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아무것도 모른 척 말했다.“민아 씨 차가 고장 나서 같이 돌아가려고. 아무리 그래도 네 약혼녀인데 어려움에 부딪힌 사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민시후는 점점 더 화를 냈다.“내가 같이 귀국하지 않았다고 지금 이런 방식으로 나를 화나게 하는 거 아니야? 너도 곽승재와 이혼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지금까지 시간을 끌고도 아직 이혼 절차를 밟지 않으니 나로서도 불쾌할 수밖에 없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한테 목을 매는 게 아니라 지금 쌍방이었던 거야? 스토리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흘러갔을까...’“고은서! 용기가 있으면 송민아 앞에서 영원히 곽승재랑 이혼하지 않겠다고 해. 그럼 나도 너에 대한 마음을 접을게.”민시후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녀로서도 차마 입밖으로 낼 수 없었다.송민아의 희망적인 눈빛에 고은서를 민시후를 향해 외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나의 이혼은 너랑 아무런 상관도 없어.”“네가 곽승재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누구다 다 알고 있어. 나한테 마음이 생긴 게 아니라면 왜 이혼하려고 하겠어?”말하며 민시후는 태도를 누그러뜨렸다.“됐어. 네 결혼에 개입한 내가 잘못이지. 내 마음을 내 의지대로 조정할 수만 있었다면 절대 너한테 흔들리지 않았을 거야. 지금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불쌍해 보이는 민시후를 보며 고은서는 정말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그렇게 고통스러워서 M국에서 다른 여자를 끼고 논 거야?”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기뻐하는 기색으로 깜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나 신경 썼구나! 그럼 그때 왜 못 본척한 거야? 나한테 한마디도 안 물어봤잖아. 그때 그 여자랑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그 여자 이름도 몰라.”민시후는 말하면 할수록 더 활개치기 시작했다.“일부러 너 화나게 하려고 그런 거야. 은서야, 화내지 마. 응?”“됐어요!”송민아는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이 차에서 내려 자리를 떴다.민시후는 아무런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
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백유미였다.그녀는 오피스룩 정장 차림에 수트 차림을 한 남자 몇 명과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곽승재와 함께 있었다.계단 입구에서 내려온 것으로 보건대 그들은 방금 밥을 다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을 것이다.백유미의 호칭에 옆에서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던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그녀가 민시후와 함께 있는 것을 보자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가라앉았다.“민 대표님도 계셨네요. 우연이네요. 두 분도 식사하러 오신 거예요?”백유미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민시후와도 인사를 건넸다.민시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방금 M국에서 입국해서 뭐 좀 먹으려고 들렀어요.”“민 대표님도 M국에 가셨어요?”백유미가 질문을 던졌지만 고은서가 계속 말이 없자 무슨 생각이라도 난건지 급히 해명했다.“사모님, 저랑 대표님은 고객 만나러 왔습니다. 방금 밥 다 먹고 이제 회사로 돌아갈 생각입니다.”고은서는 말없이 민시후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가자.”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시선을 거두고 주변 고객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로비를 벗어났다. 마치 고은서와는 모르는 사이인 듯했다.“민 대표님, 사모님.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백유미는 빠른 걸음으로 곽승재를 따라잡았다.민시후는 멀리 가버린 곽승재의 뒷모습을 보며 일부러 고은서에게 물었다.“그날 밤에는 곽승재가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오늘은 한마디도 안 하네. 왜 저래?”‘백유미가 여기 있는 이유를 말하고 싶은 거 아닌가?’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고는 답했다.“널 잡아먹을 만한 입맛이 오늘은 없나 보지.”민시후는 오한이 들며 정말 토할 것 같았다.“고은서, 앞으로 그런 징그러운 말을 또다시 하면 정말 안 봐줄 거야.”고은서도 물러서지 않고 답했다.“네가 이상한 말 안 하면 나도 이상한 말 안 하겠지.”룸 안에 고은서와 민시후는 테이블의 모서리에 앉았다.몇 번 같이 밥을 먹다 보니 두 사람은 단둘이 있어도 별다른 어색함이 없었다.고은서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그가 일부러 민시후를 쫓아낸 것임을 눈치챘다.곽승재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민시후 데리러 공항에 간 거야?”“무슨 문제 있어?”고은서가 되물었다.곽승재가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ZY그룹에 운전기사로 취직한 거야?”‘지금 누굴 비꼬는 거야.’마침 웨이터가 음식을 서빙해 와 고은서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곽승재는 그녀의 반응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민시후 운전기사가 아니라면 왜 그때 음식점에서 운전해 줬고, 오늘은 왜 또 직접 공항으로 마중 간 거야? ZY그룹에 쓸만한 운전기사가 없는 거야? 아니면 정말 니가 민시후를 마음에 품기라도 한 거야. 기혼 신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그러는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맞아. 다 알고 있으면서 더 이상 내 생각은 묻지 마. 얼른 우리 혼인 생활을 끝내자.”목이 막힌 곽승재의 얼굴빛과 안색은 더 싸늘해졌다.“고은서, 네가 결혼이 즐겁지 않다는 이유로 이혼하겠다고 투정 부리는 건 참았어. 하지만 날 바보 취급하고 결혼을 게임처럼 여기면서 오늘은 내가 좋으니 결혼하고 내일은 다른 사람이 좋아지면 이혼하겠다는 그런 생각이라면 우리 사이는 아직 계산할 게 많이 남았어.”고은서는 곽승재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만약 이혼이 곽승재의 과실이라면 그는 참을 수 있었다.하지만 만약 그녀의 마음 변화로 해야 하는 이혼이라면 곽승재는 그녀와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었다.어쩌면 정말 곽승재다운 발언이었다.고은서가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정말 민시후한테 마음이라도 움직였다는 뜻이야?”곽승재의 미간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사람을 가차 없이 물어뜯이려는 맹수의 분노였다.‘남자는 정말 재밌네. 내가 쫓아다닐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하니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라니...’고은서가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자꾸 입맛 떨어지게 하
30분 후, 백유미는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이어 그녀는 곽승재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백유미가 부드럽게 말했다.“승재야, M국에서 며칠 동안 아팠다면서 당분간은 더 쉬어야겠다. 나는 먼저 재무실에 가볼게.”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백유미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다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곽승재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육현석은 이미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육현석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형, 알아냈어. 성아연이라는 형수 친구가 개인적으로 백유미랑 연락하고 있더라고. 여기 그 두 사람의 통화 기록과 카페 CCTV 사진이 들어있어.”곽승재는 손을 뻗어 자료를 건네받고 서류를 꺼냈다.육현석이 말한 대로 안에는 통화 내역과 영상 캡처본이 몇 장 있었다.“경제적인 거래는 없었어?”곽승재가 물었다.육현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알아보려고 했는데 없었어. 하지만 이 성아연이라는 여자 최근 돈을 헤프게 쓰면서 명품 신발과 가방을 많이 사더라고. 다 자기가 낸 돈이야. 예전에는 형수가 명품 선물을 해줬었는데 최근에는 형수와 사이가 틀어진 건지 형수가 저 여자 번호까지 차단한 것 같더라고. 아, 맞다. 성아연의 아버지가 보름 전에 고씨 가문에 큰 비즈니스를 이어줬는데 형수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비록 애초의 목적은 성아연과 백유미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었지만 성아연이 고은서의 친구이다 보니 고은서와의 관계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관련 자료는 다 들어있으니 형이 한번 확인해 봐.”자료를 보며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비즈니스에 대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전에 고은서가 관련 계약서를 보고 있을 때 그가 그중의 많은 허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당시 그는 고은서가 고씨 가문 사업에 신경을 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속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은서와 성아연의 관계는 그도 조금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줄곧 한통속이었고 서로
“어쩐 일이세요?”“형수님, 지금 예원 별장에 안 묵으시고 호텔로 가셨어요?”‘곽승재가 직접 얘기했을 리는 없고... 박지연이 얘기했겠지?’“그래서 무슨 일인데요?”“헤헤, 오해하지 마세요. 형을 도와서 얘기하려는 게 아니에요.”육현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사는 곳에 적응되신 건지 물으려고 연락드렸어요. 듣기로는 집을 사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시내에 집 몇 채를 소유하고 있어요. 나중에 정보를 보태드릴 테니 형수님이 마음에 드시는 집이 있으시면 선물로 드릴게요.”고은서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괜찮습니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받을 이유가 없어요. 제가 직접 사면 됩니다.”고은서가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육현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형수님, 비록 저랑 형이 친형제는 아니지만 감정적인 문제에서는 저는 박지연 씨와 같은 입장에서 형수님을 지지합니다.”‘나를 지지하는 것조차도 박지연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밝히다니...’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지연이한테 마음이 있으신 거예요?”육현석이 급히 답했다.“형수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저랑 박지연은 의견이 잘 맞고,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예요. 절대 박지연한테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거예요!”‘박지연이 자기 같은 타입을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형수님, 비록 형수님의 의견을 지지하지만 형이 형수님한테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아서 화가 나서 이혼하시는 거라면 형 대신 한 말씀 드리고 싶네요. 형도 형수님을 신경 쓰는데 잘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빙빙 돌려서 말해도 육현석은 결국 곽승재를 도와 말하고 있었다.역시 곽승재의 좋은 친구이자 동생이었다.“오빠가 신경 쓰든 쓰지 않든 이제 상관없어요. 제가 이혼하려고 마음먹은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완곡하게 거절당한 육현석이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네. 형수님, 들어가세요.”백유미가 곽승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백유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책상에 올려두었던 자료를 백유미 앞에 내밀었다.백유미가 한번 보더니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이건 성아연 시와 나의 통화 기록이잖아. 전에 카페에 함께 있던 사진도 있네? 무슨 문제라도 있어?”곽승재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성아연이 그날 밤 네 숙소에 가서 소란 피운 건 네가 계획한 거야?”백유미는 한순간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한참 멍해 있다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승재야, 네 뜻은 내가 성아연 씨와 몇 번 연락했으니 내가 성아연 씨를 시켜서 그 난리를 피웠다는 거야?”백유미의 표정이 굳어졌다.“네가 왜 이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어. 성아연 씨와 만난 적은 있어. 성아연 씨한테 내 카톡 연락처도 있어. 하지만 난 그런 짓은 한 적 없어.”백아연은 몇 달 전 술자리에서 성아연이 먼저 그녀의 전화번호를 추가하고 카카오톡을 추가했다고 했다.성아연의 인스타에서 그녀는 성아연이 고은서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백유미가 매번 인스타를 올릴 때마다 성아연은 가시 돋친 댓글을 달고는 했다. 고은서가 투신해서 다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성아연이 백유미를 카페에 나오게 했다고 했다.“성아연 씨는 나를 꾸짖으며 너를 멀리하라고 협박하면서 심지어 회사까지 그만두라고 했어. 그리고 너랑 은서 씨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백유미의 목소리에는 쉽게 알아채지 못할 억울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엄숙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성아연 씨한테 해명했지만 성아연 씨는 듣지 않고 나를 위협하고는 자리를 떴어. 승재야, 네가 CCTV 영상을 확인했으니 알겠지만 너도 보다시피 같이 있은 지 10분도 되지 않아 성아연 씨는 자리를 떠났어.”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운호 산장에서 단합한 최근 날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사이가 그렇게 안 좋으면서 먼저 연락한 이유는 뭐야?”“원래는
“승재야, 귀국하고 나서 몇 달 동안 혹시나 너한테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서 줄곧 너와의 사이에 신경 썼어.”박유미는 정말 울컥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난 다 참았어. 나라고 태생적으로 마음이 넓은 게 아니야. 나도 속상하고 마음 아파. 하지만 네가 곤란할까 봐... 승재야,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날 의심하고 조사하는 거야?”백유미가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백유미 이마에서 보이는 흉터 자국과 슬픔을 애써 억누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곽승재의 날카로웠던 기세는 얼마간 누그러졌다.“너랑 관련 없다면 이 일도 마음에 두지 마.”백유미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나도 너한테 마음을 품었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네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난 너를 친구로만 생각하고 대했어. 승재야, 앞으로 의심스러운 점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물어봐. 너한테 한치의 숨김도 없이 솔직하게 얘기할게.”곽승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판주로 가서 일해.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네.”백유미는 뭔가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곽승재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GS그룹 빌딩에서 나온 후에야 백유미는 핸드폰을 꺼내 백승엽에게 전화를 걸었다.“유미야, 어떻게 됐어? 승재가 믿었어?”백유미는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그쪽은 아무 문제 없죠?”“내가 처리했는데 걱정할 것 없어. 약국 신입은 실수한 게 있어서 이미 해고당했어. 설사 승재가 사람을 보내 조사한다고 해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거야.”백승엽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유미야, 그렇게 고생하면서 승재가 고은서를 의심하게 만들더니 왜 또 고은서의 혐의를 벗기려고 이렇게 애쓰는 거야? 헛고생한 게 되지 않겠어?”‘헛고생이 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 혐의는 내가 직접 고은서를 위해 씻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 혐의가 벗겨지지 않을 거야.’그러나 백유미는 아버지에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아버지
이전 해찬시에 있던 거에 비해 유성준은 조금 야위었지만 특유의 따듯한 분위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할아버지, 성준 오빠.”고은서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불렀다.“은서 왔어?”유성준의 얼굴에도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고은서가 그들 앞에 다가가 고준석의 옆에 앉아 유성준에게 물었다.“성준 오빠, 해성에는 MQ에 취직하려고 온 거야?”“성준이는 먼저 MQ에서 1년간 도와주고 그때 가서 상황 봐가면서 다시 정하려고 한다.”고준석이 답했다.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당분간 외국에 가고 싶지 않네. 마침 할아버지가 초대해 주셔서 왔지.”유정길을 생각하자 고은서의 기분도 조금 가라앉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성준 오빠,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앞으로 해성에 머물면서 저희를 가족으로 생각하세요.”“예전에 투정만 부리던 은서가 이제 다 커서 사람 위로할 줄도 아네.”유성준이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그러게 말이야.”옆에 있던 고준석도 맞장구를 쳤다.“은서도 다 커서 집안 사업에 신경 쓰기도 해. 계속 믿을만한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고 하더니 성준이 네가 들어오면 은서도 마음 놓을 수 있겠지.”고은서는 자신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냈다.“맞아요! 하지만 성준 오빠를 MQ의 부대표로 임명하면 왠지 인재를 낭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유성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에이 그럴 리가. 너랑 할아버지가 실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지.”그들이 정다운 얘기를 나눌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아마 네 외삼촌 일행일 거야.”고준석이 말을 이었다.“은서야, 네 삼촌도 성준이를 알고 있어. 성준이가 MQ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마주하게 될 사이이니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미리 친해지면 좋잖아.”고은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들여서 외삼촌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정당하게 유성준을 영입하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이내 고은혜를 포함한 고은서의 외삼촌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
고은서가 계속해서 뒤를 보고 있자 민시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매번 여시은이 나타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고은서가 민시후를 바라봤다. 설마 그렇겠냐고 말하다 곧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처음 여시은을 만난 건 고양이 쿠아를 구할 때였다. 그 후 서운에서 여시은의 방에서 불이 났고, 이사 파티에서는 민시후가 함정에 빠졌다.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페인트가 뿌려졌고 지난번 골프장에서는 곽현수와 골프를 치던 장우현도 다쳤었다.모든 사건이 여시은이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었다면 여시은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은서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고객을 만나러 간다며? 나를 병원 앞에 내려주면 돼.”민시후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깟 고객 때문에 다친 너를 그냥 두고 가는 사람 같아 보여?”고은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중요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왜 혼자 이런 곳에 왔어? 비서도 기사도 없이?”“새 프로젝트 때문에 온 거야. 그 회사의 작업실이 근처에 있거든.”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운전기사 부를 시간이 없었고 송민아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빠서 이번엔 그냥 혼자 왔어.”민시후는 다시 한번 말없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다만 조금 더 차분해 보였고 무언가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의 요청대로 민시후는 그녀를 근처의 한 동네 병원에 데려갔다.동네 병원은 예약이 필요 없었고 진료도 비교적 간편했다.다행히 고은서의 팔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cm 정도 되는 길이의 상처였고 지금은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주변이 이미 검붉게 부어 있어 보기에 꽤 충격적이었다.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후, 파상풍 예방주사도 맞혔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시은 씨, 전 괜찮아요.”고은서는 팔이 조금 아팠지만 상처를 보니 긁혔을 뿐 살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아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약국에 가서 씻고 약만 바르면 돼요.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여시은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혹시라도 감염되면 큰일이에요! 제 기사님이 앞에 있어요. 그분이 병원에 데려다 줄 거예요. 저가 대신 여기서 경찰을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고은서가 거절할 새도 없이 자기 사를 부르러 갔다.“은서 씨?”도로 옆에서 깜짝 놀란 듯 급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캐주얼 슈트를 입고 차에서 뛰어 내려오는 민시후의 모습이 보였다.개업식 때 민시후가 고은서를 도와 성동욱 일을 처리해 준 후, 그녀와는 거의 연락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두 번 전화를 걸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왔으며 민시후가 최근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살도 빠졌다는 얘기를 했었다.눈앞에서 다가오는 민시후를 보고 고은서는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왜 여기에 있어? 손은 왜 그래?”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긴장하며 물었다.“별거 아니 야.”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숙자들과 싸우다 철판에 긁혔어. 다행히 살까지 파고들지 않은 것 같아. 시후 씨는 어떻게 여기 있어?”“고객과 약속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야!”그때 여시은의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지금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민시후 씨가 계시니 저는 빠져도 될 것 같아요. 빨리 은서 씨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시은 씨는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민시후가 물었다.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이 여시은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녀의 가정부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민시후는 그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차가워졌다.여시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여기 유명한 동물
게임 회사의 작업실은 다소 오래된 작은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고 단지에는 경비나 순찰을 하는 경비원도 없었다.골목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비해 꽤 외진 곳이었다.차는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고 고은서는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남자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두 남자는 하나는 마르고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까무잡잡했다. 그들은 헤진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든 짐 꾸러미에는 많은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인 듯했고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났다.고은서는 속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그녀는 차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자 차에 기대게 되었다.이제 차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이미 늦었고 두 남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두 남자의 눈가는 이상하리만치 붉었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점점 더 흥분된 듯 보였다. 그들은 입에서 지저분한 욕설을 뱉으며 다가왔다.“젠장, 오늘 운이 정말 좋아! 이 근처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울 수 있을 줄 몰랐네.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자도 만날 줄은!”“그렇지, 도시의 여자는 역시 다르네. 이 피부를 보라고. 아주 보드라워! 하하하, 집으로 끌고 가서 잘 놀아보자고!”그때, 악취 나는 마르고 키 큰 남자가 더럽게 손을 뻗으려 했고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의 아랫배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했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잡고 무릎을 꿇었다.까무잡잡한 남자는 그제야 반응해 고은서를 잡으려 했고 고은서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틀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하지만 남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체격을 가졌고 고은서는 서 있는 자세 때문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그러자 남자는 화가 난 듯 욕설을 퍼부으며 팔을 휘둘러 고은서를 향해 달려왔다.고은서는 민첩하게 몸을 낮추며 땅에 떨어진