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고 있는 듯했다. 고은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은서, 전에는 백유미가 신고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백유미가 신고하려거든 상처받는 건 너뿐이야.”곽승재가 말했다.고은서는 눈길을 돌리고 답했다.“내가 어떻게 되는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곽승재는 고은서의 턱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넌 내 아내야. 네 일이라면 다 나랑 상관있는 일이라고.”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으면 난 당신 아내가 아니야.”“고은서, 난 이혼할 생각이 없어.”곽승재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네가 집에서 나간 후로 적응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모습을 볼 때도 마음이 불편해. 나 너한테 감정이 생긴 것 같아.”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전생에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그 말을 지금 이렇게 곽승재 입으로 듣게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전생의 곽승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기 싫어했으니 말이다.이번 생만큼은 이혼하고 곽승재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도 우스웠다.‘전생의 내가 참 비참하기도 했지.’“넌 날 사랑해서 나랑 결혼한 거잖아. 그럼 지금에 와서 꼭 이혼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우리 서로에게 한 번씩 기회를 줄 수는 있잖아.”곽승재가 그녀에게 이혼하지 말자고는 여러 번이고 말했었지만 지금처럼 사랑까지 얘기 하면서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아마 진짜 이혼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자존심으로 이렇게 끌어가면서 이혼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나...”쿵.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무언가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고은혜가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딪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나,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 금방 문앞에 도착한 거야!”고은혜가 황급히 변명했다.“얘기 나눠.”
고은서는 고은혜를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네 마음속에선 원지훈이 괜찮은 사람이야?”‘원지훈 조건으로 고씨 집안 기사가 되려고 해도 어림없는데 괜찮다고?’고은혜는 고은서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다.“당연히 곽승재랑은 비교가 안 되지. 그런데 곽승재보다 더 출중한 사람이 원래 얼마 되지도 않잖아. 게다가 원지훈 집안도 사업하는 집안이고 또 본인도 요즘 창업하고 있는데 회사 규모도 나쁘지 않고 머리고 꽤 영리하고. 누가 알아, 언젠가는 우리 MQ까지 넘어서는 존재가 될지.”고은서는 절대 그가 MQ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고, 그의 회사가 곧 망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원지훈 조건은 그렇다고 쳐. 그런데 결혼 상대를 찾을 때는 적어도 상대방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고려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조건만 보고 인품을 안 보는 건 아니지 않아?”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전에 귀걸이 사건도 나한테 설명했어. 친구가 자신을 속인 거래, 원지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리고 너한테 보낸 문자도 그저 내에 관해 알고 싶어서 그런 거래. 게다가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또 원지훈은 내가 원하는 거라면 다 해주고 사람 달랠 줄도 아는데 왜 애인으로 알맞지 않다는 거야? 성아연도 나한테 이런 남자가 쥐락펴락하기 쉽다고 나한테 어울린다고 했어.”“성아연?”고은서는 중점을 잡아냈다.“언제 성아연이랑 친해진 거야?”고은혜는 고은서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네가 성아연이랑 절친인 건 알겠는데 내가 성아연이랑 친해지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고은서가 답했다.“이젠 절친이 아니야. 그보다 어떻게 연락이 닿은 거야? 성아연이 너한테 먼저 연락했어?”고은혜는 전미자 할머니 생신날에 MQ가 큰 합작을 이뤄낸 게 성아연 아버지 성동욱 덕분이라고 이실직고했다.“엄마가 성씨 집안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성아연을 우리 집에 여러 번 초대했었어. 저번에 마침 나도 집에 있어서 자연스레 내 카톡 추가해서 심심
“알았어, 알았어.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심하네.”고은혜는 기분이 금세 풀렸는지 고은서의 말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기뻐하며 방문을 나섰다.고은서는 고은혜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은혜가 나한테 먼저 말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러고 보니 원지훈과 만날 때도 된 것 같네.’고은서는 원지훈에게 귀국했다고 톡을 보냈다.그러자 내일 오후에 만나자고 칼답이 왔다.폰을 내려놓고 답답해서 바람도 쐴 겸 베란다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누우려고 할 때 옆방 베란다에 서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고은서가 사준 잠옷을 입고 회사 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통화를 마친 후 그도 베란다에 있는 고은서를 발견했다.두 사람은 서로 한참 마주 보고 있었다.“고은서, 내가 아까 했던 말 잘 생각해봤어?”밤하늘 아래에 서 있는 곽승재는 여느 때보다 더 매력적이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말했다.“전에 M에서 말했다시피 난 당신에게 더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당신이 나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내가 이혼하려는 결정은 변치 않을 거야.”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한참 서 있다가 방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저녁 바람을 좀 쐬다가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이튿날, 그녀가 일어났을 때 곽승재는 이미 이른 아침부터 나갔고 고은혜도 학교로 갔다.아침을 먹고 고준석과 함께 아침 운동까지 하고 방으로 돌아가 폰을 확인하니 박지연한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였다.‘뭐가 이리 급한 거지?’고은서가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은서, 너 지금 어디야?”박지연의 목소리가 꽤 심각해 보였다.고은서도 따라 긴장해졌는데 갑자기 전에 했던 건강검진이 떠올랐다.“왜 그래? 내 위에 문제라도 생겼어?”박지연이 답했다.“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고은서는 더 긴장되었다.“먼저 알려줘. 그렇지 않으면 나 긴장해서 운전도 못 해.”“위에는 아무 문제 없어.”“다행이다. 다른 병은 더 쉽게 이겨낼 수
박지연이 말했다.“곽승재가 백유미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약간의 미흡한 점이 있긴 했는데 육현석은 이 사이에 오해가 존재한다고 했어. 게다가 곽승재가 아직도 널 좋아하는 건 확실하잖아. 그러니까 만약 이혼하려는 의사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해도 난 네 선택을 존중해.”고은서는 더 어리둥절했다.“지연아, 할 말이 있다고 날 불러 내놓고 할 말이 고작 그거야? 내가 왜 이혼하려고 하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잘 알고 있는데 네가 이혼할 염원이 그렇게 강렬했으면 왜 피임조치도 하지 않았냐고.”박지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고 싶어서 했다고 해도 피임조치는 왜 안 한 건데?’고은서는 오리무중에 빠졌다.“피임조치?”박지연은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고은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너 임신했어!”“임신?!”고은서가 소리 지르면서 놀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에 있던 물방울들이 이리저리 튕겼다.옆방에 있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랐는지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밖에 있던 미용사가 황급히 들어와서 고은서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손님, 얼른 다시 누우세요. 그렇지 않으면 손님 옷이 다 젖을 수가 있어요.”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머리가 멍해져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미용사가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의 머리를 닦아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손님, 괜찮으세요?”“수건 저한테 주시고 나가보세요.”박지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미용사에게 말했다.미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박지연에게 건네주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박지연은 고은서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고은서,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놀라서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서 물었다.“지연아, 확실해? 나 진짜 임신했어?”박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오전에 네 진단서 가지러 갔는데 다른 곳에는 별문제가 없고 임신했다고 쓰여져 있던데.”“그게
고은서는 박지윤 덕에 머리를 말리고 미용실에서 나왔다.“차키 줘. 내가 운전할게.”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차키를 박지연에게 건네주었다.미용실.아주 정성껏 꾸민 여자 한 명이 룸에서 걸어 나왔다.“손님, 헤어디자인 해드릴까요?”헤어디자이너가 물었다.여자의 온화한 웃음 속에는 악랄함이 숨겨져 있었다.“아니에요.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병원 복도.고은서는 임신 삼 주라는 진단서를 들고 아직도 방금전의 당황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위암이라는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지만 임신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못했다.심지어 곽승재를 아이를 임신하는 건 더더욱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하늘이 나를 놀리는 건가? 곧 이혼할 예정인데 갑자기 아이가 생기다니.’“고은서, 너 어쩔 거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너무 긴장한 탓에 손발이 차가워났다.“나도 잘 모르겠어.”아이를 가져본 건 처음이라 기쁘다기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아이를 없애려거든 너무 잔인한 것 같았고 또 아이를 낳으려거든 일이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았다.“곽승재한테는 알려줄 거야?”“아니!”이것만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곽승재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이혼이 더 어려워질 것이고 고준석과 전미자가 알게 되면 어려움이 한층 더 가해질 것이다.그녀는 아이 때문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설마 혼자 몰래 낳으려는 건 아니지?”박지연이 또다시 물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자신의 엄마처럼 싱글맘이 될 용기는 없었다.사실 박지연의 연이은 물음 속에 고은서는 이미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은 듯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고 힘겹게 물었다.“나 같은 상황은 언제 수술이 가능해?”박지연은 애써 괜찮은 척하는 고은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은서야, 이렇게 빨리 결정 내릴 필요 없어. 며칠 더 생각해보고 결정 내려도 돼.”그러나 이혼하려거든 이 아이를 남기지 않는 게
아이가 5주가 되려면 아직 2주나 기다려야 했다.당장 수술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지 긴장했던 고은서의 몸은 그제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지금 예약해야 해?”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 그때 가서 태아 상태 한번 확인해 보아야 구체적인 수술 날짜를 정할 수 있어. 가자, 호텔로 바래다줄게.”앉아 있던 고은서를 일으켜 세운 박지연은 그제야 고은서의 손이 땀범벅이 되었음을 눈치챘다.박지연은 안타까움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은서야, 아이를 지우지 않아도 돼. 낳고 싶으면 나아. 환각제를 먹으면 아이의 건강 리스크가 증가할 뿐이야. 평소에 건강하고 체력도 좋고 나쁜 습관도 없었으니 아이한테도 큰 영향이 없을 거야. 좀 더 지켜보다가 종합 검진을 해보면...”“그럴 필요 없어.”고은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가자.”박지연도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소식에 고은서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지연은 오후에 다시 출근해야 해서 고은서는 혼자 호텔에서 쉬게 되었다.“정말 괜찮아? 오후에도 반차 내고 같이 있을까?”안심이 되지 않은 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가 그녀를 한번 바라보더니 말했다.“얼른 출근해. 임신한 거지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죽는 사람처럼 대하지 마.”고은서의 농담에 박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혼자 있으면 처량해 보일까 봐 그러지. 보통 여자들은 임신하면 남편한테 자랑하면서 기쁨을 나누는데 너는 숨길 수...”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지연은 괜한 소리를 했다는 것을 의식했다.“아... 미안해. 일부러 아픈 곳 찌르려고 그런 게 아니야. 곽승재 아이니까 얘기해도 되지 않나 싶어서 그랬어. 얘기해서 반응이 어떤지...”“말하면 안 돼. 아, 맞다. 비밀 지켜줘야 해. 육현석한테도 말하지 마.”비록 겉으로는 고은서를 응원하는 육현석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곽승재를 더 많이 위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육현석이 이 사실을 알면 제일 먼저
고은서는 의아함을 느꼈다.‘이 시간에 누구지?’문 구멍으로 내다보니 뜻밖에서 송민아가 서 있었다.이틀 전 공항 주차장에서 그녀와 민시후의 대화로 인해 화가 나 뛰쳐나간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그때 일에 앙심을 품고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지?’“은서 씨, 문 좀 열어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송민아도 문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은서는 하는 수 없이 방문을 열었다.호텔이다 보니 안전은 보장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송민아가 정말 문제를 일으키려고 한다면 한번은 피할 수 있어도 계속되는 공세는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고 또 곧 같은 일을 도모하게 될 사이었다.방문이 열리자 송민아가 안으로 들어왔다.고은서는 좋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을 권했다.“안 마셔요!”송민아는 단호히 거절했다.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붉어진 눈가는 마치 무슨 절망적인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와 질투가 서려 있었다.“민아 씨, 왜 그래요? 누가 괴롭혔어요?”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고은서가 물었다.그 말을 들은 송민아는 더 화가 나서 외쳤다.“당신 때문이잖아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날은 제가 먼저 차에 타라고 초대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민아 씨가 민시후의 헛소리에 화를 못 이겨 뛰쳐나갔죠. 이제 와서 왜 제 탓을 해요?”송민아가 분노에 차 외쳤다.“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가 그거 때문은 아니란 거 알잖아요!”‘내가 뭘 안다는 거지?’갑자기 찾아와서 행패 부리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라도 왜 이러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었다.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민아 씨, 할 말 있으면 그냥 직접 하세요. 제 시간도 소중해요. 민아 씨 화 받아줄 시간은 없단 말이에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물병을 열어 물을 마셨다.“당신...”송민아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겨우 진정한 송민아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시후 오빠한테 아무 관심도 없다면서요
그중 제일 중요한 사실은 민시후가 저도 모르게 고은서의 방에 두 시간 동안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이었다.‘진작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오해하면서 있은 거야?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찾아온 건가?’“정말 후회해요. 시후 오빠가 은서 씨랑 가깝게 지낸다는 거 알면서도... 두 사람이 같이 술 마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해성으로 와야 했어요. 그러면 호텔 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오밀조밀한 송민아의 얼굴에 후회가 비쳤다.“아니다. 그냥 돌아가지 말았어야 해요. 계속 해성에 남아서 시후 오빠를 지켜봐야 했어요.”‘그날 송민아가 해성에 없었구나.’“민아 씨, 어떻게 이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고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예요?”고은서는 도저히 송민아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곽승재와 내가 사이가 어떻든 그래도 부부인데 왜 그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는 거지?’“시후 오빠 아이가 아니면 누구 아이죠? 호텔에서 머무는 걸 보면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감정의 골이 깊은 두 사람이 어떻게 아이를 만들겠어요?”화가 난 송민아가 말을 이었다.“남편은 지금도 안 왔잖아요.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리지 못했죠?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서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임신했다는 사실을 밖에 알리지 못하는 거잖아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송민아의 분석력과 논리력은 민시후와 맞먹었다.어느 한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민시후 때문은 아니지만 고은서는 임신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고은서가 송민아에게 물었다.“그럼 민아 씨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저를 찾아온 거죠?”해명도 없고 민시후와의 사이도 부정하지 않는 고은서를 바라본 송민아가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당연히 아이를 지우라고 하려고 왔죠! 저야말로 시후 오빠의 미래 와이프예요. 절대로 오빠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은 없어요!”눈시울이 붉어진 송민아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몸 관리하는 데 드는 비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