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남준의 약혼식은 대단히 성대했다. 정씨 가문은 이 결혼을 매우 중시했기에 준비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송혜선은 원래 약혼식에 직접 참석하려 했으나, 출발 전 넘어지는 바람에 큰 위기를 겪었다. 만약 조봉규가 곁에 없었다면 태아를 잃을 뻔했다. 부동건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서 태교나 해.” “남준이 약혼식인 큰 행사인데, 어머니로서 참석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송혜선은 억울한 듯 반박했지만, 부동건은 사적인 의도가 있는 듯 대답을 피했다. “예법은 모두 갖췄어. 집사가 경험도 풍부하니 걱정하지 마. 이 정도 일은 실수 없이 처리할 거야.” 송혜선은 분노로 인해 어지러움에 휩싸일 지경이었다. 정신을 다잡은 그녀는 조봉규에게 화를 쏟아냈다. “내가 넘어진 거, 당신이 밀어서 넘어진 거 아니야?” 조봉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급히 부인했다. “내가? 말도 안 돼! 내가 왜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해?” 송혜선은 이를 악물며 낮게 중얼거렸다. “참나! 그럼 분명히 누군가가 날 해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은 증거가 없지만 난 절대 이대로 당하지 않을 거야!”...정씨 가문에 예물을 전달하러 갔을 때, 예법은 철저히 갖춰졌지만 부씨 가문의 두 어른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지철 부부는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남준이, 네가 아무리 DL그룹 이사회에서 하위권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우리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게 아니냐?” 정다영의 어머니 하미주는 불만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남준은 얕은 미소를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곁에 있던 집사가 대신 나섰다. “사모님께서는 태교 중이시고, 부 회장님께서는 중요한 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저를 통해 예를 갖추셨습니다. 결혼식 때는 꼭 참석하시겠다고 전하셨습니다.” 하미주의 불만을 눈치챈 정다영이 바로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엄마, 남준 씨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줄지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상혁은 나가기 전, 노크하듯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남준, 축하한다. 약혼, 행복하길.” 남준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상혁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쥔 듯한 모습이었다. “형은 언제 형수님 댁으로 예물을 보내나요?” “다음 달. 약혼식도 다음 달로 잡았다. 그때 제수씨 데리고 와서 축하해줘.” 남준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네 물론 그렇게 해야죠.” 남준의 사무실에서, 정규인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수천억의 구멍을 제가 어떻게 메우라는 겁니까? 도대체 회장님께서 어디서 이런 소식을 들으신 거죠?” 남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정 사장님 주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정규인은 충격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잃었다. “제 주변에요?”...DS그룹 쪽에서는 하연은 요즘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손이현과 자주 부딪쳤다. 늘 일부러 피했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이현은 먼지를 뒤집어쓴 듯 급히 찾아왔고, 정태훈이 이현을 막아섰다. “한 상무님, 여기서 뭘 하십니까?” 이현은 급하게 들고 온 재킷을 벗어 손에 쥔 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하연을 향해 물었다. “하연 씨, 제가 들었는데, 약혼한다면서요?” 하연은 순간 멍해졌지만, 숨길 이유는 없었다. “네, 부상혁하고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현은 거의 좌절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저를 기다려주지 않은 거죠? 저도 충분히 하연 씨한테 어울 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요.” 하연은 천천히 걸어가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무얼요? 부상혁과 같은 위치에 서는 걸요?” “하지만 사랑이란 건 저울과 같잖아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버렸어요.”
“당신!!!” 정규인은 이를 악물고 상혁을 노려보았지만, 결국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표님,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합니까?” 정규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상혁은 태연하게 무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정 사장님,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상혁의 기세도 날카롭고 위압적이며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돌아서서 차가운 뒷모습을 남겼다. 오늘 정규인의 협력 논의는 완전히 결렬되었고, 수천억의 손실은 이제 발 빠르게 처리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규인의 다리가 휘청거렸고, 굵은 땀방울이 이마에서 떨어졌다. 비서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정규인은 손으로 땀을 닦아내며 상혁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이미 사람을 보내 확인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감시해. 누가 배신했는지 밝혀내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바쁜 하루를 마친 하연은 회사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익숙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자 놀란 눈빛이 잠시 스쳤다. 곧바로 미소를 띤 하연은 기쁘게 뛰어가 남자의 품에 안겼다. 상혁은 하연을 받아들이며 힘껏 안아주었다. “어쩐 일이에요?” “내 약혼녀를 데리러 왔지!” 상혁의 입에서 나온 ‘약혼녀’라는 말에 하연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오래 기다렸어요? 왜 미리 전화 안 했어요?”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고 차로 향했다. 차 안은 히터가 켜져 있어 따뜻했고, 하연은 외투를 벗으며 환히 웃으며 말했다. “하경 오빠가 말하길, 크리스마스에 아린 씨에게 청혼할 계획이라던데, 우리도 축하하러 가요.” “그래.”상혁은 짧게 대답하며 바로 동의했다. 기쁨에 휩싸인 하연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상혁의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자기야...” 갑자기 그는 하연을 품에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청혼에 아린은 순간 멍해졌다. 한참 동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서서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아린의 마음속에 어느새 깊이 자리 잡은 하경이었다. 아린의 눈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고,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좋아요. 나도 하경 씨와 결혼하고 싶어요...”그 확실한 대답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하경은 천천히 반지를 아린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자세히 보면, 평소 차분하고 냉정한 하경의 손마저 긴장으로 땀에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린을 바라보며 진중하게 약속했다. “평생 아린 씨만 사랑할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하연은 이 감동적인 청혼 영상을 ‘미녀4총사’ 단톡방에 올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우리 오빠가 이러다니! 우리 오빠가 이러다니!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야! 우리 오빠가 이렇게 로맨틱하고 다정한 사람일 줄이야!] 채팅방은 곧 들썩였다. 신가흔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최하경이 청혼을 했다니?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너희 집안 진짜 축제 분위기네.] 정예나도 장난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 맞아! 우리 집안 요즘 축제 분위기인데, 너희 둘도 얼른 이 기운 받아서 빨리 결혼들 해라.]하연이 바로 답장이 올렸다.뒤이어 다양한 반응들이 이어졌다. [최하연, 설마 네가 우리한테 결혼 압박 넣는 거야?][이 제안, 난 정중히 거절한다.] [나도.] [그리고 나도.][결혼 안 해.]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저었다. 하경의 청혼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린을 품에 안았고, 집 안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하경의 친구들은 그를 둘러싸며 떠들썩하게 축하했다. “하경아, 청혼 성공했으니 결혼식 준비는 서둘러야지.” “우린 벌써부터 축배 들 준비가 돼 있어!” 하경은 아린을 살짝 끌어안으며
하성은 갑작스럽게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연아, 네가 생각해 봐. 우리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흔이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하성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끄며, 한숨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오빠가 말은 그 때 그 사진들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하연은 전에 가흔이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그 사진이 두 사람의 이별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임이 분명했다. “사진 문제는 내가 이미 해명했어. 가흔이도 사진 때문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가흔이는 나를 진심으로 믿지 않았어.” 하성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하연은 조용히 하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빠, 의심이 되면 직접 확인해 봐야지. 이렇게 추측만 하고 있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거 잘 알잖아.” 하성은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바라보며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가흔이... 나를 피해 해외로 도망가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찾겠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성은 동생의 말투에서 뭔가 눈치챘는지 물었다. “하연아, 솔직히 말해. 너 혹시 가흔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하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빠, 연애라는 건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오해가 있으면 풀고, 시간을 들여 서로를 이해해야 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물었다. “요즘 오빠 행복했어?” 하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표정은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럼 가흔이를 찾아가요. 직접 만나서 가흔의 진심을 들어봐요.” “만약 가흔이가 여전히 나를 만나기 싫어한다면?” 하성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그럼 오빠는 더 노력해야죠. 언젠가 가흔이도 마음을 열 거예요.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래 사랑했잖아요. 그런 사
“걱정 마십시오. 저도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정지철은 말하며 얼굴에 잠시 음험한 기색을 띠었다가 이내 웃음으로 돌려놓았다. “게다가 이제 진 이사님의 지지까지 더해졌으니, 제 승산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괜히 염려했군요.” “머지않아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면, 남준이가 반드시 우리에게 든든한 보답을 할 겁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길 바랍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잔을 부딪치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이어서 술잔을 들이켰다. 한쪽에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남준은 입꼬리에 묘한 웃음을 띤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술집을 나서자, 진수용은 이미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 내 주량으로는 절대 취한 적이 없었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더 이상은 힘들어... 힘들어...” “진 이사님의 천배불취라는 명성은 우리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과음하신 것 같습니다.” 정지철은 웃으며 운전기사에게 손짓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번 실력을 겨뤄보겠습니다.” “그럼, 그럼! 꼭 한 번 다시 겨뤄야지...” 정지철은 진수용을 부축해 차에 태우며 알랑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 돌아가 푹 쉬십시오.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까요.” 차 문이 닫히고, 차량이 출발하며 먼지와 함께 멀어졌다. 남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정지철의 옆에 섰다. 그의 시선은 차가 사라지는 방향을 향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진 이사는 오늘 술도 얼마 안 마셨는데 이렇게 취하다니?” 정지철의 얼굴은 점차 굳어졌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다 늙은 여우 주제에, 내 앞에서 큰소리만 치더니.” “보아하니 진 이사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 같네요.”남준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덧붙였다.정지철은 차갑게 웃으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의 눈
차 문이 열리자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두 명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진수용을 차에서 강제로 끌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진수용은 몸부림치며 그들의 제압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진 이사님!” 그 순간, 맞은편 차량의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면서 냉혹한 옆얼굴이 드러났다. “너는 누구야?” 진수용이 외쳤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으며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한 부를 진수용에게 던졌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진 이사님께 경고를 하나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정지철의 사람이군.” 진수용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차 안에 있는 남자도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진 이사님, 어떤 일은 충분히 생각하고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사님께서는 현명한 사람일 테니, 이걸 다 보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창문을 올렸다. 진수용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도 손을 놓았다. 잠시 후, 엔진에 시동이 걸리더니 차량은 빠르게 사라졌다. 진수용은 손에 든 서류를 급히 펼쳤다. 서류를 모두 읽은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수용 이사에게 무슨 선물을 준 겁니까?” 차 안에서,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건물을 바라보며 부남준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준은 설마 정지철이 아직도 이런 뒷수단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지철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여유 있게 대답했다. “오늘 밤 진수용의 태도를 보니, 진수용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들더구나.” 돈도, 명예도 진수용을 움직일 수 없었고, 다만... 진수용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건 오직 몇 가지 ‘보여주기 어려운 치부’뿐이었다. “이 바닥에서 수십 년을 구르다 보면, 누구든 뒤가 깨끗할 리 없지. 진수용도 자기 비밀을 완벽히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면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지.
“아빠!” 민찬이 달려들며 정규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와 친근함이 가득했다. ‘아빠’는 마치 천둥처럼 허징인의 귀에 울려 퍼졌다. 허징인은 순간 얼어붙었고,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은 어느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규인은 허리를 굽혀 열 살 난 정민찬을 품에 안고는, 이미 싸매어진 짐들을 한 번 쓱 훑어보고 냉랭하게 물었다. “아들, 아빠한테 말해봐.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민찬이는 아직 어렸지만, 주변의 긴장감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듯 조심스럽게 허징인 쪽을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귀엽게 눈을 굴리며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빠, 저번에 약속했던 변신 로봇은요?” 정규인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일 사줄게. 그런데 지금은 방에 가서 좀 쉬어. 아빠가 엄마랑 할 얘기가 있어.” 정규인은 시터에게 눈짓을 보냈고, 시터는 눈치를 챈 듯 서둘러 민찬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거대한 거실에는 허징인과 정규인 단둘만이 남았다. “이 짐들은 뭐야? 어딜 가려고?” 정규인은 허징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더불어 서늘한 칼날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손은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그저 민찬이하고 함께 잠깐 여행 가려던 것뿐이야.” “그래?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당신은 맨날 바쁘잖아. 우리 일을 언제 신경 쓴 적이나 있어? 그냥 근처로 며칠 다녀올 생각이었어.” 쾅! 정규인은 갑자기 커피 테이블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허징인, 당신 내가 바보로 보여?” 허징인은 정규인의 눈빛을 마주하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다음 순간, 정규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허징인의 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당신!! 감히 나를 배신해?!” 허징인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