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스 / 어게인, 비긴 / 챕터 311 - 챕터 320

어게인, 비긴의 모든 챕터: 챕터 311 - 챕터 320

712 챕터

제311화

“자? 우리 얘기 좀 할까?”곽승재의 낮고 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 두 사람은 크게 다툰 상태였다. 고은서는 더 남은 힘도 없는 상태에 곽승재에게 끌려가 한 번 더 그 짓을 해야 할 판이었다.“나 너무 피곤하고 졸려. 말 있으면 내일 해.”고은서는 차가운 음성으로 곽승재를 거절했다.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거절한 순간, 그가 당장 문을 열라고 강요하거나 협박이라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곽승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알겠어. 푹 쉬어.”대화가 끝나자 문밖은 다시 조용해졌다.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침묵에 고은서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곽승재가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게다가 그의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됐다, 어차피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다.더 이상 깊게 생각할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지쳐버린 고은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그렇게 잠이 든 고은서는 다음 날, 날이 밝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어제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아니면 너무 빨리 달린 탓인지 힘을 너무 많이 쓴 다음의 피로감이 몸에 축적되어 있었다.몸이 너무 나른했고, 움직이기도 싫었다.잠시 더 누워 있던 고은서는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짐 정리를 마친 후, 오늘 밤이나 내일 돌아갈 생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간단히 외투를 걸치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문을 열고 방을 나선 그녀는 천천히 주방으로 향했다.몇 걸음 떼지 않아 반 오픈형으로 되어있던 주방 안에 곽승재가 있는 것이 보였다.아직도 나가지 않은 건가?곽승재는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간이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전기밥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긋한 죽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곽승재는 숟가락으로 음식의 간을 보고 있었다.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사선으로 들어온 햇볕은 곽승재의 몸을 비추며 그의 수려한 얼굴 반쪽을 비추고 반쪽 얼굴에
더 보기

제312화

결국, 그 프라이팬이 모든 것을 다 짊어져 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곽승재는 또 한 번 헛기침하더니 재촉하듯 말했다.“얼른 먹어, 식기 전에.”고은서는 식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죽은 그럴싸하니 맛있는 냄새가 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숟가락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혹시 모를 정체불명의 맛에 두려움이 앞섰던 탓이다.고은서는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 묻혔다. 그녀는 곽승재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혀를 내밀어 죽을 살짝 핥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가 한눈을 판 사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너무 뜨거운 것 같아서 달걀부터 먹을게.”그래도 삶은 달걀이면 죽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맛없어봤자 그 정도가 있는 법이다.하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독 안 탔어!”말을 마친 그는 고은서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만든 죽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으로 넣었다.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고은서는 마음 놓고 껍질을 다 깐 달걀을 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죽을 몇 번 휘젓다가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 보았다.다행히 먹을만했다.물을 조금 많이 넣은 탓에 죽의 걸쭉함이 조금 부족했고, 소금도 생각보다 많이 넣은 것 같긴 했지만 다른 건 다 괜찮은 것 같았다.고은서가 계속 죽에 신경을 쓰고 있던 그때, 곽승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랑 민시후가 서로 아무 감정 없는 사이라는 건 나도 알아, 내 말은 민시후네 집이 재혼녀를 받아줄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어. 널 무시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곽승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어젯밤은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고은서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건가?왜 갑자기 이런 걸 해명하고 있지?“나랑 민시후 사이가 안 좋은 건 맞아, 하지만 민시후도 정말 쉬운 인간이 아니야.”곽승재는 달걀 껍데기를 까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난 네가 단지 내가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시후랑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 보기

제313화

고은서는 곽승재를 빤히 쳐다보았다.곽승재의 표정은 꽤 진지했고 눈빛에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곽승재는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고은서에게 먼저 자세를 낮춘 적도 없었고 사과의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고은서의 마음속에서는 이유 모를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그녀는 자신이 이제 곽승재가 어떤 말을 하든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곽승재가 진심 어린 사죄를 건네며 후회를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고은서는 여전히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마치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 주고 어루만져주길 원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그리고 성인이 다 된 지금에 와서야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들켜버린 듯한 애틋하고도 씁쓸한 감정이었다.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의 동요가 있을지 몰라도 오랜 시간 동안 치유하지 못한 상처는 이미 딱지가 않고 떨어져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아버렸다.“곽승재,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고은서가 물었다.“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곽승재가 대답했다.“난 이 결혼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우린 이미 1년 넘도록 결혼생활을 했고 나는 너한테 익숙해져 버렸어. 양가 가족들도 우리의 결혼생활을 응원해주고 있잖아. 이런 상황이라면 난 굳이 이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물론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얘기해도 좋아. 사랑 감정 같은 건, 우리가 천천히 키워가면 되는 거고.”곽승재는 미래를 얘기하며 앞으로 잘살아 보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고은서는 더 이상 그런 주제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곽승재. 이렇게 말해 줘서.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거야. 한때 나는 사랑이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었어.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사랑이라는 게 그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 놓아버리면 그만이었던 거야. 그리고 난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지금 너무 행복하거든. 드디어 나를 되
더 보기

제314화

해성으로 가는 동안 곽승재는 주민기와 함께 일 얘기만 나눴다.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곽승재는 계속 업무 처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은서와 곽승재는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자연스레 자신만의 자유시간을 얻게 된 고은서는 편하게 비행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기내식으로 나온 식사를 마친 그녀는 좌석 등받이를 내려 편히 잠을 청했다.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만난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자 고은서가 잠에서 깼다.왜인지 모르게 계속해서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멀미라도 하는 건가?하지만 고은서는 지금껏 비행기를 타며 멀미를 한 적이 없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옆 좌석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눈을 떠보자 곽승재는 그녀가 잠들기 전과 같은 자세로 서류를 들고 있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침에 금방 일어났을 때 느꼈던 피로와 무기력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다시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여기 따뜻한 물 좀 갖다 주세요.”곽승재가 승무원에게 부탁했다.곧이어 승무원이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오더니 예의 바르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손님, 여기 따뜻한 물 나왔습니다.”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승무원은 테이블에 컵을 살며시 올려놓았다.“손님, 비행기 탑승 이후로 계속 서류만 보고 계시던데 흔들리는 기내에서 서류만 보시면 눈에도 안 좋거든요. 적당한 휴식도 취하시는 걸 권장드립니다.”승무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초승달 같은 눈매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곽승재에게 물을 건네줄 때는 매끈한 곡선의 몸매도 더욱 부각되었다.고은서는 빠르게 승무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곽승재는 겉모습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남자였고, 그 특유의 냉정하고도 절제된 분위기는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예전에 많은 여자들이 협업을 빌미로 곽승재에게 접근하려 했었다는 얘기를
더 보기

제315화

고은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곽승재가 승무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곽승재가 고개를 돌려 고은서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그는 손을 뻗어 고은서의 목을 끌어안더니 차가운 눈길로 승무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날 꼬시고 싶으면, 먼저 우리 와이프 허락부터 받으시죠.”승무원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비행기 탑승 이후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던 두 사람이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례하게 해? 그냥 전화번호를 남기려고 했을 뿐인데 뭘 꼬셔…”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기침이 나올 지경으로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팔에 힘을 조금 푼 곽승재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무장님 불러오세요.”곽승재의 말에 승무원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복숭아꽃처럼 발갛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죄송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발 사무장님께는 알리지 말아주세요!”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던 승객을 건드렸던 탓일까, 그 소란은 금방 사무장을 불러들였고 상황파악을 마친 사무장은 곽승재와 고은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그녀는 두 사람에게 이 사안을 엄중히 처리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했다.“따뜻한 물 한 잔 더 갖다 주세요.”곽승재는 여전히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사무장은 곧바로 승무원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다시 그들에게 따뜻한 물을 갖고 온 승무원은 두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맛있게 드십시오, 손님.”말을 마친 승무원은 재빨리 그들에게서 거리를 두었다.곽승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승무원이 건네준 따뜻한 물을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고은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쳐다보며 말했다.“난 물 마시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고, 말투 역시 딱딱했다.“몸 안 좋다며. 물
더 보기

제316화

고은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 혼자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곽승재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밖에 운전기사 대기 시켜놨어. 같이 차 타고 가자.”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아직 8시밖에 아 됐어.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치안 안 좋은 나라도 아닌데 위험할 게 뭐가 있어?”곽승재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네가 M국에서 며칠 동안이나 날 돌봐줬는데, 이렇게 귀국하자마자 널 공항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어. 할머니께서 아시면 분명 난리 치실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할머니한테 혼나는 게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들을 힐끗거리기 시작했고, 주민기는 창피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투명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고은서 역시 이런 곳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 같이 가자, 같이 가. 하지만 난 호텔로 갈 거야.”곽승재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없이 고은서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탓에 고은서는 자신의 짐도 챙기지 못했다.“내 캐리어!”고은서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외치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짐을 챙기려 하던 그때였다. 주민기가 곧장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사모님, 짐은 제가 챙기겠습니다.”고은서는 여전히 곽승재에게 투덜거리며 말했다.“나 발 아픈데, 좀 천천히 걸어줄 수 없…”고은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집중되자 고은서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화가 났다.“곽승재,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 좀 내려줘!”하지만 곽승재는 그런 고은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잔뜩 화 난 듯한 발걸음으로 그녀를 들쳐 안고 성큼성큼 공항을 빠져나갔다.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이 강제적인 “공주 대접”을 받아들여야 했다.다행히도 두
더 보기

제317화

곽승재의 눈에는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찼다.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이준은 차를 출발시키며 눈치껏 운전석과 뒷좌석의 가림막을 올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코웃음을 흘렸다.“곽 대표님, 말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제가 언제 당신한테 신경 안 쓴 적이 있기는 해요?”곽승재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인 아내라면, 다른 여자가 남편한테 들이대로 있는데 아무 반응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친구였어도 곤란할까 봐 어떻게든 도와주겠어!”아, 역시 그 일 때문에 기분이 계속 안 좋았던 거구나.“누가 너한테 들이대는 게 싫으면 그냥 무시하고 쫓아내면 될 거 아니야!”고은서가 대답했다.“근데 넌 쫓아내긴커녕 오히려 계속 대답해줬잖아. 그러니까 그 여자도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 네가 먼저 그렇게 여지를 줘놓고 나한테 화풀이는 왜 하는 건데?”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그 눈빛에 고은서도 지지 않고 곽승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곽승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시 눈을 감았다.고은서도 더는 곽승재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그 후로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은 차를 호텔 주차장에 세웠다.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곽승재가 감았던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할머니께서 오늘 오후에 나한테 문자를 보내셨어. 내일 우리 본가로 오라고.”고은서는 M국에 있던 때에도 할머니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계속 그녀에게 귀국하는 대로 집에 들르라는 말을 하곤 했다.출가한 지 열흘이나 지났으니 할머니가 자신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일단 오늘 푹 자고 내일 바로 갈게.”곽승재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급히 차에서 내리려는 고
더 보기

제318화

고은서가 직접 식자재를 사서 요리를 한다고 해도 그곳의 식자재 자체가 고은서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아픈 사람 돌봐주려고 그 먼 곳까지 가서 그 고생을 했는데, 적어도 감동한 티라도 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또 너 바람 맞히는 거 아니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이혼 서류에 서명을 결심한 순간, 곧장 이 좋은 소식을 박지연에게 전해주었다.“그럴 일은 없을 거야.”고은서는 상추쌈을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같이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설득했는데, 내가 거절했어. 화도 안 내고 그냥 받아들이더라.”박지연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그런 사람이 여자한테 차여본 적이 있겠어? 자존심 하나 꺾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곽승재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은서는 정말 진지하게 그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은서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는 햄스터처럼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고기의 풍미와 상추의 신선한 향이 어우러지더니 이내 양념의 매운맛까지 더해져 환상적인 맛을 냈다. 고은서는 더 입을 열지 않고 그 맛에 한껏 취해있었다.맛있게 먹는 고은서의 모습에 박지연도 군침이 돌았는지 같이 고기를 몇 점 집어먹기 시작했다.“민시후 씨도 M국에 갔었다며?”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약혼녀가 자꾸 귀찮게 군다더라. 그래서 나 만나러 온다는 핑계 대면서 갔대.”박지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랑 민시후 씨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됐잖아. 평소에 네 얘기 들어보면 일 처리도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던데.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해도 되는 거야?”고은서가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일은 잘해.”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일전 서인수가 보육원에서 한 소녀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던 일을 말해주었다.“그때 민시후 씨는 서인수를 돕지 않았어. 그 대신 아름 언니한테 그 사실을 알렸지. 적어도 인성이 글러 먹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잖아.”고은서는 그의 이런 점을 보고 함께 일하기로 마음 먹
더 보기

제319화

안으로 들어선 곽승재는 고은서의 많은 물건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화장대 위에 있던 여러 스킨케어 병들이 반쯤 사라져 있었고 그녀가 자주 착용하던 머리띠와 얼굴을 비추는 이상한 램프 등 같은 것들도 전부 사라졌다.드레스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그녀의 화려한 옷들도 사라져 있었고, 신발과 가방을 보관하던 선반도 몇 칸 텅 비어 있었다.방금 느꼈던 허전하고 공허한 감정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곽승재는 M국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온종일 바쁘게 일만 했고 비행기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탓에 지금 곽승재는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베개와 이불에서는 아직도 고은서의 향이 느껴졌다.그는 M국에서 지내던 그 며칠 동안 고은서와 함께 있다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줄곧 그녀와 각방을 써왔다. 고은서가 화를 내며 먼저 귀국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곽승재 나름대로 많이 참아왔다.하지만 지금은 그 결정이 가장 후회되었다.그때 그냥 같은 방에서 잤어야 했다. 한밤중에라도 고은서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더라면, 몇 시간 동안이라도 가까이 있었을 텐데.몸은 이미 피곤함에 잔뜩 찌들었는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 곽승재는 고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음이 울린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작별 인사를 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굳이 전화해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다음 날, 잠에서 깬 고은서의 머리가 어지러웠다.어젯밤, 고깃집에서 박지연과 함께 식사하며 수다를 떨다 보니 거의 11시가 다 되어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비행기에서 너무 오랫동안 자버린 나머지 잠이 오지 않았다.그렇게 고은서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잠에서 깨 시계를 확인해보니 이미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카톡을 확인해보니 곽승재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점심에 함께 본가로 가자는 내용이었다.보낸 시간을 확인해보니 두 시간
더 보기

제320화

곽승재의 입술에 고은서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곽승재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고개를 돌린 운전기사는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급히 차 문을 열고 모습을 감춰버렸다.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고은서는 자신의 눈앞에 가까이 있는 곽승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눈썹을 찌푸렸다.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듯 나른함이 묻어 있었고, 그 목소리가 곽승재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태연하게 몸을 곧게 세우고는 말했다.“도착했어. 너 깨우려고 그런 거야.”“아, 그렇구나.”고은서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로 본가에 도착해 있었다.고은서는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기사님은 어디 가셨어?”곽승재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는 차 문을 열며 말했다.“내려.”함께 응접실로 들어선 두 사람은 그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전미자를 발견했다.고은서를 만난 전미자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얼굴이 초췌해 보인다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식사 중에도 전미자는 계속해서 고은서에게 음식을 권했지만 정작 친손자인 곽승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곽승재는 회사에 볼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고 잠에서 완전히 깬 고은서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곁을 지켰다.…육현석은 GS 그룹 대표이사실에서 곽승재를 기다리고 있었다.“형은 어쩜 이렇게 매일 바빠? 밥 한 끼 같이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안 와서 나 혼자 쓸쓸하게 배달 음식만 시켜 먹었잖아.”육현석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면서도 곽승재는 농담할 틈도 없이 바쁘다는 듯 대충 물었다.“여기까지는 왜 왔어?”“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당연히 보러 와야지.”“내가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조사 중이야, 곧 있으면 결과 나올 거야.”육현석이 궁금하다는 듯
더 보기
이전
1
...
3031323334
...
72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