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해찬시에 있던 거에 비해 유성준은 조금 야위었지만 특유의 따듯한 분위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할아버지, 성준 오빠.”고은서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불렀다.“은서 왔어?”유성준의 얼굴에도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고은서가 그들 앞에 다가가 고준석의 옆에 앉아 유성준에게 물었다.“성준 오빠, 해성에는 MQ에 취직하려고 온 거야?”“성준이는 먼저 MQ에서 1년간 도와주고 그때 가서 상황 봐가면서 다시 정하려고 한다.”고준석이 답했다.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당분간 외국에 가고 싶지 않네. 마침 할아버지가 초대해 주셔서 왔지.”유정길을 생각하자 고은서의 기분도 조금 가라앉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성준 오빠,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앞으로 해성에 머물면서 저희를 가족으로 생각하세요.”“예전에 투정만 부리던 은서가 이제 다 커서 사람 위로할 줄도 아네.”유성준이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그러게 말이야.”옆에 있던 고준석도 맞장구를 쳤다.“은서도 다 커서 집안 사업에 신경 쓰기도 해. 계속 믿을만한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고 하더니 성준이 네가 들어오면 은서도 마음 놓을 수 있겠지.”고은서는 자신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냈다.“맞아요! 하지만 성준 오빠를 MQ의 부대표로 임명하면 왠지 인재를 낭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유성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에이 그럴 리가. 너랑 할아버지가 실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지.”그들이 정다운 얘기를 나눌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아마 네 외삼촌 일행일 거야.”고준석이 말을 이었다.“은서야, 네 삼촌도 성준이를 알고 있어. 성준이가 MQ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마주하게 될 사이이니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미리 친해지면 좋잖아.”고은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들여서 외삼촌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정당하게 유성준을 영입하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이내 고은혜를 포함한 고은서의 외삼촌
‘곽승재가 왜 여기에 온 거지?’“외할아버지, 곽승재도 부르셨어요?”고은서가 고준석에게 물었다.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오후에 승재한테서 문안 전화가 왔었는데 너도 오고 하니까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을 꺼내 봤지. 그러니 오겠다고 하더구나.”고준석은 지금도 고은서와 곽승재가 이혼하는 걸 원치 않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름이 지나도록 고은서와 곽승재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리가 없었다.곽승재를 이 자리에 부른 것도 아마 두 사람 사이에 미련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귀찮아 죽겠어. 곽승재는 대체 언제 사인하려는 거야. 끌면 끌수록 더 번거로워지는데.’고은서는 민시후와 합작할 충동까지 들었다.공식적인 담판을 하고 온 듯 곽승재는 화이트색 셔츠와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 걸어들어왔다. 평소와 별다름 없는 차림이지만 온몸에서 시선을 이끄는 범상치 않은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한 번 스쳐보고는 예의 바르게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유성준에게 말을 걸었다.“오빠도 해성에 오셨네요?”유성준은 나긋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응, 오후에 금방 도착했어.”“승재야, 마침 잘 왔어!”고국성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성준이가 얼마 안 있으면 MQ에 정식 직원으로 들어올 거야.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네가 잘 보살펴줘.”고국성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가 답했다.“물론이죠. 듣기로는 전에 계속 해외에 있었다고 하던데요?”곽승재는 무심코 물었다.“네. 이젠 안 가려고요. 아무래도 고향 땅이 더 좋은 법이니까요.”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곽승재는 더는 묻지 않고 웃으면서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서 있지만 말고 얼른 다들 앉아. 은서야, 앉아서 뭐해? 승재가 앉게 얼른 일어나.”단은숙이 고은서를 비난하듯 말했다.다른 자리도 많았지만 다 고준석과 멀리 떨어진 자리들이었다. 단은숙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곽승재
“누구야 그 남자? 민시후야? 아니면 유성준인가?”고은서는 약간 어이없었다.‘이건 또 무슨 소리야. 민시후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데 유성준은 왜 나오는 거야?’곽승재는 고은서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말을 이어갔다.“유성준이 해외에서 꽤 잘나가는 거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MQ에 들어가서 네 삼촌 조력을 한다고? 목적이 뻔하잖아.”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방금전에 아주 확실하게 답해준 거로 알고 있는데, 못 알아들은 거야?”곽승재는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말했다.“해외로 가지 않는다고 해도 왜 하필 해성으로 온 걸까?”곽승재는 유성준이 고은서를 위해 MQ로 들어갔다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해친시에서 유성준과 두 번 정도 만난 이후로는 서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곽승재의 말을 도무지 믿어줄 수가 없었다.“내가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린 곧 이혼할 사이야. 쓸데없는 점유욕은 집어치워.”고은서는 짜증 난다는 듯 말하고는 작업실을 나갔다.곽승재는 그녀로부터 오는 향긋한 냄새에 입술을 살짝 오므리다가 그녀 뒤를 따라 나갔다.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식탁 앞에 도착했다.다들 원형 식탁 앞에 착석했고 이어 고은혜도 방에서 나왔다.그녀는 곽승재를 보자마자 전에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어색해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은혜야, 예절 없게 왜 이래. 형부를 봤으면 인사해야지.”단은혜가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고은혜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부.”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승재야, 은서야, 얼른 와서 앉아.”고준석은 왼쪽에 남겨둔 자리를 가리키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고은서가 고준석 옆에 붙어 앉고 곽승재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저녁은 꽤 푸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고국성은 술까지 꺼내 들고 유성준과 곽승재에게 따라줬다.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국성은 자신의 회사 경영 경험을 쉴 새 없이 털어놓았고 유성준은 옆에서 타이밍에 맞추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고은서는 듣자마자 재빨리 대신 거절했다.“할아버지, 여기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그냥 돌아가서 쉬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고준석이 말했다.“없다니? 전에 네가 산 그 많은 옷들이 아직도 옷장에 있지 않느냐.”“...”확실히 전에 옷을 많이 사두긴 했었다.어느 날 이곳에 묵게 될 때 갈아입을 옷이 없는 상황을 대비해 여러 벌 사두었었다. 하지만 곽승재는 전에 한 번도 고준석 집에 묵은 적이 없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요.”고은서가 다른 이유로 다시 둘러댔다.“그래?”고준석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고은서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같이 밥 먹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여기에 묵을 생각은 절대 하지마!’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보더니 고준석에게 말했다.“확실히 처리할 일들이 남아있긴 해요.”고은서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은근 좋아할 때 곽승재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온라인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잘됐구나. 그럼 힘들게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렴.”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결정을 내렸다.“할아버지, 저도 오늘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래요.”고은혜가 말했다.“너 내일 학교 가는데 왜 갑자기 할아버지 집에서 자겠다는 거야. 얼른 집으로 돌아가!”단은숙이 명령조로 말했다.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엄마, 평소에 시도 때도 없이 할아버지 환심 사게 자주 곁에 있어줘라고 했었잖아. 오늘 할아버지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환심을 사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설득해서 지금 해외로 가려고 그러는 거잖아!”고은혜가 벌떡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엄마, 고집 좀 그만 부려. 나 스무 살이야, 이제 어른이라고.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일쯤은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너!”단은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얼굴이 빨개졌다.“그만해. 은혜가 자고 가겠다는데 그렇게 하게 해. 애도 다 컸는데 너무 엄하게 대하지
고준석은 고은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은서야, 승재를 방으로 안내해줘. 그리고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서 전해주고.”고은서는 못마땅했지만 할아버지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너도 올라가 봐. 은서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너한테 아직도 마음은 있어.”“감사합니다, 할아버지.”곽승재는 이어 위층으로 따라 올라갔다.고은서의 방으로 다가가 보니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고은서는 방 안 드레싱룸 구석에서 곽승재 옷을 찾고 있었다.고은서 방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방은 아주 소녀소녀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핑크색 벽지와 침구 용품, 심지어 화장대까지 다 연분홍색이었다.침대 위에는 여러 가지 인형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학창시절 사진이 놓여 있었다.사진 속의 그녀는 복스러운 얼굴에 보는 사람의 기분도 함께 좋아질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러나 곽승재의 인상 속의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웃은 적이 없었다.대부분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나 질투하거나 불만스러운 모습뿐이었다. 함부로 웃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었다.결혼한 후로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던 고은서의 말을 떠올린 곽승재는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그러나 예전의 그녀와 비겼을 때 이 모든 게 사실이라는 걸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거 받아!”고은서는 힘겹게 찾아낸 옷 여러 벌을 곽승재에게 던져주었다.옷더미 안에는 잠옷과 수건, 그리고 셔츠도 있었다. 구석에 보관해둔 탓에 접힌 흔적이 있긴 했으나 옷 질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또 아주 깨끗했다.고은서가 사들인 후 열심히 씻어서 다려 놓은 게 분명했다.“객실은 옆방이야. 사용인들 시켜서 침구 용품 다 새것으로 바꿨으니까 오늘은 그 방에서 쉬면...”“고은서, 그때 당시 나랑 결혼한 이유가 뭐야?”곽승재가 고은서의 말을 끊고 물었다.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이 결혼이 너한테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는 걸 너
“전에 백유미가 운호 산장에서 알레르기 일으킨 일을 조사해봤는데 약국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래. 너랑 전혀 무관한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고은서의 주의력이 곽승재에게로 쏠렸다.백유미가 과민한 일이 약국 탓일 리가 없다. 백유미의 자작극이 분명했으니 말이다.“누가 조사한 거야?”고은서가 물었다.“승엽 아저씨가 직접 조사했어.”곽승재는 오후에 있었던 일을 고은서에게 간단히 알려줬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얘기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날 모함하려고 들더니 왜 갑자기 백승엽과 함께 말을 바꾸는 거지?’“내가 조사해봤는데 성아연과 백유미가 서로 연락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날 저녁 백유미를 찾아간 건 성아연 혼자의 뜻이야.”곽승재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네.’고은서는 순간 모든 걸 깨달았다. 일이 곽승재에게 들키는 게 무서워서 먼저 손을 써서 억울한 캐릭터를 만들려는 심보였다.‘전생에 날 귀신도 모르게 죽인 사람이 아니랄까 봐. 확실히 총명하긴 하네.’“성아연한테서 어떤 사과를 원하는지 말만 해.”곽승재가 말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보며 말했다.“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이 일을 꾸민 사람은 백유미인데 왜 성아연이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지?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백유미야.”“백유미와 성아연 사이에 아무런 경제적인 거래도 없었어.”곽승재가 답했다.“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백유미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아연 혼자 모든 걸 꾸몄다는 거야?”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흘렸다.고은서가 화날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곽승재가 차근차근 그녀를 달랬다.“내가 백유미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 드는 거라면 육현석한테 한 번 더 조사해보라고 맡길게. 너도 육현석이 지금 널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육현석이 널 가짜 서류로 널 속일 일은 없을 거잖아.”고은서는 점심에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그가 했던 말을 결론 지어 보면 곽승재가 아직도 날 많이 관심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꺼
곽승재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고 있는 듯했다. 고은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은서, 전에는 백유미가 신고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백유미가 신고하려거든 상처받는 건 너뿐이야.”곽승재가 말했다.고은서는 눈길을 돌리고 답했다.“내가 어떻게 되는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곽승재는 고은서의 턱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넌 내 아내야. 네 일이라면 다 나랑 상관있는 일이라고.”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으면 난 당신 아내가 아니야.”“고은서, 난 이혼할 생각이 없어.”곽승재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네가 집에서 나간 후로 적응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모습을 볼 때도 마음이 불편해. 나 너한테 감정이 생긴 것 같아.”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전생에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그 말을 지금 이렇게 곽승재 입으로 듣게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전생의 곽승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기 싫어했으니 말이다.이번 생만큼은 이혼하고 곽승재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도 우스웠다.‘전생의 내가 참 비참하기도 했지.’“넌 날 사랑해서 나랑 결혼한 거잖아. 그럼 지금에 와서 꼭 이혼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우리 서로에게 한 번씩 기회를 줄 수는 있잖아.”곽승재가 그녀에게 이혼하지 말자고는 여러 번이고 말했었지만 지금처럼 사랑까지 얘기 하면서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아마 진짜 이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자존심으로 이렇게 끌어가면서 이혼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나...”쿵.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언가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고은혜가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딪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나,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 금방 문앞에 도착한 거야!”고은혜가 황급히 변명했다.“얘기 나눠.”
고은서는 고은혜를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네 마음속에선 원지훈이 괜찮은 사람이야?”‘원지훈 조건으로 고씨 집안 기사가 되려고 해도 어림없는데 괜찮다고?’고은혜는 고은서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다.“당연히 곽승재랑은 비교가 안 되지. 그런데 곽승재보다 더 출중한 사람이 원래 얼마 되지도 않잖아. 게다가 원지훈 집안도 사업하는 집안이고 또 본인도 요즘 창업하고 있는데 회사 규모도 나쁘지 않고 머리고 꽤 영리하고. 누가 알아, 언젠가는 우리 MQ까지 넘어서는 존재가 될지.”고은서는 절대 그가 MQ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고, 그의 회사가 곧 망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원지훈 조건은 그렇다고 쳐. 그런데 결혼 상대를 찾을 때는 적어도 상대방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고려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조건만 보고 인품을 안 보는 건 아니지 않아?”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전에 귀걸이 사건도 나한테 설명했어. 친구가 자신을 속인 거래, 원지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리고 너한테 보낸 문자도 그저 내에 관해 알고 싶어서 그런 거래. 게다가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또 원지훈은 내가 원하는 거라면 다 해주고 사람 달랠 줄도 아는데 왜 애인으로 알맞지 않다는 거야? 성아연도 나한테 이런 남자가 쥐락펴락하기 쉽다고 나한테 어울린다고 했어.”“성아연?”고은서는 중점을 잡아냈다.“언제 성아연이랑 친해진 거야?”고은혜는 고은서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네가 성아연이랑 절친인 건 알겠는데 내가 성아연이랑 친해지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고은서가 답했다.“이젠 절친이 아니야. 그보다 어떻게 연락이 닿은 거야? 성아연이 너한테 먼저 연락했어?”고은혜는 전미자 할머니 생신날에 MQ가 큰 합작을 이뤄낸 게 성아연 아버지 성동욱 덕분이라고 이실직고했다.“엄마가 성씨 집안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성아연을 우리 집에 여러 번 초대했었어. 저번에 마침 나도 집에 있어서 자연스레 내 카톡 추가해서 심심
이어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회장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곽현수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지?’그녀는 본가에서 곽현수와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서연정과 사이가 안 좋아서 본가로 안 오나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언니, 우리 사진 찍자.”곽승연이 좋아하며 그녀를 불렀다.고은서는 곽승연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반 시간 후, 서연정이 곽승연에게 먹일 약과 물을 들고 정원으로 찾아왔다.곽승연은 별다른 불만 없이 약을 먹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기뻐하며 고은서한테 함께 숨바꼭질을 놀자고 졸랐다.고은서는 곽승연이 이리도 유치한 유희를 놀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필경 그녀에게 있어서는 초등학교 때까지만 놀던 유희였으니까 말이다.“집에 있는 하인들이 승연이를 어린아이로 대하면서 함께 숨바꼭질을 한 적이 있는데 아마 재미를 들인 모양이야.”서연정이 대신 설명해줬다.고은서는 곽승연과 놀아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곽현수와 마주치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서연정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승연이 아빠는 어머니한테 불리워 가서 마주칠 일 없을 거야.”고은서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본가 안으로 돌아갔을 때 서연정 말대로 곽현수와 전미자가 보이지 않았다.곽승연이 평소에 이 층에서 지내면서 이 층과 삼 층에서 많이 놀곤 해서 고은서는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숨바꼭질을 할 방과 범위를 정한 다음 그들은 함께 게임을 할 하인 몇 명을 더 불렀다.“승연이를 너무 얕보지 마. 사람 찾는데 엄청 능해.”게임 시작 전에 서연정이 고은서에게 미리 말해줬다.고은서는 처음에 서연정의 말을 별로 새겨듣지 않았는데 곽승연한테 여러 번 잡힌 이후로 서연정이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믿게 되었다.승부욕이 생긴 고은서는 이번엔 확실하게 꽁꽁 숨겠다고 마음먹었다.이 층에 있는 방들
그러나 바로 그때, 서연정이 곽승연이 고은서를 보고싶어 한다면서 본가로 와줄 수 없냐면서 연락이 왔다.그날 이후로 곽승연의 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 했는데 모처럼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그녀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곽승재는 의외로 고은서가 제인 제약에서 나올 때까지 그녀한테 말을 걸지도 않았고 미팅이 끝난 이후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아직 시간이 많았기에 고은서는 송민아를 먼저 회사로 데려다주기로 했다.“고은서, 곽승재가 아직도 너한테 미련 남아 있어 하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고서야 제인 제약 같은 프로젝트에 직접 나설 필요가 없잖아.”송민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그래?”“그렇다니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으면서도 네가 발언하러 올라갈 때부터 너한테서 시선을 뗀 적이 없다니까. 엄청 미련 담긴 눈빛으로 널 바라보고 있었어. 엄숙한 자리만 아니었으면 동영상이라도 찍어서 민시후한테 보내주는 건데.”고은서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두 사람 사이 안 좋은 거 알잖아. 그만 약 올려.”“약 올리다니? 민시후한테 약간의 압력을 주려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으면 종일 자신밖에 모르면서 거만하게 군다니까. 잠깐만. 그러니까 너 지금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에 함께 어머니 묘에 다녀왔어.”송민아는 멈칫하더니 자세를 바꾸며 등을 좌석에 붙이면서 말을 이어갔다.“아줌마가 거의 사십 세가 되어서 민시후를 낳아서 엄청 이뻐했거든.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나도 장례식에 갔었어. 그리고 그곳에서 민시후가 슬퍼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전엔 누구한테도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 너한테 주동적으로 알려줬다는 건 널 신임하고 있다는 뜻일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너처럼 힘든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길 다 하고 그러는 거야?”송민아는 피식 웃으면서 답
응접실에 있는 곽승재를 본 송민아는 고은서를 힐끗 보았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녀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민시후가 전에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직접 책임질 거라고 했는데 사실이었네.’곽승재는 제인 제약 응접실에서도 분망하게 주민기가 건네주는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고 매니저님, 오셨어요? 회의실 이미 다 준비되었으니까 먼저 들어가 계세요.”제인 제약의 직원이 고은서한테 인사하며 말했다.곽승재도 고 매니저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아직 근무 상태에 빠져 있어서인지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차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은서를 본 그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듯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고 매니저님.”주민기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다시 삼키고 제인 제약 직원을 따라 그녀를 고 매니저라고 불렀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송민아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고은서 씨!”문을 들어서려던 순간 여시은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고은서는 송민아를 먼저 회의실로 들여보내고 의아해하며 여시은을 향해 물었다.“시은 씨도 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참여했나요?”여시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저 이런 방면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어요. 그저 아빠가 곧 GS그룹이랑 협력하게 되는데 미리 곽 대표님 곁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해서 따라온 것뿐이에요.”여시은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저도 어쩔 수 없이 서류를 작성해서 곽 대표님한테 봐달라고 했는데 오후에 시간이 없으시다고 하는 바람에 직접 이곳으로 가져온 거예요.”‘민시후가 전에 여씨 가문이랑 GS그룹이 협력한다고 알려줬었는데 순리롭게 진행된 모양이네.’“곽승재 저기 있으니까 얼른 가봐요.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은서 씨, 혹시 토요일에 시간 되나요? 제가 해성에서 집을 마련해서 토요일에 집들이하려고 하는데 은서 씨도 초대하고
민시후는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경고하는데 날 넘보지 마. 나 당신 매부가 될 생각 없어. 그리고 얼른 고은서한테 나랑 송민아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약혼도 그저 해본 소리라고 설명해줘.”“그만해.”고은서가 민시후를 쏘아보며 말했다.그녀는 단 한 번도 그와 송민아 사이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아마 송민아가 그에게 미련이 남아있을까 봐 이런 말을 하는 듯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꾸지람 소리에도 화내지 않고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알겠어. 네 말 들을게. 안 말하면 되지?”방금전까지만 해도 껄렁대던 그가 갑자기 처음 보는 온순한 모습으로 변하는 바람에 송민아와 송민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은서도 할 말을 잃었다.저녁 식사는 예상 밖으로 평화롭게 끝났다.민시후는 시도 때도 없이 남친처럼 고은서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도중에 민시후는 손 씻으러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고 송민아도 마침 웨이터를 부르러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룸 안에 송민준과 고은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송민준은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은서 씨, 시후가 여자애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은 저도 처음이에요. 은서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네요.”고은서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민아 때문에 지금까지 사귀지 않는 건가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민아가 내려놓겠다고 말한 이상 더는 시후한테 집착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고집이 세긴 하지만 마음씨는 착한 애예요.”“민아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민시후랑 더 깊이 알아가려고 그러는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마침 민시후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송 대표님, 요즘 해성에서 사업한다고 들었는데 이젠 해성으로 들어오려고 결정 내린 거야?”민시후가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그저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어서 시도해보려 한 것뿐이야. 해성으로 들어오려거든 아직 너무 이르잖아.”송민준이 웃으면서 답했다.고
다름 아닌 송민준과 송민아였다.송민아는 예전의 부잣집 아가씨 모습과 달리 간단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직장 여성의 기품이 느껴졌다.옆에 있는 송민준은 맞춤 제작 정장을 입고 아주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만 보아도 상위자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고은서를 본 송민아는 약간 의아해하긴 했지만 먼저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은서야, 너도 여기 밥 먹으러 온 거야? 이렇게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러게 말이야.”고은서가 나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반면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물었다.“오빠 따라온 거 아니거든요. 우리 오빠가 밥 사준대서 온 것뿐이에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고요.”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시후야, 내가 고른 곳이야. 민아랑 상관없어.”송민준이 옆에서 설명했다.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랜만이에요, 은서 씨.”송민준이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인사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오랜만입니다, 민준 씨.”“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할까요?”송민준이 먼저 요청을 보냈다.“오빠, 그냥 우리끼리 먹어.”송민아는 민시후가 병원에 있을 때 고은서가 매일 찾아가서 함께 시간 보낼 정도로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행여나 민시후가 자신이 일부러 쫓아온 거라고 오해라도 할까 봐 황급히 송민준을 막았다.송민아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본 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여기서 만난 데다가 다 서로 아는 사이인데 같이 식사해요.”민시후는 두 사람과 같이 밥 먹기 싫었지만 고은서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레스토랑에 들어간 후 네 사람은 웨이터를 따라 한 룸으로 들어갔다.송민준은 매너 있게 메뉴판을 고은서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은서 씨가 좋아하는 메뉴로 주문하세요.”“저는 다 괜찮으니까 민준 씨가 하세요.”
아침은 홍콩식 딤섬집에서 먹기로 했다.민시후가 미리 예약해놓은 덕분에 자리에 앉자마자 각종 딤섬이 오르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그중에서 새우만두를 맛보았는데 아주 맛있었다.반면 민시후는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고은서가 그를 재촉했다.“빨리 먹어. 조금 이따 투자 은행 직원들이랑 미팅해야 하잖아.”“비서한테 미팅을 내일로 미루라고 말해두었어.”민시후가 그녀에게 군만두를 집어주면서 말했다.“왜?”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백씨 집안 기업에 엄중한 문제가 생겼잖아. 네가 원지훈한테 알려줬던 그 프로젝트가 망하는 바람에 백씨 집안 기업이 곧 파산하게 생겼어. 그 말인즉슨 지금이야말로 백씨 집안 기업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딱 좋은 타이밍이란 뜻이지.”‘벌써 파산한다고? 곽현수가 뒤에서 계속 도와주고 있는 거로 아는데. 게다가 그 프로젝트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백유미는 가만있었단 말이야?’고은서는 약간 의아해했다.“아침에 소식 전해 들었는데 웬일인지 백유미가 어젯밤에 손가락 하나가 단절되어서 수술실로 들어갔다가 우연하게 임신한 지 두 주일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대.”‘백유미가 임신했다고? 두 주일이라면 T국에 있을 때 그 남자들이 한 짓인가?’그녀의 의문을 알아본 민시후가 말을 이어갔다.“백유미 임신 소식을 전해 들은 범가온이 기어코 원지훈 애라면서 죽어도 그 애를 낳아야 한다고 고집부리고 있대.”고은서는 놀라움을 머금지 못했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 백유미가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약을 썼는데 그 애가 성하겠어? 애가 성하다고 해도 꼭 원지훈 애라는 보장은 없잖아. 게다가 두 사람 사촌 오누이 아니야?’“친척 관계로 따지면 사촌 오누이가 맞는데 사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혈연관계도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범가온이 더 악을 쓰고 고집부리는 거야.”“그런데 전에는 범가온이 원지훈 일 때문에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지 않았어? 백유미가 범가온 말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가 했다는 확실한
얼마 후, 병실에서는 귀가 째지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그러나 정신병원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극을 받은 환자들이 유사한 소리를 내곤 했다.오늘 밤은 유달리 시끄럽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이튿날.고은서는 칫솔하고 세수를 마치자마자 민시후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곧 아파트 밑에 도착하니까 함께 아침 먹으러 가자고 내려오라는 전화였다.옆에서 듣고 있던 박지연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누가 들으면 두 사람이 서로 못 본 지 몇 년은 되는 줄 알겠어.”고은서는 그녀를 쏘아보면서 답했다.“어제 집 들어오면서 다 들었거든. 육현석이랑 통화하고 있었지?”그러나 박지연은 아주 태연하게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평소에도 자주 연락하는데. 별다른 의미가 없어. 그보다 삼촌 생신 쇠주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은 왜 안 알려주는 거야?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어제 곽승재 때문에 기분을 망친 데다가 박지연이 육현석이 한창 즐겁게 통화하고 있는 바람에 그녀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미처 말해주지 못하고 씻자마자 잠에 들었다.그래서 이 기회에 박지연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곽승재는 밥 안 먹고 갔단 말이야?”박지연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쌤통이야.”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속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네가 민시후한테 더 잘해주니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서 참지 못하고 먼저 간 게 분명해. 그런데 사실 민시후도 곽승재보다 못한 곳은 없잖아. 그럼 삼촌이랑 숙모도 더는 곽승재랑 재결합하라고 너한테 조르지 않겠네.”“아마 말해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요즘에는 잔소리가 전보다 많이 뜸해졌어.”고은서는 무언갈 떠올린 듯 말을 보태었다.“그런데 어제 외숙모가 민시후에 관해 많이 묻던데 조금 이따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둬야겠어.”“삼촌이랑 숙모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다들 거리 두는 데는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데 민시후가 껄렁대는 것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네 삼촌
곽승재는 점차 인내심이 바닥났다.“변명 그만해. 어쩔 수 없었다고? 어쩔 수 없어서 우리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귀국한 거야? 전에도 몇 번이고 너한테 돈 주면서 일해달라고 부탁한 거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런데 T국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 아버지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잖아. 심지어 네가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잖아!”곽현수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려던 백유미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녀는 곽승재가 사건이 터지자마자 자신의 아버지부터 조사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T국에서 있었던 납치 사건을 주도한 사람 너 말고 대체 누가 더 있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백유미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 파일을 확인하자마자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조사해 보았는데 출저를 찾을 수가 없었다.당사자 백유미에게 캐물어도 끝까지 부인하는 바람에 배후에 대체 누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정상인이라면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죄를 씻어내려고 하겠는데 백유미는 처음부터 단연코 거절해버렸다.그 덕분에 곽승재는 백유미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고은서를 해치려 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곽현수가 백유미를 도우려 한다고 해도 사실상 그녀를 감옥으로 보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배후에 있는 사람을 끄집어내지 않고서는 그는 도무지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숨긴다고 소용없어. 고은서를 납치할 때 녹음되었던 파일들이 유출된 이상 넌 이미 희생양이 된 셈이야. 그 누구도 널 구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지.”백유미는 곽승재가 한 말들이 다 사실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T국에 들어서자부터 원지훈의 배신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나타난 곽승재까지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정체와 계획도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원지훈을 죽이고 자살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관건적인 시각에 녹음 파일까지 유출되었다.모든 책임을 그녀와 원지훈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 뻔했다.백유미에게는
백유미는 사실 범가온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곽승재가 범가온을 위해 나서주지만 않았더라면 백유미는 애초에 그녀를 T국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러나 백유미는 그가 정신질환 감정까지 도와주면서 범가온을 자신과 같은 정신병원에 들여보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백승엽이 간병인을 고용했다고 해도 범가온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 앞에 나타나 욕설을 퍼부으며 심할 때는 미친 듯이 그녀를 때리기도 했다.전에 고은서 일 때문에 몇 번이고 곽현수한테 도움을 청했는데 형사 처벌을 피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그 이상은 도우려고 해도 곽승재가 오랫동안 GS그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바람에 함부로 그와 맞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백유미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협조하지 않는 한 곽승재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걸 며칠 동안 깊이 깨달았으니까 말이다.“승재야, 내가 모든 걸 다 털어놓기 전에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백유미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곽승재를 바라보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들어줄 생각 없어.”곽승재가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그런데 물어보지 않고서 차마 내가 알고 있는 걸 제대로 털어놓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그냥 범가온 손에 죽게 내버려 둬. 대신 넌 누가 고은서를 해치려 하는지 영원히 모르게 될 거야.”백유미는 용기가 생긴 듯 턱을 빳빳이 치켜올리면서 비아냥거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물어보고 싶은 게 대체 뭔데?”곽승재가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백유미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애원하는 말투로 물었다.“왜 T국에서 날 구한 거야? 날 죽게 내버려 두어도 됐었잖아.”곽승재는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널 구하려던 게 아니었어. 나도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어.”곽승재가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백유미는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며 지금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