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눈에는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찼다.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이준은 차를 출발시키며 눈치껏 운전석과 뒷좌석의 가림막을 올렸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코웃음을 흘렸다.“곽 대표님, 말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제가 언제 당신한테 신경 안 쓴 적이 있기는 해요?”곽승재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인 아내라면, 다른 여자가 남편한테 들이대로 있는데 아무 반응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친구였어도 곤란할까 봐 어떻게든 도와주겠어!”아, 역시 그 일 때문에 기분이 계속 안 좋았던 거구나.“누가 너한테 들이대는 게 싫으면 그냥 무시하고 쫓아내면 될 거 아니야!”고은서가 대답했다.“근데 넌 쫓아내긴커녕 오히려 계속 대답해줬잖아. 그러니까 그 여자도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 네가 먼저 그렇게 여지를 줘놓고 나한테 화풀이는 왜 하는 건데?”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그 눈빛에 고은서도 지지 않고 곽승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곽승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시 눈을 감았다.고은서도 더는 곽승재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그 후로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은 차를 호텔 주차장에 세웠다.고은서가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곽승재가 감았던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할머니께서 오늘 오후에 나한테 문자를 보내셨어. 내일 우리 본가로 오라고.”고은서는 M국에 있던 때에도 할머니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계속 그녀에게 귀국하는 대로 집에 들르라는 말을 하곤 했다.출가한 지 열흘이나 지났으니 할머니가 자신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일단 오늘 푹 자고 내일 바로 갈게.”곽승재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급히 차에서 내리려는 고
고은서가 직접 식자재를 사서 요리를 한다고 해도 그곳의 식자재 자체가 고은서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아픈 사람 돌봐주려고 그 먼 곳까지 가서 그 고생을 했는데, 적어도 감동한 티라도 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 또 너 바람 맞히는 거 아니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이혼 서류에 서명을 결심한 순간, 곧장 이 좋은 소식을 박지연에게 전해주었다.“그럴 일은 없을 거야.”고은서는 상추쌈을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같이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설득했는데, 내가 거절했어. 화도 안 내고 그냥 받아들이더라.”박지연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그런 사람이 여자한테 차여본 적이 있겠어? 자존심 하나 꺾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곽승재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은서는 정말 진지하게 그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은서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는 햄스터처럼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고기의 풍미와 상추의 신선한 향이 어우러지더니 이내 양념의 매운맛까지 더해져 환상적인 맛을 냈다. 고은서는 더 입을 열지 않고 그 맛에 한껏 취해있었다.맛있게 먹는 고은서의 모습에 박지연도 군침이 돌았는지 같이 고기를 몇 점 집어먹기 시작했다.“민시후 씨도 M국에 갔었다며?”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약혼녀가 자꾸 귀찮게 군다더라. 그래서 나 만나러 온다는 핑계 대면서 갔대.”박지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랑 민시후 씨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됐잖아. 평소에 네 얘기 들어보면 일 처리도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던데.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해도 되는 거야?”고은서가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일은 잘해.”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일전 서인수가 보육원에서 한 소녀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던 일을 말해주었다.“그때 민시후 씨는 서인수를 돕지 않았어. 그 대신 아름 언니한테 그 사실을 알렸지. 적어도 인성이 글러 먹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잖아.”고은서는 그의 이런 점을 보고 함께 일하기로 마음 먹
안으로 들어선 곽승재는 고은서의 많은 물건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화장대 위에 있던 여러 스킨케어 병들이 반쯤 사라져 있었고 그녀가 자주 착용하던 머리띠와 얼굴을 비추는 이상한 램프 등 같은 것들도 전부 사라졌다.드레스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그녀의 화려한 옷들도 사라져 있었고, 신발과 가방을 보관하던 선반도 몇 칸 텅 비어 있었다.방금 느꼈던 허전하고 공허한 감정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곽승재는 M국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온종일 바쁘게 일만 했고 비행기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탓에 지금 곽승재는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베개와 이불에서는 아직도 고은서의 향이 느껴졌다.그는 M국에서 지내던 그 며칠 동안 고은서와 함께 있다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줄곧 그녀와 각방을 써왔다. 고은서가 화를 내며 먼저 귀국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곽승재 나름대로 많이 참아왔다.하지만 지금은 그 결정이 가장 후회되었다.그때 그냥 같은 방에서 잤어야 했다. 한밤중에라도 고은서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더라면, 몇 시간 동안이라도 가까이 있었을 텐데.몸은 이미 피곤함에 잔뜩 찌들었는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 곽승재는 고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음이 울린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작별 인사를 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굳이 전화해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다음 날, 잠에서 깬 고은서의 머리가 어지러웠다.어젯밤, 고깃집에서 박지연과 함께 식사하며 수다를 떨다 보니 거의 11시가 다 되어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비행기에서 너무 오랫동안 자버린 나머지 잠이 오지 않았다.그렇게 고은서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잠에서 깨 시계를 확인해보니 이미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카톡을 확인해보니 곽승재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점심에 함께 본가로 가자는 내용이었다.보낸 시간을 확인해보니 두 시간
곽승재의 입술에 고은서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곽승재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고개를 돌린 운전기사는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급히 차 문을 열고 모습을 감춰버렸다.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고은서는 자신의 눈앞에 가까이 있는 곽승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고은서가 눈썹을 찌푸렸다.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듯 나른함이 묻어 있었고, 그 목소리가 곽승재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태연하게 몸을 곧게 세우고는 말했다.“도착했어. 너 깨우려고 그런 거야.”“아, 그렇구나.”고은서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로 본가에 도착해 있었다.고은서는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기사님은 어디 가셨어?”곽승재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는 차 문을 열며 말했다.“내려.”함께 응접실로 들어선 두 사람은 그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전미자를 발견했다.고은서를 만난 전미자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얼굴이 초췌해 보인다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식사 중에도 전미자는 계속해서 고은서에게 음식을 권했지만 정작 친손자인 곽승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곽승재는 회사에 볼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고 잠에서 완전히 깬 고은서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곁을 지켰다.…육현석은 GS 그룹 대표이사실에서 곽승재를 기다리고 있었다.“형은 어쩜 이렇게 매일 바빠? 밥 한 끼 같이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안 와서 나 혼자 쓸쓸하게 배달 음식만 시켜 먹었잖아.”육현석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면서도 곽승재는 농담할 틈도 없이 바쁘다는 듯 대충 물었다.“여기까지는 왜 왔어?”“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당연히 보러 와야지.”“내가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조사 중이야, 곧 있으면 결과 나올 거야.”육현석이 궁금하다는 듯
육현석이 뭐라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곽승재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결과 나오면 바로 알려줘.”고은서가 마침 본가에서 나왔을 때, 민시후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귀국할 예정이니 데리러 와.”“운전기사가 없어? 아니면 택시 예약할 줄 몰라서 그래? 왜 굳이 나한테 오라는 거야?”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M국에 왔을 때 내가 아니었다면 고생 좀 했을 거였잖아. 나한테 신세 졌으니 갚아야지.”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송민아가 네 귀국 항공편을 알고 있어서 데리러 가는 거지?”“항공편은 몰라. 하지만 M국에서 해성으로 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2대밖에 없는데 그 자리를 지켜서면 되지 않겠어?”민시후의 말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우리 집 영감이 나랑 송민아를 결혼시키려고 굳게 마음먹은 것 같아. 아니면 우리 한번 협력해 볼까? 나는 네 이혼을 도와주고 너는 이 혼사를 망쳐주는 거야. 어때?”“어떻게 도와줄 건데?”“나한테 다 방법이 있지.”“그럼 난 어떻게 네 혼사를 망쳐야 하는데?”“네가 수락만 한다면 나한테 맡겨.”고은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비록 민시후의 제안이 매력적이긴 했지만 조건이 조금 까다로웠다. 고은서는 자신이 이 판에 뛰어들어 혼사를 망치면 앞으로 평온한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곽승재는 수중에 있는 급한 프로젝트만 끝내면 이혼을 진행하기로 했었다.두 제안을 비교해 본다면 곽승재 쪽이 좀 더 이로운 것 같았다.“그 얘기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고 항공편 알려줘. 내일 데리러 갈게. 이걸로 신세는 갚은 거다? 앞으로 또 나한테 이상한 일 시키면 안 돼.”민시후는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알았어. 그럼 내일 데리러 오기로 한 거다.”다음날, 고은서는 박지연에게 미리 연락하고 그녀가 일하는 병원으로 향했다.위만 검사하려고 했는데 박지연은 건강 검진 시트를 들고 있었다.“위에서 지난번 2천만 원을 네가 기부했다는 걸 알고 감사의 의미로 건강 검진을 무료로 진행하라고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송민아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선이 마주치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송민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은서 씨, 공교롭네요. 시후 오빠 데리러 온 거예요?”송민아는 거침없이 고은서에게 다가갔다.고은서는 어떤 태도로 송민아를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그녀가 출국하기 전, 민시후는 일부러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또한 M국에서 그녀를 찾으러 오기도 했다. 아마 송민아는 마음속으로 고은서를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지난번 민시후에게 불려 간 식당에서 송민아를 만났을 때 민시후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해명하고 송민아를 설득하려고 했었다.하지만 송민아는 민시후의 행동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조금 날카로운 듯한 송민아의 질문에 고은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민시후 씨한테 신세진 게 있어요. 민시후 씨가 그걸로 절 협박해서 데리러 오라고 했어요. 이런 이유 믿으시나요?”송민아가 갑자기 언성을 높인 채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매번 시후 오빠가 은서 씨 짝사랑한다는 걸 자랑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들이 어떻게 하든 저는 시후 오빠를 포기할 생각 없어요.”전생의 자신을 생각하면 고은서는 화를 내는 송민아를 정말 미워할 수 없었다.자존심까지 내려놓으며 좋아하는 남자를 쫓아다니는데 상대는 피하려고만 하는 그 감정, 고은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송민아 씨, 지난번에 저한테 물으셨죠? 어떻게 하면 민시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냐고 말이에요.”송민아의 분노가 얼마간 가라앉았다. 그녀는 의심 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때 대답하셨죠. 저한테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고요.”“거창한 의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렇게 매달리기만 해서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 거예요. 매달릴수록 민시후 씨는 더 멀리 멀어지려고만 할 거예요. 그러니 매달릴 시간에 자신을 향상하고 기쁘게 하는 데 집중하세요. 어쩌면 손에 넣지 못하는 게 제일 욕심날 수도
고은서는 아무것도 모른 척 말했다.“민아 씨 차가 고장 나서 같이 돌아가려고. 아무리 그래도 네 약혼녀인데 어려움에 부딪힌 사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민시후는 점점 더 화를 냈다.“내가 같이 귀국하지 않았다고 지금 이런 방식으로 나를 화나게 하는 거 아니야? 너도 곽승재와 이혼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지금까지 시간을 끌고도 아직 이혼 절차를 밟지 않으니 나로서도 불쾌할 수밖에 없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한테 목을 매는 게 아니라 지금 쌍방이었던 거야? 스토리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흘러갔을까...’“고은서! 용기가 있으면 송민아 앞에서 영원히 곽승재랑 이혼하지 않겠다고 해. 그럼 나도 너에 대한 마음을 접을게.”민시후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녀로서도 차마 입밖으로 낼 수 없었다.송민아의 희망적인 눈빛에 고은서를 민시후를 향해 외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나의 이혼은 너랑 아무런 상관도 없어.”“네가 곽승재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누구다 다 알고 있어. 나한테 마음이 생긴 게 아니라면 왜 이혼하려고 하겠어?”말하며 민시후는 태도를 누그러뜨렸다.“됐어. 네 결혼에 개입한 내가 잘못이지. 내 마음을 내 의지대로 조정할 수만 있었다면 절대 너한테 흔들리지 않았을 거야. 지금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불쌍해 보이는 민시후를 보며 고은서는 정말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그렇게 고통스러워서 M국에서 다른 여자를 끼고 논 거야?”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기뻐하는 기색으로 깜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나 신경 썼구나! 그럼 그때 왜 못 본척한 거야? 나한테 한마디도 안 물어봤잖아. 그때 그 여자랑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그 여자 이름도 몰라.”민시후는 말하면 할수록 더 활개치기 시작했다.“일부러 너 화나게 하려고 그런 거야. 은서야, 화내지 마. 응?”“됐어요!”송민아는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이 차에서 내려 자리를 떴다.민시후는 아무런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
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백유미였다.그녀는 오피스룩 정장 차림에 수트 차림을 한 남자 몇 명과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곽승재와 함께 있었다.계단 입구에서 내려온 것으로 보건대 그들은 방금 밥을 다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을 것이다.백유미의 호칭에 옆에서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던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그녀가 민시후와 함께 있는 것을 보자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가라앉았다.“민 대표님도 계셨네요. 우연이네요. 두 분도 식사하러 오신 거예요?”백유미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민시후와도 인사를 건넸다.민시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방금 M국에서 입국해서 뭐 좀 먹으려고 들렀어요.”“민 대표님도 M국에 가셨어요?”백유미가 질문을 던졌지만 고은서가 계속 말이 없자 무슨 생각이라도 난건지 급히 해명했다.“사모님, 저랑 대표님은 고객 만나러 왔습니다. 방금 밥 다 먹고 이제 회사로 돌아갈 생각입니다.”고은서는 말없이 민시후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가자.”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시선을 거두고 주변 고객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로비를 벗어났다. 마치 고은서와는 모르는 사이인 듯했다.“민 대표님, 사모님.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백유미는 빠른 걸음으로 곽승재를 따라잡았다.민시후는 멀리 가버린 곽승재의 뒷모습을 보며 일부러 고은서에게 물었다.“그날 밤에는 곽승재가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오늘은 한마디도 안 하네. 왜 저래?”‘백유미가 여기 있는 이유를 말하고 싶은 거 아닌가?’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고는 답했다.“널 잡아먹을 만한 입맛이 오늘은 없나 보지.”민시후는 오한이 들며 정말 토할 것 같았다.“고은서, 앞으로 그런 징그러운 말을 또다시 하면 정말 안 봐줄 거야.”고은서도 물러서지 않고 답했다.“네가 이상한 말 안 하면 나도 이상한 말 안 하겠지.”룸 안에 고은서와 민시후는 테이블의 모서리에 앉았다.몇 번 같이 밥을 먹다 보니 두 사람은 단둘이 있어도 별다른 어색함이 없었다.고은서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