득 메웠고, 그 모습은 마치 축복의 행렬과도 같았다. 최씨 가문의 저택 뜰을 가득 채운 예물들은 부씨 가문이 신부를 향한 진심을 담아 준비한 것이었으며, 그 정성과 재력은 이번 약혼에 대한 기대와 존중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조진숙은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을까 염려하는 듯 정중하게 물었다.“사돈 어르신,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최동신은 이 압도적인 광경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조진숙은 늘 세심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불만족스러울 만한 부분이 없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부씨 가문은 이미 충분히 성의를 보여줬으니, 더 이상 번거롭게 할 필요 없습니다.” “번거롭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진숙은 진심 어린 미소로 말했다. “우리 두 집안은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사이고, 하연이는 제가 직접 키우다시피 한 아이입니다. 하연이는 비록 제 양딸이지만, 저는 친딸과 다를 바 없이 하연이를 소중히 여기며 키웠습니다. 이제 하연과 상혁
“저도 그날이 좋다고 생각합니다.”조진숙이 빠르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 날짜라면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니, 두 아이를 위해 더 세심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럼 약혼식은 그날로 정합시다.”최동신이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렸다.두 집안 어른들이 뜻을 모아 약혼 날짜를 확정 지었다. 이어 두 집안은 초대할 손님 명단과 연회 준비 사항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화기애애했고, 온 집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하연은 핸드폰을 꺼내 ‘미녀4총사’ 단톡방에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설이 지난 후 다섯 번째 날 약혼식! 친구들, 모두 참석 필수야!]가장 먼저 정예나가 답장을 보냈다. [드디어 날짜가 정해졌구나! 축하해! 꼭 시간 맞춰 갈게!] 서여은도 바쁜 인터뷰를 마친 뒤 메시지를 확인하고 빠르게 응답했다. [마침 휴가라 시간 여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이어 여은이도 농담조로 덧붙였다. [축하해, 우리 하연이 좋은 사람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이제 리틀 하연이 빨리 태어나면 더 좋겠네.] [리틀 상혁도 괜찮지 않을까? 친구야, 힘내!] 모두들 장난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하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었는데, 무심코 먼발치에 앉아 있는 상혁을 슬쩍 보았다. 오늘 상혁은 맞춤 제작한 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단정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한껏 품위가 느껴졌다.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배 위에 얹었다. ‘우리 둘... 피임한 적이 없었는데, 혹시... 이미 임신한 건 아니겠지?’ 하연은 조심스레 상상해 보았다. ‘나와 부상혁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 생각해 보니, 나쁘진 않아...’ ‘미녀4총사’ 단톡방에서는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신가흔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예나가 참지 못하고 가흔을 태그했다. [우리 가흔 디자이너님,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조봉규는 보양식을 내려놓고 다정하게 송혜선의 어깨를 주물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그깟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진짜 중요한 건 바로 DL그룹이지 안 그래?” 그 말에 송혜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봉규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남준이가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 성과도 눈에 띄고, 그룹 내에서도 꽤 인정받고 있어. 그리고 연말 이사회 때까지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라고.” 송혜선은 눈을 들어 조봉규와 시선을 맞췄다. ‘만약 남준이가 DL그룹 이사회 집행이사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깟 예물이 무슨 대수겠어? 나도 좀 더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해.’ 송혜선의 화는 조금씩 누그러졌고, 얼굴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조봉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보양식을 들고 직접 그녀의 입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남준이는 지금 정씨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고, 또 다른 이사들도 차근차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현재로서는 승산이 아주 크다는 걸 알고 있잖아.” 송혜선은 마침내 보양식을 몇 모금 들이켰고, 금세 한 그릇을 비웠다. “이제야 제대로 먹네. 지금은 몸을 보살피는 게 가장 중요해...” 송혜선은 눈을 흘기며 조봉규를 타박했다. “당신도 참, 정말 나를 걱정하는 게 맞아? 아니면 그저 뱃속에 있는 이 아이만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당신 지금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내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야.” 송혜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입에서는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그 최하연이라는 여자는 겨우 이혼녀 아니야? 그저 조진숙의 아들이 눈여겨봤으니 최씨 가문에 기를 쓰고 붙으려 하는 거겠지. 뒤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그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침실 안에 있는 둘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고, 송혜선은 비명을 질렀다. 조봉규의 손이
하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상혁을 밀어내고, 재빨리 욕실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나, 드레스 때문에 이모랑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어제 말했잖아요.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늦는다고요!” ...F국에서 가장 비싼 상업지구에 위치한 맞춤형 웨딩숍. 조진숙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넘기며 커피를 음미하던 그녀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모!” 하연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조진숙에게 뛰어왔고, 조금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조진숙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늦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말 안 해도 돼.” 하연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뒤따라온 상혁은 아예 잊은 듯했다. 매장 직원이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여사님!” 조진숙은 하연을 보며 말했다. “하연아, 얼른 드레스 입어보고 수정할 곳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연말 전에 디자이너가 휴가를 간다고 하니 그 전에 확정해야 하잖니. 너희 약혼식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지.” 이 드레스는 조진숙이 친구를 통해 특별히 의뢰한 독점 디자이너의 하이엔드 맞춤 드레스였다.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작품이었다. 하연의 치수에 맞춰 이미 조정된 상태로 항공 배송된 것이다. 하연이 피팅룸에서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오늘 하연은 옅은 핑크빛 립스틱을 발랐고, 골드 톤의 오프숄더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섬세한 어깨와 매끈한 종아리가 드러나는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10cm의 은빛 하이힐을 신은 하연은 완벽하게 안정된 모습이었다. “어머, 하연아! 정말 너무 아름답구나!” 조진숙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상혁을 힐끔 보며 덧붙였다. “아들아, 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하연이 같은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를 얻다니, 정말 복 받았구나.”상혁은 하
상혁은 자연스럽게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귀 가까이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오래든 상관없어.” 하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부 대표님, 참을성 하나는 최고네요.” “그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지.” 상혁은 미소를 띠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하연을 향해 내밀었고, 눈앞에 화려한 붉은 장미 꽃다발이 나타났다. 하연의 눈이 반짝였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여자들은 꽃을 좋아해서, 꽃을 자주 선물해주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진다더군.” 그래서 부상혁도 한 번 두 사람의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하연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급히 꽃다발을 받아 들고 장미 향을 맡았다. 향긋한 꽃내음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이제는 인터넷으로 공부도 하시네요?” 상혁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 “네 반응을 보니, 공부한 보람이 있군.” “맞아요, 부 대표님.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해주세요.” 둘은 눈을 맞추며 미소를 나눴다. ...돌아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웠다. 하루 종일 일한 하연은 피로에 지쳐 있었고, 차 안에서 연신 하품을 했다. 상혁은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졸리면 잠깐 눈 좀 붙여. 도착하면 내가 깨워줄게.” 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잠들기 전,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나지막이 말했다. “진숙이 이모가 오후에 전화했어요. 맞춤 제작한 드레스가 항공편으로 도착했다고 하셨어요. 내일 오전에 우리 같이 보러 가요.” “그래, 알겠으니까 일단 좀 자.” 상혁의 대답을 듣고 하연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연은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더 많이 자는 듯했다. 그녀는 해가
상혁은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확고한 대답에 연지는 속으로 환호하며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고,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제가 반드시 두 배로 열심히 일해서 꼭 대표님께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상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 웃음은 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그래, 황 비서의 능력을 믿어.” 확신의 말을 듣고 연지는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곧이어 상혁이 말의 방향을 틀었다. “다만, 그전에 황 비서가 내게 작은 일을 하나 도와줬으면 좋겠어.” 말이 끝나자 연지의 얼굴에 스친 미소가 살짝 굳으며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일’이 결코 단순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만약 그녀가 이 일을 거절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넓은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으며 적막감이 감돌았다. 연지는 사무실에 겨우 15분 정도 머물렀고, 바로 서둘러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원신민이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꽃다발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상혁의 시선이 꽃다발로 향했다. 한겨울에도 장미는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햇살 아래 더욱 화사하고 매혹적으로 보였다. “대표님, 이렇게 예쁜 꽃이라면 최 사장님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응.”부상혁은 가벼운 소리로 답하며, 마치 하연이 꽃다발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냥 거기에 놔둬. 퇴근할 때 가져갈게.” “알겠습니다.” 원신민은 꽃다발을 책상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나서 문서 정리를 하며 상혁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다 방금 연지가 떠날
다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국자를 들고 국 한 그릇을 떠내어 남준에게 내밀었다. “제 음식 손맛이 어떤지 한 번 봐주세요.” 다영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몇 시간이나 끓인 거예요. 제 체면 좀 살려주세요.” 남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그냥 놔두세요. 나중에 먹을게요.” 하지만 다영은 물러서지 않았고, 남준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안 돼요. 국은 식으면 맛이 없어요.” 둘 사이에 잠시 신경전이 오갔는데, 결국 남준은 소파에 앉아 국을 받아 들었다. 그는 한 모금 떠먹으며 살짝 맛을 보았다. “어때요? 맛있죠?” 다영은 남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미소를 지었다. 둘은 매우 가까이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남준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런 일은 아줌마에게 맡겨요. 다영 씨가 직접 할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한가하기도 하고 남준 씨한테 직접 해주고 싶었어요.” 다영은 남준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그리고요, 남준 씨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건 제겐 행복한 일이에요.” 남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영 씨, 나는 다영 씨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어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가로막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덮었다. 다영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은은한 꽃 향기가 풍겼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제가 결정할 일이에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남준 씨, 이건 제 선택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갈비탕을 끓이는 게 나에겐 분명 기쁨이었어.' ‘그리고 내가 남준 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뿐인 건 아니잖아.'“남준 씨,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도와줄게요. 그게... DL그룹 전체라 해도
[상무님, 저 감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정규인은 완전히 방향을 잃은 채 안절부절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가면 이번 생은 끝입니다. 상무님, 어떻게든 이번에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이 고비만 넘기게 해 주세요.]“내가 무슨 수로...!” 남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전에 경고했었잖아요. 적당히 하고 그만두라고... 내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정규인도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한 번 자극되면 멈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부상혁이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나올 줄 몰랐어요... 명백히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다른 야심 있는 자들을 철저히 제거하려는 거예요. 심지어 상무님까지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걸 보면 말이에요.”정규인은 다급히 대답하며 남준의 도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남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정 사장님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자금 부족을 메우는 게 우선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요.” 이 말에 정규인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상무님, 그 말은 저를 돕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정규인은 초조하게 말했다. [제가 돈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끌지 않았겠죠. 이미 집이며 주식이며 팔아도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밖에 없습니다. 결국 감옥으로 가라는 건가요?]그는 이를 갈며 마음속으로 부정했다. ‘안 돼. 난 감옥에 갈 순 없어.' [상무님, 잊지 마세요. 우리 둘은 같은 배를 탄 사이입니다.] 정규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남준이 이 시점에서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가면, 상무님도 혼자 깨끗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남준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지며, 그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졌다. “정 사장님, 지금 그 말은 무슨 뜻으로 하시는 거죠?”정규인은 감추고 있던 ‘비상카드’를 꺼내듯 천천히
부씨 가문 본가.부동건은 동남아시아쪽 소식을 듣고 난 뒤 서재에서 한참 동안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남준이... 이 놈의 자식, 감히 이렇게 큰일을 나한테 보고도 안하고 멋대로 처리를 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송혜선이 갓 우려낸 최고급 녹차를 들고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온몸에 분노를 두른 부동건이었다. 요 며칠 동안 컨디션을 잘 관리한 덕분에 송혜선의 안색은 한결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살짝 걱정 섞인 그녀의 물음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송혜선의 이런 부드러운 태도는 거친 감정을 진정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미 화가 극에 달한 부동건은 송혜선의 얼굴을 보자마자 더욱 불같이 타올랐다. “누가 들어오래?” 분노를 삼킨 낮은 목소리였다.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불룩한 배를 이끌며 그의 앞에 다가가 차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아주머님한테 부탁해서 회장님을 위해 우려낸 차예요. 따뜻할 때 드세요.” “나가!” 그녀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회장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탁자 위로 부동건의 손이 강하게 내려치며 큰 소리를 냈다. 그 충격에 송혜선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부동건은 냉소를 머금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던졌다. “네 훌륭한 아들이 한 짓을 직접 확인해 봐!” 송혜선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서류가 바닥에 흩어지며 떨어졌다. 부동건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움켜쥐며 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부동건의 새로운 비서는 이미 저택 아래서 부동건을 기다리고 있었고, 부동건이 내려오자 비서는 주눅 든 얼굴로 다가갔다. “회장님!” “30분 안에 모두에게 모이라고 전해. 긴급회의 할 거라고.” 그날의 폭풍은 DL그룹 전체를 강타했고, 회의는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이
원신민의 업무 처리 속도는 매우 빨랐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CCTV 자료가 상혁의 이메일로 전달되었다. 상혁은 사무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윤곽선을 가진 그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고, 어둠 속에 잠겨 표정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한쪽에 서 있던 원신민이 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 지시하신 대로 처리 완료했습니다.” 어제 모임과 관련된 인물들... 예외 없이, 모두 응당한 대가를 치렀다. 어젯밤, F국은 그야말로 피바람이 몰아치는 혼돈의 밤이었다. 밤 11시를 막 넘긴 시각, 전씨 가문 산하의 기업들이 일제히 해커들의 공격을 받았다. 내부 시스템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고위층의 기밀 자료들이 모조리 유출되었다. 단 한순간에, 전씨 가문은 상업계의 집중 표적이 되어버렸다.전영철은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서 화가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길래 전화를 하는 거야! 내일 말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 그러나 전화기 너머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큰일났습니다. 회사가 곧 망하게 생겼습니다!] 이 말에 전영철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대표님, 당장 인터넷을 확인해 보세요! 대표님 과거의 모든 비리 자료가 전부 까발려졌고, 심지어 경찰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전영철의 손은 떨리기 시작하며 마음속은 공포로 가득 찼다. 그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서둘러 전화를 끊고 웹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영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십여 년 전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일이 모두 드러난 것이다. [대표님, 경찰이 지금 대표님 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도망?’ ‘맞아! 지금 내가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어!’ 전영철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눈에는
사교 자리를 한 바퀴 돈 뒤, 하연은 약간 피로함을 느껴서 틈을 타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가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주슬기를 마주쳤다. 주슬기는 오늘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주슬기는 하연을 본 순간 자세를 약간 바로잡았다. “주 대표님, 여기 혼자 계셨군요.” 하연은 주슬기를 유심히 살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자존심 때문인지, 주슬기는 솔직한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해서 최 사장님을 피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지 않나요? 최 사장님이 정말 그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 슬기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최 사장님과 부상혁 대표님이 너무 잘 어울려서요. 솔직히 보는 게 좀 거북하더군요.”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하연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쓰시면 앞으로는 더 피곤할 텐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며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슬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마치 지금 자신이 승자라고 저한테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애초에 우리는 제대로 경쟁조차 해본 적 없으니까요.” ‘부상혁의 마음은 처음부터 최하연에게 기울어 있었어. 경쟁이라고 하기에도 웃긴 거지, 내 완패일 뿐이니까.’ “최하연 씨, 당신 정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나요?” 이번엔 주슬기가 하연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 섰고, 주슬기는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질문을 꺼냈다. “최하연 씨도 잘 알잖아요. 최하연 씨와 그 사람이 함께하면 온갖 소문이 뒤따를 거라는 걸... 그런 말들을 어떻게 막을 건데요?” ...차 안. 하연의 표정은 한껏 무거워 보였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주슬기와의 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 상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질문의 화살은 주슬기에게로 향했다. 전서나는 마치 이미 답을 확신한 듯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주슬기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다른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 사람 DL그룹의 부상혁 대표님 아니야? 오늘 여기에 있었던 거야?” 사람들 틈에서 한 남자의 길고 우아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과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부상혁이라는 남자만의 독특한 아우라였다. ‘부상혁...’ 주슬기는 입을 열려다 멈췄고, 상혁의 존재가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겼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은 듯했다. 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주 대표님, 무슨 말이라도 하셔야죠. 모두 우리를 보고 있잖아요.” 서나의 말의 그제서야 주슬기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길은 여전히 자신도 모르게 부상혁을 따라갔다. 상혁은 사람을 가로질러 하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둘은 마주 보고 미소를 주고받았고, 하연은 자연스럽게 상혁의 팔짱을 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상혁의 눈빛에는 따뜻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깊은 연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침 이 근처에서 협상할 일이 있었는데 방금 협상이 끝났거든 그래서 네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들른 거야.” 하연은 그의 말을 듣고 피식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기로는 방금 당신이 있던 곳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완전히 반대던데요. 여기가 근처라니, 그게 말이 돼요?”말하면서 그녀는 작은 손으로 상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부상혁 대표님, 당신의 속마음은 너무 뻔히 보이는걸요.” 둘의 자연스러운 연인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을 찌르듯 강렬했다. 특히나 주슬기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다. 서나도 당연히 부상혁을 알고 있었다. 부상혁은 사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과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