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백유미였다.그녀는 오피스룩 정장 차림에 수트 차림을 한 남자 몇 명과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곽승재와 함께 있었다.계단 입구에서 내려온 것으로 보건대 그들은 방금 밥을 다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을 것이다.백유미의 호칭에 옆에서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던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그녀가 민시후와 함께 있는 것을 보자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가라앉았다.“민 대표님도 계셨네요. 우연이네요. 두 분도 식사하러 오신 거예요?”백유미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민시후와도 인사를 건넸다.민시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방금 M국에서 입국해서 뭐 좀 먹으려고 들렀어요.”“민 대표님도 M국에 가셨어요?”백유미가 질문을 던졌지만 고은서가 계속 말이 없자 무슨 생각이라도 난건지 급히 해명했다.“사모님, 저랑 대표님은 고객 만나러 왔습니다. 방금 밥 다 먹고 이제 회사로 돌아갈 생각입니다.”고은서는 말없이 민시후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가자.”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시선을 거두고 주변 고객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로비를 벗어났다. 마치 고은서와는 모르는 사이인 듯했다.“민 대표님, 사모님.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백유미는 빠른 걸음으로 곽승재를 따라잡았다.민시후는 멀리 가버린 곽승재의 뒷모습을 보며 일부러 고은서에게 물었다.“그날 밤에는 곽승재가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오늘은 한마디도 안 하네. 왜 저래?”‘백유미가 여기 있는 이유를 말하고 싶은 거 아닌가?’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고는 답했다.“널 잡아먹을 만한 입맛이 오늘은 없나 보지.”민시후는 오한이 들며 정말 토할 것 같았다.“고은서, 앞으로 그런 징그러운 말을 또다시 하면 정말 안 봐줄 거야.”고은서도 물러서지 않고 답했다.“네가 이상한 말 안 하면 나도 이상한 말 안 하겠지.”룸 안에 고은서와 민시후는 테이블의 모서리에 앉았다.몇 번 같이 밥을 먹다 보니 두 사람은 단둘이 있어도 별다른 어색함이 없었다.고은서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그가 일부러 민시후를 쫓아낸 것임을 눈치챘다.곽승재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민시후 데리러 공항에 간 거야?”“무슨 문제 있어?”고은서가 되물었다.곽승재가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ZY그룹에 운전기사로 취직한 거야?”‘지금 누굴 비꼬는 거야.’마침 웨이터가 음식을 서빙해 와 고은서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민시후 운전기사가 아니라면 왜 그때 음식점에서 운전해 줬고, 오늘은 왜 또 직접 공항으로 마중 간 거야? ZY그룹에 쓸만한 운전기사가 없는 거야? 아니면 정말 니가 민시후를 마음에 품기라도 한 거야. 기혼 신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그러는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맞아. 다 알고 있으면서 더 이상 내 생각은 묻지 마. 얼른 우리 혼인 생활을 끝내자.”목이 막힌 곽승재의 얼굴빛과 안색은 더 싸늘해졌다.“고은서, 네가 결혼이 즐겁지 않다는 이유로 이혼하겠다고 투정 부리는 건 참았어. 하지만 날 바보 취급하고 결혼을 게임처럼 여기면서 오늘은 내가 좋으니 결혼하고 내일은 다른 사람이 좋아지면 이혼하겠다는 그런 생각이라면 우리 사이는 아직 계산할 게 많이 남았어.”고은서는 곽승재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만약 이혼이 곽승재의 과실이라면 그는 참을 수 있었다.하지만 만약 그녀의 마음 변화로 해야 하는 이혼이라면 곽승재는 그녀와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었다.어쩌면 정말 곽승재다운 발언이었다.고은서가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정말 민시후한테 마음이라도 움직였다는 뜻이야?”곽승재의 미간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사람을 가차 없이 물어뜯이려는 맹수의 분노였다.‘남자는 정말 재밌네. 내가 쫓아다닐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하니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라니...’고은서가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자꾸 입맛 떨어지게 하
30분 후, 백유미는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이어 그녀는 곽승재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백유미가 부드럽게 말했다.“승재야, M국에서 며칠 동안 아팠다면서 당분간은 더 쉬어야겠다. 나는 먼저 재무실에 가볼게.”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백유미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다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곽승재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육현석은 이미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육현석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형, 알아냈어. 성아연이라는 형수 친구가 개인적으로 백유미랑 연락하고 있더라고. 여기 그 두 사람의 통화 기록과 카페 CCTV 사진이 들어있어.”곽승재는 손을 뻗어 자료를 건네받고 서류를 꺼냈다.육현석이 말한 대로 안에는 통화 내역과 영상 캡처본이 몇 장 있었다.“경제적인 거래는 없었어?”곽승재가 물었다.육현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알아보려고 했는데 없었어. 하지만 이 성아연이라는 여자 최근 돈을 헤프게 쓰면서 명품 신발과 가방을 많이 사더라고. 다 자기가 낸 돈이야. 예전에는 형수가 명품 선물을 해줬었는데 최근에는 형수와 사이가 틀어진 건지 형수가 저 여자 번호까지 차단한 것 같더라고. 아, 맞다. 성아연의 아버지가 보름 전에 고씨 가문에 큰 비즈니스를 이어줬는데 형수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비록 애초의 목적은 성아연과 백유미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었지만 성아연이 고은서의 친구이다 보니 고은서와의 관계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관련 자료는 다 들어있으니 형이 한번 확인해 봐.”자료를 보며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비즈니스에 대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전에 고은서가 관련 계약서를 보고 있을 때 그가 그중의 많은 허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당시 그는 고은서가 고씨 가문 사업에 신경을 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속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은서와 성아연의 관계는 그도 조금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줄곧 한통속이었고 서로
“어쩐 일이세요?”“형수님, 지금 예원 별장에 안 묵으시고 호텔로 가셨어요?”‘곽승재가 직접 얘기했을 리는 없고... 박지연이 얘기했겠지?’“그래서 무슨 일인데요?”“헤헤, 오해하지 마세요. 형을 도와서 얘기하려는 게 아니에요.”육현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사는 곳에 적응되신 건지 물으려고 연락드렸어요. 듣기로는 집을 사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시내에 집 몇 채를 소유하고 있어요. 나중에 정보를 보태드릴 테니 형수님이 마음에 드시는 집이 있으시면 선물로 드릴게요.”고은서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괜찮습니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받을 이유가 없어요. 제가 직접 사면 됩니다.”고은서가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육현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형수님, 비록 저랑 형이 친형제는 아니지만 감정적인 문제에서는 저는 박지연 씨와 같은 입장에서 형수님을 지지합니다.”‘나를 지지하는 것조차도 박지연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밝히다니...’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지연이한테 마음이 있으신 거예요?”육현석이 급히 답했다.“형수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저랑 박지연은 의견이 잘 맞고,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예요. 절대 박지연한테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거예요!”‘박지연이 자기 같은 타입을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형수님, 비록 형수님의 의견을 지지하지만 형이 형수님한테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아서 화가 나서 이혼하시는 거라면 형 대신 한 말씀 드리고 싶네요. 형도 형수님을 신경 쓰는데 잘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빙빙 돌려서 말해도 육현석은 결국 곽승재를 도와 말하고 있었다.역시 곽승재의 좋은 친구이자 동생이었다.“오빠가 신경 쓰든 쓰지 않든 이제 상관없어요. 제가 이혼하려고 마음먹은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완곡하게 거절당한 육현석이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네. 형수님, 들어가세요.”백유미가 곽승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백유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책상에 올려두었던 자료를 백유미 앞에 내밀었다.백유미가 한번 보더니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이건 성아연 시와 나의 통화 기록이잖아. 전에 카페에 함께 있던 사진도 있네? 무슨 문제라도 있어?”곽승재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성아연이 그날 밤 네 숙소에 가서 소란 피운 건 네가 계획한 거야?”백유미는 한순간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한참 멍해 있다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승재야, 네 뜻은 내가 성아연 씨와 몇 번 연락했으니 내가 성아연 씨를 시켜서 그 난리를 피웠다는 거야?”백유미의 표정이 굳어졌다.“네가 왜 이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어. 성아연 씨와 만난 적은 있어. 성아연 씨한테 내 카톡 연락처도 있어. 하지만 난 그런 짓은 한 적 없어.”백아연은 몇 달 전 술자리에서 성아연이 먼저 그녀의 전화번호를 추가하고 카카오톡을 추가했다고 했다.성아연의 인스타에서 그녀는 성아연이 고은서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백유미가 매번 인스타를 올릴 때마다 성아연은 가시 돋친 댓글을 달고는 했다. 고은서가 투신해서 다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성아연이 백유미를 카페에 나오게 했다고 했다.“성아연 씨는 나를 꾸짖으며 너를 멀리하라고 협박하면서 심지어 회사까지 그만두라고 했어. 그리고 너랑 은서 씨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백유미의 목소리에는 쉽게 알아채지 못할 억울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엄숙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성아연 씨한테 해명했지만 성아연 씨는 듣지 않고 나를 위협하고는 자리를 떴어. 승재야, 네가 CCTV 영상을 확인했으니 알겠지만 너도 보다시피 같이 있은 지 10분도 되지 않아 성아연 씨는 자리를 떠났어.”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운호 산장에서 단합한 최근 날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사이가 그렇게 안 좋으면서 먼저 연락한 이유는 뭐야?”“원래는
“승재야, 귀국하고 나서 몇 달 동안 혹시나 너한테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서 줄곧 너와의 사이에 신경 썼어.”박유미는 정말 울컥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난 다 참았어. 나라고 태생적으로 마음이 넓은 게 아니야. 나도 속상하고 마음 아파. 하지만 네가 곤란할까 봐... 승재야,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날 의심하고 조사하는 거야?”백유미가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백유미 이마에서 보이는 흉터 자국과 슬픔을 애써 억누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곽승재의 날카로웠던 기세는 얼마간 누그러졌다.“너랑 관련 없다면 이 일도 마음에 두지 마.”백유미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나도 너한테 마음을 품었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네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난 너를 친구로만 생각하고 대했어. 승재야, 앞으로 의심스러운 점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물어봐. 너한테 한치의 숨김도 없이 솔직하게 얘기할게.”곽승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판주로 가서 일해.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네.”백유미는 뭔가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곽승재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GS그룹 빌딩에서 나온 후에야 백유미는 핸드폰을 꺼내 백승엽에게 전화를 걸었다.“유미야, 어떻게 됐어? 승재가 믿었어?”백유미는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그쪽은 아무 문제 없죠?”“내가 처리했는데 걱정할 것 없어. 약국 신입은 실수한 게 있어서 이미 해고당했어. 설사 승재가 사람을 보내 조사한다고 해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거야.”백승엽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유미야, 그렇게 고생하면서 승재가 고은서를 의심하게 만들더니 왜 또 고은서의 혐의를 벗기려고 이렇게 애쓰는 거야? 헛고생한 게 되지 않겠어?”‘헛고생이 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 혐의는 내가 직접 고은서를 위해 씻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 혐의가 벗겨지지 않을 거야.’그러나 백유미는 아버지에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아버지
이전 해찬시에 있던 거에 비해 유성준은 조금 야위었지만 특유의 따듯한 분위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할아버지, 성준 오빠.”고은서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불렀다.“은서 왔어?”유성준의 얼굴에도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고은서가 그들 앞에 다가가 고준석의 옆에 앉아 유성준에게 물었다.“성준 오빠, 해성에는 MQ에 취직하려고 온 거야?”“성준이는 먼저 MQ에서 1년간 도와주고 그때 가서 상황 봐가면서 다시 정하려고 한다.”고준석이 답했다.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당분간 외국에 가고 싶지 않네. 마침 할아버지가 초대해 주셔서 왔지.”유정길을 생각하자 고은서의 기분도 조금 가라앉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성준 오빠,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앞으로 해성에 머물면서 저희를 가족으로 생각하세요.”“예전에 투정만 부리던 은서가 이제 다 커서 사람 위로할 줄도 아네.”유성준이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그러게 말이야.”옆에 있던 고준석도 맞장구를 쳤다.“은서도 다 커서 집안 사업에 신경 쓰기도 해. 계속 믿을만한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고 하더니 성준이 네가 들어오면 은서도 마음 놓을 수 있겠지.”고은서는 자신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냈다.“맞아요! 하지만 성준 오빠를 MQ의 부대표로 임명하면 왠지 인재를 낭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유성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에이 그럴 리가. 너랑 할아버지가 실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지.”그들이 정다운 얘기를 나눌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아마 네 외삼촌 일행일 거야.”고준석이 말을 이었다.“은서야, 네 삼촌도 성준이를 알고 있어. 성준이가 MQ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마주하게 될 사이이니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미리 친해지면 좋잖아.”고은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들여서 외삼촌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정당하게 유성준을 영입하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이내 고은혜를 포함한 고은서의 외삼촌
‘곽승재가 왜 여기에 온 거지?’“외할아버지, 곽승재도 부르셨어요?”고은서가 고준석에게 물었다.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오후에 승재한테서 문안 전화가 왔었는데 너도 오고 하니까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을 꺼내 봤지. 그러니 오겠다고 하더구나.”고준석은 지금도 고은서와 곽승재가 이혼하는 걸 원치 않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름이 지나도록 고은서와 곽승재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리가 없었다.곽승재를 이 자리에 부른 것도 아마 두 사람 사이에 미련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귀찮아 죽겠어. 곽승재는 대체 언제 사인하려는 거야. 끌면 끌수록 더 번거로워지는데.’고은서는 민시후와 합작할 충동까지 들었다.공식적인 담판을 하고 온 듯 곽승재는 화이트색 셔츠와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 걸어들어왔다. 평소와 별다름 없는 차림이지만 온몸에서 시선을 이끄는 범상치 않은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한 번 스쳐보고는 예의 바르게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유성준에게 말을 걸었다.“오빠도 해성에 오셨네요?”유성준은 나긋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응, 오후에 금방 도착했어.”“승재야, 마침 잘 왔어!”고국성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성준이가 얼마 안 있으면 MQ에 정식 직원으로 들어올 거야.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네가 잘 보살펴줘.”고국성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가 답했다.“물론이죠. 듣기로는 전에 계속 해외에 있었다고 하던데요?”곽승재는 무심코 물었다.“네. 이젠 안 가려고요. 아무래도 고향 땅이 더 좋은 법이니까요.”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곽승재는 더는 묻지 않고 웃으면서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서 있지만 말고 얼른 다들 앉아. 은서야, 앉아서 뭐해? 승재가 앉게 얼른 일어나.”단은숙이 고은서를 비난하듯 말했다.다른 자리도 많았지만 다 고준석과 멀리 떨어진 자리들이었다. 단은숙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곽승재
고서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말씀하세요.”“승연이 상황에 관해서 너도 전해 들었을 거라 믿어. 지금 승연이가 꺼려하지 않으면서도 정서 조절에 도움이 되는 향을 찾아야 하는데 승재 할머니 말씀으로는 네가 퍼퓸 제작에 능하다고 하던데 혹시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해서.”서연정은 국내외에도 많은 퍼퓨머가 있긴 하나 곽승연이 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설명을 보태면서 부득이하게 고은서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전에 곽씨 가문 본가에 갔을 때 곽승연 상태와 퍼퓸 제작에 관한 일을 곽승재한테서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때 당시는 곽승연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던지라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 거절했었다.“어머니, 제가 한번 해볼게요.”“은서야, 고마워.”서연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를 보며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가슴이 찡해났다.“하지만 너무 큰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꼭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장할 수가 없어요.”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고은서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은서야. 내 부탁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걸. 승연이 상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결과가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정말 고마워.”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시간 내서 승연이가 무얼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보도록 할게요.”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원래도 까다로운 퍼퓸 제작이 이번엔 더 힘들 것 같았다.‘천천히 해야지.’“은서야, 잘 부탁해. 기사님한테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기다리라고 할게.”“괜찮아요.”고은서가 말을 계속 이어가려고 할 때 서연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넌 승연이를 도와주는 것 외에 일도 해야잖니. 기사님이 데려다주고 하면 너도 차에서 조금이나마 편히 쉴 수 있잖아.”그녀의 말에 고은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운전하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육현석이 혼자 추측하기 시작했다.“혹시 뭐 발견한 거라도 있어서 백유미를 이용하려고 놓아준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은 모르고 있는 게 나아.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서류 하나를 들면서 말했다.“...”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은서와 서연정은 전에 약속한 찻집에서 만났다.웨이터를 따라 위로 올라가 보니 은은한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혔고 여러 향초도 켜져 있었고 내부는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송민준을 만날 때 갔던 찻집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는데 아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은서야, 왔어?”서연정이 그녀를 보며 인사했다.“어머니.”고은서는 인사하면서 곽승연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열심히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승연이가 요즘 많이 나아졌어. 너한테 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했는데 직접 전해주는 게 더 예의인 것 같아서 데리고 왔어.”서연정이 앞서 설명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곽승연은 다도 전문가들이 차를 올려줄 때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미안, 은서야. 승연이 아직 다른 여자애들처럼 너랑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진 못해.”서연정이 웃으면서 사과했다.“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 하는데 대부분 사람은 그저 환자로만 보거든. 승연이는 또 그걸 싫어하고. 그래서 애가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지금은 주동적으로 인사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돼.”아이패드를 들고 조용하게 앉아있는 곽승연은 나긋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가녀린 몸매와 창백한 얼굴빛을 외에는 전혀 자폐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저는 승연이가 그저 평범한 여자애처럼 보여요. 조용하고 귀엽잖아요.”“고마워, 은서야.”서연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승연아, 언니한테 줄 물건이 있다며? 언니 지금 여기 왔어
육현석은 곽승재의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큰 타격을 받은 모양이다.육현석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달랬다.“형, 형수님이 실망한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잖아. 전에 백유미를 감방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어긴 사람이 형이 맞잖아. 심지어 지연이도 화를 내면서 또다시 형이랑 형수님이 재혼하는 걸 도와주면 나랑 절교하겠다고 했단 말이야.”육현석은 무척 난감해했다.한쪽은 제일 친한 형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였기에 그에게 있어서 누굴 도와줄지 선택 내리기 너무 어려웠다.“형수님 형한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냥 내려놓는 건 어때?”육현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다시 열었다.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너도 민시후가 고은서한테 더 잘 어울린다는 소리 하려고 그러는 거야?”“그럴 리가! 형수님처럼 훌륭한 사람한테 민시후가 뭐야.”육현석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그런데 왜 백유미를 이대로 놓아주는 거야? 혹시 아버님이랑 백승엽이 백유미를 놔주라고 형을 협박한 거야?”육현석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현석아, 전에 은서가 임신했던 아이가 내 아이래.”곽승재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바꾸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왜 갑자기 이 말을 꺼내는 건지 약간 의문스럽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그의 말에 답했다.“내가 전에도 형수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민시후랑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을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나한테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난 그저 민시후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는 거라고만 생각하면서 믿지 않았어.”곽승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주민기한테 조사하라고 맡기고도 그 결과를 확인해 보지 않았어. 고은서 말이 맞아. 난 근거 없는 자신감만 넘치는 사람이야. 증거 있는 일만 믿으면서 단 한 번도 고은서를 믿어준 적이 없어. 그래서 고은서도 내가 자신을 위해 변할
“누가 얌생이라는 거야?”“T국에 있을 때 분명히 나도 고은서를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한테 소식을 숨겼잖아. 이게 얌생이가 아니고 할 짓이야?”민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내 아내에 관한 소식을 왜 너한테 알려줘야 하는데?”곽승재가 화를 내며 말했다.“두 사람이 이혼한 지 언젠데 아직도 아내 타령이야. 곽승재, 아내라는 호칭 적당하게 부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너 대신 창피해지려고 하니까.”민시후가 비아냥거리며 반박했다.“너!”곽승재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민시후, 네가 환자라고 내가 널 못 팰 것 같아?”“당신이 뭔데 민시후를 패?”바로 이때, 고은서가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그녀는 민시후 앞에 막아서며 한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곽승재, 여기 블랙박스 있는 거 안 보여? 함부로 행동하지 마.”고은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곽승재의 마음을 찔렀다.그는 순간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옆에 보고 있던 주민기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나 고은서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주민기 씨, 건망증이세요? 뇌 건강에 신경 좀 쓰시는 게 좋겠네요. 곽승재한테서 돈 받으면서 편드는 건 이해하겠지만 저도 스스로 볼 줄 알거든요. 그러니까 대신 설명해줄 필요 없어요.”주민기는 억울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그냥 사무실에 계시면 될 걸 왜 굳이 나와서 사모님을 기다리려는 거야. 난 부득이하게 따라 나온 것뿐인데. 게다가 사모님한테 잘 보이기는커녕 민시후 때문에 도리어 화내는 모습만 보이게 되었잖아.’그에게 있어 더 절망적인 건 고은서가 민시후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주민기는 미래의 속상해하는 곽승재의 모습과 힘든 자신의 앞날이 벌써부터 무서워 났다.‘대표님이 기분 나빠하면 내 일상도 함께 힘들어지는데. 난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인데 왜 하늘은 계속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야. 벌써부터 힘이 빠져.’주민기가 한창 생각
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해외에서 혼자 지내며 꽤 많은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고은서는 민시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비록 지난 생에서 앞으로 그가 이루어낼 성과가 작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 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고은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그냥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고은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이 없어. 이제 알게 되었으니 날 책임 져야 해.”민시후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답했다.“져야 할 책임이 너무 커서 감당 안 되겠는데?”“그럼 내가 너 책임질까?”민시후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어머니의 묘비 앞에 데려간 이유를 알았다.그는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며 자신에게 진지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고은서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구애받았지만 그녀는 곽승재에게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곽승재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고 살았었다.잠시 생각하던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다음 주 우리 삼촌 생일인데 부상이 다 나으면 나랑 같이 갈래?”그 말에 민시후는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지금이라도 갈 수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두 바퀴 뛰어서 보여줄까?”말을 마친 민시후가 날뛰려 했지만 고은서가 얼른 제지했다.“됐어. 얼른 앉아.”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민시후, 여기서 몇 바퀴 돌다가는 구급차 불러야 할 거야.”민시후는 고은서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래. 알았어. 얌전히 앉아 있을게.”병동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고은서는 핸드폰을 차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민시후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고
다급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농담이야.”그 말을 들은 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고은서, 너는 진짜 예쁘면서 마음도 착해.”“야... 그러지 마.”고은서가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민 도련님, 정상적으로 돌아올 순 없을까? 그렇게 웃지도 말고 닭살 돋는 말 하지도 마. 아니면 뭔가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잖아.”민시후는 말문이 막혔다.‘역시 장난은 그만 쳐야겠어. 전에 방탕하게 행동했더니 이제 이미지 회복은 글렀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재밌는 곳이나 특별히 경치가 좋은 곳에 데려갈 것으로 생각했다.그런데 민시후는 그녀를 묘지로 데려왔다.고은서는 민시후의 지시에 따라 한 묘비 앞에 섰다.묘비 사진에는 온화하고 단정한 표정의 중년 여성이 웃고 있었다.“우리 어머니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여긴 외가 쪽 집안 묘지야. 비록 어머니가 북성으로 시집갔지만 외로울까 봐 여기에서 묘비를 세웠어.”고은서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평소 민시후는 세상만사에 무심한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드물게 부드럽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민시후는 휠체어에서 내려 준비한 꽃을 조심스럽게 묘비 앞에 놓고 묘비 위로 떨어진 나뭇잎을 정성껏 정리했다.“왜 곽승재를 그렇게 미워하냐고 물었었지?”고은서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여러 번 물었었지만 지난번 서운에서 조금 얘기해줬을 뿐 전부는 얘기해 주지 않았다.묘비 앞에 앉아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는 민시후의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조심스레 짐작했다.“설마 경찰서에 끌려갔던 그날 밤 어머니께서 사고를 당하신 거야?”민시후의 눈에 슬픈 감정이 서렸다.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날 밤 내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급하게 해성으로 오시다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어. 이튿날 북성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 난 어머니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
곽승재는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단순히 바람 쐬러 나온 건지 아니면 볼일이 있어 나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고은서가 민시후를 휠체어에 태운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평소처럼 냉담하고 무표정한 눈빛을 보였지만 그 안에는 아픔도 서려 있었다.“아이고, 곽 대표. 여기서 입원 중이었어? 우연이네.”민시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곽승재는 그에게 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였다.고은서가 물었다.“할 말이라도 있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몇 분이면 되는데 병실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고은서는 차분하게 답했다.“여기서 얘기해.”곽승재는 민시후를 한번 보고 다시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사적인 일이라서 다른 사람이 듣는 건 곤란해.”“그럼 미안하지만 시간이 안 되겠네. 저녁에 시간 되면 다시 얘기해.”고은서가 그렇게 말하자 곽승재의 가슴 속에서 무거운 통증이 밀려왔다.이제 고은서는 몇 분이라도 자신에게 할애하지 않으려는 듯했다.“지나가게 좀 비켜줄래?”고은서가 곽승재에게 길을 비키라고 재촉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나중에 시간을 낸다는 말을 핑계로 그저 대화를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결국 입을 열었다.“어제 승연이가 네가 준 캔들을 사용했더니 밤새 잠을 설치지 않고 잤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 승연이가 그림 한 장 그렸는데 너한테 주고 싶대.”고은서는 약간 놀랐다.‘승연이랑은 한번 마주친 게 다인데? 날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그림을 선물로 준다고?’“외할아버지 댁에 아직 오일이 조금 남아 있어. 만약 승연이가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 가져다줄게.”고은서가 여전히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은서야, 어머니가 직접 승연이 그림을 너한테 전달하고 싶대. 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내가 장소를 정해서 알려줄게.”고은서가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도 어머니 연락처 있으니 나중
고은서가 민시후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민시후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들어서려 하자 민시후는 전화를 끊고 백유미에게 정신 진단서를 발급한 병원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병원은 곽현수가 개인적으로 지분을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관련 증거는 경찰서에 보내놨고 백유미가 돌아오면 재검사 신청할 거야. 원지훈의 사망 원인은 T 국 쪽 부검 보고서에서 군도로 목을 그었다고 나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건지 실수로 찔린 건지는 알 수 없어. 상식적으로 백유미가 그 상태에서 성인 남성을 죽일 힘이 남아있을 리는 없지만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이 나타날 수도 있지. 하지만 이 부분은 증거로 삼을 수 없어. 폐기된 창고에는 CCTV가 없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너에게 향해 있었으니 그 누구도 안쪽 상황은 신경 쓰지 않았어. 새로운 증거가 없으면 사건 재조사는 힘들 거야.”민시후의 설명을 듣자 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시후는 대충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T 국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고마워.”고은서는 진심으로 말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감사한 마음을 알아채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마우면 행동으로 표현해 줘.”고은서는 경계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뭐 하려는 거야?”그 모습을 본 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고은서, 지금 누구랑 벽을 세우는 거야? 밥 챙겨왔다며? 어디 있어? 배고파 죽겠어!”고은서는 그제야 도시락을 열어 보여줬다.“특별히 찾아온 맛집이야. 얼른 드세요, 민 도련님.”민시후는 젓가락으로 몇 입 맛보고선 불만을 표했다.“특색이 하나도 안 살았잖아. 다음엔 내가 직접 요리해서 진짜 맛있는 음식이 뭔지 보여줄게.”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요리할 줄 알아?”민시후가 고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무슨 반응이야? 내가 요리할 줄 아는 게 이상해?”‘이상하고말고. 부잣집 도련님이 의식주에 대해 까다롭게 굴면서 사람들이 신경 써주는 생활이 익숙할 텐데 왜 스스로 요리를 배운 거지?’“혹시 어떤 여자
고은서가 여시은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며 미소를 지었다.“시은 씨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네요.”여시은은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곽 대표님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보고 싶어 할 걸요? 같이 가면 제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여시은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병실로 이끌었다.여시은의 비서는 문을 두드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예기치 않게 곽승재의 병실에 들어섰다.곽승재는 VIP 스위트룸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실과 오픈형 주방 작은 재활실이 있었으며 병상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주민기에게 업무 보고를 듣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고은서를 바라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은서의 방문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사모님, 시은 씨.”주민기는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네고 한쪽으로 물러났다.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시은은 상냥하게 말했다.“주 비서님께서도 계셨네요.”여시은은 곧장 곽승재에게 말을 건넸다.“곽 대표님,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대신 제가 왔어요. 마침 은서 씨를 마주쳐서 같이 왔지 뭐예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귀여웠다.“곽 대표님, 너무 감사하죠?”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 말했다.“감사합니다. 여시은 씨. 아저씨한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그럼요.”여시은은 눈빛으로 비서에게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과일 좀 준비했어요. 성의 없어 보인다고 하진 말아주세요.”곽승재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눈길은 여전히 고은서에게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수중에 들린 도시락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에게 말하는 대신 여시은에게 말을 건넸다.“시은 씨. 얘기 나눠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떤 여시은이 작은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부탁했다.“은서 씨, 저도 대표님이랑 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