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 그룹의 몇몇 임원들의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곽승재는 지금까지 회의 중간에 멈춘 적이 없었다. 답답해하는 그의 표정으로 임원들은 얼마나 큰 문제에 봉착한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주민기 만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컴퓨터와 서류를 챙겨 곽승재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주민기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곽승재가 고은서의 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제 오후, 스케줄이 많던 곽승재는 전화 한 통 한 후 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직접 운전하여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갈 때는 절박한 표정이었지만 오늘 아침 사무실에 온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주민기는 혹시나 괜한 화를 입을까 봐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안색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큰 화는 내지 않으셔서 다행이네. 심적으로는 큰 동요가 없으신가 보네.’곽승재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주민기가 차분하게 말했다.“대표님, 잠시 밖에 다녀와야겠습니다.”곽승재가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얼마나 걸리는데요? 어디 가요?”“XX 호텔이요.”익숙한 호텔 이름에 곽승재는 손을 떼고 주민기를 돌아보며 물었다.“민기 씨가 거긴 왜 가죠?”주민기가 시선을 떨구며 답했다.“사모님께서 지난번에 M국에서 물건을 많이 사 오셨는데 노숙자들을 피하느라 전부 바닥에 떨어뜨리셨습니다. 그때 제가 물건을 챙겨서 사모님한테 돌려드렸는데 오늘 짐을 정리하다 보니 빠진 물건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사모님한테 전달해 드리려고요.”“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많지 않나요?”곽승재는 별다른 표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네. 야근해도 못 끝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 급하게 필요하신 물건이면 어떡하죠?”곽승재의 얼굴에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무슨 물건인데 오늘 꼭 전해줘야 하죠?”“포장을 보니 세안기 아니면 미용기기 같습니다. 여자들은 미용에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사셨으니 급하게 쓰실 물건인 것 같아 오늘 전달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훤칠한 키에 복도의 불빛이 곽승재 머리 위에 비치자 그의 이목구비는 한결 더 깊어 보였다.그는 어젯밤 그녀가 가져다준 검은색 양복에 셔츠를 입고 있었다. 구석에 오래 눌려 있어서 그런지 옷깃이 평소보다는 빳빳하지 않았다.‘평소 이미지에 엄청 신경 쓰지 않았나? 사무실에 드레스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옷으로 안 갈아입은 거지?’“뭐했길래 이 시간까지 자?”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고은서의 주의를 끌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물었다.“무슨 일이야?”곽승재는 잘 포장된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민기 씨가 M국에 있을 때 이걸 당신한테 전해주는 걸 빼먹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해주러 왔어.”고은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출발할 때 다 주지 않았나? 뭔가 빠진 게 있었나?’쇼핑백을 받아본 고은서는 그 물건을 샀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날 뭘 많이 샀는데 증정품인가?’고은서는 물건을 건네받고 답했다.“고마워. 물건은 잘 받았으니 당신도 잘 가.”고은서의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곽승재는 방에 들어가 버젓이 소파에 앉았다.“자기만 하느라 저녁도 못 먹었지? 나도 마침 배고프니 같이 뭐라도 먹자.”“그럴 필요 없어. 조금 있다 룸서비스 부르면 돼.”“그럼 하나 더 주문해. 나도 여기서 같이 먹게.”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지금 뭐 하자는 거야?”곽승재는 동요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저녁 먹으려고. 뭘 더 할 게 있어?”“좋아. 그렇게 한가하면 이혼 서류에 사인이나 해.”고은서가 다시 말을 꺼냈다.“고은서, 그거 말고는 나한테 할 말 없어?”곽승재가 싸늘히 물었다.“우리가 원수야? 나한테 시선조차 주지 않네?”고은서가 답했다.“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계속 이렇게 미루기만 한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고은서의 말에 곽승재는 말문이 막혔다.“집 사려고 한다면서? 시그니엘도 GS 그룹 산업이야. 같이 밥 먹으면서 한 채 골라.”곽승재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
고은서는 빠른 걸음으로 곽승재에게 다가가서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홱 낚아챘다.“왜 남의 물건을 뒤적거려! 정말 교양 없어!”서슬 퍼런 고은서의 반응에 곽승재 눈가에는 의심이 서렸다.“전단지 본 것뿐인데 왜 그래? 뭐 못 볼 거라도 있어?”고은서는 그제야 손에 든 종이가 불임 치료 광고지라는 것을 눈치챘다.병원에서 나올 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에 쥐여준 전단지 같았다.혼란스러웠던 고은서는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돌아와서 바로 탁자 위에 내동댕이쳤다.곽승재가 본 것이 전단지라는것을 안 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곽승재는 그녀의 가방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반응이 왜 이렇게 날카로워? 내가 본 게 뭔 줄 알았는데?”곽승재는 고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고은서도 자신의 반응이 조금 과격했다는 것을 알고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했다.“아무 생각도 안 했어. 그냥 당신이 내 물건 함부로 만지는 게 싫었어.”곽승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이런 불임 치료 전단지는 병원 주위에서 나눠주는데 오늘 병원 갔었어? 어디 아파?”“지연이 찾으러 간 것뿐이야. 됐지?”고은서는 약간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밥 먹자며? 가자!”곽승재는 고은서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어디가 이상하냐 물으면 정확히 답하기 어려웠다.고은서의 찌푸린 얼굴에 곽승재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곽승재는 골목에 숨겨진 한정식집을 찾아갔다.작은 다리 아래 물이 흐르고 주위에는 각종 화초가 즐비했다. 방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지붕은 볏짚으로 쌓아뒀는데 아늑한 전원 스타일의 가게였다.두 사람은 반개방형 룸으로 향했다. 밥을 먹으면서 냇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는 룸이었다.물고기들에게 관심을 가진 고은서는 미끼를 던지며 먹이를 주었다.곽승재는 여유롭게 그녀의 옆에 서서 입을 열었다.“전에 고객이랑 한 번 왔었는데 음식이 괜찮더라고. 너도 좋아할 거야.”고은서가 한 발 앞
“고은서, 네가 선물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날 외숙모가 꺼냈을 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거야?”곽승재는 넥타이핀을 처음 착용한 날을 떠올렸다. 당시 육현석은 고은서의 취향이 아닌 것 같다 했지만 날카로운 그의 시선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었다.‘육현석의 말이 맞았네. 이 넥타이핀은 고은서가 직접 고른 게 아니네. 하긴, 나한테 선물 사준 적도 없는데... 나만 바보처럼 은서가 기뻐할 줄 알고 어젯밤 가져다준 셔츠를 입고 은서가 선물했다고 생각한 넥타이핀을 한 거네.’“굳이 나서서 해명할 필요 있어?”고은서가 싸늘히 말을 이었다.“전에도 당신한테 많이 보냈는데 한 번도 받은 적 없잖아. 비서가 거절하게 하든 아니면 프런트 데스크에서 처리하게 해놓고 당신이 정말 이 핀을 사용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말문이 막혔다.예전에 그는 고은서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녀가 선물한 물건을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고은서의 말에 그는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곽승재의 안색이 변했지만 고은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곽승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곽승재가 룸을 나와 마당에 도착할 때까지 고은서는 그를 다시 부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얼굴을 굳힌 곽승재는 그대로 운전하여 자리를 벗어났다.고은서는 그 후 며칠동안 곽승재를 볼 수 없었다.오히려 주민기가 전화를 걸어 혹시 곽승재와 싸웠는지 조심스레 물어보며 기분이 매우 좋지 않으니 혹시 한번 와주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다.고은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기분 나빠야 할 사람이 누군데. 이혼 서류에 사인 안 한 건 그렇다 치고 시그니엘도 물 건너갔잖아!’뱃속에는 처리해야 할 시한폭탄도 있었다.월요일, 고은서는 ZY 그룹에서 입사 절차를 밟고 있었다.민시후는 그녀에게 굳이 매일 출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투자은행 프로젝트만 담당하면 된다고 했다.마음이 상한 송민아는 며칠 휴가를 내어 자리
서인수가 사람을 시켜 고은서를 미행하고 납치했던 일로 인해 그녀는 이러한 상황을 각별히 경계하고 있었다.하여 고은서는 프런트에 가서 CCTV를 통해 그 남자가 자신을 본 게 맞는지 어느 룸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직원은 CCTV 확인하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 남자가 어느 룸으로 가는지는 고객의 프라이버시라는 이유로 밝힐 수 없다고 했다.직원과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민시후가 걸어왔다.“왜 그래?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있던 거 아니었어? 여기서 뭐 해?”고은서는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민시후에게 얘기했다.민시후가 답했다.“일단 로비 CCTV 보고 결정하자.”고은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영상 속, 주류 구역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고 이내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그 남자는 술 한 잔을 꺼내 무심하게 식당을 훑어보고는 이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눈에 띄게 고은서에게 머물러 있었다.“이 사람이야.”고은서가 부랴부랴 말했다.민시후는 영상을 확인하고는 의아함을 드러내며 직원에게 화면을 확대하라고 했다.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민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끄셔도 됩니다.”고은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왜 끄라고 해? 아는 사람이야?”민시후는 그녀에게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시후야.”맞은편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비록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고은서는 조금 전 그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해성에 왔어?”민시후가 물었다.“응. 볼일이 있어서.”“어느 룸에 있어?”상대방이 룸 번호를 알려주자 민시후를 전화를 끊고 고은서에게 말했다.“가자. 같이 가서 만나.”“누군데?”고은서가 물었다.“송민아의 오빠, 송민준.”송민아의 오빠라는 말에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적어도 다른 원수는 아니었으니 말이다.“너무 일찍 마음 놓지 말고.”민시후가 평소와는 다르게 일깨워주었다.“송민아랑은 다르게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 마음의
송민준이 민시후의 제안을 거절했다.“됐어.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 돼.”민시후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답했다.“그럼 다음에 봐.”송민준이 고은서를 한번 보고는 민시후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몇 번이나 나한테 네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소연하더라. 혹시 은서 씨야?”고은서는 송민준과 민시후의 사이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감정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물을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송민아 앞에서는 연기할 수 있었지만 송민준 앞에서는 뭔가 내키지 않았다.“민준 씨, 저랑 시후는...”“맞아.”고은서가 해명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입을 열었다.“아직 완전히 받아준 건 아니지만 너도 잘 알잖아. 이 사람한테 마음 없었으면 내 옆에 두지도 않았어.”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있기 부끄러웠다.“민준아, 양가 어르신들한테 잘 좀 얘기해줘. 난 정말 네 동생한테 이성적인 감정이 없어. 얼른 이 정략결혼을 포기하게 만들어줘.”민시후는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송민준의 시선이 고은서에게로 향했다.“은서 씨, 시후 마음 알고 있어요?”송민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곽승재 못지않았다.비록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민시후에게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거짓으로 말을 꾸몄다.“시후 마음 받아주지 않았어요. 시후랑 민아 씨 사이에 끼고 싶지도 않아요.”민시후의 말을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본인의 입장을 밝힌 고은서였다.송민준은 별다른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민시후에게 말했다.“돌아가서 민아 설득해 볼게. 어려서부터 오냐오냐하면서 키우고 어른들의 지지를 받는 혼약이다 보니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네. 먼저 갈게.”말을 마친 송민준이 자리를 뜨자 밖에 있던 두 경호원도 그의 뒤를 따랐다.고은서와 민시후도 예약한 룸으로 돌아가려 했다.“전에 송민준 만난 적 있어?”민시후가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만난 적 있었으면 CCTV 확인할 리가 있었겠어?
익숙한 우드향이 코끝으로 밀려왔다. 고은서가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곽승재였다.“괜찮아?”곽승재의 깊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지만 그의 말투에는 알아채기 힘든 관심이 어려있었다.고은서가 몸을 바로 세우며 답했다.“괜찮아.”“어이구, 곽 대표 아닌가. 우연이네. 놀러 왔어?”민시후가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곽승재는 고은서와 불과 반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민시후를 보며 그녀를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대표님. 얼른 와서 한잔하셔야죠!”마침 룸 쪽에서 동료가 고개를 내밀며 민시후를 불렀다.“가요.”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같이 갈래?”“그래.”고은서가 막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곽승재가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어깨를 감싸안으며 차가운 말투로 민시후에게 말했다.“은서는 술 못 마시니 너랑 같이 안 갈 거야.”“뭐 하는 거야!”고은서는 퉁명스럽게 곽승재를 뿌리쳤다.“상관하지 마. 누가 멋대로 결정하래.”곽승재는 자신을 피하는 고은서를 바라보며 마음의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지난번 같이 밥 먹으려고 한 자리에서 그를 화나게 하고 그녀는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런데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더니 민시후와 함께 가기 위해 그를 밀어내고 있었으니 화가 안 날 리 없었다.“고은서, 네 주량을 몰라? 나한테 화풀이하려고 굳이 낯선 사람들이랑 술 마셔야 해?”“곽 대표, 그건 아니야.”민시후가 도발적인 말투로 답했다.“오늘 부서 모임이야. 고 매니저도 미래 투자은행의 일원으로 참석한 건데 낯선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네가 네 와이프를 아낀다면 우리랑 함께해도 돼. 누가 술을 권하면 네가 대신 마시면 되잖아. 어때?”‘지금 강 건너 불구경하겠다는 건가? 곽승재더러 나 대신 술을 마시라고 하다니. 정말 민시후 답네.’고은서가 거절하려고 할 때 곽승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러지 뭐.”“가시죠.”민시후가 곽승재를 안내했다.“승재야.”그때 등 뒤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이분은 GS 그룹의 곽 대표님이시자 고 매니저의 남편입니다.”민시후가 사람들에게 곽승재를 소개했다.민시후의 소개를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나 미래 투자은행과 GS 그룹은 잘 안 맞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GS 그룹 대표의 사모님을 미래 투자은행에 출근시키고 대표까지 이 자리에 데리고 오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지?’사람들의 놀라움을 뒤로하고 곽승재는 태연하고 입을 열었다.“앞으로 제 아내 잘 부탁드립니다.”말을 마친 곽승재가 고은서를 끌어안고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공공장소이다 보니 고은서는 곽승재를 대놓고 밀어내지 않고 남몰래 어깨에 걸쳐진 그의 손을 밀쳐냈다.“다들 서서 뭐 해요? 얼른 곽 대표님께 술을 권해야죠?”민시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네. 네! 그래야죠!”눈치 빠른 젊은 남자 한 명이 곽승재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제가 동료들을 대표해서 대표님께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곽승재는 긴 다리를 여유롭게 꼬고 앉아 상대방을 흘끗 쳐다보았다. 곽승재는 술잔을 바로 건네받을 생각이 없었다. 먼저 술을 권한 남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하고 있었다.곽승재를 본 고은서는 내일 자신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까 봐 잔을 받으려고 했다. 그때 곽승재가 긴 팔을 뻗어 그녀보다 먼저 잔을 건네받았다.“대표님께서는 원하시는 만큼 드시죠. 저는 존경의 의미로 원샷하겠습니다.”젊은 남자는 이내 시원하게 술잔을 비웠다.곽승재도 느긋하게 술잔을 비웠다.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갈색 액체는 그의 체내로 들어갔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민시후가 곽승재를 취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을 눈치챘다. 먼저 나선 동료가 거절당하지 않은 모습을 보자 하나둘 곽승재에게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곽승재는 거절하지 않고 연거푸 몇 잔을 마셨다.고은서는 말리려다가 그가 자초한 상황이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또 술 두 잔을 비웠을 때 곽승재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고은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품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무 허약한 탓에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몸도 따라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그 사람은 등 뒤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얼굴을 그녀 이마 가까이 붙였다.체온이 하도 높아서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상대방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등이 점점 더 뜨거워 난 고은서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잠에서 제대로 깨지 못한 탓에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얼마 후, 그 사람은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흐느끼는 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서는 눈을 번쩍 떴다.그러나 뒤돌아 확인하려고 할 때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은서야, 미안해...”귓가에서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발버둥 치며 화를 내면서 그를 내쫓는 대신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놔.”곽승재는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약간 울먹이면서 말했다.“은서야, 미안해.”고은서는 곽승재가 오후에 박지연한테서 들은 말 때문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연이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고은서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당신 아버지랑 백승엽까지 여기로 온 이상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겠지. 할 만큼 했다는 거 나도 알아.”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방금전보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고은서는 목 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은서야, 차라리 욕이라도 해...”곽승재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가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여전히 담담했다.“곽승재,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돼. 난 당신이 한 말을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까.”곽승재는 순간 몸이 굳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번이 그녀를 안아볼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이 광경을 주민기는 황급히 벨을 누르며 의사를 불렀다.“의사 선생님...”...고은서의 병실로 다시 돌아간 박지연은 방금전 씩씩거리며 나가던 모습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거봐,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고은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위안했다.“화 풀고 나랑 내일 귀국할 준비 하자. 돌아가고 나서 나 밥 사줘. 그리고 SPA도 하고 싶은데 네가 쏠 거지?”박지연은 한참 동안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은서야, 곽승재한테 목매지 말고 우리 다른 남자 찾아보자. 넌 곽승재가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박지연은 평소에 이런 오글거리는 행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런 행위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곽승재한테 찾아가더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알겠어.”고은서가 박지연의 등을 토닥이며 웃으면서 답했다.민시후도 어느새 백유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백유미 정신질환 진단서에 관해서는 이미 조사해보라고 사람 시켰어. 민시현한테도 원지훈 사망 사건에 관해 다시 조사하게끔 당지 경찰 측에 말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괜찮아.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라서 큰 변화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 조사해달라고 형을 귀찮게 굴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답했다.“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 데 써먹을 수 있을 때 써야지.”민시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난 네 형한테 불리워 가서 밥 먹기 싫어.”고은서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싸움을 했다.“민시후, 비록 네 선택이기는 하지만 다신 이런 일에 끼어들지 마.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일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민시후는 이번 일로 며칠 동안 병상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금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그녀가 보기에도 엄청 안쓰러운데 그의 가족들은 오죽할까.“네가 다치는 일이 없는 한 이건 약속 못 하겠는데.”
곽승재는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박지연은 콧방귀를 뀌면서 곽승재한테 고은서가 유산한 날 동료한테 부탁해서 그가 썼던 수건에 있던 머리카락으로 유전자검사를 했다면서 알려줬다.“고은서가 계속 마음에 못을 박는 소리를 해왔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요. 원래는 당신이 고은서의 마음을 되돌리고 두 사람이 재혼하게 되는 그날에 이 모든 걸 알려주면서 은서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진짜 구제불능인 것 같네요. 어떻게 자기 아내랑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범인을 이대로 놓아줄 수가 있죠? 당신은 은서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박지연이 화를 내며 호통쳤다.고은서가 유산했을 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구슬프게 우는 모습을 떠올린 박지연은 지금이라도 곽승재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은서가 그 아이가 태어나길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아요?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애가 행복하게 클 수 있는지를 얼마나 고민해왔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백유미 그 악독한 여자가 이 모든 걸 망쳐버렸잖아요.”박지연은 말하면서 울먹이기 시작했다.“아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당신이 은서를 굳게 믿었다면 굳이 이혼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 두 사람이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요.”곽승재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은서가 당신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부터 아주 큰 착오였어. 당신은 단 한 번도 은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지 않았잖아요. 단 한 번도 은서 입장에 서서 고려해본 적이 없잖아요! 민시후가 계속 눈에 거슬린다고 했죠? 그런데 민시후가 당신보다 백 배는 나아요. 적어도 은서를 웃게 하려고 노력하고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하잖아요. 고은서가 무슨 일이 있든 항상 발 벗고 나서주잖아요.”박지연은 계속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그의 마음에 칼을 꽂았다.“고은서가 백유미한테 반격하려는 일을 민시후한테
박지연은 종래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거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고은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부했다.“적당히 해. 화내면서 눈물 흘리며 찾아오기 없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농담을 뒤로 한 채 마치 곽승재를 후회하게 만들 히든카드라도 손에 쥐고 있는 듯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아침에 어머니한테 불리워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나랑 함께 지연이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됐어. 당하고 나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뭐.’...박지연은 이내 곽승재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어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갈 때 그는 병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는 비서 주민기가 서 있었다.주민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곽승재는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걸 먼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주 덤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박지연은 냉소를 흘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 대표님, 백유미가 은서한테 얼마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고작 정신병원 진단서 하나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가요?”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은서한테 백유미를 대가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이게 곽 대표님이 말한 그 대가인가요?”박지연이 계속 캐물었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예요.”“거참. 고작 정신병원 하나로 끝내겠단 말씀이세요?”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백유미가 아무런 병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저 핑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형,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저 악몽 꾼 걸 거야.”비록 고은서의 변화와 곽승재의 말들을 잘 되새겨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육현석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형수님처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의 주장도 과감하게 제기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은 일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다는 거야?”그러나 곽승재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육현석의 말대로 고은서는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을 느껴서였을까?’“형, 방금전에 백유미 찾아가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육현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손에 있는 증거를 경찰 측에 넘기면 되잖아. 왜 굳이 직접 찾아간 거야?”곽승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증거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수상해.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뭐? 누군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육현석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그저 내 직감일뿐이야.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해.”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튿날, 고은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약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띄엄띄엄 어지러워 났다.“고은서!”그녀가 누워서 좀 더 쉬려고 할 때 박지연이 흥분해 하며 병실로 달려 들어왔다.“빅뉴스야!”반면 고은서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뭔데?”“백유미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갔대.”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누가 때린 건데?”“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봐.”박지연이 웃으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T국에 있는 백유미랑
곽승재는 육현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아침의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은서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살이 빠져있었고 얼굴도 전과 다르게 핼쑥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다르게 꿈속의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냉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고은서는 이미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었다.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형, 왜 그래...”육현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 형 지금 눈시울이 빨개진 거야?’오랫동안 곽승재와 지내오면서 그의 이런 모습은 육현석도 처음이었다.마치 하나뿐인 동반자를 잃은 늑대처럼 처절하고 비참하면서도 후회막심해 보였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육현석이 위안했다.곽승재는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어제 백유미가 칼을 들고 자살하려고 할 때 유난히 당황스러웠어. 마치 백유미를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난 후로 그 이유를 알겠더라. 고은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땐 내가 미처 구하지 못했다는 걸.”“그러니까 지금 전생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지? 방금전에 말한 일도 전생에 발생한 일이고.”육현석이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아주 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꿈에서 봤던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이런 모습이 약간 적응되지 않았다.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이며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없었던 곽승재가 갑자기 전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형, 그저 꿈일 뿐이야. 너무 자책하지마.”육현석이 애써 그를 위안
목소리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민시후는 아주 똑똑히 들었다.그는 육현석을 힐끗 째려보고는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떨며 말했다.“은서야, 방금 깎아준 사과 엄청 달고 맛있는데 한 조각만 더 먹여주면 안 될까?”나머지 세 사람은 충격적인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육현석은 진저리를 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민 대표님, 은서랑 얘기 더 나누세요. 저는 먼저 밥 먹으러 가볼게요.”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고는 쌩하고 달아났다.병실 안에는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다음에는 연기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따로 신호 보내주면 안 될까?”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곽승재 껌딱지 새끼를 가만두면 안 되지.”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한 시간 후, 육현석은 곽승재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형, 민시후 그 새끼 진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짝이 없어. 형수님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심지어 사과까지 먹여달라고 한다니까.”방금전 민시후의 모습을 떠올린 육현석은 씩씩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바라보는 눈길은 또 어찌나 오글거리던지. 형수님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환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달려가서 한 대 치는 건데.”그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그 많은 여자 중에서 왜 하필 형수님을 좋아한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육현석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형, 내 말 듣고 있어? 형은 화 안 나?”곽승재는 방금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육현석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하필 그 위급한 상황에 백유미를 구하려고 한 거야?”육현석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답답해 났다.“그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힘겹게 형수님을 찾았으면 당시 상황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형수님 곁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