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고 있는 듯했다. 고은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은서, 전에는 백유미가 신고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백유미가 신고하려거든 상처받는 건 너뿐이야.”곽승재가 말했다.고은서는 눈길을 돌리고 답했다.“내가 어떻게 되는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곽승재는 고은서의 턱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넌 내 아내야. 네 일이라면 다 나랑 상관있는 일이라고.”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으면 난 당신 아내가 아니야.”“고은서, 난 이혼할 생각이 없어.”곽승재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네가 집에서 나간 후로 적응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모습을 볼 때도 마음이 불편해. 나 너한테 감정이 생긴 것 같아.”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전생에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그 말을 지금 이렇게 곽승재 입으로 듣게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전생의 곽승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기 싫어했으니 말이다.이번 생만큼은 이혼하고 곽승재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도 우스웠다.‘전생의 내가 참 비참하기도 했지.’“넌 날 사랑해서 나랑 결혼한 거잖아. 그럼 지금에 와서 꼭 이혼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우리 서로에게 한 번씩 기회를 줄 수는 있잖아.”곽승재가 그녀에게 이혼하지 말자고는 여러 번이고 말했었지만 지금처럼 사랑까지 얘기 하면서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아마 진짜 이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자존심으로 이렇게 끌어가면서 이혼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나...”쿵.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언가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고은혜가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딪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나,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 금방 문앞에 도착한 거야!”고은혜가 황급히 변명했다.“얘기 나눠.”
고은서는 고은혜를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네 마음속에선 원지훈이 괜찮은 사람이야?”‘원지훈 조건으로 고씨 집안 기사가 되려고 해도 어림없는데 괜찮다고?’고은혜는 고은서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다.“당연히 곽승재랑은 비교가 안 되지. 그런데 곽승재보다 더 출중한 사람이 원래 얼마 되지도 않잖아. 게다가 원지훈 집안도 사업하는 집안이고 또 본인도 요즘 창업하고 있는데 회사 규모도 나쁘지 않고 머리고 꽤 영리하고. 누가 알아, 언젠가는 우리 MQ까지 넘어서는 존재가 될지.”고은서는 절대 그가 MQ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고, 그의 회사가 곧 망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원지훈 조건은 그렇다고 쳐. 그런데 결혼 상대를 찾을 때는 적어도 상대방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고려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조건만 보고 인품을 안 보는 건 아니지 않아?”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전에 귀걸이 사건도 나한테 설명했어. 친구가 자신을 속인 거래, 원지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리고 너한테 보낸 문자도 그저 내에 관해 알고 싶어서 그런 거래. 게다가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또 원지훈은 내가 원하는 거라면 다 해주고 사람 달랠 줄도 아는데 왜 애인으로 알맞지 않다는 거야? 성아연도 나한테 이런 남자가 쥐락펴락하기 쉽다고 나한테 어울린다고 했어.”“성아연?”고은서는 중점을 잡아냈다.“언제 성아연이랑 친해진 거야?”고은혜는 고은서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네가 성아연이랑 절친인 건 알겠는데 내가 성아연이랑 친해지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고은서가 답했다.“이젠 절친이 아니야. 그보다 어떻게 연락이 닿은 거야? 성아연이 너한테 먼저 연락했어?”고은혜는 전미자 할머니 생신날에 MQ가 큰 합작을 이뤄낸 게 성아연 아버지 성동욱 덕분이라고 이실직고했다.“엄마가 성씨 집안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성아연을 우리 집에 여러 번 초대했었어. 저번에 마침 나도 집에 있어서 자연스레 내 카톡 추가해서 심심
“알았어, 알았어.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심하네.”고은혜는 기분이 금세 풀렸는지 고은서의 말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기뻐하며 방문을 나섰다.고은서는 고은혜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은혜가 나한테 먼저 말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러고 보니 원지훈과 만날 때도 된 것 같네.’고은서는 원지훈에게 귀국했다고 톡을 보냈다.그러자 내일 오후에 만나자고 칼답이 왔다.폰을 내려놓고 답답해서 바람도 쐴 겸 베란다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누우려고 할 때 옆방 베란다에 서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고은서가 사준 잠옷을 입고 회사 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통화를 마친 후 그도 베란다에 있는 고은서를 발견했다.두 사람은 서로 한참 마주 보고 있었다.“고은서, 내가 아까 했던 말 잘 생각해봤어?”밤하늘 아래에 서 있는 곽승재는 여느 때보다 더 매력적이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말했다.“전에 M에서 말했다시피 난 당신에게 더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당신이 나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내가 이혼하려는 결정은 변치 않을 거야.”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한참 서 있다가 방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저녁 바람을 좀 쐬다가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이튿날, 그녀가 일어났을 때 곽승재는 이미 이른 아침부터 나갔고 고은혜도 학교로 갔다.아침을 먹고 고준석과 함께 아침 운동까지 하고 방으로 돌아가 폰을 확인하니 박지연한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였다.‘뭐가 이리 급한 거지?’고은서가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은서, 너 지금 어디야?”박지연의 목소리가 꽤 심각해 보였다.고은서도 따라 긴장해졌는데 갑자기 전에 했던 건강검진이 떠올랐다.“왜 그래? 내 위에 문제라도 생겼어?”박지연이 답했다.“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고은서는 더 긴장되었다.“먼저 알려줘. 그렇지 않으면 나 긴장해서 운전도 못 해.”“위에는 아무 문제 없어.”“다행이다. 다른 병은 더 쉽게 이겨낼 수
박지연이 말했다.“곽승재가 백유미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약간의 미흡한 점이 있긴 했는데 육현석은 이 사이에 오해가 존재한다고 했어. 게다가 곽승재가 아직도 널 좋아하는 건 확실하잖아. 그러니까 만약 이혼하려는 의사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해도 난 네 선택을 존중해.”고은서는 더 어리둥절했다.“지연아, 할 말이 있다고 날 불러 내놓고 할 말이 고작 그거야? 내가 왜 이혼하려고 하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잘 알고 있는데 네가 이혼할 염원이 그렇게 강렬했으면 왜 피임조치도 하지 않았냐고.”박지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고 싶어서 했다고 해도 피임조치는 왜 안 한 건데?’고은서는 오리무중에 빠졌다.“피임조치?”박지연은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고은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너 임신했어!”“임신?!”고은서가 소리 지르면서 놀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에 있던 물방울들이 이리저리 튕겼다.옆방에 있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랐는지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밖에 있던 미용사가 황급히 들어와서 고은서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손님, 얼른 다시 누우세요. 그렇지 않으면 손님 옷이 다 젖을 수가 있어요.”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머리가 멍해져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미용사가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의 머리를 닦아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손님, 괜찮으세요?”“수건 저한테 주시고 나가보세요.”박지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미용사에게 말했다.미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박지연에게 건네주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박지연은 고은서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고은서,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놀라서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서 물었다.“지연아, 확실해? 나 진짜 임신했어?”박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오전에 네 진단서 가지러 갔는데 다른 곳에는 별문제가 없고 임신했다고 쓰여져 있던데.”“그게
고은서는 박지윤 덕에 머리를 말리고 미용실에서 나왔다.“차키 줘. 내가 운전할게.”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차키를 박지연에게 건네주었다.미용실.아주 정성껏 꾸민 여자 한 명이 룸에서 걸어 나왔다.“손님, 헤어디자인 해드릴까요?”헤어디자이너가 물었다.여자의 온화한 웃음 속에는 악랄함이 숨겨져 있었다.“아니에요.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병원 복도.고은서는 임신 삼 주라는 진단서를 들고 아직도 방금전의 당황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위암이라는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지만 임신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못했다.심지어 곽승재를 아이를 임신하는 건 더더욱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하늘이 나를 놀리는 건가? 곧 이혼할 예정인데 갑자기 아이가 생기다니.’“고은서, 너 어쩔 거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너무 긴장한 탓에 손발이 차가워났다.“나도 잘 모르겠어.”아이를 가져본 건 처음이라 기쁘다기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아이를 없애려거든 너무 잔인한 것 같았고 또 아이를 낳으려거든 일이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았다.“곽승재한테는 알려줄 거야?”“아니!”이것만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곽승재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이혼이 더 어려워질 것이고 고준석과 전미자가 알게 되면 어려움이 한층 더 가해질 것이다.그녀는 아이 때문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설마 혼자 몰래 낳으려는 건 아니지?”박지연이 또다시 물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자신의 엄마처럼 싱글맘이 될 용기는 없었다.사실 박지연의 연이은 물음 속에 고은서는 이미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은 듯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고 힘겹게 물었다.“나 같은 상황은 언제 수술이 가능해?”박지연은 애써 괜찮은 척하는 고은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은서야, 이렇게 빨리 결정 내릴 필요 없어. 며칠 더 생각해보고 결정 내려도 돼.”그러나 이혼하려거든 이 아이를 남기지 않는 게
아이가 5주가 되려면 아직 2주나 기다려야 했다.당장 수술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지 긴장했던 고은서의 몸은 그제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지금 예약해야 해?”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 그때 가서 태아 상태 한번 확인해 보아야 구체적인 수술 날짜를 정할 수 있어. 가자, 호텔로 바래다줄게.”앉아 있던 고은서를 일으켜 세운 박지연은 그제야 고은서의 손이 땀범벅이 되었음을 눈치챘다.박지연은 안타까움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은서야, 아이를 지우지 않아도 돼. 낳고 싶으면 나아. 환각제를 먹으면 아이의 건강 리스크가 증가할 뿐이야. 평소에 건강하고 체력도 좋고 나쁜 습관도 없었으니 아이한테도 큰 영향이 없을 거야. 좀 더 지켜보다가 종합 검진을 해보면...”“그럴 필요 없어.”고은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가자.”박지연도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소식에 고은서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지연은 오후에 다시 출근해야 해서 고은서는 혼자 호텔에서 쉬게 되었다.“정말 괜찮아? 오후에도 반차 내고 같이 있을까?”안심이 되지 않은 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가 그녀를 한번 바라보더니 말했다.“얼른 출근해. 임신한 거지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죽는 사람처럼 대하지 마.”고은서의 농담에 박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혼자 있으면 처량해 보일까 봐 그러지. 보통 여자들은 임신하면 남편한테 자랑하면서 기쁨을 나누는데 너는 숨길 수...”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지연은 괜한 소리를 했다는 것을 의식했다.“아... 미안해. 일부러 아픈 곳 찌르려고 그런 게 아니야. 곽승재 아이니까 얘기해도 되지 않나 싶어서 그랬어. 얘기해서 반응이 어떤지...”“말하면 안 돼. 아, 맞다. 비밀 지켜줘야 해. 육현석한테도 말하지 마.”비록 겉으로는 고은서를 응원하는 육현석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곽승재를 더 많이 위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육현석이 이 사실을 알면 제일 먼저
고은서는 의아함을 느꼈다.‘이 시간에 누구지?’문 구멍으로 내다보니 뜻밖에서 송민아가 서 있었다.이틀 전 공항 주차장에서 그녀와 민시후의 대화로 인해 화가 나 뛰쳐나간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그때 일에 앙심을 품고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지?’“은서 씨, 문 좀 열어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송민아도 문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은서는 하는 수 없이 방문을 열었다.호텔이다 보니 안전은 보장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송민아가 정말 문제를 일으키려고 한다면 한번은 피할 수 있어도 계속되는 공세는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고 또 곧 같은 일을 도모하게 될 사이었다.방문이 열리자 송민아가 안으로 들어왔다.고은서는 좋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을 권했다.“안 마셔요!”송민아는 단호히 거절했다.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붉어진 눈가는 마치 무슨 절망적인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와 질투가 서려 있었다.“민아 씨, 왜 그래요? 누가 괴롭혔어요?”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고은서가 물었다.그 말을 들은 송민아는 더 화가 나서 외쳤다.“당신 때문이잖아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날은 제가 먼저 차에 타라고 초대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민아 씨가 민시후의 헛소리에 화를 못 이겨 뛰쳐나갔죠. 이제 와서 왜 제 탓을 해요?”송민아가 분노에 차 외쳤다.“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가 그거 때문은 아니란 거 알잖아요!”‘내가 뭘 안다는 거지?’갑자기 찾아와서 행패 부리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라도 왜 이러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었다.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민아 씨, 할 말 있으면 그냥 직접 하세요. 제 시간도 소중해요. 민아 씨 화 받아줄 시간은 없단 말이에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물병을 열어 물을 마셨다.“당신...”송민아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겨우 진정한 송민아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시후 오빠한테 아무 관심도 없다면서요
그중 제일 중요한 사실은 민시후가 저도 모르게 고은서의 방에 두 시간 동안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이었다.‘진작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오해하면서 있은 거야?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찾아온 건가?’“정말 후회해요. 시후 오빠가 은서 씨랑 가깝게 지낸다는 거 알면서도... 두 사람이 같이 술 마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해성으로 와야 했어요. 그러면 호텔 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오밀조밀한 송민아의 얼굴에 후회가 비쳤다.“아니다. 그냥 돌아가지 말았어야 해요. 계속 해성에 남아서 시후 오빠를 지켜봐야 했어요.”‘그날 송민아가 해성에 없었구나.’“민아 씨, 어떻게 이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고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예요?”고은서는 도저히 송민아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곽승재와 내가 사이가 어떻든 그래도 부부인데 왜 그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는 거지?’“시후 오빠 아이가 아니면 누구 아이죠? 호텔에서 머무는 걸 보면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감정의 골이 깊은 두 사람이 어떻게 아이를 만들겠어요?”화가 난 송민아가 말을 이었다.“남편은 지금도 안 왔잖아요.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리지 못했죠?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서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임신했다는 사실을 밖에 알리지 못하는 거잖아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송민아의 분석력과 논리력은 민시후와 맞먹었다.어느 한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민시후 때문은 아니지만 고은서는 임신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고은서가 송민아에게 물었다.“그럼 민아 씨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저를 찾아온 거죠?”해명도 없고 민시후와의 사이도 부정하지 않는 고은서를 바라본 송민아가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당연히 아이를 지우라고 하려고 왔죠! 저야말로 시후 오빠의 미래 와이프예요. 절대로 오빠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은 없어요!”눈시울이 붉어진 송민아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몸 관리하는 데 드는 비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형,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저 악몽 꾼 걸 거야.”비록 고은서의 변화와 곽승재의 말들을 잘 되새겨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육현석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형수님처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의 주장도 과감하게 제기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은 일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다는 거야?”그러나 곽승재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육현석의 말대로 고은서는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을 느껴서였을까?’“형, 방금전에 백유미 찾아가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육현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손에 있는 증거를 경찰 측에 넘기면 되잖아. 왜 굳이 직접 찾아간 거야?”곽승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증거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수상해.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뭐? 누군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육현석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그저 내 직감일뿐이야.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해.”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튿날, 고은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약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띄엄띄엄 어지러워 났다.“고은서!”그녀가 누워서 좀 더 쉬려고 할 때 박지연이 흥분해 하며 병실로 달려 들어왔다.“빅뉴스야!”반면 고은서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뭔데?”“백유미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갔대.”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누가 때린 건데?”“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봐.”박지연이 웃으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T국에 있는 백유미랑
곽승재는 육현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아침의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은서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살이 빠져있었고 얼굴도 전과 다르게 핼쑥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다르게 꿈속의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냉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고은서는 이미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었다.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형, 왜 그래...”육현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 형 지금 눈시울이 빨개진 거야?’오랫동안 곽승재와 지내오면서 그의 이런 모습은 육현석도 처음이었다.마치 하나뿐인 동반자를 잃은 늑대처럼 처절하고 비참하면서도 후회막심해 보였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육현석이 위안했다.곽승재는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어제 백유미가 칼을 들고 자살하려고 할 때 유난히 당황스러웠어. 마치 백유미를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난 후로 그 이유를 알겠더라. 고은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땐 내가 미처 구하지 못했다는 걸.”“그러니까 지금 전생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지? 방금전에 말한 일도 전생에 발생한 일이고.”육현석이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아주 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꿈에서 봤던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이런 모습이 약간 적응되지 않았다.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이며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없었던 곽승재가 갑자기 전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형, 그저 꿈일 뿐이야. 너무 자책하지마.”육현석이 애써 그를 위안
목소리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민시후는 아주 똑똑히 들었다.그는 육현석을 힐끗 째려보고는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떨며 말했다.“은서야, 방금 깎아준 사과 엄청 달고 맛있는데 한 조각만 더 먹여주면 안 될까?”나머지 세 사람은 충격적인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육현석은 진저리를 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민 대표님, 은서랑 얘기 더 나누세요. 저는 먼저 밥 먹으러 가볼게요.”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고는 쌩하고 달아났다.병실 안에는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다음에는 연기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따로 신호 보내주면 안 될까?”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곽승재 껌딱지 새끼를 가만두면 안 되지.”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한 시간 후, 육현석은 곽승재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형, 민시후 그 새끼 진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짝이 없어. 형수님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심지어 사과까지 먹여달라고 한다니까.”방금전 민시후의 모습을 떠올린 육현석은 씩씩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바라보는 눈길은 또 어찌나 오글거리던지. 형수님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환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달려가서 한 대 치는 건데.”그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그 많은 여자 중에서 왜 하필 형수님을 좋아한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육현석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형, 내 말 듣고 있어? 형은 화 안 나?”곽승재는 방금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육현석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하필 그 위급한 상황에 백유미를 구하려고 한 거야?”육현석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답답해 났다.“그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힘겹게 형수님을 찾았으면 당시 상황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형수님 곁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
박지연과 육현석이 나간 후 고은서는 민시후가 계속 마음에 걸려 그의 병실로 갔다.하지만 병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박지연의 말대로 목숨 바쳐 자신을 구한 민시후의 마음이 가식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고은서에게 있어 이건 하나의 부담과도 같았다.그녀는 민시후가 단지 자신을 놀리게 재밌어서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집착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곽승재를 엿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단 한 번도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고은서?”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문밖에 있지?”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내가 밖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의사와 간호사들은 문을 지키는 습관이 없거든.”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그런데 안 들어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민시후가 무언갈 눈치챈 듯 물었다.고은서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병상 옆으로 다가가 되물었다.“분명히 심하게 다쳤으면서 왜 거짓말한 거야?”‘아니지. 그저 스치면서 상한 거라는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심하게 다치지 않았으면 병상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민시후의 성격으로 내 병실로 찾아오지 않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았어. 적어도 곽승재보다는 심하지 않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젠 이런 것까지 비기는 거야?’민시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고은서를 보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내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그리 쉽게 죽을 인간이 아니야. 너한테 오랫동안 붙어 다닐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헛소리 좀 그만 쳐!”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알았어. 안 말하면 될 거 아니야.”민시후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먹을 거 가져왔다며. 뭘 가져왔는데?”“이거.”고은서가 손에 있는 사과를 들어 보
곽승재의 차갑고 결연한 표정을 본 백유미는 순간 불안해졌다.‘어느 부분에서 문제라도 생긴 건가? 고은서는 원지훈이 직접 T국으로 데려온 거고 프로젝트도 확실히 존재하는 거여서 내가 T국에 온 것도 아주 마땅한 일일 텐데. 심지어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도 이미 죽었는데 곽승재는 왜 자꾸 이 모든 게 다 내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면 고은서의 말이라면 이젠 굳게 믿는다는 건가?’백유미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있을 때 곽승재는 폰을 꺼내 녹음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T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고은서한테 들켜서는 안 돼. 이번 일까지 망치면 너랑 네 엄마 진짜 감방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다름 아닌 그녀와 원지훈의 대화 내용이었다.백유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등골이 오싹해 나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이건 어디서 난 거야... 누군가 날 모함하려고 하는 거야! 이거 합성한 거야. 승재야, 다시 한번 조사해봐. 난 억울하다고!”백유미가 소리쳤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른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그녀가 T국에 있는 사람과 협상한 내용부터 그녀가 짠 상세한 계획까지 다 녹음되어 있었다.그녀의 섬뜩한 목소리가 병실에서 유난히 잘 들렸다.“똑똑히 들었어? 다신 한 번 더 재생해줄까?”곽승재가 물었다.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진 그녀는 더는 새로운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승재야, 난... 난 그저 은서 씨를 간단하게 겁만 주려고 했어. 진짜 해칠 생각은 없었어.”“온갖 방법으로 은서를 속이면서 T국으로 데려간 것도 모자라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찾아놓고서 그저 겁만 주려고 했다고?”곽승재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승재야,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줘.”백유미는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병상에서 일어나 곽승재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내가 거짓말을 했어. 난 지금도 널 사랑하고 있어. 네가 고은서랑 이혼하면 나
고은서는 서로 물러서지 않으며 계속 다투려 하는 두 사람을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두 분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시지 그래요? 저 환자예요.”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그제야 방금전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깨달았다.“지연아,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육현석이 먼저 사과했다.“나 급하게 오느라고 밥도 못 먹었는데 넌 안 배고파? 같이 나가서 밥이라도 먹고 들어올래?”박지연은 갑작스레 바뀐 육현석의 태도에 약간 어색해졌다.“난...”그녀가 거절하려고 할 때 옆에 있던 고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둘이 같이 가서 먹고 와. 나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박지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다른 병실.백유미는 혼자 병상에 누워있었다.그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제일 심한 상처는 가슴 부근에 있는 자상이었는데 수술하면서 여러 바늘을 꿰맸다고 한다.바로 이때 누군가가 병실로 들어왔다.백유미가 눈을 뜨고 확인해보니 곽승재가 휠체어에 앉은 채 차가운 표정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약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고 허약하고 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승재야...”백유미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움직일 때마다 밀려오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백유미는 포기하고 병상에 누운 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재야, 지금 내 죄를 물으러 온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원지훈이 날 죽이려고 할 때 반항하지 말았던 거...”“원지훈이 널 죽이려 했는지 아니면 네가 원지훈을 죽이려 했는지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백유미는 눈이 휘둥그레서 의아해하며 물었다.“승재야,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살기 위해서 실수로 원지훈을 찌른 거야.”“그건 경찰 측에서 알아서 판단하겠지.”곽승재의 얼굴빛이 더 어두워졌다.“T국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 다 네가 꾸민 거잖아. 왜 은
박지연의 물음을 들은 고은서는 그녀를 힐끗 째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럼 물음 바꿔볼게. 깨어났을 때 민시후에 관해 먼저 물어봤잖아. 곽승재는 걱정되지 않았어?”박지연이 또다시 물었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굳이 피곤하게 걱정할 필요가 있나.’그녀는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박지연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 그냥 민시후랑 곽승재 중에서 누가 더 그쪽 마음에 드는지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죠.”“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아직도 곽승재한테 미련이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미련 남지 않았다면 민시후랑 사귀어 봐도 괜찮지 않아?”박지연이 헤헤거리며 말했다.“안 돼! 민시후랑 사귀면 안 된다고!”박지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실 밖에서 육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내 그가 병실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여긴 어쩐 일이야?”“승재 형이랑 형수님한테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당연히 보러 와야지. 지연아, 넌 왜 나한테 안 알려줬어. 알려줬으면 같이 왔을 텐데.”“미안, 나도 너무 급해서 미처 생각 못 했어.”비록 박지연이 자신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는 게 정상이긴 했지만 육현석은 저도 모르게 약간 속상했다.“형수님, 괜찮아요? 크게 다치진 않았죠?”“계속 형수님이라 부를 거면 나가요. 진짜 형수님은 다른 병실에 있으니까.”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그런데 고은서 씨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서먹해 보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두 살 더 많은데 누나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동생이라고 부르기에는 또 너무 오글거리잖아요. 그럼 그냥 말 놓으면서 은서라고 부를까요?”고은서는 형수님만 아니라면 호칭에 관해 별다른 요구가 없었다.“그냥 형수님만 아니면 돼요.”‘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엄청 집착했는데 이젠 형수님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진저리치네. 승재 형은 대체 형수님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거야.’“은서야, 승재 형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그러니까 승재 형한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