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제일 중요한 사실은 민시후가 저도 모르게 고은서의 방에 두 시간 동안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이었다.‘진작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오해하면서 있은 거야?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찾아온 건가?’“정말 후회해요. 시후 오빠가 은서 씨랑 가깝게 지낸다는 거 알면서도... 두 사람이 같이 술 마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해성으로 와야 했어요. 그러면 호텔 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오밀조밀한 송민아의 얼굴에 후회가 비쳤다.“아니다. 그냥 돌아가지 말았어야 해요. 계속 해성에 남아서 시후 오빠를 지켜봐야 했어요.”‘그날 송민아가 해성에 없었구나.’“민아 씨, 어떻게 이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고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예요?”고은서는 도저히 송민아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곽승재와 내가 사이가 어떻든 그래도 부부인데 왜 그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는 거지?’“시후 오빠 아이가 아니면 누구 아이죠? 호텔에서 머무는 걸 보면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감정의 골이 깊은 두 사람이 어떻게 아이를 만들겠어요?”화가 난 송민아가 말을 이었다.“남편은 지금도 안 왔잖아요.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리지 못했죠?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서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임신했다는 사실을 밖에 알리지 못하는 거잖아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송민아의 분석력과 논리력은 민시후와 맞먹었다.어느 한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민시후 때문은 아니지만 고은서는 임신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고은서가 송민아에게 물었다.“그럼 민아 씨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저를 찾아온 거죠?”해명도 없고 민시후와의 사이도 부정하지 않는 고은서를 바라본 송민아가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당연히 아이를 지우라고 하려고 왔죠! 저야말로 시후 오빠의 미래 와이프예요. 절대로 오빠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은 없어요!”눈시울이 붉어진 송민아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몸 관리하는 데 드는 비
송민아가 오빠를 제외하고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민시후였다.정말 민시후를 불러온다면 혼나고 냉대를 받는 사람은 단연코 그녀일 것이다.“갈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의 말에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아이를 지우지 않으면 이 일은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예요.”말을 마친 송민아가 온 힘을 다해 문을 박차고 나가며 불쾌감과 화를 표출했다.고은서는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밥 먹으러 나갈 기분이 들지 않은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민시후의 번호를 눌렀다.“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우리 미녀분 아니신가.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다 한 거야?”민시후는 기분이 좋은 건지 껄렁한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고은서는 그에게 공사장의 일을 물었다. 민시후는 그저 평범한 해프닝이라고 답했다.“의심할 여지 없이 곽승재가 뭔가 수를 쓴 거지.”민시후는 의자를 돌리는 것 같았다.“은서 씨, 그러고 보니 곽승재도 은서 씨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네요?”더 이상 곽승재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민 도련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쪽부터 들을래?”“또 무슨 어려운 프로젝트야?”민시후가 심드렁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말을 늘어뜨리며 답했다.“프로젝트는 아니고 개인적인 일이야.”“오? 나한테 얘기할 개인적인 일이 있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고은서는 성공적으로 민시후의 호기심을 끌어냈다.“이제 우리 사이가 그 정도로 가까워진 거야?”“나를 짝사랑해서 M국까지 쫓아왔는데 그 정도 사이는 되지.”한번 맞받아친 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래서 좋은 소식 먼저 듣고 싶어? 나쁜 소식 먼저 듣고 싶어?”민시후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나쁜 소식 먼저 들을게. 좋은 소식으로 나빠진 기분 좀 가다듬어야지.”‘마음가짐이 나쁘지는 않네.’“송민아가 방금 나를 찾아왔어. 내가 입이 닳도록 최선을 다해 설득했지만 너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송민아랑 결혼해야겠는걸?”송민아 얘기가 나오자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더 이상 대화를 끌지 않고 말했다.“곽승재에게 임신 소식을 전할 생각 없어. 아이를 지울 생각이지만 지우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만약 곽승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네가 그 어떤 것도 부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어젯밤에 곽승재는 그녀에게 마음이 생겼다면서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해왔다.임신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혼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었다. 어쩌면 양가 어르신들을 내세워 그녀를 다시 예원 별장으로 들어가게 할지도 몰랐다.그래서 고은서는 민시후가 이 상황을 도와주길 바랐다.“쯧. 이렇게까지 이혼하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아이까지 생겼는데 곽승재에게 알리지 않는 거야?”“그래서 도와줄 거야? 말 거야?”고은서가 물었다.“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을 거야. 나한테 좋은 점은 뭐야?”민시후가 흥미롭게 물었다.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좋은 점은 없어. 하지만 네가 날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송민아에게 솔직하게 네 아이가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할 거야.”“고은서, 지금 협박하는 거야?”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지금 누가 누굴 도와주는지는 분명히 해야 하지 않아?”고은서도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민 도련님, 서로한테 나쁠 게 없는 제안 아니야? 지금까지 계속 나를 이용해서 송민아를 밀어내고 있잖아. 전에 이혼하는 거 도와주겠다며? 이런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생각 아니었어?”민시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정말 교활한 여자네. 분명 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서 주도권을 잡고 있네.’민시후도 그럴 계획이었다.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민시후는 더 이상 고은서와 말싸움하지 않고 답했다.“알았어. 그럼 큰마음 먹고 이번만 도와주도록 하지.”“미리 말할 게 있어.”고은서가 요구했다.“송민아가 혼자 오해하는 건 해명하지 않을 거지만 네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이 찾아와서 묻는다면 거짓말할 수는 없어.”‘송민아가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한다면 더
GS 그룹의 몇몇 임원들의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곽승재는 지금까지 회의 중간에 멈춘 적이 없었다. 답답해하는 그의 표정으로 임원들은 얼마나 큰 문제에 봉착한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주민기 만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컴퓨터와 서류를 챙겨 곽승재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주민기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곽승재가 고은서의 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제 오후, 스케줄이 많던 곽승재는 전화 한 통 한 후 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직접 운전하여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갈 때는 절박한 표정이었지만 오늘 아침 사무실에 온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주민기는 혹시나 괜한 화를 입을까 봐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안색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큰 화는 내지 않으셔서 다행이네. 심적으로는 큰 동요가 없으신가 보네.’곽승재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주민기가 차분하게 말했다.“대표님, 잠시 밖에 다녀와야겠습니다.”곽승재가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얼마나 걸리는데요? 어디 가요?”“XX 호텔이요.”익숙한 호텔 이름에 곽승재는 손을 떼고 주민기를 돌아보며 물었다.“민기 씨가 거긴 왜 가죠?”주민기가 시선을 떨구며 답했다.“사모님께서 지난번에 M국에서 물건을 많이 사 오셨는데 노숙자들을 피하느라 전부 바닥에 떨어뜨리셨습니다. 그때 제가 물건을 챙겨서 사모님한테 돌려드렸는데 오늘 짐을 정리하다 보니 빠진 물건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사모님한테 전달해 드리려고요.”“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많지 않나요?”곽승재는 별다른 표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네. 야근해도 못 끝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 급하게 필요하신 물건이면 어떡하죠?”곽승재의 얼굴에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무슨 물건인데 오늘 꼭 전해줘야 하죠?”“포장을 보니 세안기 아니면 미용기기 같습니다. 여자들은 미용에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사셨으니 급하게 쓰실 물건인 것 같아 오늘 전달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훤칠한 키에 복도의 불빛이 곽승재 머리 위에 비치자 그의 이목구비는 한결 더 깊어 보였다.그는 어젯밤 그녀가 가져다준 검은색 양복에 셔츠를 입고 있었다. 구석에 오래 눌려 있어서 그런지 옷깃이 평소보다는 빳빳하지 않았다.‘평소 이미지에 엄청 신경 쓰지 않았나? 사무실에 드레스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옷으로 안 갈아입은 거지?’“뭐했길래 이 시간까지 자?”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고은서의 주의를 끌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물었다.“무슨 일이야?”곽승재는 잘 포장된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민기 씨가 M국에 있을 때 이걸 당신한테 전해주는 걸 빼먹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해주러 왔어.”고은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출발할 때 다 주지 않았나? 뭔가 빠진 게 있었나?’쇼핑백을 받아본 고은서는 그 물건을 샀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날 뭘 많이 샀는데 증정품인가?’고은서는 물건을 건네받고 답했다.“고마워. 물건은 잘 받았으니 당신도 잘 가.”고은서의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곽승재는 방에 들어가 버젓이 소파에 앉았다.“자기만 하느라 저녁도 못 먹었지? 나도 마침 배고프니 같이 뭐라도 먹자.”“그럴 필요 없어. 조금 있다 룸서비스 부르면 돼.”“그럼 하나 더 주문해. 나도 여기서 같이 먹게.”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지금 뭐 하자는 거야?”곽승재는 동요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저녁 먹으려고. 뭘 더 할 게 있어?”“좋아. 그렇게 한가하면 이혼 서류에 사인이나 해.”고은서가 다시 말을 꺼냈다.“고은서, 그거 말고는 나한테 할 말 없어?”곽승재가 싸늘히 물었다.“우리가 원수야? 나한테 시선조차 주지 않네?”고은서가 답했다.“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계속 이렇게 미루기만 한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고은서의 말에 곽승재는 말문이 막혔다.“집 사려고 한다면서? 시그니엘도 GS 그룹 산업이야. 같이 밥 먹으면서 한 채 골라.”곽승재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
고은서는 빠른 걸음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가서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홱 낚아챘다.“왜 남의 물건을 뒤적거려! 정말 교양 없어!”서슬 퍼런 고은서의 반응에 곽승재 눈가에는 의심이 서렸다.“전단지 본 것뿐인데 왜 그래? 뭐 못 볼 거라도 있어?”고은서는 그제야 손에 든 종이가 불임 치료 광고지라는 것을 눈치챘다.병원에서 나올 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에 쥐여준 전단지 같았다.혼란스러웠던 고은서는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돌아와서 바로 탁자 위에 내동댕이쳤다.곽승재가 본 것이 전단지라는것을 안 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곽승재는 그녀의 가방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반응이 왜 이렇게 날카로워? 내가 본 게 뭔 줄 알았는데?”곽승재는 고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고은서도 자신의 반응이 조금 과격했다는 것을 알고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했다.“아무 생각도 안 했어. 그냥 당신이 내 물건 함부로 만지는 게 싫었어.”곽승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이런 불임 치료 전단지는 병원 주위에서 나눠주는데 오늘 병원 갔었어? 어디 아파?”“지연이 찾으러 간 것뿐이야. 됐지?”고은서는 약간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밥 먹자며? 가자!”곽승재는 고은서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어디가 이상하냐 물으면 정확히 답하기 어려웠다.고은서의 찌푸린 얼굴에 곽승재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곽승재는 골목에 숨겨진 한정식집을 찾아갔다.작은 다리 아래 물이 흐르고 주위에는 각종 화초가 즐비했다. 방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지붕은 볏짚으로 쌓아뒀는데 아늑한 전원 스타일의 가게였다.두 사람은 반개방형 룸으로 향했다. 밥을 먹으면서 냇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는 룸이었다.물고기들에게 관심을 가진 고은서는 미끼를 던지며 먹이를 주었다.곽승재는 여유롭게 그녀의 옆에 서서 입을 열었다.“전에 고객이랑 한 번 왔었는데 음식이 괜찮더라고. 너도 좋아할 거야.”고은서가 한 발 앞
“고은서, 네가 선물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날 외숙모가 꺼냈을 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거야?”곽승재는 넥타이핀을 처음 착용한 날을 떠올렸다. 당시 육현석은 고은서의 취향이 아닌 것 같다 했지만 날카로운 그의 시선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었다.‘육현석의 말이 맞았네. 이 넥타이핀은 고은서가 직접 고른 게 아니네. 하긴, 나한테 선물 사준 적도 없는데... 나만 바보처럼 은서가 기뻐할 줄 알고 어젯밤 가져다준 셔츠를 입고 은서가 선물했다고 생각한 넥타이핀을 한 거네.’“굳이 나서서 해명할 필요 있어?”고은서가 싸늘히 말을 이었다.“전에도 당신한테 많이 보냈는데 한 번도 받은 적 없잖아. 비서가 거절하게 하든 아니면 프런트 데스크에서 처리하게 해놓고 당신이 정말 이 핀을 사용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말문이 막혔다.예전에 그는 고은서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녀가 선물한 물건을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고은서의 말에 그는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곽승재의 안색이 변했지만 고은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곽승재가 룸을 나와 마당에 도착할 때까지 고은서는 그를 다시 부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얼굴을 굳힌 곽승재는 그대로 운전하여 자리를 벗어났다.고은서는 그 후 며칠동안 곽승재를 볼 수 없었다.오히려 주민기가 전화를 걸어 혹시 곽승재와 싸웠는지 조심스레 물어보며 기분이 매우 좋지 않으니 혹시 한번 와주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다.고은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기분 나빠야 할 사람이 누군데. 이혼 서류에 사인 안 한 건 그렇다 치고 시그니엘도 물 건너갔잖아!’뱃속에는 처리해야 할 시한폭탄도 있었다.월요일, 고은서는 ZY 그룹에서 입사 절차를 밟고 있었다.민시후는 그녀에게 굳이 매일 출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투자은행 프로젝트만 담당하면 된다고 했다.마음이 상한 송민아는 며칠 휴가를 내어 자리
서인수가 사람을 시켜 고은서를 미행하고 납치했던 일로 인해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각별히 경계하고 있었다.하여 고은서는 프런트에 가서 CCTV를 통해 그 남자가 자신을 본 게 맞는지 어느 룸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직원은 CCTV 확인하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 남자가 어느 룸으로 가는지는 고객의 프라이버시라는 이유로 밝힐 수 없다고 했다.직원과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민시후가 걸어왔다.“왜 그래?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있던 거 아니었어? 여기서 뭐 해?”고은서는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민시후에게 얘기했다.민시후가 답했다.“일단 로비 CCTV 보고 결정하자.”고은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영상 속, 주류 구역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고 이내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그 남자는 술 한 잔을 꺼내 무심하게 식당을 훑어보고는 이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눈에 띄게 고은서에게 머물러 있었다.“이 사람이야.”고은서가 부랴부랴 말했다.민시후는 영상을 확인하고는 의아함을 드러내며 직원에게 화면을 확대하라고 했다.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민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끄셔도 됩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왜 끄라고 해? 아는 사람이야?”민시후는 그녀에게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시후야.”맞은편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비록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고은서는 조금 전 그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해성에 왔어?”민시후가 물었다.“응. 볼일이 있어서.”“어느 룸에 있어?”상대방이 룸 번호를 알려주자 민시후를 전화를 끊고 고은서에게 말했다.“가자. 같이 가서 만나.”“누군데?”고은서가 물었다.“송민아의 오빠, 송민준.”송민아의 오빠라는 말에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적어도 다른 원수는 아니었으니 말이다.“너무 일찍 마음 놓지 말고.”민시후가 평소와는 다르게 일깨워주었다.“송민아랑은 다르게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 마음의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