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더 이상 대화를 끌지 않고 말했다.“곽승재에게 임신 소식을 전할 생각 없어. 아이를 지울 생각이지만 지우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만약 곽승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네가 그 어떤 것도 부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어젯밤에 곽승재는 그녀에게 마음이 생겼다면서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해왔다.임신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혼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었다. 어쩌면 양가 어르신들을 내세워 그녀를 다시 예원 별장으로 들어가게 할지도 몰랐다.그래서 고은서는 민시후가 이 상황을 도와주길 바랐다.“쯧. 이렇게까지 이혼하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아이까지 생겼는데 곽승재에게 알리지 않는 거야?”“그래서 도와줄 거야? 말 거야?”고은서가 물었다.“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을 거야. 나한테 좋은 점은 뭐야?”민시후가 흥미롭게 물었다.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좋은 점은 없어. 하지만 네가 날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송민아에게 솔직하게 네 아이가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할 거야.”“고은서, 지금 협박하는 거야?”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지금 누가 누굴 도와주는지는 분명히 해야 하지 않아?”고은서도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민 도련님, 서로한테 나쁠 게 없는 제안 아니야? 지금까지 계속 나를 이용해서 송민아를 밀어내고 있잖아. 전에 이혼하는 거 도와주겠다며? 이런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생각 아니었어?”민시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정말 교활한 여자네. 분명 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서 주도권을 잡고 있네.’민시후도 그럴 계획이었다.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민시후는 더 이상 고은서와 말싸움하지 않고 답했다.“알았어. 그럼 큰마음 먹고 이번만 도와주도록 하지.”“미리 말할 게 있어.”고은서가 요구했다.“송민아가 혼자 오해하는 건 해명하지 않을 거지만 네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이 찾아와서 묻는다면 거짓말할 수는 없어.”‘송민아가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한다면 더
GS 그룹의 몇몇 임원들의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곽승재는 지금까지 회의 중간에 멈춘 적이 없었다. 답답해하는 그의 표정으로 임원들은 얼마나 큰 문제에 봉착한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주민기 만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컴퓨터와 서류를 챙겨 곽승재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주민기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곽승재가 고은서의 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제 오후, 스케줄이 많던 곽승재는 전화 한 통 한 후 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직접 운전하여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갈 때는 절박한 표정이었지만 오늘 아침 사무실에 온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주민기는 혹시나 괜한 화를 입을까 봐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안색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큰 화는 내지 않으셔서 다행이네. 심적으로는 큰 동요가 없으신가 보네.’곽승재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주민기가 차분하게 말했다.“대표님, 잠시 밖에 다녀와야겠습니다.”곽승재가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얼마나 걸리는데요? 어디 가요?”“XX 호텔이요.”익숙한 호텔 이름에 곽승재는 손을 떼고 주민기를 돌아보며 물었다.“민기 씨가 거긴 왜 가죠?”주민기가 시선을 떨구며 답했다.“사모님께서 지난번에 M국에서 물건을 많이 사 오셨는데 노숙자들을 피하느라 전부 바닥에 떨어뜨리셨습니다. 그때 제가 물건을 챙겨서 사모님한테 돌려드렸는데 오늘 짐을 정리하다 보니 빠진 물건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사모님한테 전달해 드리려고요.”“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많지 않나요?”곽승재는 별다른 표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네. 야근해도 못 끝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 급하게 필요하신 물건이면 어떡하죠?”곽승재의 얼굴에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무슨 물건인데 오늘 꼭 전해줘야 하죠?”“포장을 보니 세안기 아니면 미용기기 같습니다. 여자들은 미용에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사셨으니 급하게 쓰실 물건인 것 같아 오늘 전달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훤칠한 키에 복도의 불빛이 곽승재 머리 위에 비치자 그의 이목구비는 한결 더 깊어 보였다.그는 어젯밤 그녀가 가져다준 검은색 양복에 셔츠를 입고 있었다. 구석에 오래 눌려 있어서 그런지 옷깃이 평소보다는 빳빳하지 않았다.‘평소 이미지에 엄청 신경 쓰지 않았나? 사무실에 드레스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옷으로 안 갈아입은 거지?’“뭐했길래 이 시간까지 자?”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고은서의 주의를 끌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물었다.“무슨 일이야?”곽승재는 잘 포장된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민기 씨가 M국에 있을 때 이걸 당신한테 전해주는 걸 빼먹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해주러 왔어.”고은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출발할 때 다 주지 않았나? 뭔가 빠진 게 있었나?’쇼핑백을 받아본 고은서는 그 물건을 샀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날 뭘 많이 샀는데 증정품인가?’고은서는 물건을 건네받고 답했다.“고마워. 물건은 잘 받았으니 당신도 잘 가.”고은서의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곽승재는 방에 들어가 버젓이 소파에 앉았다.“자기만 하느라 저녁도 못 먹었지? 나도 마침 배고프니 같이 뭐라도 먹자.”“그럴 필요 없어. 조금 있다 룸서비스 부르면 돼.”“그럼 하나 더 주문해. 나도 여기서 같이 먹게.”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지금 뭐 하자는 거야?”곽승재는 동요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저녁 먹으려고. 뭘 더 할 게 있어?”“좋아. 그렇게 한가하면 이혼 서류에 사인이나 해.”고은서가 다시 말을 꺼냈다.“고은서, 그거 말고는 나한테 할 말 없어?”곽승재가 싸늘히 물었다.“우리가 원수야? 나한테 시선조차 주지 않네?”고은서가 답했다.“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계속 이렇게 미루기만 한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고은서의 말에 곽승재는 말문이 막혔다.“집 사려고 한다면서? 시그니엘도 GS 그룹 산업이야. 같이 밥 먹으면서 한 채 골라.”곽승재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
고은서는 빠른 걸음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가서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홱 낚아챘다.“왜 남의 물건을 뒤적거려! 정말 교양 없어!”서슬 퍼런 고은서의 반응에 곽승재 눈가에는 의심이 서렸다.“전단지 본 것뿐인데 왜 그래? 뭐 못 볼 거라도 있어?”고은서는 그제야 손에 든 종이가 불임 치료 광고지라는 것을 눈치챘다.병원에서 나올 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에 쥐여준 전단지 같았다.혼란스러웠던 고은서는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돌아와서 바로 탁자 위에 내동댕이쳤다.곽승재가 본 것이 전단지라는것을 안 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곽승재는 그녀의 가방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반응이 왜 이렇게 날카로워? 내가 본 게 뭔 줄 알았는데?”곽승재는 고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고은서도 자신의 반응이 조금 과격했다는 것을 알고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했다.“아무 생각도 안 했어. 그냥 당신이 내 물건 함부로 만지는 게 싫었어.”곽승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이런 불임 치료 전단지는 병원 주위에서 나눠주는데 오늘 병원 갔었어? 어디 아파?”“지연이 찾으러 간 것뿐이야. 됐지?”고은서는 약간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밥 먹자며? 가자!”곽승재는 고은서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어디가 이상하냐 물으면 정확히 답하기 어려웠다.고은서의 찌푸린 얼굴에 곽승재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곽승재는 골목에 숨겨진 한정식집을 찾아갔다.작은 다리 아래 물이 흐르고 주위에는 각종 화초가 즐비했다. 방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지붕은 볏짚으로 쌓아뒀는데 아늑한 전원 스타일의 가게였다.두 사람은 반개방형 룸으로 향했다. 밥을 먹으면서 냇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는 룸이었다.물고기들에게 관심을 가진 고은서는 미끼를 던지며 먹이를 주었다.곽승재는 여유롭게 그녀의 옆에 서서 입을 열었다.“전에 고객이랑 한 번 왔었는데 음식이 괜찮더라고. 너도 좋아할 거야.”고은서가 한 발 앞
“고은서, 네가 선물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날 외숙모가 꺼냈을 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거야?”곽승재는 넥타이핀을 처음 착용한 날을 떠올렸다. 당시 육현석은 고은서의 취향이 아닌 것 같다 했지만 날카로운 그의 시선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었다.‘육현석의 말이 맞았네. 이 넥타이핀은 고은서가 직접 고른 게 아니네. 하긴, 나한테 선물 사준 적도 없는데... 나만 바보처럼 은서가 기뻐할 줄 알고 어젯밤 가져다준 셔츠를 입고 은서가 선물했다고 생각한 넥타이핀을 한 거네.’“굳이 나서서 해명할 필요 있어?”고은서가 싸늘히 말을 이었다.“전에도 당신한테 많이 보냈는데 한 번도 받은 적 없잖아. 비서가 거절하게 하든 아니면 프런트 데스크에서 처리하게 해놓고 당신이 정말 이 핀을 사용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말문이 막혔다.예전에 그는 고은서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녀가 선물한 물건을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고은서의 말에 그는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곽승재의 안색이 변했지만 고은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곽승재가 룸을 나와 마당에 도착할 때까지 고은서는 그를 다시 부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얼굴을 굳힌 곽승재는 그대로 운전하여 자리를 벗어났다.고은서는 그 후 며칠동안 곽승재를 볼 수 없었다.오히려 주민기가 전화를 걸어 혹시 곽승재와 싸웠는지 조심스레 물어보며 기분이 매우 좋지 않으니 혹시 한번 와주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다.고은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기분 나빠야 할 사람이 누군데. 이혼 서류에 사인 안 한 건 그렇다 치고 시그니엘도 물 건너갔잖아!’뱃속에는 처리해야 할 시한폭탄도 있었다.월요일, 고은서는 ZY 그룹에서 입사 절차를 밟고 있었다.민시후는 그녀에게 굳이 매일 출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투자은행 프로젝트만 담당하면 된다고 했다.마음이 상한 송민아는 며칠 휴가를 내어 자리
서인수가 사람을 시켜 고은서를 미행하고 납치했던 일로 인해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각별히 경계하고 있었다.하여 고은서는 프런트에 가서 CCTV를 통해 그 남자가 자신을 본 게 맞는지 어느 룸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직원은 CCTV 확인하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 남자가 어느 룸으로 가는지는 고객의 프라이버시라는 이유로 밝힐 수 없다고 했다.직원과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민시후가 걸어왔다.“왜 그래?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있던 거 아니었어? 여기서 뭐 해?”고은서는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민시후에게 얘기했다.민시후가 답했다.“일단 로비 CCTV 보고 결정하자.”고은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영상 속, 주류 구역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고 이내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그 남자는 술 한 잔을 꺼내 무심하게 식당을 훑어보고는 이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눈에 띄게 고은서에게 머물러 있었다.“이 사람이야.”고은서가 부랴부랴 말했다.민시후는 영상을 확인하고는 의아함을 드러내며 직원에게 화면을 확대하라고 했다.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민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끄셔도 됩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왜 끄라고 해? 아는 사람이야?”민시후는 그녀에게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시후야.”맞은편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비록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고은서는 조금 전 그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해성에 왔어?”민시후가 물었다.“응. 볼일이 있어서.”“어느 룸에 있어?”상대방이 룸 번호를 알려주자 민시후를 전화를 끊고 고은서에게 말했다.“가자. 같이 가서 만나.”“누군데?”고은서가 물었다.“송민아의 오빠, 송민준.”송민아의 오빠라는 말에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적어도 다른 원수는 아니었으니 말이다.“너무 일찍 마음 놓지 말고.”민시후가 평소와는 다르게 일깨워주었다.“송민아랑은 다르게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 마음의
송민준이 민시후의 제안을 거절했다.“됐어.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 돼.”민시후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답했다.“그럼 다음에 봐.”송민준이 고은서를 한번 보고는 민시후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몇 번이나 나한테 네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소연하더라. 혹시 은서 씨야?”고은서는 송민준과 민시후의 사이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감정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물을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송민아 앞에서는 연기할 수 있었지만 송민준 앞에서는 뭔가 내키지 않았다.“민준 씨, 저랑 시후는...”“맞아.”고은서가 해명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입을 열었다.“아직 완전히 받아준 건 아니지만 너도 잘 알잖아. 이 사람한테 마음 없었으면 내 옆에 두지도 않았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있기 부끄러웠다.“민준아, 양가 어르신들한테 잘 좀 얘기해줘. 난 정말 네 동생한테 이성적인 감정이 없어. 얼른 이 정략결혼을 포기하게 만들어줘.”민시후는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송민준의 시선이 고은서에게로 향했다.“은서 씨, 시후 마음 알고 있어요?”송민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곽승재 못지않았다.비록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민시후에게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거짓으로 말을 꾸몄다.“시후 마음 받아주지 않았어요. 시후랑 민아 씨 사이에 끼고 싶지도 않아요.”민시후의 말을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본인의 입장을 밝힌 고은서였다.송민준은 별다른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민시후에게 말했다.“돌아가서 민아 설득해 볼게. 어려서부터 오냐오냐하면서 키우고 어른들의 지지를 받는 혼약이다 보니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네. 먼저 갈게.”말을 마친 송민준이 자리를 뜨자 밖에 있던 두 경호원도 그의 뒤를 따랐다.고은서와 민시후도 예약한 룸으로 돌아가려 했다.“전에 송민준 만난 적 있어?”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만난 적 있었으면 CCTV 확인할 리가 있었겠어?
익숙한 우드향이 코끝으로 밀려왔다. 고은서가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곽승재였다.“괜찮아?”곽승재의 깊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지만 그의 말투에는 알아채기 힘든 관심이 어려있었다.고은서가 몸을 바로 세우며 답했다.“괜찮아.”“어이구, 곽 대표 아닌가. 우연이네. 놀러 왔어?”민시후가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곽승재는 고은서와 불과 반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민시후를 보며 그녀를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대표님. 얼른 와서 한잔하셔야죠!”마침 룸 쪽에서 동료가 고개를 내밀며 민시후를 불렀다.“가요.”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같이 갈래?”“그래.”고은서가 막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곽승재가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어깨를 감싸안으며 차가운 말투로 민시후에게 말했다.“은서는 술 못 마시니 너랑 같이 안 갈 거야.”“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퉁명스럽게 곽승재를 뿌리쳤다.“상관하지 마. 누가 멋대로 결정하래.”곽승재는 자신을 피하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마음의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지난번 같이 밥 먹으려고 한 자리에서 그를 화나게 하고 그녀는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런데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더니 민시후와 함께 가기 위해 그를 밀어내고 있었으니 화가 안 날 리 없었다.“고은서, 네 주량을 몰라? 나한테 화풀이하려고 굳이 낯선 사람들이랑 술 마셔야 해?”“곽 대표, 그건 아니야.”민시후가 도발적인 말투로 답했다.“오늘 부서 모임이야. 고 매니저도 미래 투자은행의 일원으로 참석한 건데 낯선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네가 네 와이프를 아낀다면 우리랑 함께해도 돼. 누가 술을 권하면 네가 대신 마시면 되잖아. 어때?”‘지금 강 건너 불구경하겠다는 건가? 곽승재더러 나 대신 술을 마시라고 하다니. 정말 민시후 답네.’고은서가 거절하려고 할 때 곽승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러지 뭐.”“가시죠.”민시후가 곽승재를 안내했다.“승재야.”그때 등 뒤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