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고은혜를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네 마음속에선 원지훈이 괜찮은 사람이야?”‘원지훈 조건으로 고씨 집안 기사가 되려고 해도 어림없는데 괜찮다고?’고은혜는 고은서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다.“당연히 곽승재랑은 비교가 안 되지. 그런데 곽승재보다 더 출중한 사람이 원래 얼마 되지도 않잖아. 게다가 원지훈 집안도 사업하는 집안이고 또 본인도 요즘 창업하고 있는데 회사 규모도 나쁘지 않고 머리고 꽤 영리하고. 누가 알아, 언젠가는 우리 MQ까지 넘어서는 존재가 될지.”고은서는 절대 그가 MQ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고, 그의 회사가 곧 망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원지훈 조건은 그렇다고 쳐. 그런데 결혼 상대를 찾을 때는 적어도 상대방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고려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조건만 보고 인품을 안 보는 건 아니지 않아?”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전에 귀걸이 사건도 나한테 설명했어. 친구가 자신을 속인 거래, 원지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리고 너한테 보낸 문자도 그저 내에 관해 알고 싶어서 그런 거래. 게다가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또 원지훈은 내가 원하는 거라면 다 해주고 사람 달랠 줄도 아는데 왜 애인으로 알맞지 않다는 거야? 성아연도 나한테 이런 남자가 쥐락펴락하기 쉽다고 나한테 어울린다고 했어.”“성아연?”고은서는 중점을 잡아냈다.“언제 성아연이랑 친해진 거야?”고은혜는 고은서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네가 성아연이랑 절친인 건 알겠는데 내가 성아연이랑 친해지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고은서가 답했다.“이젠 절친이 아니야. 그보다 어떻게 연락이 닿은 거야? 성아연이 너한테 먼저 연락했어?”고은혜는 전미자 할머니 생신날에 MQ가 큰 합작을 이뤄낸 게 성아연 아버지 성동욱 덕분이라고 이실직고했다.“엄마가 성씨 집안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성아연을 우리 집에 여러 번 초대했었어. 저번에 마침 나도 집에 있어서 자연스레 내 카톡 추가해서 심심
“알았어, 알았어.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심하네.”고은혜는 기분이 금세 풀렸는지 고은서의 말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기뻐하며 방문을 나섰다.고은서는 고은혜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은혜가 나한테 먼저 말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러고 보니 원지훈과 만날 때도 된 것 같네.’고은서는 원지훈에게 귀국했다고 톡을 보냈다.그러자 내일 오후에 만나자고 칼답이 왔다.폰을 내려놓고 답답해서 바람도 쐴 겸 베란다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누우려고 할 때 옆방 베란다에 서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고은서가 사준 잠옷을 입고 회사 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통화를 마친 후 그도 베란다에 있는 고은서를 발견했다.두 사람은 서로 한참 마주 보고 있었다.“고은서, 내가 아까 했던 말 잘 생각해봤어?”밤하늘 아래에 서 있는 곽승재는 여느 때보다 더 매력적이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말했다.“전에 M에서 말했다시피 난 당신에게 더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당신이 나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내가 이혼하려는 결정은 변치 않을 거야.”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한참 서 있다가 방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저녁 바람을 좀 쐬다가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이튿날, 그녀가 일어났을 때 곽승재는 이미 이른 아침부터 나갔고 고은혜도 학교로 갔다.아침을 먹고 고준석과 함께 아침 운동까지 하고 방으로 돌아가 폰을 확인하니 박지연한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였다.‘뭐가 이리 급한 거지?’고은서가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은서, 너 지금 어디야?”박지연의 목소리가 꽤 심각해 보였다.고은서도 따라 긴장해졌는데 갑자기 전에 했던 건강검진이 떠올랐다.“왜 그래? 내 위에 문제라도 생겼어?”박지연이 답했다.“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고은서는 더 긴장되었다.“먼저 알려줘. 그렇지 않으면 나 긴장해서 운전도 못 해.”“위에는 아무 문제 없어.”“다행이다. 다른 병은 더 쉽게 이겨낼 수
박지연이 말했다.“곽승재가 백유미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약간의 미흡한 점이 있긴 했는데 육현석은 이 사이에 오해가 존재한다고 했어. 게다가 곽승재가 아직도 널 좋아하는 건 확실하잖아. 그러니까 만약 이혼하려는 의사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해도 난 네 선택을 존중해.”고은서는 더 어리둥절했다.“지연아, 할 말이 있다고 날 불러 내놓고 할 말이 고작 그거야? 내가 왜 이혼하려고 하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잘 알고 있는데 네가 이혼할 염원이 그렇게 강렬했으면 왜 피임조치도 하지 않았냐고.”박지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고 싶어서 했다고 해도 피임조치는 왜 안 한 건데?’고은서는 오리무중에 빠졌다.“피임조치?”박지연은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고은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너 임신했어!”“임신?!”고은서가 소리 지르면서 놀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에 있던 물방울들이 이리저리 튕겼다.옆방에 있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랐는지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밖에 있던 미용사가 황급히 들어와서 고은서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손님, 얼른 다시 누우세요. 그렇지 않으면 손님 옷이 다 젖을 수가 있어요.”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머리가 멍해져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미용사가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의 머리를 닦아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손님, 괜찮으세요?”“수건 저한테 주시고 나가보세요.”박지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미용사에게 말했다.미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박지연에게 건네주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박지연은 고은서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고은서,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놀라서 그러는 거야?”고은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서 물었다.“지연아, 확실해? 나 진짜 임신했어?”박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오전에 네 진단서 가지러 갔는데 다른 곳에는 별문제가 없고 임신했다고 쓰여져 있던데.”“그게
고은서는 박지윤 덕에 머리를 말리고 미용실에서 나왔다.“차키 줘. 내가 운전할게.”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차키를 박지연에게 건네주었다.미용실.아주 정성껏 꾸민 여자 한 명이 룸에서 걸어 나왔다.“손님, 헤어디자인 해드릴까요?”헤어디자이너가 물었다.여자의 온화한 웃음 속에는 악랄함이 숨겨져 있었다.“아니에요.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병원 복도.고은서는 임신 삼 주라는 진단서를 들고 아직도 방금전의 당황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위암이라는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지만 임신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못했다.심지어 곽승재를 아이를 임신하는 건 더더욱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하늘이 나를 놀리는 건가? 곧 이혼할 예정인데 갑자기 아이가 생기다니.’“고은서, 너 어쩔 거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너무 긴장한 탓에 손발이 차가워났다.“나도 잘 모르겠어.”아이를 가져본 건 처음이라 기쁘다기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아이를 없애려거든 너무 잔인한 것 같았고 또 아이를 낳으려거든 일이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았다.“곽승재한테는 알려줄 거야?”“아니!”이것만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곽승재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이혼이 더 어려워질 것이고 고준석과 전미자가 알게 되면 어려움이 한층 더 가해질 것이다.그녀는 아이 때문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설마 혼자 몰래 낳으려는 건 아니지?”박지연이 또다시 물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자신의 엄마처럼 싱글맘이 될 용기는 없었다.사실 박지연의 연이은 물음 속에 고은서는 이미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은 듯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고 힘겹게 물었다.“나 같은 상황은 언제 수술이 가능해?”박지연은 애써 괜찮은 척하는 고은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은서야, 이렇게 빨리 결정 내릴 필요 없어. 며칠 더 생각해보고 결정 내려도 돼.”그러나 이혼하려거든 이 아이를 남기지 않는 게
아이가 5주가 되려면 아직 2주나 기다려야 했다.당장 수술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지 긴장했던 고은서의 몸은 그제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지금 예약해야 해?”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 그때 가서 태아 상태 한번 확인해 보아야 구체적인 수술 날짜를 정할 수 있어. 가자, 호텔로 바래다줄게.”앉아 있던 고은서를 일으켜 세운 박지연은 그제야 고은서의 손이 땀범벅이 되었음을 눈치챘다.박지연은 안타까움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은서야, 아이를 지우지 않아도 돼. 낳고 싶으면 나아. 환각제를 먹으면 아이의 건강 리스크가 증가할 뿐이야. 평소에 건강하고 체력도 좋고 나쁜 습관도 없었으니 아이한테도 큰 영향이 없을 거야. 좀 더 지켜보다가 종합 검진을 해보면...”“그럴 필요 없어.”고은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가자.”박지연도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소식에 고은서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박지연은 오후에 다시 출근해야 해서 고은서는 혼자 호텔에서 쉬게 되었다.“정말 괜찮아? 오후에도 반차 내고 같이 있을까?”안심이 되지 않은 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가 그녀를 한번 바라보더니 말했다.“얼른 출근해. 임신한 거지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죽는 사람처럼 대하지 마.”고은서의 농담에 박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혼자 있으면 처량해 보일까 봐 그러지. 보통 여자들은 임신하면 남편한테 자랑하면서 기쁨을 나누는데 너는 숨길 수...”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지연은 괜한 소리를 했다는 것을 의식했다.“아... 미안해. 일부러 아픈 곳 찌르려고 그런 게 아니야. 곽승재 아이니까 얘기해도 되지 않나 싶어서 그랬어. 얘기해서 반응이 어떤지...”“말하면 안 돼. 아, 맞다. 비밀 지켜줘야 해. 육현석한테도 말하지 마.”비록 겉으로는 고은서를 응원하는 육현석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곽승재를 더 많이 위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육현석이 이 사실을 알면 제일 먼저
고은서는 의아함을 느꼈다.‘이 시간에 누구지?’문 구멍으로 내다보니 뜻밖에서 송민아가 서 있었다.이틀 전 공항 주차장에서 그녀와 민시후의 대화로 인해 화가 나 뛰쳐나간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그때 일에 앙심을 품고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지?’“은서 씨, 문 좀 열어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송민아도 문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은서는 하는 수 없이 방문을 열었다.호텔이다 보니 안전은 보장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송민아가 정말 문제를 일으키려고 한다면 한번은 피할 수 있어도 계속되는 공세는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고 또 곧 같은 일을 도모하게 될 사이었다.방문이 열리자 송민아가 안으로 들어왔다.고은서는 좋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을 권했다.“안 마셔요!”송민아는 단호히 거절했다.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붉어진 눈가는 마치 무슨 절망적인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와 질투가 서려 있었다.“민아 씨, 왜 그래요? 누가 괴롭혔어요?”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고은서가 물었다.그 말을 들은 송민아는 더 화가 나서 외쳤다.“당신 때문이잖아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날은 제가 먼저 차에 타라고 초대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민아 씨가 민시후의 헛소리에 화를 못 이겨 뛰쳐나갔죠. 이제 와서 왜 제 탓을 해요?”송민아가 분노에 차 외쳤다.“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가 그거 때문은 아니란 거 알잖아요!”‘내가 뭘 안다는 거지?’갑자기 찾아와서 행패 부리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라도 왜 이러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었다.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민아 씨, 할 말 있으면 그냥 직접 하세요. 제 시간도 소중해요. 민아 씨 화 받아줄 시간은 없단 말이에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물병을 열어 물을 마셨다.“당신...”송민아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겨우 진정한 송민아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시후 오빠한테 아무 관심도 없다면서요
그중 제일 중요한 사실은 민시후가 저도 모르게 고은서의 방에 두 시간 동안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이었다.‘진작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오해하면서 있은 거야?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찾아온 건가?’“정말 후회해요. 시후 오빠가 은서 씨랑 가깝게 지낸다는 거 알면서도... 두 사람이 같이 술 마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해성으로 와야 했어요. 그러면 호텔 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오밀조밀한 송민아의 얼굴에 후회가 비쳤다.“아니다. 그냥 돌아가지 말았어야 해요. 계속 해성에 남아서 시후 오빠를 지켜봐야 했어요.”‘그날 송민아가 해성에 없었구나.’“민아 씨, 어떻게 이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고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예요?”고은서는 도저히 송민아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곽승재와 내가 사이가 어떻든 그래도 부부인데 왜 그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는 거지?’“시후 오빠 아이가 아니면 누구 아이죠? 호텔에서 머무는 걸 보면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감정의 골이 깊은 두 사람이 어떻게 아이를 만들겠어요?”화가 난 송민아가 말을 이었다.“남편은 지금도 안 왔잖아요.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리지 못했죠?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서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임신했다는 사실을 밖에 알리지 못하는 거잖아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송민아의 분석력과 논리력은 민시후와 맞먹었다.어느 한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민시후 때문은 아니지만 고은서는 임신 사실을 곽승재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고은서가 송민아에게 물었다.“그럼 민아 씨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저를 찾아온 거죠?”해명도 없고 민시후와의 사이도 부정하지 않는 고은서를 바라본 송민아가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당연히 아이를 지우라고 하려고 왔죠! 저야말로 시후 오빠의 미래 와이프예요. 절대로 오빠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은 없어요!”눈시울이 붉어진 송민아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몸 관리하는 데 드는 비
송민아가 오빠를 제외하고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민시후였다.정말 민시후를 불러온다면 혼나고 냉대를 받는 사람은 단연코 그녀일 것이다.“갈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의 말에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아이를 지우지 않으면 이 일은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예요.”말을 마친 송민아가 온 힘을 다해 문을 박차고 나가며 불쾌감과 화를 표출했다.고은서는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밥 먹으러 나갈 기분이 들지 않은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민시후의 번호를 눌렀다.“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우리 미녀분 아니신가.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다 한 거야?”민시후는 기분이 좋은 건지 껄렁한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고은서는 그에게 공사장의 일을 물었다. 민시후는 그저 평범한 해프닝이라고 답했다.“의심할 여지 없이 곽승재가 뭔가 수를 쓴 거지.”민시후는 의자를 돌리는 것 같았다.“은서 씨, 그러고 보니 곽승재도 은서 씨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네요?”더 이상 곽승재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민 도련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쪽부터 들을래?”“또 무슨 어려운 프로젝트야?”민시후가 심드렁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말을 늘어뜨리며 답했다.“프로젝트는 아니고 개인적인 일이야.”“오? 나한테 얘기할 개인적인 일이 있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고은서는 성공적으로 민시후의 호기심을 끌어냈다.“이제 우리 사이가 그 정도로 가까워진 거야?”“나를 짝사랑해서 M국까지 쫓아왔는데 그 정도 사이는 되지.”한번 맞받아친 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래서 좋은 소식 먼저 듣고 싶어? 나쁜 소식 먼저 듣고 싶어?”민시후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나쁜 소식 먼저 들을게. 좋은 소식으로 나빠진 기분 좀 가다듬어야지.”‘마음가짐이 나쁘지는 않네.’“송민아가 방금 나를 찾아왔어. 내가 입이 닳도록 최선을 다해 설득했지만 너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송민아랑 결혼해야겠는걸?”송민아 얘기가 나오자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