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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Author: 고운
“오빠 손님방에 갈 거라며? 빨리 가!”

온하랑은 다급히 타월을 들고 가슴을 가렸다.

고개를 들자 부승민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쳤는데, 너무 깊어서 그녀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온하랑은 얼어붙었다.

눈앞의 잘생긴 얼굴이 서서히 다가오더니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눈앞에 빛이 가려져 어둠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키스하지 않았다.

온하랑이 눈을 떠보자, 부승민은 이미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미안해. 나는 손님방으로 갈 테니까 일찍 쉬어.”

그는 문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조금 전의 장면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하마터면 그녀에게 키스할 뻔했다.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이제 곧 온하랑과 이혼하고 추서윤과 함께 할 건데, 어떻게 온하랑에게...

그는 몸매가 좋은 온하랑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눈앞에 서 있으면 정상적인 남자인 그가 생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부승민은 자신의 미간을 만졌다.

...

문이 닫히는 무거운 소리가 들리자 온하랑은 몸이 굳은 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자 다급히 이불을 들어 자기 몸을 가리고 침대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고 머리를 이불속에 파묻었다. 반짝이는 눈물이 눈가에서 새어 나와 이불을 적셨다.

조금 전 차갑게 돌아서서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그녀의 뺨을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가 조금만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면 그녀는 바로 그것에 빠져들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승민이 그녀를 보고 추서윤에게 술을 권하라고 한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가 다가오자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기대려 했다.

그녀가 받아들이려 해도 부승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추서윤에게 정말 충성스러웠다.

또 망신당했다. 그는 온하랑이 싸게 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그런 것이, 부승민은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대한 적이 없었고 단지 있어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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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ugnay na kabanata

  • 위태로운 제안   제26화

    온하랑은 재빨리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하지만 살짝 떨리는 몸은 그녀의 기분을 완전히 드러냈다.부승민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침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온하랑은 긴장해서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갑자기 이불이 걷혀지자 몸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그녀는 놀라서 몸이 뻣뻣해졌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두 다리를 꼿꼿이 펴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나는 잠들었다, 나는 잠들었다.’‘내가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네가 깬 거 알아. 눈 뜨고 나를 봐. 그렇지 않으면 강간하고 죽여버릴 거야.”남자는 온하랑의 귓가에 대고 입김을 불며 속삭였다.온하랑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두려움에 눈을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눈을 뜰 테니까 저를 죽이지 마요. 제발 죽이지 마...”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부승민이 아니면 누구겠나?온하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겁먹은 듯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난감해 보이기도 했다.그녀는 부승민도 별장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게다가 별장의 보안이 엄격했는데 어떻게 침입자가 있겠는가?온하랑은 시선을 피하고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왜 왔어?”“밖에 번개 쳐서 네가 못 잘까 봐.”부승민도 결혼하고 난 뒤에야 밖에서는 강한 모습의 온 디렉터도 번개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았다.온하랑은 입을 앙다물고 말했다.“그것 때문에 못 자지는 않았어.”“그래? 진짜야?”“진짜야.”온하랑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그럼 나 간다?”부승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가려는 제스처를 취했다.온하랑은 온몸이 굳어 입을 뻐금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돌아누워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가든지 말든지.”등 뒤로 떠나가는 발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말 갔다.온하랑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가 시큰했다.그녀는 코를 찡긋거렸

  • 위태로운 제안   제27화

    추서윤은 고개를 들고 보더니 기뻐하며 외쳤다.“승민아!”성큼성큼 걸어오던 부승민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조심해!”온하랑은 그 목소리를 듣고 머리를 들어보니 누군가 강한 힘으로 자신을 밀치고 있음을 느꼈다.쾅.옆에 있던 선반이 바닥에 떨어지며 격렬한 소리를 냈다.온하랑은 바닥에 넘어졌고 발목에서 날카롭고 뼈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어디 다치지 않았어?”부승민은 추서윤을 안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승민아, 나 너무 놀랐어. 네가 제때 와서 나를 잡아줘서 다행이야. 아니면 난 무조건 부딪쳐서 다쳤을 거야.”추서윤은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부승민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너무 위험했어. 이 선반은 방금 너와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다행히 부 대표님이 빨랐어.”안수빈이 다가오면서 말했다.“부 대표님, 너무 감사해요.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서윤이는 무조건 다쳤을 거예요.’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온하랑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녀는 온몸이 차가워지면서 발목의 통증조차 느낄 수 없었다.부승민의 눈에는 추서윤밖에 없었다.그러나 온하랑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부승민이 추서윤에게 보이는 관심이 아니라, 조금 전 그가 자신을 밀친 것이다.그로 인해 온하랑은 위험해질 뻔했다.하지만 부승민은 그녀의 안전은 신경 쓰지 않고 추서윤만 걱정했다. 심지어 그녀더러 추서윤 대신 다치거나 죽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부승민, 그렇게 추서윤을 좋아하면서 어젯밤에는 왜 온 거야?왜 매번 상처가 거의 아물 때쯤에 다시 한번 칼로 가슴을 찌르는 거야?“하랑 씨, 괜찮아요?”주현은 조금 전 선반이 자신 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 얼어붙어 있다가 정신을 차린 후에야 카메라를 내려놓고 온하랑을 부축했다.온하랑이 발목을 움직이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복부는 수백만 마리의 개미가 갉아먹는 듯이 은은하게 아팠다.그녀는 갑자기 뭔가 잘못된 듯싶어 주현의 손을 잡고 힘겹게 말했다.“주현 씨, 부탁인데 날 병원에 데

  • 위태로운 제안   제28화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온하랑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그녀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자신이 병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랑아, 깨어났어? 몸은 좀 어때?”눈을 뜬 온하랑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잘생긴 부승민의 얼굴이었다.온하랑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괜찮아.”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바로 이때 온하랑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배고파? 사람을 시켜 음식을 가져오라고 할까?”“그러면 너무 느려. 나 지금 너무 배고프단 말이야. 오빠가 내려가서 사다 주면 안 돼?”온하랑이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처음 보는 온하랑의 순하고 여린 모습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가서 사 올게. 혼자서 조심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간호사를 불러. 네 멋대로 침대에서 내려오지 말고.”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부승민이 떠나자, 온하랑은 벨을 눌렀고 간호사가 금방 달려왔다.“환자분, 뭘 도와드릴까요? 혹시 몸이 불편해요?”“간호사 선생님, 제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어요.”“환자분,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무사해요. 태동이 조금 불안정한 것만 빼면요. 그리고 발을 다쳐서 며칠 동안은 가급적이면 침대에서 내려오지 마세요.”자신이 원하던 대답을 들은 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고마워요, 간호사 선생님.”“천만에요. 임신 중이라 내복약은 처방하지 않고 외용약만 처방했어요. 발목에 펴 바르고 붕대를 제때 갈아주기만 하면 돼요. 내일 퇴원할 수 있어요.”“네, 고마워요.”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이 음식을 사 들고 돌아왔다.그는 병원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해 왔다. 고기, 채소, 국물, 밥 한 그릇과 더불어 배 한 개와 우유 한 팩을 사 왔다.온하랑은 도시락을 열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아니면 오빠 먼저 돌아가. 간호사 선생님이 계시니까. 내일 퇴원할 때 데리러 오면 돼. 바쁘면 운전기사만 보내고.”“내가 같이

  • 위태로운 제안   제29화

    위아래 층을 오르내리는 불편함을 피하고자 온하랑은 계속 이층 침실에만 있으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식사할 때도 도우미 아줌마가 음식을 방으로 가져다줬다.이때 온하랑은 급히 업무를 처리 중이었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도우미 아줌마가 음식을 가져온 줄 알고 대충 말했다.“책상 위에 올려놔요. 조금 있다 먹을게요.”“시간이 얼마 드는 것도 아닌데 일단 밥부터 먹고 일해.”부승민의 목소리에 온하랑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음식을 들고 있었다.“오빠, 퇴근했어?”“그래.”온하랑이 노트북을 닫자 부승민이 음식을 온하랑 앞 침대 테이블에 올려두고 내려가 식사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올라와서 그릇을 거둬갔다.다시 올라왔을 때 부승민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있었고 안에는 온하랑의 약들이 들어 있었다.그중에는 병원에서 금방 처방해 준 약도 있었고 전에 온하랑이 복용하던 소화제도 있었다.부승민이 약들을 일일이 꺼내 놓자, 온하랑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아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잡았다.부승민이 설명이 붙어있지 않은 하얀색 약병 두 개를 흔들었다.“이거 병원에서 처방받은 소화제 아니야? 포장이 왜 이래?”온하랑은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설명했다.“한 팩씩 들고 다니기 불편해서 내가 담아 넣은 거야. 다음 주 출장이잖아. 그래서 약병에 넣어둔 거야.”이 이유는 그나마 그럴싸해 보였고 부승민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네 발 다음 주까지 낫기 힘들 건데 만약 중요한 게 아니라면 그냥 다른 사람을 보내.”온하랑은 대답하고 슬그머니 한시름 내려놓았다.부승민이 다시 봉투 속에 다른 약들을 보다가 외용약을 꺼내며 물었다.“어제 병원에서 외용약만 처방해 주고 소염제나 지혈제 같은 내복약은 안 줬어?”온하랑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나 요즘 위장 상태가 안 좋잖아. 의사가 그런 약들은 위를 자극한다고 처방해 주지 않았어.”또 위장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는 온하랑을 보며 부승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어딘가 이상했지만 딱히 짚어 내지 못했다.

  • 위태로운 제안   제30화

    “될수록 돌아올게.”“서윤 씨는 무슨 일이야?”온하랑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내 부승민이 이대로 나가면 어제처럼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추서윤이 무슨 연유로 두 날 연속 그를 불러내는지 알 수 없었다.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하랑아, 너 전에는 이런 쓸데없는 질문 안 했잖아.”온하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오빠, 나 발이 너무 아파. 안 가면 안 돼?”“네 발목 상처는 별로 심하지 않잖아. 필요하면 아줌마를 불러.”부승민이 차가운 어조로 말하더니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온하랑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더없이 씁쓸했다.그녀가 겨우 자신의 강인한 겉모습을 던져버리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 줬지만 부승민은 그녀더러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고 했다.한 사람이 자신에게 아예 관심이 없을 때는 아무리 연약하게 굴어봐도 소용이 없다.두 사람은 애초에 이혼하기로 했는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할 수 있단 말인가?온하랑이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부승민이 약을 갈아줬다고 잠시 자신의 주제를 잊어버린 듯했다.그리고 또 한 번 모욕을 자초했다.온하랑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건 부승민이 그렇게 가고 나서 하룻밤이 아니라 연속 이삼일 밤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온하랑은 우울해서 침대 위에 앉아 늦은 밤까지 지루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도저히 버티기 힘들 때면 머리맡에 조명등을 켜두고 잠들었다.새벽에 깨어나 보면 옆에 시트는 깔끔했고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온하랑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한 한숨을 쉬었다.왜 이럴까?온하랑은 이미 이혼하기로 해놓고 왜 자꾸 헛된 희망을 품는지 생각했다.그녀가 온전한 마음으로 십 년을 좋아한 사람이자 그녀와 삼 년 동안 잠자리를 함께한 남편이었던 사람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았다.아마도 부승민이 온하랑에게 더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며 그녀의 사랑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려야만 헛된 희망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온하

  • 위태로운 제안   제31화

    “이게 안 심각한 거야? 어쩌다 이렇게 됐어?”“내가 요즘 운이 안 따르네, 재수가 좀 없다고 해야 하나...”온하랑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그래? 흠... 내가 요즘 며칠 쉬거든. 엄마가 아침에 절에 같이 안 갈 거냐고 하던데, 가서 스님한테 부적 한 장 써달라고 할까?”“그러면 나야 땡큐지.”온하랑은 전면 카메라로 전환하며 말했다.“음... 너 어디 살아? 네가 못 오면 내가 널 보러 가면 되겠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내가 가는 길에 사 갈게. 그럴까?”무심한 척하며 이주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는 온하랑과 어릴 적 친구였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별로 없이 지내다가 작년에야 다시 만났다. 게다가 매일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꽉 차버린 그의 일정 때문에 사적으로는 고작 몇 번 본 게 전부였다. 둘은 매번 밖에서 만나 식사하거나, 혹은 온하랑이 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다고 집에 오기도 하였다. 어쩌다 보니 그는 온하랑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어디서 사는지, 누구랑 사는지... 그녀가 부씨 집안에 입양되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이주혁이 보러 오겠다는 말에 온하랑은 거부감이 없었다. 어차피 부승민도 집에 없는데 못 올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럼. 여기는 더원 파크힐이라고, 서래동에 있는 단독주택단지야. 단지 입구에 경비가 있으니까 도착하면 나한테 문자 보내. 음... 오는 길에 여운로에 있는 그 맛집 족발이랑, DK 플라자 1층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블랙 포레스트도 사다 줘.”“야, 이... 그 둘은 완전 반대 방향이잖아...”“그럼 좀 돌아서 다녀. 어쩌다 나 보러 오는데, 그 정도도 못 해주냐?”“허허...그래, 알았어. 금방 갈게.”저편에 있는 이주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그녀가 귀엽기만 하다.이주혁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웠다.경비원이 화상통화를 걸어와 확인하고 난 후에 그를 단지 안으로 들여보냈다.온하랑은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2층에서 내려와 거

  • 위태로운 제안   제32화

    온하랑은 다시 침실로 들어와 낮잠을 청했다.오후 3시가 넘은 시각에 부승민은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뭔가 어수선한 행색이 그간 많은 일이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주방으로 직행해 물 한 잔 따라 목부터 축이다가 곁눈질로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꾸러미들을 발견하였다.“아주머니, 누가 왔다 갔어요?”도우미는 사실대로 얘기했다.“사모님 친구분께서 오늘 다녀가셨습니다.”아주머니는 뭔가 더 할말이 있는 것처럼 우물쭈물하였다.“그런데요?”“사모님이 저한테 친구 앞에서 아가씨라고 부르라고 하셨어요.”부승민은 미간을 찌푸렸다.“친구가 남자예요?”“네...”온하랑이 좋아하는 사람이었을까.미혼인 척했다는 건 그 사람이 무척 좋아서 자신이 결혼했었다는 사실이 혹여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는 걸로 그는 해석했다.물컵을 쥔 손에 힘이 약간 들어갔다. 그는 물 한 모금 더 마시고 또 물었다.“남자가 어떻던가요? 내 말은, 생김새가...”“어느 티브이에서 나오는 연예인인 것 같던데요?”요즘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아주머니는 그저 눈에 살짝 익은 정도였지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연예인이라...부승민은 그날 스튜디오 입구에서 마스크와 모자로 완벽하게 얼굴을 감춘 연예인 포스가 물씬 풍기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그 남자가 바로 하랑이가 좋아하는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더 들었다.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그는 컵을 내려놓은 뒤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온하랑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일어나기가 귀찮아 침대에서 뭉그적대고 있었다.눈앞의 천장을 보며 한참 넋이 나가 있는데, 문밖에서 나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전해져 자연스레 눈길을 문 쪽으로 향하였다. 이어 부승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가 어제 이 시간에 돌아왔다면 그녀는 아마 너무 기뻐 달려가 품에 안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오랜 기다림으로 지쳐버린 지금은 그의 모습을 보고도 마음속에 큰 파란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이 시간에 돌아왔다는 건 아

  • 위태로운 제안   제33화

    하지만 그녀는 더는 그의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이혼할 사이인데 설명을 들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어차피 그와 추서윤이 연인 사이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으니 말이다.“말해.”“내일 우리가 이혼하고 말이야. 나 일 그만두고 싶어.”그녀의 말이 떨어진 후, 침실 안에는 한동안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한참 후 부승민이 물었다.“온하랑, 확실해? 정말 일 그만두려고?”“응.”온하랑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그만두면 뭐 할 건데? MQ 브랜드 디렉터가 성에 안 차?”부승민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지 미간을 구겼다.“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하든 내 계획이야. 이혼을 합의할 때도 나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준다며. 그러면 내가 왜 출근을 해야 하는데?”부승민은 실소를 터뜨렸다.예상 밖의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부씨 일가에 온 몇 년 동안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온하랑을 매우 예뻐하셨다. 그녀에게 준 용돈만으로도 충분히 일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었지만 온하랑은 그동안 열심히 일해 왔다.그녀는 절대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가만히 누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만약 앞으로의 계획을 똑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난 네가 그만두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나 그렇게 보지 마. 할아버지가 아셨어도 이렇게 했을 거야.”“별다른 계획 없어. 그냥 그동안 너무 힘든 것 같아서 이 기회를 빌려 외국에 나가 여행하면서 좀 쉬려고. 우리가 곧 이혼하는데 내가 계속 여기에 남아있으면 할아버님 할머님 앞에서 부부인 척 연기해야 하잖아. 오빠한테도 부담이 아니야?”부승민이 눈썹을 치켜들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지금 서윤이랑 일하는 게 피곤해서 그래?”MQ는 그녀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MQ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전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왜 갑자기 포기한다는 걸까?온하랑은 어금니를 깨물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의 말을 묵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Pinakabagong kabanata

  • 위태로운 제안   제1357화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 위태로운 제안   제1356화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 위태로운 제안   제1355화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 위태로운 제안   제1354화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 위태로운 제안   제1353화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 위태로운 제안   제1352화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 위태로운 제안   제1351화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 위태로운 제안   제1350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 위태로운 제안   제1349화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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