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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운전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부승민을 흘긋 보더니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분 사모님이 아니야? 사모님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 캡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꼼꼼히 가리고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걸 보아 아마도 연예인이겠지?’그 남자는 사모님과 사이가 아주 가까워 보였다.운전기사가 조용히 일러줬다.“도련님, 추서윤 아가씨가 나오셨습니다.”“응.”부승민이 무심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기사는 조금 헷갈렸다.“차를 스튜디오 문 앞에 갖다대.”스튜디오 문 앞에 가면 사모님이 볼 텐데?운전기사는 마음속으로 갈팡질팡하다가 부승민의 지시에 따라 차를 스튜디오 앞에 세웠다.대화 중이던 이주혁이 턱을 쳐들며 차를 가리켰다.“저분 너희 대표님 아니야?”온하랑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어느새 스튜디오 문 앞에 검은색 카이엔 한 대가 서 있었고 번호판을 보니 부승민이 자주 사용하는 차량이었다.그리고 차 앞에는 추서윤이 서 있었다.부승민이 차에서 내려 추서윤과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추서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그리고 부승민은 반대편으로 가서 추서윤에게 문을 열어주더니 매너 있게 손으로 차의 윗부분을 가려줬고 추서윤이 차에 타자 다시 돌아가 차의 뒷좌석에 앉았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리러 온 것을 보고 온하랑의 마음에는 씁쓸함이 밀려왔다.하지만 이주혁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우리 매니저가 요즘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이미 여주인공을 추서윤으로 정했대. BX 그룹 산하의 스타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한 대작이래. 특별히 진 감독님을 섭외해서 촬영한다네. 하랑이 너희 대표님은 여자 친구에게 씀씀이가 정말 크더라. 듣기로 전 MQ의 전속모델은 임리안이었다며?”온하랑은 입꼬리를 올렸고 이미 자기도 모르는 새에 소매 안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깊은 초승달 모양의 자국을 남겼다.그녀는 숨이 멎을 정도로 마음은 답답했다. 알고 보니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부승민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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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부승민은 고개를 들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온하랑을 보았다.온하랑은 불빛을 등지고 서 있어 얼굴이 어두워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승민은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복도에서 우연히 준형 오빠와 마주쳐서 여러분께 인사드리러 왔어요.”온하랑은 미소를 지은 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친구랑 식사하러 온 거야?”부승민이 물었다.“응.”강민이 웃으며 물었다.“하랑아, 요즘 뭐해?”“MQ 전속모델 계약 건을 맡고 있어요.”그러자 강민은 자신이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걸 깨닫고 당황했다.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해서 강민이 추서윤을 가리키고 웃으며 말했다.“그 전속모델이 바로 여기 있잖아?”미소를 짓고 있던 온하랑은 다가와 테이블에서 빈 컵을 들고 직접 차를 따르며 말했다.“오늘 우연히 이곳에서 만났으니 제가 술 한 잔 권하겠습니다. 다음에 식사 대접해 드릴게요. 둘째 오빠도 축하해요.”그녀는 ‘둘째 오빠’라고 또박또박 말했다.두 사람이 결혼한 뒤로 그녀는 부승민을 ‘둘째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대신 더 친밀해 보이게 그냥 ‘오빠’라고 불렀었다.온하랑은 술잔에 들어있는 차를 한꺼번에 들이켰다.“천만에.”“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온하랑은 술잔을 내려놓았다.그런데 이때 노준형이 말했다.“하랑아, 이렇게 가면 안 되지! 네 새언니도 여기 있는데 새언니한테 술 안 권해?”강민은 속으로 노준형을 욕했다.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옆에 있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노준형을 따라 부추기기 시작했다.“하랑 씨, 승민이가 직접 서윤 씨와의 계약을 성사한 건데, 서윤 씨에게 술 권하지 않아요?”“두 사람 지금 협력하고 있잖아요? 같이 한 잔 마셔요.”온하랑은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앙다물었다.그녀가 어떻게 추서윤에게 술을 권할 수 있겠는가?!“에이, 됐어.”강민이 말했다.노준형은 웃을 듯 말 듯 하면서 말했다.“왜? 하랑인 새언니가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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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그녀의 심장을 칼로 찌른 것처럼 아프게 하다니.“온하랑, 새언니에게 술을 권하는 것뿐이잖아? 그게 뭐라고 망설여?”“역시 서윤 씨가 착하다니까. 새언니한테 술 권하는 게 어떻다고?”온하랑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테이블 위의 술잔을 들고 추서윤 앞으로 건네는 제스처를 취하고 한꺼번에 들이마셨다.그리고 그녀는 술잔을 내려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끝까지 새언니라고 부르지 않네.”노준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정말 자기가 부씨 가문의 아가씨인 줄 알아. 감히 승민이 체면을 세워주지 않다니.”“BX 그룹에서 자기 자리가 있는 걸로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서윤 씨는 이제 사모님이 될 건데, 감히 저렇게 무시하다니. 승민아, 서윤 씨가 당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크흠.”강민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부승민의 얼굴을 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다들 조용히 해요.”사람들은 부승민의 언짢은 듯한 표정을 보고 그가 온하랑의 태도에 불쾌해하는 줄로 알고 더는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중에 한 명은 이 기회에 부승민과 추서윤의 환심을 사려는 듯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부 대표님, 온하랑은 십 대 때 부씨 가문에 와서 양딸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게 놔두면 안 돼요. 보세요, 지금 대표님이랑 추서윤 아가씨를 존중하지도 않잖아요. 지금 부 회장님을 믿고 저러는 건데, 대표님이 혼내시지 않으면 부 회장님에게 있는 주식도 온하랑한테 넘어갈 거예요.”“그래요? 그럼 제가 어떻게 혼내 주어야 할까요?”술잔을 흔들며 무심코 묻는 부승민의 표정이 어두워 기분을 알 수가 없었다.“그건 간단하죠. 지금 온하랑은 결혼 안 했잖아요? 아무 남자나 찾아서 결혼시키면 그 남자가 대표님께 아첨하지 않을까요?”“좋은 생각이네요.”칭찬을 들은 남자는 환하게 웃었다.부승민은 천천히 일어서더니 갑자기 남자의 무릎을 발로 찼다.방심한 그 남자는 쿵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고 고통스러웠다.사람들은 깜짝 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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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왔어?”부승민이 말했다.온하랑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곧장 계단을 올라갔다.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시선은 계단 끝에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따라갔다.일 층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부승민은 일어서서 위층으로 올라가 바로 침실로 갔다. 문을 열자 침실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만 들렸다. 온하랑은 샤워하고 있었다.부승민은 침을 삼키며 옷깃을 풀고 옷장에서 샤워 가운을 집어 들어 침실 밖에 있는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부승민은 다시 침실로 들어오자 마침 욕실에서 나오는 온하랑과 마주쳤다.그녀는 잠옷을 챙기는 것을 까먹었고 머리는 반쯤 말린 채 몸에 타월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것은 가슴부터 엉덩이까지 겨우 가리고 있었다. 온하랑의 목은 길고 아름다웠고 반질반질한 어깨는 가늘었으며 타월에 가려진 가슴은 풍만했다. 부승민은 그것들의 촉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희고 날씬한 다리는 밖으로 드러났는데 피부는 우유처럼 희고 비단처럼 매끄러워 보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온하랑은 눈을 피하고 옷방으로 가서 자기 잠옷을 꺼내며 무심한 듯 말했다.“난 오늘 손님방에서 잘 거야.”“온하랑, 그게 무슨 뜻이야?”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무 뜻도 없어. 두 사람을 만족시켜 주려는 것뿐이야.”온하랑은 조롱하듯 웃었고 그의 몸에서 살짝 풍기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부승민은 문 앞에 서서 나른하게 기대어 있었다.“내가 서윤이에게 술을 권하라고 해서 화났어?”“난 화나면 안 돼?”무심한 그의 말투에 온하랑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녀는 술을 권하라는 말 때문에 화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친구들이 추서윤을 감싸는 모습이 더 꼴 보기 싫었다.“언젠가는 서윤이를 새언니라고 불러야 할 텐데, 왜 이번 일을 그렇게까지 신경 써?”“걱정하지 마. 이혼하면 난 절대 그 불륜녀를 새언니라고 부르지 않을 테니까.”“온하랑!”부승민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날 왜 불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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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오빠 손님방에 갈 거라며? 빨리 가!”온하랑은 다급히 타월을 들고 가슴을 가렸다.고개를 들자 부승민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쳤는데, 너무 깊어서 그녀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얼어붙었다.눈앞의 잘생긴 얼굴이 서서히 다가오더니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눈을 감아도 눈앞에 빛이 가려져 어둠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키스하지 않았다.온하랑이 눈을 떠보자, 부승민은 이미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미안해. 나는 손님방으로 갈 테니까 일찍 쉬어.”그는 문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조금 전의 장면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그는 하마터면 그녀에게 키스할 뻔했다.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이제 곧 온하랑과 이혼하고 추서윤과 함께 할 건데, 어떻게 온하랑에게...그는 몸매가 좋은 온하랑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눈앞에 서 있으면 정상적인 남자인 그가 생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자신을 위로했다.부승민은 자신의 미간을 만졌다....문이 닫히는 무거운 소리가 들리자 온하랑은 몸이 굳은 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주변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자 다급히 이불을 들어 자기 몸을 가리고 침대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고 머리를 이불속에 파묻었다. 반짝이는 눈물이 눈가에서 새어 나와 이불을 적셨다.조금 전 차갑게 돌아서서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그녀의 뺨을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것 같았다.그가 조금만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면 그녀는 바로 그것에 빠져들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부승민이 그녀를 보고 추서윤에게 술을 권하라고 한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가 다가오자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기대려 했다.그녀가 받아들이려 해도 부승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는 추서윤에게 정말 충성스러웠다. 또 망신당했다. 그는 온하랑이 싸게 군다고 생각할 것이다.그것도 그런 것이, 부승민은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대한 적이 없었고 단지 있어도 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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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온하랑은 재빨리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하지만 살짝 떨리는 몸은 그녀의 기분을 완전히 드러냈다.부승민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침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온하랑은 긴장해서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갑자기 이불이 걷혀지자 몸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그녀는 놀라서 몸이 뻣뻣해졌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두 다리를 꼿꼿이 펴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나는 잠들었다, 나는 잠들었다.’‘내가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네가 깬 거 알아. 눈 뜨고 나를 봐. 그렇지 않으면 강간하고 죽여버릴 거야.”남자는 온하랑의 귓가에 대고 입김을 불며 속삭였다.온하랑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두려움에 눈을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눈을 뜰 테니까 저를 죽이지 마요. 제발 죽이지 마...”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부승민이 아니면 누구겠나?온하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겁먹은 듯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난감해 보이기도 했다.그녀는 부승민도 별장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게다가 별장의 보안이 엄격했는데 어떻게 침입자가 있겠는가?온하랑은 시선을 피하고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왜 왔어?”“밖에 번개 쳐서 네가 못 잘까 봐.”부승민도 결혼하고 난 뒤에야 밖에서는 강한 모습의 온 디렉터도 번개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았다.온하랑은 입을 앙다물고 말했다.“그것 때문에 못 자지는 않았어.”“그래? 진짜야?”“진짜야.”온하랑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그럼 나 간다?”부승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가려는 제스처를 취했다.온하랑은 온몸이 굳어 입을 뻐금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돌아누워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가든지 말든지.”등 뒤로 떠나가는 발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말 갔다.온하랑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가 시큰했다.그녀는 코를 찡긋거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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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추서윤은 고개를 들고 보더니 기뻐하며 외쳤다.“승민아!”성큼성큼 걸어오던 부승민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조심해!”온하랑은 그 목소리를 듣고 머리를 들어보니 누군가 강한 힘으로 자신을 밀치고 있음을 느꼈다.쾅.옆에 있던 선반이 바닥에 떨어지며 격렬한 소리를 냈다.온하랑은 바닥에 넘어졌고 발목에서 날카롭고 뼈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어디 다치지 않았어?”부승민은 추서윤을 안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승민아, 나 너무 놀랐어. 네가 제때 와서 나를 잡아줘서 다행이야. 아니면 난 무조건 부딪쳐서 다쳤을 거야.”추서윤은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부승민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너무 위험했어. 이 선반은 방금 너와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다행히 부 대표님이 빨랐어.”안수빈이 다가오면서 말했다.“부 대표님, 너무 감사해요.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서윤이는 무조건 다쳤을 거예요.’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온하랑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녀는 온몸이 차가워지면서 발목의 통증조차 느낄 수 없었다.부승민의 눈에는 추서윤밖에 없었다.그러나 온하랑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부승민이 추서윤에게 보이는 관심이 아니라, 조금 전 그가 자신을 밀친 것이다.그로 인해 온하랑은 위험해질 뻔했다.하지만 부승민은 그녀의 안전은 신경 쓰지 않고 추서윤만 걱정했다. 심지어 그녀더러 추서윤 대신 다치거나 죽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부승민, 그렇게 추서윤을 좋아하면서 어젯밤에는 왜 온 거야?왜 매번 상처가 거의 아물 때쯤에 다시 한번 칼로 가슴을 찌르는 거야?“하랑 씨, 괜찮아요?”주현은 조금 전 선반이 자신 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 얼어붙어 있다가 정신을 차린 후에야 카메라를 내려놓고 온하랑을 부축했다.온하랑이 발목을 움직이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복부는 수백만 마리의 개미가 갉아먹는 듯이 은은하게 아팠다.그녀는 갑자기 뭔가 잘못된 듯싶어 주현의 손을 잡고 힘겹게 말했다.“주현 씨, 부탁인데 날 병원에 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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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온하랑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그녀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자신이 병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랑아, 깨어났어? 몸은 좀 어때?”눈을 뜬 온하랑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잘생긴 부승민의 얼굴이었다.온하랑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괜찮아.”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바로 이때 온하랑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배고파? 사람을 시켜 음식을 가져오라고 할까?”“그러면 너무 느려. 나 지금 너무 배고프단 말이야. 오빠가 내려가서 사다 주면 안 돼?”온하랑이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처음 보는 온하랑의 순하고 여린 모습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가서 사 올게. 혼자서 조심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간호사를 불러. 네 멋대로 침대에서 내려오지 말고.”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부승민이 떠나자, 온하랑은 벨을 눌렀고 간호사가 금방 달려왔다.“환자분, 뭘 도와드릴까요? 혹시 몸이 불편해요?”“간호사 선생님, 제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어요.”“환자분,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무사해요. 태동이 조금 불안정한 것만 빼면요. 그리고 발을 다쳐서 며칠 동안은 가급적이면 침대에서 내려오지 마세요.”자신이 원하던 대답을 들은 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고마워요, 간호사 선생님.”“천만에요. 임신 중이라 내복약은 처방하지 않고 외용약만 처방했어요. 발목에 펴 바르고 붕대를 제때 갈아주기만 하면 돼요. 내일 퇴원할 수 있어요.”“네, 고마워요.”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이 음식을 사 들고 돌아왔다.그는 병원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해 왔다. 고기, 채소, 국물, 밥 한 그릇과 더불어 배 한 개와 우유 한 팩을 사 왔다.온하랑은 도시락을 열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아니면 오빠 먼저 돌아가. 간호사 선생님이 계시니까. 내일 퇴원할 때 데리러 오면 돼. 바쁘면 운전기사만 보내고.”“내가 같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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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위아래 층을 오르내리는 불편함을 피하고자 온하랑은 계속 이층 침실에만 있으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식사할 때도 도우미 아줌마가 음식을 방으로 가져다줬다.이때 온하랑은 급히 업무를 처리 중이었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도우미 아줌마가 음식을 가져온 줄 알고 대충 말했다.“책상 위에 올려놔요. 조금 있다 먹을게요.”“시간이 얼마 드는 것도 아닌데 일단 밥부터 먹고 일해.”부승민의 목소리에 온하랑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음식을 들고 있었다.“오빠, 퇴근했어?”“그래.”온하랑이 노트북을 닫자 부승민이 음식을 온하랑 앞 침대 테이블에 올려두고 내려가 식사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올라와서 그릇을 거둬갔다.다시 올라왔을 때 부승민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있었고 안에는 온하랑의 약들이 들어 있었다.그중에는 병원에서 금방 처방해 준 약도 있었고 전에 온하랑이 복용하던 소화제도 있었다.부승민이 약들을 일일이 꺼내 놓자, 온하랑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아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잡았다.부승민이 설명이 붙어있지 않은 하얀색 약병 두 개를 흔들었다.“이거 병원에서 처방받은 소화제 아니야? 포장이 왜 이래?”온하랑은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설명했다.“한 팩씩 들고 다니기 불편해서 내가 담아 넣은 거야. 다음 주 출장이잖아. 그래서 약병에 넣어둔 거야.”이 이유는 그나마 그럴싸해 보였고 부승민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네 발 다음 주까지 낫기 힘들 건데 만약 중요한 게 아니라면 그냥 다른 사람을 보내.”온하랑은 대답하고 슬그머니 한시름 내려놓았다.부승민이 다시 봉투 속에 다른 약들을 보다가 외용약을 꺼내며 물었다.“어제 병원에서 외용약만 처방해 주고 소염제나 지혈제 같은 내복약은 안 줬어?”온하랑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나 요즘 위장 상태가 안 좋잖아. 의사가 그런 약들은 위를 자극한다고 처방해 주지 않았어.”또 위장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는 온하랑을 보며 부승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어딘가 이상했지만 딱히 짚어 내지 못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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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될수록 돌아올게.”“서윤 씨는 무슨 일이야?”온하랑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내 부승민이 이대로 나가면 어제처럼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추서윤이 무슨 연유로 두 날 연속 그를 불러내는지 알 수 없었다.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하랑아, 너 전에는 이런 쓸데없는 질문 안 했잖아.”온하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오빠, 나 발이 너무 아파. 안 가면 안 돼?”“네 발목 상처는 별로 심하지 않잖아. 필요하면 아줌마를 불러.”부승민이 차가운 어조로 말하더니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온하랑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더없이 씁쓸했다.그녀가 겨우 자신의 강인한 겉모습을 던져버리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 줬지만 부승민은 그녀더러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고 했다.한 사람이 자신에게 아예 관심이 없을 때는 아무리 연약하게 굴어봐도 소용이 없다.두 사람은 애초에 이혼하기로 했는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할 수 있단 말인가?온하랑이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부승민이 약을 갈아줬다고 잠시 자신의 주제를 잊어버린 듯했다.그리고 또 한 번 모욕을 자초했다.온하랑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건 부승민이 그렇게 가고 나서 하룻밤이 아니라 연속 이삼일 밤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온하랑은 우울해서 침대 위에 앉아 늦은 밤까지 지루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도저히 버티기 힘들 때면 머리맡에 조명등을 켜두고 잠들었다.새벽에 깨어나 보면 옆에 시트는 깔끔했고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온하랑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한 한숨을 쉬었다.왜 이럴까?온하랑은 이미 이혼하기로 해놓고 왜 자꾸 헛된 희망을 품는지 생각했다.그녀가 온전한 마음으로 십 년을 좋아한 사람이자 그녀와 삼 년 동안 잠자리를 함께한 남편이었던 사람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았다.아마도 부승민이 온하랑에게 더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며 그녀의 사랑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려야만 헛된 희망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온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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